찻잔 속에 비친.....

[스크랩] `동다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______^)

청원1 2010. 3. 17. 02:00

동다기 발굴 기사입니다.

 

몇년전까지만해도..

사람들이 동다기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것 같아...

용운스님이 다담에 연제하신것 복사해묶어 여기저기 뿌려도 별 반응이 없어.. ==;

인터넷의 힘을 빌려 책을 찾고자...

2003년말에 자료 정리하여  2004년1월초에 인터넷에 자료를 올렸는데...

제 생각보다는 의외로 빨리 찾은거 같습니다.. ^^

그리고 제가.. 정리한 단서들..

즉 전의 이선생이

1720년 전후로 출생하여 1780년 이후까지 생존하셨으며

전라남도 해안쪽에 살았고..

전의이씨 태사공 20세손 전후이시고..(이건 확인 못함)

관직에 근무 하셨을 분.. 일거라 짐작하였는데...

거의 대부분 맞는것 같군요 (^__^)v

그리고 동다기 지으신분 찾기위해 인터넷상에서 자료 주고받았던

전의이씨 종친회분께서..

'상고당'은 '상고당 김광수'선생이나 그분 이름을 딴 정자일 것..이라 하셨는데..

(용운스님은 중국 용양현 장서각일것으로 추측)

지금보니 그분의 의견이 맞는것 같군요..

저는 상고당이 김광수선생이면 '상고당 지날때 요양遼陽사인 임모씨..'라는 글은

'상고당 김씨전'을 쓰신 빈양濱陽노인을 잘못 필사한거 아닌가.. 라는 의견을 냈는데

이건.. 더 연구를 해봐야겠군요^^

 

암튼.. 제가 간절히 바라던.....동다기가 발굴되어 너무나 기쁘고요..

앞으로.. 해석 등에서 많은 이야기꺼리가 있을것 같군요..

최성림 새날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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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차 전문서 '동다기' 발굴

 

[연합뉴스 2006-11-02 15:47]
한국 최초의 차 전문서 동다기
 

다산 저작으로 오인, 저자는 이덕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차(茶)에 대한 한국 최초의 전문 저작인 '동다기'(東茶記)가 발굴됐다.

'동다기'는 그동안 제목 정도만 알려져 있었고 저자는 다산 정약용으로 추정됐으나 이번 실물 자료 발견을 통해 저자가 다산이 아닌 이덕리(李德履. 1728-?)로 판명됐다.

한국 한문학 전공인 정민(45)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백운동 이효천 씨 집안에서 정약용의 강진 유배 시절 막내 제자인 이시헌(李時憲.1803-1860)이 필사한 '동다기'를 발굴했다고 2일 밝혔다.

정 교수 조사 결과 이시헌이 필사한 '동다기'는 저자가 이덕리이며, 1785년 전후 진도 유배 시절에 완성한 저술로 나타났다. 또, 원래 제목은 '기다'(記茶)로 드러났다.

이 '동다기'는 제목이 '강심'(江心)이라고 적힌 이덕리의 각종 시문 필사본 묶음집 속에서 발견됐다. '강심'은 가로 19.6cm × 세로 15.3cm이며, 행서와 초서를 절반 가량 섞은 세련된 서체로 쓴 필사본으로 모두 55장(110쪽) 분량이다.

이 '강심'에서 '기다', 즉 '동다기'는 10쪽 분량을 차지한다. 이 '동다기'는 차의 효능을 설명하고, 특히 차 사업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생산된 차 상품을 중국에 수출하며, 그렇게 얻은 수익을 국방 강화에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차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 저자 이덕리는 "차는 국가에 보탬이 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수 있으니 금은주옥(金銀珠玉)보다 소중한 자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동다기'를 포함한 '강심'의 원래 저자가 이덕리라는 사실은 이를 필사한 이시헌이 "이 한 책(강심)에 적힌 사(辭)와 문(文), 그리고 시는 바로 이덕리(李德履)가 옥주(沃州)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것이다"(此一冊所錄辭文及詩, 乃李德履沃州謫中所作)는 말에서 확인된다.

정 교수에 의하면 '동다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산의 저술로 오인됐다. '동다기'는 실물이 발견되지 않은 채, 다산과 교류가 남달랐던 승려 초의선사가 1837년에 지은 차에 대한 예찬론인 '동다송'(東茶頌)에 두어 구절이 인용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 '동다기'라는 저술이 1992년에는 용운 스님에 의해 차 전문지 '다담'에 그 일부가 10회에 걸쳐 연재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차 전문서 동다기

하지만 이번에 '강심'에서 발굴한 동다기와 비교해 본 결과 용운 스님이 소개한 '동다기'는 원문의 절반 가량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원전이 공개된 적도 없으며, 저자는 '전의리'(全義李)라고만 밝히고 있어 책의 정체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 정 교수에 의해 '동다기'의 저자로 밝혀진 이덕리는 본관이 전의(全義)이며, 자는 수지(綏之)를 쓴 무관이다. 1763년(영조 39)에는 조선통신사의 자제군관 신분으로 일본을 다녀왔고, 1772년에는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에 가좌되었다가 2년 뒤에는 도성 경비를 책임 진 종2품 오위장(五衛將)으로 승진해 창덕궁 수비를 맡았다.

이덕리는 무인이지만 시가에도 뛰어나 윤광심(尹光心.1751-1817)이 당대 저명한 작가의 시문을 모아 편찬한 '병세집'(幷世集)에는 그의 시가 모두 9수 수록돼 있다. 이 '병세집'에는 이덕리의 호를 '이중'(而重)이라고 소개했다.

이덕리는 49세 때인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그 해 4월초에 사도세자 복권 움직임과 관련해서 일어난 상소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진도로 유배된 뒤 이곳에서 적어도 18년 이상을 보냈다. 다산이 강진에서 18년을 유배생활했듯이 그 또한 비슷한 처지에 내몰렸다.

정민 교수는 '동다기' 발굴을 통해 "초의선사의 '동다송' 보다 적어도 50년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차문화 관련 전문서를 찾았으며, 차의 국가 전매와 국제 무역을 통한 국부 창출을 주장한 또 다른 실학자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동다기'에 기술된 내용을 통해 당시의 사회 실상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예컨대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에서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희귀했으며, 1760년 남해에 표류한 차 무역선에서 얻은 차를 조선에서 10년 동안이나 다려 마셨다는 사실 등이 드러났다.

한편, '동다기'를 포함한 '강심'에는 다산 저술로 간주되던 '상두지'(桑土志)가 함께 발굴됨으로써 이 역시 이덕리 저작으로 밝혀졌다. 나아가 '기연다'(記煙茶)라는 담배 관련 논술도 발견됐다. 이는 종래 이 분야 최초 저술로 알려진 이옥의 '연경'(煙經)보다 20년 정도 빠른 것으로 밝혀졌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이덕리(李德履) 저작집 강심(江心)

 

 

<한국 최초 차 저술 '동다기' 간추린 내용>

 

[연합뉴스 2006-11-02 15:48]
한국 최초의 차 전문서 동다기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양대 정민 교수가 발굴, 공개한 현존 한국 최초의 차(茶) 문화 전문저술 '동다기'(東茶記)는 원래 제목이 '기다'(記茶)이며, 조선 영조-정조 연간에 무관으로 활약한 이덕리(李德履. 1728-?)의 저술로 드러났다.
 

1785년을 전후한 진도 유배 시절에 완성한 이 저술은 서설ㆍ본문ㆍ다조(茶條)의 3부로 구성된다.

그 내용을 항목별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서설

1. 차는 국가에 보탬이 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수 있어 금은주옥(金銀珠玉)보다 소중한 자원이다.

2. 차는 그 연원이 오래고, 위진(魏晉)에서 시작해서 당송(唐宋) 때 성행했다. 북로(北虜)는 차가 생산되지 않는 곳이지만 육식으로 인해 배열병(背熱病)을 앓기 때문에 차를 몹시 즐긴다. 중국 역대 왕조도 차를 미끼로 북방 민족을 제어했다.

3. 우리나라는 차 산지가 영남과 호남 지방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작설차로 약용에 쓸 뿐 마실 줄 모른다. 경진년(1760년. 영조 36) 차 파는 중국 배가 표류해 와서 온 나라가 비로소 차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후 10년간 그 차를 마셨다. 하지만 차는 우리에게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이후로도 차를 만들어 마실 줄 몰랐다. 차를 만들어 중국의 은이나 말, 또는 비단과 교역을 하면 국용(國用)이 넉넉해지고, 민력(民力)이 펴지니, 국가에 보탬이 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해 줄 수 있다.

4. 예전 중국의 여러 나라에서는 모두 그 타고난 환경을 이용해 부국의 기틀을 다졌다.

5. 중국차는 아득히 만리 밖에서 생산되는 데도 이를 취해 부국의 바탕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우리나라 차는 바로 울타리 가나 섬돌 옆에서 나는 데도 사람들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을 지어 당국자들이 베풀어 시행해 볼 것을 건의한다.

▲본문

1. 차는 따는 시기에 따라 우전차(雨前茶)와 우후차(雨後茶)가 있다. 차 따는 시기는 동지에서 곡우 전까지와 곡우 후에서 망종까지로 구분된다. 잎의 크기로 진짜 가짜를 구별하는 것은 말 관상 잘 보는 구방고(九方皐)가 말을 살피는 것처럼 어렵다.

2. 차에는 일창(一槍)과 일기(一旗)의 구별이 있다. 잎의 크기만 가지고 따질 수는 없다. 일창은 처음 싹터 나온 한 가지이고, 일기는 한 가지에 달린 잎을 말한다. 그 뒤에 가지 위에 다시 가지가 나면 그 잎은 못 쓴다.

3. 차는 고구사(苦口師)니 만감후(晩甘侯)니 하는 명칭이 있다. 차는 맛이 달아 감초(甘草)라고도 하는데 혀로 핥으면 단 맛이 난다. 달여서 고약처럼 만드는 것은 겨울잎을 따도 괜찮을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차의 진액은 멋대로 만들어, 맛이 쓰고 약용으로 밖에 못 쓴다. 일본 사람이 만든 향다고(香茶膏)만 못하다.

4. 차 빛깔이 흰 것은 떡차에 향약(香藥)을 넣어 만든 것이다. 송나라 때 문인들이 노래한 것은 모두 떡차다. 옥천자(玉川子) 노동(盧仝)의 칠완다가(七椀茶歌)는 엽차를 노래한 것이다. 떡차는 맛과 향이 좋을 뿐이니 중국의 방법을 본떠 만들 필요가 없다.

5. 떡차는 향약을 넣어 절구에 빻아 물에 넣고 끓인 것이다. 중국차는 다른 것으로 가미하지 않았다. 차에 꿀을 타서 마시는 경우도 있는데 촌티를 벗지 못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차 전문서 동다기

6. 우리나라 차는 색과 향, 기운과 맛에서 중국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중국의 육우나 이찬황 같은 사람도 내 말을 인정할 것이다.

7. 계해년(1743년, 영조 19) 봄에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6-1770)의 집에 들러 중국 차를 맛보았다. 이 때 주인이 감기 든 늙은 하인에게 차가 특효약이라며 몇 잔 마시게 하는 것을 보았다. 차 파는 배가 들어왔을 때 우리나라 사람은 설사약으로 차를 먹었다. 내가 직접 딴 차로 시험해보니, 감기와 식체(食滯), 주육독(酒肉毒), 흉복통(胸腹痛)에 모두 효과가 있었다. 이질 설사와 학질, 염병까지도 모두 효험이 있었다.

8. 냉차를 마시면 가래가 끓는다. 하지만 표류해 온 사람들과 역관 서종망(徐宗望)의 경우를 보면 뜨거운 음식을 먹은 뒤에는 냉차를 마셔도 문제가 없는 듯 하다.

9. 차는 잠을 적게 하므로 공부하는 사람이나 길쌈하는 아낙, 또 선정(禪定)에 든 스님네들에게 꼭 필요하다.

10. 차는 산 속 바위 많은 곳에서 난다. 대숲 사이에서 나는 차가 특히 좋다. 해가 들지 않아 대숲의 차는 늦게까지 딸 수 있다.

11. 동복(同福)은 작은 고을인데, 한 원님이 여덟 말의 작설을 따서 이를 달여 고약으로 만들려 한 일이 있다. 이 엄청난 양을 따서 차로 만들면 수천 근은 될 테고, 이것을 따는 노력으로 수천 근의 차를 찌고 덖을 수도 있는데,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쓸 줄 모르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12. 차는 비온 뒤에 따는 것이 가장 좋다. 깨끗하기 때문이다. 소동파의 시에도 그런 말이 있다.

13.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보면 차를 딸 때 고을 관리가 몸소 산에 들어가서 백성들을 독려해서 차를 따게 한다고 했다. 좋은 것은 공차(貢茶)로 하고, 그 다음은 관차(官茶)로 하며, 나머지는 백성들이 취해 쓰게 허용한다. 차가 나라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줌이 이와 같다.

14. 차에 편갑(片甲)이란 것이 있다. 이른 봄의 황차(黃茶)를 가리킨다. 차 배가 들어왔을 때 온 나라 사람들이 황차라고 불렀다. 하지만 살펴보니 이른 봄에 딴 것이 아니었다. 정유년(1777년. 정조 1) 겨울 흑산도에서 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표류해온 중국인이 아차(兒茶), 즉, 황매(黃梅)를 보고 황차라고 했다고 한다. 황매는 생강맛을 띠고 있는데, 이것을 달여 고약으로 만들어 차에 섞어 마시면 감기와 여러 질병에 신효가 있다. 일종의 별차다.

▲다조(茶條)

1. 주사(籌司) 즉,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전기(前期)에 호남 영남의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 차의 유무를 보고하게 하고, 차가 나는 고을은 수령으로 하여금 가난해서 땅이 없는 사람과 땅이 있어도 면적이 십원(十員)이 못 되는 사람, 그리고 군역세를 중복해서 내는 사람을 가려 뽑아 대기하게 한다.

2. 비변사는 전기에 낭청첩(郎廳帖) 100여 장을 내서 서울 약국 사람 중에 일 처리 잘 하는 사람을 가려 뽑아 말과 마부, 초료(草料)를 지급하여 차가 있는 고장으로 나눠 보내, 곡우가 지나기를 기다려 해당 고을에서 뽑아 대기시킨 사람들을 이끌고 산에 들어가 차를 따서, 찌고 덖는 법을 가르친다. 차 한 근에 50문씩 쳐주어, 첫 해는 5천 냥으로 제한해서 1만 근의 차를 취한다. 일본 종이를 사서 봉지에 담아 서울로 나눠 보내고, 관가의 배로 서북 개시(開市)로 보낸다. 낭청 가운데 한 사람을 압해관(押解官)으로 임명해 납고(納庫)케 하고 수고비를 준다.

3. 중국 차 배에 붙은 차 가격은 은 2전이었고, 봉지에 담은 차는 1냥이었다.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수천 리이고, 두만강에서 심양까지도 또 수천 리이니, 한 봉지에 2전이라면 값이 너무 싸다. 한 봉지에 2전으로 값을 치면 1만근의 찻값은 은으로는 3만 2천냥이 되고, 돈으로 환산하면 9만 6천냥이 된다. 해마다 생산량을 늘려 1백만근을 생산하면 비용이 50만이 될 것이니 국가의 경비로 써서 백성의 힘을 덜어준다면 큰 이익이 아닐 수 없다.

4. 어떤 이는 우리나라에 차가 나는 것을 알게 되면 중국에서 반드시 차를 공물로 바치라 할 것이니, 새로운 폐단을 만드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만약 수백 근의 차를 중국에 보내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에서 차가 생산되는 것을 알게 하면 연나라 남쪽 조나라 북쪽의 상인들이 수레를 몰고 책문을 넘어 우리나라로 몰려올 것이다. 처음에 1만근으로 제한하자고 한 것은 시일과 거리 때문에 재화가 정체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만약 유통만 잘 된다면 1백만 근이라도 판매에는 문제가 없으니, 얻기 힘든 기회다. 제한을 두면 안 된다.

이덕리(李德履) 저작집 강심(江心)

5. 차 시장을 열면 감시어사(監市御史)와 경역관(京譯官) 및 압해관(押解官)을 선발하여 이 일을 맡긴다. 수행 인원은 일 맡은 자의 재량으로 정한다. 다만 만인(灣人)만 시장에 올 수 있게 한다. 차 시장이 파하면 상급(賞給)을 좋게 주어 장려한다.

6. 경제 규모가 적은 우리나라가 갑작스레 수백만 냥의 세수(稅收)가 생기면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비용 외에는 조금도 손대지 못하게 한다. 다만 서쪽 변방의 성 쌓고 연못 파며 둔전을 운영하는 데 쓴다. 길 가 양 옆으로 5리에 전조(田租)의 절반을 감면해주고, 힘껏 성관(城館)을 쌓고, 구혁(溝혁<삼수변에 血>)을 파서 천리 길에 그물망처럼 이어지게 한다. 올해 못하면 내년에 계속하게 한다. 또 서쪽 변방의 재력 있는 인사를 모집해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수백 명을 두어 대포를 쏘는 연습을 시키며,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상을 준다면 외적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에 위엄을 떨칠 수가 있다.

7. 차는 잠을 적게 하므로 숙직 서는 사람이나 혼정신성(昏定晨省)하며 어버이를 모시는 사람, 새벽부터 베틀에 앉는 여자, 과거 공부하는 선비 등에게 모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출처 : 차맛어때
글쓴이 : 최성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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