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스님 다삼매를 찾아 (9)] 서상수계〈瑞祥受戒〉
칠불암 서상수계 비밀 ‘다신전’ 으로 드러나다
다신전 후기에 언급된 ‘스승’은 금담 스님
초의, 칠불암 아자방서 장원의 ‘다록’ 필사
|
초의 스님이 운흥사를 다시 찾은 것은 1824년 가을이다. ‘송월(松月)’은 운흥사에 비친 가을달의 맑고 경쾌함을 읊은 시이다. 산중에 뜨는 달을 “서늘한 산 속, 어둠이 걷히는 듯 훤해지더니 느릿느릿 환한 달이 솟구쳐 오르네(耿耿山夜凉 悠悠昇淸質)”라 노래했다. 달이 뜨기 직전을 경경(耿耿)하다 한 것이나 솟아오르는 달을 유유(悠悠)하다 표현한 것은 초의의 시재(詩才)가 아니면 담아내기 어려웠으리라.
신위는 ‘일지암시고’ 서문에서 “내가 초의의 시를 보니 맑고 담담하며 고요하다. 또한 굳게 참고 견디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옛 사람의 경지에 들어가 있으니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余見其詩 澹淨沈靜 又能有堅忍之性 駸駸入古人室 盖不可易得也)”라 하였다. 신위는 조선 후기 시·서·화 삼절(三絶)로 칭송된 문예의 수장. 어찌 그가 허언을 말했으랴.
무자(1828)년 장마철에 스승을 따라 방장산 칠불암에 가게 된 초의는 ‘만보전서’에 수록된 장원의 ‘다록’을 필사해 왔다. 이것은 1830년 2월에 완성되어 ‘다신전’이라 명명되었다. 후일 이 다서가 세상에 남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무자년(1828년) 곡우절에 스승을 따라 방장산(지리산) 칠불아자방에 갔다가 (‘만보전서’를) 등초해 다시 정서(正書)하려했지만 병으로 끝내지 못했다. 수홍이 사미 때, 시자방에 있었는데 다도를 알고자해 다시 쓰려했으나 또한 병으로 마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참선하는 여가에 마음을 가다듬고 써서 끝내게 되었다. 시작이 있으면 마침이 있는 것이니 어찌 군자만 그런 것이랴. 선종에는 조주풍(喫茶去)이 있었지만 모두 다도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써보지만 조심스럽다.
戊子雨際 隨師於方丈山七佛啞院 謄抄下來 更欲正書而因病未果 修洪沙彌時 在侍者房 欲知茶道 正抄亦病未終 故 禪餘强命管城子成終 有始有終 何獨君子爲之 叢林或有趙州風 而盡不知茶道 故 抄示畏
그가 스승을 따라 칠불암을 찾았다고 하니 그가 스승이라 한 사람은 누구일까. 초의의 스승 완호 스님은 이미 1826년 8월 23일 한산전에서 열반해 1828년 초의에 의해 그의 탑이 세워졌다. 그렇다면 그가 스승이라 부르며 따라간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이 의문의 실마리가 풀린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필자가 초의의 서상수계와 관련된 자료를 다시 살펴보다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게 된 것. 간접 자료를 꼼꼼히 살피고, 초의가 칠불암을 찾았던 시기를 대조해 보니 그가 금담장로로부터 서상수계를 받은 시점이 바로 그가 칠불암을 찾았던 시기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는 초의가 칠불암에서 ‘다록’을 필사했다는 사실자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은 초의의 차이론 탁마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풀어야할 과제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자료의 한계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넘을 수 없는 장벽인 양. 연구자란 수많은 모래알에서 진주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선배들의 말은 허사가 아니다. 깨알 같은 글자를 읽으며 고단한 눈을 비비던 일은 이런 횡재를 만나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잔잔히 밀려오는 희열, 천하를 얻은 듯하다. 하도 신기해 ‘조선불교통사’에 금담장로가 서상수계를 잇게 된 연유를 다시 살펴보았다.
조선조에 접어들어서는 영암 도갑사의 대은낭오(大隱 朗悟)화상이 그의 스승 금담장로(金潭長老)와 더불어 계학(戒學)이 실전상태에 놓여 있는 실정을 개탄하고, 1826(순조26)년 7월 15일 해제 후, 하동 칠불암 아자방에서 서상수계(瑞祥受戒)를 서원하고 7일간의 기도를 봉행하던 중 7일 만에 일도서광(一道瑞光)이 대은의 정수리에 관주(灌注)하므로 스승인 금담이 이르기를 “나는 오직 법을 위함이요 사자(師資)의 서열에는 구애받지 않는다”면서 “곧 상좌인 대은을 전계사로 하여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대은 스님과 금담 스님은 서로 상좌와 스승이었고 나이 차이도 금담이 16세나 많았지만, 서상수계로 인하여 스승과 제자가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계맥은 대은낭오(1780~1841)가 금담보명(1765~1848)에게 수계를 주고, 금담이 초의의순(1786~1866)에게, 초의는 범해각안(1864~1896)에게 전하고, 범해가 선곡(禪谷)에게, 선곡이 용성진종(1864~1940)에게로 주어 대대상전하였다.
영암 도갑사의 대은낭오(大隱 朗悟)화상이 그의 스승 금담장로(金潭長老)와 함께 계학(戒學)이 실전(失傳)상태에 놓여 있는 실정을 개탄해, 1826년 7월15일 해제 후 칠불암 아자방에서 서상수계를 서원하는 7일간의 기도를 봉행하였다. 대은 스님이 기도하던 중 한 줄기 서광이 그의 정수리로 쏟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 광경을 목도한 것은 금담 스님이다. 금담 스님은 원래 대은 스님의 스승. 하지만 금담 스님은 사자의 서열에 구애 받지 않고 오직 법을 위해 상좌인 대은 스님을 전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는 용단을 내렸다. 서상수계는 담무참 이후 호상(好相)을 통해 자서수계를 증명하는 것으로 그의 이러한 결단은 서상수계의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따라서 초의가 칠불암에 갔던 시기인 술자우제(戌子雨祭)는 1828년 곡우절에 칠불암 아자방을 찾아 금담에게 서상수계를 받기 위해 갔던 때를 이르는 것이다. 늘 우제(雨祭)를 ‘장마철’이라 번역해 왔는데 서상수계와 관련하여 본다면 곡우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는 대은 스님이 금담 스님에게 수계하는 동안의 절차나 초의에게 서상수계를 잇게 한 저간의 사정을 살펴본 결론이다. 아! 초의의 ‘다신전’이 서상수계와 이렇게 연결될 줄이야.
초의가 말한 스승은 금담이었다. 그리고 초의가 ‘만보전서’에서 장원의 ‘다록’을 필사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불가에 조주풍의 ‘끽다거(喫茶去)’ 전통은 오랫동안 선림에 습윤된 수행풍토였다. 하지만 다도의 원리를 아는 이 적어서 다시 이 음다의 수행풍토를 이어나가려는 그의 뜻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초의는 사미 수홍이 다도를 알려고 하는 뜻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우리의 풍토에 알맞은 내용으로 다시 정서해 주려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는 수행 틈틈이 수정 보완을 거쳐 ‘다신전’을 완성했다. 이 다서를 완성한 후 그의 자신감은 “시작이 있으면 마침이 있는 것이니 어찌 군자만 그런 것이랴.”라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
요즘 항간에서는 ‘다신전’이 장원의 ‘다록’과 내용면에서 다른 점이 없다는 이유로, 중국 다서를 필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다신전’과 ‘다록’을 꼼꼼히 분석해 보면 차에 대한 초의의 견해가 ‘다신전’의 행간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만보전서’를 필사한 후 정서(正書)하려했던 의도가 무엇에 있는지도 쉽게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은 지면의 한계 상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대략 ‘채다론(採茶論)’에서 “차 잎은 자순이 아닌 것이 상품이다(茶非紫者爲上)”이라든지 ‘탕변(湯辨)’에서 보인 초의의 순숙(純熟:차 우리기에 가장 좋은 물 끓음 상태)을 분별하는 방법은 장원의 견해를 능가한 것이다. 이는 장원이 탕변을 모두 순숙이라 했지만 초의는 이를 세분하여 순숙, 결숙(結熟), 경숙(經熟)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탕변에 대한 치밀하고 은미한 연구를 짐작할 수 있겠다.
특히 ‘다신전’이 우리의 자연환경을 고려했다는 사실은 바로 ‘정수불의차(井水不宜茶)’에서도 드러난다. 초의는 “강물은 하품으로 친다(江水下)”라든지 “산에서 가까지 않으면 좋은 물이 나지 않는다(第一方不近山 卒無泉水)”라는 그의 견해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이러한 그의 저술 태도는 고증을 통해 사실을 규명하려했던 조선후기 학문적인 방법론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추사는 “초의가 ‘군방보’를 등초했는데 여러 곳을 증정(證正)하였다. 마치 해당우미인(海棠虞美人)같은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내가 ‘잡화경(襍花經)’ 중에서 소초하면서 (여기에서)잘못된 것을 지적한 것이 또한 해당우미인뿐만이 아니니 마땅히 하나하나 고증해 바로잡음을 이처럼 해야 한다(草衣鈔群芳譜 多有證正者 如海棠虞美人之流 非一二 余謂襍花經中 因疏鈔而誤者 又不啻海棠虞美人 當有一一 證正如此耳)”라 하였다. 이는 고증을 통해 사실을 규명하려했던 초의의 학문적인 태도를 추사가 증언한 말이다.
따라서 초의가 ‘다신전’을 쓴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으리라. 초의가 1828년 곡우절에 칠불암에 간 것은 금담 스님으로부터 서상수계를 받기 위한 것이고, 그가 스승이라 부른 이는 금담 스님이다. 서상수계의 계학(戒學)을 이은 초의는 불가의 수행 풍토에서 사라져 버린 차를 수행과 계합된 전통으로 이어 나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찻잔 속에 비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만일염불기도 100일 회향후 향(香)을 듣고 차(茶)를 보며.... (0) | 2015.04.08 |
---|---|
[스크랩] 부처님 오신날의 통도사와 낙화놀이 (0) | 2014.10.28 |
정월 대보름! 차 한잔 드시고 積善功德行으로 행복한 한해가 되시길 빕니다 (0) | 2011.02.17 |
[스크랩] `동다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______^) (0) | 2010.03.17 |
[스크랩] 정찬주의 茶人기행 (0) | 2010.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