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스크랩]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들 - 明治維新

청원1 2006. 5. 7. 00:18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들  - 明治維新 

東洋 최초의 자주적인 근대화 혁명

 

사쓰마藩의 두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主導한 幕府타도, 무사계급 폐지, 富國强兵의 네이션 빌딩 全貌
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을 배출한 가고시마(사쓰마藩)·야마구치(조슈藩)·고치(도사藩)는 해외 先進 문물과의 접촉점인 港口들이었다. 일찍이 開明領主에 의한 교육을 통해 세상물정에 눈을 뜬데다 黑船 來到 이후 국가 存亡의 위기를 깨달은 이 사무라이들은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사쓰마-조슈 同盟을 맺고 幕府를 타도했다. 「마지막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는 明治維新의 성공 후 旣得權을 상실하고 퇴장한 不平 사무라이들을 朝鮮侵略戰으로 돌리려고 征韓論을 주장했으나 內治 優先을 주장한 竹馬故友 오쿠보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 반란을 일으키는데…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下級 사무라이가 주도한 近代국가 만들기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무라이 반란군이 정부군이 지키는 구마모토城을 포격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명치유신)은 文明開化와 富國强兵을 겨냥한 近代日本의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이며 「軍國日本」의 出發點이었다. 그것의 성공에 의해 列强의 반열에 오른 日本은 西洋의 帝國主義 침략 방식을 그대로 학습했다. 따라서 日帝로부터 국권을 강탈당했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메이지 유신은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오늘의 日本 또한 이해할 수 없다.
 
  메이지 유신의 주체세력은 사쓰마藩(번)과 조슈藩의 사무라이(武士)들이었다. 藩이라면 도쿠가와 幕府체제下의 지방정권이었다. 일본에는 그런 藩이 260여 개나 있었다. 藩의 규모는 다양했지만, 대체로 우리나라의 郡보다 약간 컸다.   
  사쓰마藩은 규슈(九州)의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 일대를 領地로 삼은 藩이었고, 조슈藩은 혼슈(本州)의 서쪽 끝 시모노세키(下關) 일대(지금의 야마구치縣)를 領地로 삼은 藩이었다. 그러니까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藩이 메이지 유신의 진원지였다. 더구나 메이지 유신을 推動(추동)한 핵심세력은 藩主(번주)나 上級무사가 아니라 사쓰마藩과 조슈藩의 下級무사들이었다.  
  이런 하급무사 출신 중에서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維新3傑」로 회자된다. 西鄕과 大久保는 사쓰마藩 출신이고, 木戶는 조슈藩 출신이다. 

  
   

 변두리 藩의 下級 사무라이 출신―출생성분이 열악한 그들이 일본 역사상 가장 빛나는 국가발전의 역할을 감당한 셈이었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지난 5월, 필자는 메이지 유신의 진원지를 취재하기 위해 4박5일간, 후쿠오카 국제공항에 내려 구마모토-가고시마-미야자키 코스를 거치는 규슈 縱斷 답사에 나섰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을 强國으로 만든 메이지 유신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歷史의 요행이 아니라 敎育의 힘이었다―이것이 이번 답사를 통해 필자가 느낀 솔직한 소감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성장한 마을    

가고시마는 일본 근대사의 주역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西가고시마 역 앞 대로를 지나면 곧 甲突川(갑돌천: 코츠키가와)을 만난다. 그 위에 걸린 高見橋를 건너면 왼쪽의 녹지공원 안에 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상이 있다. 그 남쪽 마을이 메이지 유신의 에너지기를 키워 낸 下級 사무라이 주거지인 가지야마치(加治屋町)이다. JR 西가고시마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다.   
  서쪽으로 甲突川을 끼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이, 維新의 최고 元勳이며 일본 무사를 대표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동생 츠쿠미치(從道: 메이지 시대 9人 元老 중 1人), 維新3傑의 1人으로 손꼽히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바로 이웃엔 러일전쟁 때 만주군 총사령관(元帥)으로 奉天會戰에서 크로파트긴의 大軍을 격파한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東海海戰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킨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등의 탄생지가 200∼300m 안팎의 거리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이고 형제와 오쿠보의 生家를 휘감아도는 甲突川 에는 高麗橋라는 다리가 걸려 있다. 그 위론 1994년에 개관한 「維新후루사토(고향)館」이 있다. 이곳의 지하층 「維新體感홀」에서는 첨단 하이테크 기기를 사용하여 維新 드라마를 재현하고 있다. 사이고·오쿠보 등을 형상화한 로봇이 등장하여 약 20분에 걸쳐 메이지 유신의 배경과 목표를 설명한다.   
  가지야町 동쪽 대로를 1km쯤 따라 내려가면 사쓰마번 시절 上級 사무라이 거주지인 天文館거리인데, 현재 가고시마 제1의 번화가이다. 천문관거리에서 좌회전해 5분쯤 달리면 縣立박물관이 있고, 그 동쪽 市立미술관 일각에 城山을 배경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銅像이 우뚝 서 있다. 城山이라면 西南전쟁 최후의 전쟁터로 사이고가 자결한 곳이다. 가고시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숨결로 가득 채워진 느낌을 주었다. 下龍尾町에는 西鄕南洲(남주는 사이고의 雅號)공원까지 조성되어 있다.
 
  西勢東漸(서세동점)의 물결 속에서 韓·中·日의 東아시아 3국 가운데 왜 유독 일본만 자기 나라를 발전시켜 列强의 반열에 진입할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사쓰마번 특유의 교육의 힘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메이지 유신 주역들의 성장과정을 逆추적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쓰마 특유의 사무라이 교육 

사이고 다카모리는 1827년 12월, 西鄕九郞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九郞이 藩으로부터 받은 祿米는 겨우 47石. 4남3녀를 양육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남자 아이들은 겨울에도 이불 하나를 서로 끌어당기며 잠을 잤다고 한다.   
  오쿠보의 아버지는 醫業에 종사하다가 武士가 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사쓰마의 제9대 藩主 시마즈 나리오키를 이을 家督다툼에서 나리아키라(長男: 正妻 소생)派였기 때문에 나리오키의 애첩 「오유라(お由羅)의 소동」 때 遠島유배 처분을 받았다. 오유라는 그녀의 소생인 히사미쓰를 차기 藩主로 세우려고 나리오키에게 베개송사를 했는데, 그로 인해 나리아키라派에 대한 피의 숙청이 벌어졌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했던 만큼 오쿠보의 가정형편도 사이고와 마찬가지로 유복할 수 없었다. 어떻든 오쿠보 도시미치는 어릴 적부터 이웃에 사는 세 살 年上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까이 지냈다.
 
  사쓰마번에서는 文武兼全을 모토로 삼는 全人敎育을 하급무사 자제들에 대해서도 시행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쓰마藩 특유의 鄕中敎育이었다. 城下는 30개 정도의 鄕이란 행정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사이고 등은 下加治屋町의 鄕中에 속해 있었다.   
  鄕中은 연령에 따라 二才(청년)組와 稚兒組(치아조)의 두 개로 나눠졌는데, 치아조에는 또 長치아조(11~13세)와 小치아조(7~10세)가 있었다. 치아는 매일, 稚兒頭의 命에 의해 스모(씨름)·旗뺏기·大將지키기 등의 경기 및 전쟁놀이를 하여 心身을 단련했고, 長치아 및 二才는 歌舞와 論語·大學 등을 배웠다.   
  二才組는 오전 중에 藩校인 造士館에서 漢學과 習字를 배우고, 오후에는 무예를 익힌다든지, 長치아들의 지도를 맡는다든지 했다. 밤에는 윤번으로 軍書를 읽는다든지 담력을 시험한다든지 향중교육의 기본목표를 담은 「格式條目」을 낭독하든지 했다. 사쓰마번 특유의 사무라이 교육이었다.   
  그러면 사이고는 어떤 교육과정을 거친 것일까. 그는 小치아 때부터 漢學을 배우고 長치아가 되면서 造士館에서 陽明學 등 諸學을 배웠다. 15세 때 번주의 눈에 띄어 元服(원복: 成人이 되는 의식)을 마치고 二才組에 들어갔고 藩의 근무자로 뽑혔다. 18세에 사이고는 郡方書役助가 되었다. 오쿠보의 경우는 14세부터 記錄所役助가 되었다. 근무라 해도 비상근이었기 때문에 향중교육에 열중할 수 있었다. 사이고는 21세 때 下加治屋町 鄕中의 鄕中頭에 올랐고, 곧 藩主 나리아키라의 中小姓(보좌역)이 되어 幕府 소재지 에도(江戶)에 파견 근무함으로써 출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규슈는 「일본의 어미땅」이다. 이번 답사에서 필자는 규슈 중앙부의 阿蘇山을 빠져나와 일본의 名 온천지의 하나인 기리시마(霧島)로 향하던 중 祖母山 남쪽에 위치한 「天孫降臨城地」 앞을 지났다. 일본신화에서는 일본인의 始祖인 니니기가 비단 이불에 싸여 하늘에서 이곳 「쿠지후루」(龜旨峰)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니니기의 설화는 駕洛國(가락국: 지금의 金海) 金首露王의 탄강설화와 똑같다.   
  
 
사쓰마·조슈藩과 우리의 惡緣  
  일본 민족은 크게 보면 한반도에서 건너간 渡來人과 남방계통 폴리네시안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면 渡來人이 먼저 정착한 곳은 한반도와 가까운 규슈일 수밖에 없다. 駕洛國은 고대의 일류 海運國이자 貿易國이었다. 倭國 왕가의 발생지도 규슈였다. 이것은 駕洛國과 倭國 왕가 사이의 혈연적 관계를 말해 주는 흔적이다.   
  또한 가고시마縣과 미야자키縣의 접경지대에 「韓國岳」이라는 높이 1700m의 峻峰이 있는데, 일본어 발음으로 「가라쿠니다케」라고 불린다. 駕洛國에서 건너간 渡來人들이 鄕愁에 젖어 이 봉우리에 올라가 멀리 駕洛國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기에 이렇게 命名된 것이 아닐까.   
  어떻든 규슈에는 韓半島와 관련한 지명이 많다. 예컨대 규슈 서남부 미야자키(宮崎)현 소재 南鄕村에는 「百濟里」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百濟 마지막 임금 義慈王의 왕자가 정착한 곳이라고 전해진다(별항 기사 참조).
 
  古代의 關係史 부분은 일단 생략하고 여기서는 近世 이후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우리 역사에선 어떤 존재인지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묘하게도 두 藩이 모두 우리와는 깊은 惡緣이 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사쓰마 藩主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제4군(병력 1만5000명) 대장, 조슈 藩主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제7군(병력 3만명) 대장이었다. 특히 시마즈는 1598년 10월1일 泗川倭城 전투에서 明의 中路軍 대장 董一元(동일원)이 이끄는 朝明연합군 3만6000명을 전멸시켜 그 武名을 明나라 궁정에까지 크게 떨쳤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598년 8월 침략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病死하자 왜군은 철수를 서둘렀다. 이때 倭의 제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순천의 왜교성에서 농성하며 탈출을 기도했지만, 李舜臣 장군에 의해 퇴로를 봉쇄당하고 있었다. 고니시는 사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에게 화급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시마즈는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500척의 대함대를 거느리고 순천 방면으로 출진했다. 시마즈 함대가 西進해 오자 李舜臣 장군은 지금의 南海大橋 해역에서 迎擊했는데, 이것이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던 露粱海戰(1598년 11월29일)이다. 이 해전에서 李舜臣 장군은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왜적의 유탄을 가슴에 맞아 전사했다. 고니시는 李舜臣 함대와 시마즈 함대가 격돌하는 틈에 脫出路를 얻어 도주했다.   
  히데요시의 死後, 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도요토미 정권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출전하지 않음으로써 실력을 비축할 수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하고 에도(江戶: 지금의 東京)에 幕府를 세웠다(1603). 도쿠가와 막부는 그 후 260여 년 동안 일본 열도를 지배하게 된다. 도쿠가와 정권을 성립시킨 결전이 1600년 9월15일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였다.   
  
 
세키가하라 敗戰 후 260년간 復讐戰 노려  
  세키가하라 전투는 東軍 12만 명과 西軍 8만 명이 충돌한 일본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壬辰倭亂에 참전한 장수들의 대다수는 反도쿠가와 연합군인 西軍(8만 명)에 가담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壬亂 당시 제8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壬亂 당시 제1군 대장),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시마즈 요시히로와 모리 테루모토 등이 그들이다.   
  東軍의 총대장은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壬亂 당시 제2군 대장)는 히데요시의 侍童 출신이었지만, 西軍의 핵심세력인 이시다(石田)와 고니시를 유별나게 미워했던 나머지 東軍에 가담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西軍의 일익을 담당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배신하여 갑자기 西軍을 공격함으로써 東軍의 압승으로 끝났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正妻인 北政所의 조카여서 丁酉再亂 때 불과 16세의 나이로 원정군의 총대장이 되었지만, 武將으로서의 능력은 수준 이하였다. 
   포로가 된 미쓰나리와 고니시는 참수를 당했다. 우키다는 항복을 했지만 외딴 섬에서 무려 50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사망했다. 모리 테루모토는 領地의 대폭 삭감에 의해 石高가 120만 석에서 36만9000석으로 깎였다. 그러나 시마즈의 사쓰마번만은 石高의 변동 없이 건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동원한 병력은 1500명에 불과했지만, 西軍의 총붕괴에도 불구하고 매우 善戰했다. 戰後 사쓰마번의 健在는 「敵이지만 잘 싸웠다」는 평판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면 시마즈軍은 도대체 어떻게 싸웠던 것일까.
 
  시마즈軍은 前面의 井伊直政·松平忠吉의 軍과 맞섰지만 전투가 개시되자 고바야카와의 배반에 의해 좌우에 있던 오다니 요시츠쿠(大谷吉繼)·우키다 히데이에의 兩陣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북방의 이시다軍도 패퇴, 3면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전투는 참담한 난전과 격투의 양상이었다.   
  맨 마지막까지 남아 난투를 벌이던 시마즈軍도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참으로 대담하게 이에야스의 本陣이 설치된 東軍의 중앙부를 기습적으로 돌파, 伊勢路를 통해 탈출했다. 이때 「시마즈의 敵中돌파」는 일본의 戰史에서 유명하다. 이것은 죽음을 각오한 병사 수명이 伏兵으로 남아 화승총을 발사, 다가오는 적병의 추격을 막는 사이에 本軍이 퇴각하고, 그 伏兵이 전멸하면 또 수명이 후방으로 뛰어나가 捨石(사석)이 되는 그야말로 처절한 퇴각전술이었다.   
  오후 4시, 이에야스가 전투 중지의 명령을 내림으로써 東軍의 추격은 끝났다. 요시히로는 이틀 후인 17일 밤에야 겨우 西軍의 본거지 오사카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요시히로를 따랐던 병사는 고작 80명으로 생존율 5.3%였다. 일행은 오사카로부터 海路로 사쓰마로 돌아왔다.   
  이로써 사쓰마번의 시마즈家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敗者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에야스는 시마즈家의 石高 65만 석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그것은 사쓰마번의 실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동원한 사쓰마軍은 1500명에 불과했음은 앞에서 지적했다. 패전 당시 요시히로의 형 요시히사(義久)와 요시히로의 아들 이에히사(家久)가 본국에 남아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에야스로서도 3만여 명의 精兵을 보유한 사쓰마번을 가볍게 처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쓰마藩의 경제력 기반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9년 후인 1609년 2월 시마즈 이에히사는 막부의 명령에 의해 오키나와(琉球)에 출병, 5월에는 오키나와王을 사로잡았다. 그해 7월, 막부는 오키나와를 시마즈家의 所管으로 결정했다. 이로써 사쓰마번의 石高는 77만 석으로 늘어나 전국 260개 藩 가운데 랭킹 3위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도시대가 안정기에 들어감에 따라 무사계급은 점차 생활에 쪼들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쟁이야말로 사무라이의 職場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없으면 사무라이들은 功을 세울 기회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사무라이들의 祿高(녹고: 봉급)는 여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활수준은 갈수록 높아지는데다 물가도 올랐던 만큼 무사계급의 궁핍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쓰마번도 점차로 藩의 財政이 어려워져 10代 藩主 나리오키(齊興)가 통치하던 1820년대 말에는 누적적자가 500만 량에 달해 파산위기에 봉착했다. 그때 나리오키의 祖父 시게히데(重濠)가 즈쇼 히로사토(調所廣鄕)란 유능한 측근을 기용, 財政개혁을 단행했다.   
  즈쇼는 오키나와 特産인 黑사탕의 전매와 부채의 250년 분할상환 등의 정책을 강행, 만년 赤字체질을 黑字체질로 전환시켰다. 그 결과, 10년 후 사쓰마번은 거금 100만 량을 비축하게 되었다. 바로 이 재력이 幕末에 사쓰마藩이 강력해질 수 있었던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경제개혁의 공로자 즈쇼는 1848년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는 사쓰마번을 일본 제1의 풍요한 藩으로 만들기 위해 淸國과 密貿易을 감행했다. 당시 막부는 藩의 해외무역을 엄격히 통제하는 쇄국정책을 강행하고 있었다. 사쓰마번에 대한 막부의 추궁이 들어오자 즈쇼는 혼자 모든 책임을 떠안고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英語 일기를 썼던 開明藩主 나리아키라   
  사쓰마번이 幕末이란 亂世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開明藩主(개명번주)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가 11대 藩主인 나리아키라(齊彬)다. 그는 두뇌가 뛰어난데다 蘭學(난학: 서양학문)을 깊게 배웠다. 서양문물에 심취, 심지어 일기도 英語로 썼다. 大名家의 正室과 長男은 에도 소재 藩邸(번저)에 거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武家諸法度」에 따라 나리아키라는 에도에서 성장했다. 당시 에도에서 그의 평판은 대단히 높았다.   
  『저 사람이 도자마 다이묘(外樣大名: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부터 도쿠가와家를 섬긴 大名)가 아니고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家를 섬긴 대명)라면 日本 천하의 國政을 맡을 터인데…』   
  그런 그도 나이 마흔을 넘어 11대 藩主를 승계할 때까지 강력한 경쟁자를 만나 고전했다. 경쟁자는 그의 異母弟인 히사미쓰(久光)이었다. 사쓰마로부터 보면 에도는 너무 멀고, 나리아키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蘭學에 대해서도 기괴한 요술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히사미쓰는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래 무사의 수련법인 犬追物(이누오우모노: 수십 마리의 사냥개를 동원하는 사냥)이나 스모(일본식 씨름)와 궁술 등을 좋아했다. 당연히 보수파 사무라이들 사이엔 히사미쓰의 인기가 높았다. 이런 가운데 히사미쓰 암살 기도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나리아키라 지지파로 지목되어 개혁파 사무라이들이 피의 숙청을 당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결국 나리아키라가 사쓰마 藩主의 자리에 올랐다. 1851년 2월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852년 새 藩主 나리아키라는 가고시마의 이소(磯: 바닷가)에 공업단지를 건설하고 集成館이라고 명명했다. 集成館에는 反射爐, 용광로, 鑽開臺(찬개대: 대포의 포신에 구멍을 뚫는 공장) 등 군수 관련 설비뿐만 아니라 유리공장, 鍛冶場, 蒸氣金物細工場 등도 들어섰다. 쇄국보다 통상개국이 일본의 나아가야 할 길임을 일찌감치 파악한 유능한 藩主는 이렇게 새 시대를 준비했다.
 
  集成館의 일부는 현재 「尙古集成館」(가고시마市 吉野町 磯 9685)이라는 이름으로 그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JR 가고시마역에서 霧島·國分 방면 버스를 타고 가다 磯庭園에서 하차하면 걸어서 1분 거리다. 이곳엔 옛 集成館의 기계공장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1864년에 착공, 1865년에 완성된 것으로 일본 最古의 본격적인 공장이다. 원래 蒸氣기계소인데, 건물 가운데를 관통하는 샤프트로써 동력을 끌어 다양한 기계를 가동시켰다고 한다.   
  
 
黑船 소동 이후 대두한 尊王攘夷 운동  
당시의 藩主 나리아키라는 일본 최초의 군함 昇平丸을 완성시켰다. 船長 약 30m, 대포 10門을 갖춘 당당한 洋式 군함이었다. 이 배에 게양하기 위해 나리아키라는 스스로 다자인한 日章旗를 처음 만들었다. 日章旗를 게양한 昇平丸은 그 후 幕府의 요청에 의해 헌상되었다. 尙古集成館으로부터 200m 떨어진 곳에는 당시 集成館의 방적공장에서 근무하던 외국인 기술자 6명이 살았던 양옥인 異人館이 보존되어 있다.   
  1853년 6월3일, 성조기를 펄럭이는 네 척의 군함이 갑자기 에도灣의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일찍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거대한 함대로 일본 천지가 발칵 뒤집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黑船 소동」이다.   
  旗艦에는 미국의 東印度함대 사령장관 페리가 타고 있었다. 페리 제독은 대통령의 국서를 지참, 일본에 개국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막부는 일단 거절했지만, 그 강경한 태도에 겁을 집어먹고 국서를 접수하면서 다음해에 답서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페리는 에도灣의 측량 등 한바탕 무력시위를 감행한 다음, 6월12일에야 함대를 오키나와의 나하港으로 물렸다.   
  러시아의 사절 푸차친도 來日했다. 그는 페리보다 1개월 늦게 나가사키(長崎)에 들어와 千島·화태의 국경획정과 통상을 요구하는 국서를 전달했다.
 
  막부는 가능하면 쇄국을 계속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쇄국을 고수할 만한 힘이 없었다. 푸차친의 來日에 자극을 받은 페리 제독은 예상보다 빠른 1854년 1월16일, 7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다시 에도灣 깊숙이 들어왔다.   
  幕府는 페리의 강경한 개항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요코하마가 회담장소로 결정되었다. 2월10일부터 담판이 시작되어 3월31일 마침내 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이 가나가와(新奈川)조약이다. 이 조약에 이어 일본은 영국·러시아·프랑스·네덜란드와도 화친조약을 맺었다.   
  막부는 서양의 군함을 보고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깨닫게 되었다. 이즈에 反射爐를 설치하여 대포를 제작하고, 에도灣을 방어하기 위해 포대를 쌓는가 하면 나가사키에 해군견습소를 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幕府에 눌려 實權이 없었던 천황을 받들어 西洋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尊王攘夷(존왕양이)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로써 막부의 토대가 흔들리자 유력한 大名들이 막부의 정치에 대해 발언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언과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朝廷을 이용했다. 그러자 大名(다이묘)과 京都에 있는 朝廷 사이를 중재하는 浪士와 志士들의 활동도 활발해져 갔다.
 
  1858년 7월, 나리아키라는 사쓰마번의 정예 병사 3000명을 이끌고 上京하여 천황의 御所를 경비할 계획으로 가고시마 城下에서 대규모 군사연습을 했다. 그러나 이 연습 당일 나리아키라는 갑자기 병을 얻어 쓰러졌다. 나리아키라는 7월8일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임종에 앞서 나리아키라는 그의 이복동생 히사미쓰의 아들인 타다요시(忠義)를 양자로 삼아 藩主로 세웠다. 타다요시는 당시 19세였다. 그래서 나리아키라는 그의 이복동생 히사미쓰를 「藩父」로 삼아 타다요시의 후견역을 맡도록 했다.   
  나리아키라는 생전에 하급무사 계급에서 개혁파를 발탁, 精忠組란 조직을 만들어 육성했다. 精忠組의 대표적 인물이 메이지 유신의 쌍벽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나리아키라는 특히 사이고의 장래에 기대를 걸고 그를 에도에 파견, 당시 일본의 일류 인물들과 교유하도록 배려했다. 당시 流行사상은 尊王攘夷論이었다. 이 때문에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精忠組 멤버들은 모두 과격한 尊王攘夷論에 기울어져 있었다. 幕府를 물리치고 천황을 받들어 西洋 오랑캐를 배격하자―이것은 시대적 思潮였다.   
  
 
先覺者 요시다 쇼인과 그의 제자들   
   나리아키라가 병사한 지 2개월 후에 尊王攘夷論者를 숙청하는 이른바 安世(안세이) 大獄이 일어났다. 안세이 大獄을 주도한 인물은 막부의 大老(首相格)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였다. 이때 교토에서 활약하던 月照라는 勤王僧이 막부의 관헌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月照의 신병을 보호하기 위해 사이고는 그와 함께 가고시마로 내려가 그를 숨겨 주었다.   
  이에 사쓰마의 통치자 히사미쓰-타다요시 父子는 이이 나오스케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사이고를 아마미(奄美) 섬으로 귀양을 보내 버렸다. 사쓰마 藩主 부자는 존왕양이론자가 아닌 公武合體論者였다. 공무합체론은 막부의 쇼군(將軍)이 유력 藩主들과 함께 國事를 협의하여 그 결정 사항을 천황에게 결재를 받는다는 타협적인 개혁노선이었다.
 
  安政의 大獄에서는 조슈번의 대표적인 존왕양이론자로서 松下村塾(쇼카손수쿠)을 열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도 붙잡혀 처형되었다. 요시다 쇼인의 門下에서는 「維新3傑」 중 1人인 기도 다카요시를 비롯, 타카스기 신사쿠(高衫晉作)·구사카 겐스이(久坂玄瑞)·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기라성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尊王攘夷論者에 대한 막부의 대대적인 탄압이 벌어지자 水戶(미도)번과 사쓰마의 浪士(浪人 사무라이)들은 大老 이이 나오스케 암살을 모의했다. 이들은 1860년 3월, 에도城의 櫻田(사쿠라다)門 근처에서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 살해했다. 이로써 막부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公武合體派(조정과 막부가 타협해야 한다는 쪽)인 사쓰마의 히사미쓰는 大兵을 이끌고 上京했다. 그는 코메이(孝明) 천황을 알현하여 尊攘派의 급진적인 행동을 억제하고 막부와 협조할 것을 진언했다. 이어 히사미쓰는 검술의 達人들을 파견, 교토 郊外 후시미(伏見) 소재 여관 테라다야(寺田屋)에 집결해 있던 自藩의 급진파들을 베어 죽이는 한편, 勅使와 동행하여 에도로 내려가 14대 將軍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에게 幕政 개혁의 勅命을 전달했다.
 
  그 내용은 1)히도츠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를 將軍後見職,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를 政事總裁職, 아이즈(會津) 藩主인 마쓰다이라 카다모리(松平容保)를 京都守護職에 임명할 것, 2)洋式兵制를 채용할 것, 3)參勤交代制(참근교대제: 반란 예방책으로 大名은 에도에서 1년, 자기 領地에서 1년씩 교대로 살게 하는 규정)를 완화할 것 등이었다.   
  이 플랜은 모두 히사미쓰가 천황에게 진언한 구상 그대로였다. 時流에 밀린 막부는 칙명을 받아들였다. 이런 「國事周旋」에 성공한 그는 매우 의기양양했다.   
  
 
英國人 살해사건으로 발발한 薩英전쟁  
 사쓰마의 히사미쓰가 國事周旋의 성과를 코메이 천황에게 보고하기 위해 에도를 떠나 교토로 가던 8월21일 이른 아침의 일이었다. 약 400명으로 이뤄진 大名 행렬은 시나가와(品川)를 지나 나마무기(生麥: 요코하마市 鶴見區 生麥 1-16) 가도로 접어들 때 전방으로부터 말을 탄 영국인 4명이 다가왔다.   
  그들은 上海에 거주하면서 관광을 위해 요코하마(橫濱)에 와 있던 찰스 리처드슨, 요코하마 거주 상인 윌리엄 마셜과 그의 친척 보로델 부인, 그리고 商社員 클라크 등이었다.   
  이들은 日本의 藩主쯤은 얕잡아 보았는지, 말을 되돌려 가라는 번사들의 손짓을 무시하고, 大名의 행렬에 끼어들었다.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리처드슨을 칼로 난도질하여 죽여 버렸다. 마셜과 클라크는 刀傷을 입은 채 보로델 부인과 함께 도주했다. 이것이 나마무기 사건의 개요다.
 
  나마무기 사건 발생 후 영국은 막부에 대해 배상금 10만 파운드, 사쓰마번에 대해선 범인 처벌과 배상금 2만5000파운드를 각각 요구했다. 막부는 이에 굴복하여 배상금 10만 파운드를 지급했지만, 사쓰마번은 완강하게 응하지 않았다. 이에 영국은 1863년 6월, 요코하마에 집결했던 함대를 가고시마에 원정시켰다.   
  6월28일, 사쿠라지마(櫻島)가 우뚝 솟은 가고시마灣에 旗艦 유리아라스(배수톤수 2371t, 승무원 515명)를 비롯한 영국 함대 7척이 진입했다. 이에 대해 사쓰마의 함선은 3척뿐이었고, 배수량은 3척을 모두 합쳐도 1770t에 불과, 유리아라스 1척에 미치지 못했다. 함대 결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쓰마번은 사쿠라지마를 중심으로 한 5개의 포대에 5100여 명을 배치하고, 이 밖에 8000여 명을 동원하여 방어전에 나섰다.
 
  이번 답사여행에서 필자는 가고시마 부두에서 페리에 승선, 약 15분 걸려 사쿠라지마의 하카마코시港에 도착했다. 섬 중앙부 南岳의 분화구에서는 때마침 버섯구름 모양의 연기를 하늘 높이 뭉텅뭉텅 뿜어내고 있었다. 하카마코시로부터 국도 224호선을 타면 곧 모츠키(持木). 모츠키에는 사쿠라지마 대폭발(1914년) 기념탑이 서 있다. 이곳에 사쿠라지마 포대가 설치되어 가고시마 해안포대와 함께 錦江灣(가고시마灣)에 진입한 英國 함대를 향해 협공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薩英전투는 7월1일부터 3일까지 벌어졌다. 전투 결과, 영국 측의 피해는 전사 13명, 부상 65명, 레이스호스號 小破. 사쓰마 측의 피해는 전사 5명, 부상 10여 명, 함선과 화물선 등 8척 燒失, 포대 2개소 완전 파괴.   
  인적피해만 놓고 보면 영국 측이 혼이 난 셈이지만, 물적피해는 사쓰마 측이 훨씬 심대했다. 영국 함선에서 발사한 로케트탄은 집성관 이외에도 시가지 가옥 350호, 사무라이의 가옥 160호, 사원 4개를 불태웠다. 결국 이 전쟁에선 양측 모두 데미지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존왕양이파의 감각은 달랐다.   
  『사쓰마는 유럽의 최강 영국 함대를 쫓아냈다. 훌륭하다』   
  특히 코메이 천황은 사쓰마번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히사미쓰를 마쓰다이라 다카모리와 함께 京都수호직으로 임명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어떻든 薩英전쟁을 치름으로써 영국과 사쓰마는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게 되어 11월에는 화해하기에 이르렀다. 사쓰마는 영국에 배상금을 지급하고, 영국은 군함을 구입하려는 사쓰마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로 했다.   
  公武合體論者인 사쓰마 藩父 히사미쓰는 1863년 8월18일, 아이즈(會津)번과 薩會동맹을 맺어 在京 조슈(長州)번 및 조슈系 尊攘激派의 公卿 7人을 교토로부터 추방하는 쿠데타의 주력이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8·18 정변이다.   
  
 
雄藩연합으로 列强 침략 막자   
  1864년 2월, 히사미쓰 藩父 취임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아마미大島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면되었다. 사이고는 곧 京都番으로 임명되어 京都에 있어 사쓰마번의 대표자가 되었다. 물론 이 시기까지 사이고도 藩主의 노선에 따라 公武合體派로 행세했다. 동년 7월19일 洋夷派인 조슈軍이 8·18 정변에 대한 복수전을 위해 上京, 막부군과 싸우다가 御所를 향해 砲를 발사한 「禁門의 變」이 발생했다. 이때 사이고는 조슈번을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이고는 바로 그 나흘 후 幕末의 經世家였던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만난 다음에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雄藩聯合에 의해 신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歐美 열강의 침략을 막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가쓰의 지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이고와 「一心同體」였던 오쿠보 도시미치도 사이고의 雄藩聯合論을 적극 지원했다.   
  이후 사이고와 도시미치는 절묘한 2人3脚을 이뤄 사쓰마번의 武力을 막부 타도의 主力으로 유도해 간다. 사쓰마가 雄藩聯合을 실현하려면 동맹을 맺을 만한 세력은 조슈藩밖에 없었다. 사쓰마-조슈 同盟 실현을 위해 사이고는 조슈번에 대한 종래의 태도를 180도 바꿨다. 당시 조슈는 禁門의 變을 일으킨 罪로 막부의 토벌을 받을 상황이었는데, 사이고가 앞장서 부드러운 처분을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때 사이고에 대한 유력한 협조자는 도사번의 脫藩 무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新太郞)였다. 가쓰 가이슈의 가르침에 의해 雄藩聯合의 구상을 품고 있던 사카모토 료마는 1864년 5월 시모노세키를 방문하여 조슈번의 藩士 기도 다카요시와 회담, 사쓰마가 公武合體 노선을 이탈하고 있는 사정을 전달했다.   
  당시 막부는 제2차 조슈 追討戰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조슈번은 佐幕派 諸藩의 來攻에 대비, 총포와 군함을 외국에서 구입하려고 했다. 료마와 나카오카는 나가사키의 영국인 무기상인 토머스 글라버를 조슈번에 소개했다. 사쓰마번도 이에 협력, 藩船 胡蝶丸에 미니에총 4000정, 게베르총 3000정을 적재하여 조슈에 보냈다.
 
  글라버로서도 조국 영국이 사쓰마와 적대관계였다면 이런 비즈니스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薩英전쟁 이후 영국과 사쓰마는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막부가 프랑스에 접근하는 데 대한 영국의 견제책이기도 했다.   
  
 
사쓰마-조슈 同盟  
  9월8일, 조슈의 藩主 모리 父子는 시마즈 히사미쓰·타다요시 父子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자신들은 사쓰마번을 「흠모」하고 「의뢰」한다는 표현을 구사했다. 그 결과, 이때까지 藩士 레벨에서 진행되어 온 사쓰마-조슈 동맹은 결정적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사쓰마-조슈 동맹은 비밀협약이었다. 이것을 눈치채지 못한 막부는 1866년 4월 사쓰마번에 대해 조슈 追討軍의 선봉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제2차 조슈 追討戰은 막부군의 대패로 끝났다. 이에 막부의 將軍 이에모리는 오사카城에서 상심한 끝에 病死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사쓰마번의 對조정 공작을 담당했던 것은 오쿠보였다. 오쿠보는 前 左近衛中將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조정의 핵심적 요직을 차지하도록 후원했다. 이와쿠라는 귀족으로서는 특이하게도 담력이 크고 지모도 상당한 인물이었는데, 천황으로부터 근신처분을 받고 일시 京都 교외에서 칩거하고 있었다.   
  그런 이와쿠라가 드디어 코메이 천황의 부름을 받고 國事의견서를 제출했다. 國事의견서의 요지는 王政復古의 주장이었다. 이어 그는 도쿠가와家의 정권을 조정에 반환해야 한다는 大政奉還을 건의했다. 이것은 처음으로 제시된 新국가 건설을 겨냥한 그랜드 비전이었다.   
  오쿠보는 이와쿠라의 왕정복고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즉각 사쓰마·조슈 이외의 雄藩들에도 호소하여 雄藩연합의 확대를 꾀했다. 이런 상황에서 히토츠바시 요시노부(히토츠바시家는 도쿠가와家와 같은 家門)가 德川 15대 장군직에 취임하고(1866년 12월5일), 코메이 천황이 갑자기 병사했다(1866년 12월25일).
 
  공무합체에 의한 攘夷 실천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코메이 천황이 죽음으로써 사쓰마번의 활동공간은 더욱 넓어졌다. 해가 바뀌어 1867년이 되면 사이고와 오쿠보의 雄藩 설득공작이 물결을 탔다.   
  당시 賢公으로 이름이 높던 다이묘는 후쿠이번의 前 번주 松平春嶽, 도사번의 前 번주 山內容堂, 우화도번의 前 번주 伊達宗城이었다. 이들 3인은 모두 前 번주의 신분이었지만, 아직 藩의 實權을 장악하고 있던 실력자들이었다.   
  사이고 등은 이들 3인과 사쓰마의 시마즈 히사미쓰를 京都로 초치하여 4侯회의를 개최했다. 히사미쓰가 이니셔티브를 잡았던 4侯회의는 다음과 같은 國事周旋 방침을 결정했다.   
  1)국가의 중대사는 우리 네 藩이 막부에 상신하고, 막부는 이것을 조정에 奏上할 것. 2)그런 연후 조정은 勅許가 아닌 勅命에 의해 국책을 결정할 것. 3)조슈번에 대해 처분은 寬典으로 하고, 毛利敬親 父子의 官位를 되돌려 주고 封土 삭감 및 關東에의 轉封도 취하지 말 것.   
  이 방침 중 핵심은 王政復古 사상이 內在되었다는 점이다. 즉, 조정이 막부에 勅許를 주어서 國事를 追認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 자체가 勅命을 발해 직접정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부로서는 이런 방침을 승복할 수 없었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존재의미를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在京의 佐幕派 諸藩도 태도를 경화시켰기 때문에 4侯는 소득 없이 歸藩하고 말았다. 왕정복고에 의한 新국가 건설을 꿈꾸던 사이고와 오쿠보의 위기였다.   
  
 
幕府 타도를 위한 폭력혁명 노선  
  이때 도사번의 번사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討幕擧兵에 의한 新국가 건설을 부르짖었다. 5월21일, 사이고는 이 두 사람과 회담을 하고 난 뒤 武力討幕, 즉 막부를 무력으로 토벌하는 폭력혁명을 기도하게 되었다.  
  오쿠보도 武力討幕에 동의했다. 그 결과 사쓰마번은 9월6일, 병사 1000명을 급거 入京시켰다. 이어 오쿠보는 조슈로 급행하여 조슈번주 父子와 직접 면담, 출병의 맹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이 무렵, 오쿠보의 움직임은 電光石火를 방불케 했다. 그는 다시 歸京하여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討幕擧兵에서 왕정복고에 이르는 프로세스를 협의했다.
 
  이와쿠라는 강력한 왕정복고론자였지만, 코메이 천황의 미움을 받아 京都 교외에서 근신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전년 12월 코메이 천황의 死去 이후 어느 정도 행동의 자유를 인정받고 있었다. 이와쿠라와 오쿠보가 합의한 시나리오는 토막군에게 천황의 錦旗(금기)를 내려 官軍으로 할 것, 새 政體는 왕조 때의 太政官의 職制 그대로 할 것 등이었다.
 
  사태가 급박해진 10월13일, 막부는 도사번의 건의를 받아들여 大政奉還을 단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다만, 막부의 구상은 대정봉환을 하더라도 장군이 列藩연합체의 議長 지위만은 확보하려 했던 점에서 장군을 배제하려는 討幕派의 구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 같은 막부의 先手에 이미 討幕擧兵을 결정했던 사쓰마·조슈 양번은 擧兵의 명분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오쿠보는 이와쿠라를 통해 메이지 천황의 外祖父인 中山能久 등 토막파 公卿 3인에게 「討幕의 密勅」을 내려줄 것을 교섭했다.   
  토막의 밀칙은 10월14일에 사쓰마·조슈 양번에 각각 전달되지만, 여기엔 석연치 않은 의혹이 있다. 장군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결의했던 것은 그보다 하루 전인 10월13일이었으며, 대정봉환의 上表가 조정에 접수된 일자는 10월14일이었다. 그렇다면 메이지 천황이 정치적으로 양면 작전을 구사했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같은 날짜에 요시노부의 上表를 접수하는 한편으로 사쓰마·조슈 양번에 대해 토막의 밀칙을 내렸기 때문이다. 「토막의 密勅」은 그 書式 등의 不備 때문에 僞勅이라는 의심을 받아 왔다.   
  사실, 사쓰마번은 그보다 5개월 전에 이미 에도의 사쓰마 藩邸에 존양파 번사 500명을 집결시켜 일부러 막부 교란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검은 복면을 하고 밤마다 방화·강도 사건을 일삼아 에도의 치안불안을 꾀하는 한편, 이에 발끈한 막부의 선제공격을 유도했다. 막부가 藩邸에 대해 선제공격을 가하기만 하면 사쓰마번으로선 開戰의 대의명분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작전을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드디어 막부는 사이고가 깔아 놓은 미끼를 덥석 물고 말았다. 방화와 강도 짓을 자행하던 黑복면의 무리들이 에도의 사쓰마 번저로 사라지는 현장을 막부의 순찰조가 확인했던 것이다. 10월25일, 막부군은 에도의 사쓰마 번저에 대포까지 발사했다. 이 사건으로 사쓰마 측은 전사 18명, 항복 42명, 생포 33명의 피해를 입었다.   
  
 
王政復古의 大號令  
  12월9일, 薩·土·藝·尾·越의 5藩 군대가 돌연 御所를 봉쇄하고 親幕派의 親王과 公卿을 쫓아낸 다음에 이와쿠라가 어린 메이지 천황 앞에서 「왕정복고의 大號令」을 대독했다. 즉, 攝政·關白·征夷大將軍 등을 폐지하고 總裁·議政·參與의 3職으로 구성되는 新정부를 발족시킨다는 선언이었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의 출발점이었다.
 
  총재에는 다루히도 親王, 議政에는 公家와 쿠데타에 참가한 5藩의 藩主 또는 前번주, 參與에는 公家와 5藩으로부터 각 3명씩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京都에는 왕정복고정권이 탄생했지만, 막부도 전국 지배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2개의 중앙정부가 병립하는 모습이 되었다.   
  천황 정부 내부에는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할 것을 주장하는 이와쿠라·사쓰마 등의 왕권복고파, 그리고 도쿠가와 정부와의 평화적 융합을 바라는 도사번·에치젠번·오와리번 등의 公議政體派라는 두 조류가 병존했다. 公卿들의 다수는 왕정복고의 명목에 만족하여 그 이상의 변화를 바라지 않아 公議政體派에 동조했다.   
  왕정복고 쿠데타 당일 밤의 小御所會議에서는 의정 山內豊信(도사 前 번주)이 이곳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불러올 것을 주장한 데 대하여 이와쿠라와 오쿠보는 요시노부에게 辭官·納地를 명하는 것이 先決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회의의 분위기는 山內 지지 쪽으로 흘렀다.   
  공의정체파의 大공세에 불안을 느낀 참여 岩下方平은 옥외에서 경비를 지휘하던 사이고에게 달려가 대책을 물었다. 사이고는 『短刀 한 자루만 있으면 결말을 낼 일』이라고 답변했다. 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한편 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大政奉還을 위해 京都의 二條城에 머물고 있다가 12월13일 트러블을 피해 스스로 오사카城으로 옮겨 갔다. 그가 데리고 온 아이즈 번사 등이 대정봉환 후 잇달아 入京하는 사쓰마·조슈의 번사들과 충돌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大실수였다. 諸藩의 大勢는 도쿠가와 막부와 公議政體派 측으로 기울고 있었다. 왕정복고파는 점차로 고립, 쿠데타는 龍頭蛇尾(용두사미)로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최후의 다지기에 소홀하여 8, 9부 능선에서 눈앞에 둔 승리를 놓쳤다.   
  12월25일, 오사카城으로 「사쓰마 번저 燒却(소각) 성공」의 飛報가 날아들었다. 오사카 城內는 그동안의 거듭된 양보로 사기가 죽어 있던 막부군 병사들의 환호성으로 들끓었다. 이번 기회에 京都로 진격하여 사쓰마·조슈 軍과 雌雄을 결하자는 강경론이 빗발쳤다. 요시노부도 사이고의 도발에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도쿠가와家, 드디어 朝敵이 되다  
  戰力은 도쿠가와 막부軍 측이 단연 우세했다. 병력이 3배 내지 5배였고, 천하의 名城인 오사카城을 근거지로 했으며, 에도로부터 프랑스式 신예군대의 증원을 기대할 수 있었는데다 오사카灣에는 東아시아 최강의 도쿠가와 함대가 버티고 있었다. 보통의 싸움이라면 천황 정부 측의 必敗 구도였다.   
  사이고도 패전을 각오, 그때는 천왕을 주고쿠(中國) 山地로 옮기고 게릴라전으로 저항할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將軍 요시노부는 1868년 1월1일, 사쓰마번의 죄상을 열거하면서 奸臣의 인도를 요구, 만약 불응한다면 誅戮(주륙)을 가하겠다는 「討薩(토살)의 表」를 조정에 제출하고, 諸藩에도 出兵을 명했다. 그리고 2일, 막부군 1만5000명을 오사카로부터 진발시켜 요도(淀)에 본영을 설치했다. 이어 아이즈번을 선봉으로 하는 本隊는 후시미(伏見)에 집결시켜 본영을 후시미 奉行所에 두었다. 요시노부는 入京하여 參內의 순서를 밟을 작정이었다.
 
  1월3일, 북상하던 도쿠가와 막부軍은 京都의 교외 도바(鳥羽)·후시미에서 사쓰마번·조슈번의 방어선과 충돌했다. 緖戰은 일단 방어 측이 우세했지만, 곧 승패의 행방은 불분명해졌다.   
  그런데 1월4일, 천황 정부軍의 前線에 「錦의 御旗」가 펄럭이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朝敵(조정의 적)이 되었다는 쇼크를 받고 戰意를 잃고 死鬪를 벌이는 부하들을 버려 놓은 채 에도로 도피했다. 將軍이 되기 전 水戶(미도)번에서 성장했던 요시노부는 水戶學의 尊王論에 심취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錦의 御旗」는 실은 이와쿠라와 오쿠보가 密造한 가짜였다. 主將이 전선으로부터 이탈했던 만큼 도쿠가와軍은 붕괴했고, 천황 정부 측은 예상치도 못한 승리를 거두었다. 사쓰마번으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도바·후시미 싸움은 불과 3일간 전개된 국지전이었지만, 이후 일본의 역사를 결정할 정도로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천황정부 내에서는 왕정복고파가 지도권을 잡았고, 公議政體派의 영향력은 후퇴했다.   
  
 
100만 시민의 戰火를 모면시킨 에도 開成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西일본의 諸藩은 「새 시대의 버스」에 올라타려고 천황 정부에 눈사태처럼 몰려와 줄을 섰다. 이로써 천황 정부의 정치기반은 일거에 확립되었다. 교토와 오사카의 豪商들도 천황 정부 측에 붙었고, 西일본의 幕領도 접수되어 천황 정부의 재정적 기반도 일응 모양은 갖추게 되었다.
 
  1월7일, 천황 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한 征討令을 발했다. 2월9일에는 총재 다루히도 親王을 東征대총독에, 12일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大總督參謀에 임명했다. 천황 정부軍은 15일 진발했다.   
  한편 에도성으로 도피해 온 요시노부는 항전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를 놓고 고뇌했다. 결국, 대세는 갔다고 보고 退城勤愼(퇴성근신)으로 恭順의 자세를 보였다. 도쿠가와 막부 측에서는 가쓰 가이슈가 全權을 갖고 나와 천황 정부가 요시노부의 항복을 받아들여 관대하게 처리해 줄 것을 탄원했다.   
  하지만 천황 정부는 강경했다. 전승의 세를 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여러 세력이 연합한 천황 정부內에서는 異論를 절충하여 講和로 이끌어갈 지도성이 아직 확립되지 않아 무책임한 강경론이 횡행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야마오카 데츠타로(山岡鐵太郞)라는 막부의 직속무사가 가쓰의 뜻을 받들어 결사의 각오로 준푸(駿府)의 대총독부를 방문, 參謀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요시노부의 眞意를 설명하고 항복조건을 협의했다.   
  드디어 강화교섭이 구체화되었다. 3월15일로 예정된 에도 총공격을 이틀 앞둔 13일, 에도 所在 사쓰마 藩邸에서 개최된 사이고-가쓰 회담에서 에도성의 明渡가 결정됨으로써 에도의 100만 시민들이 戰火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 신뢰관계가 어려운 문제를 풀었던 것이다.   
  4월11일 에도의 開城, 즉 막부의 항복이었다. 요시노부는 미도(水戶)번으로 은퇴했다. 이로써 도쿠가와 막부는 소멸되고, 천황 정부가 일본 유일의 중앙정부가 되었다.   
  
 
舊막부군 잔당을 토벌한 戊辰전쟁  
  에도 開城 후에도 關東의 政情은 안정되지 않았다. 舊도쿠가와 막부군의 일부는 關東 각지로 탈출하여 反정부의 깃발을 올렸다. 요시노부의 항복에 불만이었던 분자들은 에도성의 턱 밑인 우에노(上野)山에다 陣을 치고 「彰義隊」라고 일컬으며 대결자세를 보여 新정부의 권위는 좀처럼 확립되지 않았다.   
  정부의 無策에 대한 비판이 높았다. 軍務官判事 오무라 마쓰지로(大村益次郞: 조슈번 출신)와 대총독부 軍監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佐賀藩 출신)가 진압계획을 세워 5월15일 彰義隊士 2000명이 진을 친 우에노山을 공격했다.   
  사이고가 지휘한 사쓰마 藩軍은 최대의 격전을 치러 정면 黑門口를 탈취했다. 彰義隊도 선전했지만, 사가(佐賀)번의 최신예 암스트롱砲의 맹격을 받아 한나절 만에 궤멸했다.   
  드디어 에도는 평정되어 7월에는 東京으로 개칭되었다. 10월에는 천황이 入城했다. 한편 石高 600만 석의 도쿠가와家는 시즈오카(靜岡) 70만 석에 封해졌다.   
  그러나 아직 北일본의 정세는 험악했다. 정부군의 東北 진군에 대해 陸奧·出羽·越後 등 25개 번의 대표는 1868년 5월, 仙臺藩에 모여 아이즈藩 征討의 중지를 新정부에 요청하면서, 수락하지 않으면 列藩동맹을 맺어 사쓰마·조슈 兩藩과 싸우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정부군은 이들 東北諸藩에 일제공격을 가했다. 越後의 長岡城 및 아이즈(會津)의 若松城은 격렬한 전투 끝에 함락되었지만, 다른 諸藩은 싸우지도 않고 정부군에 항복했다. 이렇게 東北전쟁은 9월에 종료되었다.   
  한편 에도 開城 때 막부군함을 이끌고 탈주했던 舊막부의 해군부총재 에노모토 다키아키 등은 하코다테(箱館)의 요새 五稜郭을 본영으로 삼아 北海道에 독립정권을 수립하고 있었다. 동북전쟁을 끝낸 新정부는 겨울을 지내고 1869년 4월 北海道에 상륙, 격전 끝에 하코다테와 五稜郭을 함락시켰다.
 
  舊막부 세력을 일소한 전쟁을 통틀어 戊辰전쟁이라고 한다. 그 결과 신정부의 전국지배는 거의 완성되었다. 내란 평정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고 있다.   
  1)신정부군에는 農商 출신의 병사가 많이 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여러 전투에 있어 정부 측의 조기 승리에는 민중의 舊영주에의 반항이 큰 원인이었다.   
  3)이 승리에 의해 봉건적인 지배체제는 사실상 붕괴했다.   
  4)內戰의 조기 승리에 의해 英·佛 등에 대해 군사개입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廢藩置縣으로 天皇 정부 권위 확립  
  절묘한 2人3脚으로 사쓰마번을 討幕의 주체세력으로 이끌어 목적을 달성한 사이고와 오쿠보는 신정부의 參與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 후 둘의 활동분야는 달랐다. 사이고는 군사지도자로서 국내 통일전쟁에 대활약했지만, 內戰이 종료되면 世人의 기대와는 달리 고향으로 은퇴해 버렸다. 반면 오쿠보는 이와쿠라 도모미와 협력, 네이션 빌딩에 골몰했다. 그러나 신정부의 앞길은 험란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쿠보(사쓰마번)·기도(조슈번)·이다가키(도사번)·오쿠마 시게노부(肥前藩)가 협의, 제각기의 藩主를 설득하여 토지·인민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했다. 4藩主가 천황에게 版籍奉還(판적봉환)의 建白書를 올리자 다른 번주들도 뒤따라 1869년 6월, 전국적으로 版籍奉還이 이뤄졌다.   
  이것은 藩主가 版圖(土地) 및 戶籍(人民)을 지배하는 領主權을 천황에게 집중시킨다는 것이다. 舊번주에 대해서는 정부(천황)로부터 새롭게 知藩事로 임명됨과 함께 石高에 대신하는 家祿을 지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版籍奉還 후에도 藩의 호칭이 남았고, 藩의 稅收도 藩廳이 관리했다. 藩은 의연히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시책은 번번이 藩의 벽에 부딪혀 전국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1869년 2월 말부터 야마구치(山口)번에서 병사 2000명의 반란사건이 돌발했다. 藩廳은 정부의 원조로 간신히 진압했지만, 반란분자의 잔당은 구루메(久留米)번에 숨어들어 구마모토(熊本)번의 舊존양파와 연결을 가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정부로선 당연히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무엇보다 경계한 것은 反정부운동이 농민폭동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藩을 그대로 두고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젠 蕃을 폐지해야만 했다.   
  신정부가 이런 난제를 풀려면 강한 실천력을 지닌 사이고의 出馬를 재촉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1871년 3월12일, 勅使 이와쿠라 도모미가 오쿠보를 대동하고 가고시마에 가서 사이고에게 上京과 협조를 간청했다. 사이고는 쾌락하고, 스스로 야마구치와 고치(高知)에 가서 두 藩에게 협력을 구했다. 또한 그의 제안으로 가고시마·야마구치·고치의 3藩으로부터 8000명의 군대를 제공받아 御親兵으로 삼았다. 御親兵이란 군사력을 배경으로 중앙집권제를 단행하려 했던 것이다.
 
  1871년 6월25일, 천황은 정부의 參議 및 각 省의 卿(장관) 전원을 일단 해임하고 사이고와 기도, 둘만을 參議로 임명하여 권한을 집중, 발본적 개혁을 수행하는 체제를 정비했다. 廢藩의 단행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7월14일, 천황은 在京 知藩事를 소집, 일방적으로 藩을 폐지하고 縣을 설치할 것을 선언함과 아울러 知藩事 전원의 해임과 東京 거주를 명령했다. 이로써 261개 藩 전부가 일거에 소멸, 領主制의 遺制가 일소되고 정부에 의한 전국 직접 통치가 실현되었다.   
  廢藩 발령의 날, 정부 수뇌가 모인 구수회의에서 諸藩이 반항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었다. 늦게 회의에 출석했던 사이고는 그런 논의들을 듣고 있다가 돌연 큰 소리로 『이 이상 각 藩이 어물거리면 我輩(우리)가 御親兵을 끌고 가서 깨부숴 버리겠다』고 放言했다. 이에 의론이 일순에 정리되었다.   
  난항이 예상되었던 廢藩置縣의 스무드하게 수행된 것은 사이고가 위엄으로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廢藩置縣의 최대 공로자는 사이고였다.   
  
 
竹馬故友를 등지게 한 征韓論爭  
  朝鮮과 日本의 관계는 幕末 이후 중단된 상태에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1868년 對馬島의 宗씨를 통해 조약의 체결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은 高宗의 아버지 興宣大院君이 집권했는데, 洋夷들인 歐美제국과 國交를 맺은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일본은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교섭을 하려 했지만, 조선 정부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선 측의 태도에 대해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교섭에 응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이런 征韓派의 목소리는 일본 국내에 있어 反정부의 움직임을 한반도로 돌리려는 속셈을 깔고 있었다. 요컨대 征韓論은 불평 사무라이 및 농민 봉기의 빈발에 따른 내란의 위기를 회피하려는 대외 강경책이며, 동시에 韓半島를 집어먹음으로써 일본의 국권을 신장시키겠다는 야심의 정책이었다.   
  이런 가운데 메이지 정부는 1871년 정부 수뇌부를 歐美에 파견하여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려 했다. 특명전권대사는 外務卿(외무대신)으로부터 右大臣에 오른 이와쿠라 도모미, 副使는 參議 기도 다카요시·大藏卿 오쿠보 도시미치·工部大輔(공부차관) 이토 히로부미 등으로서 사절단원의 인원은 48명에 달했다.   
  이와쿠라 등의 출국에 의해 일본 정부 내부엔 征韓派에 대한 견제세력이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에토 신페이(江藤新平) 등에 의해 주도된 일본 정부는 朝鮮에 대한 강경방침을 결정했다. 우선, 사이고를 朝鮮에 특명전권대사로서 파견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 일행의 귀국 이후 征韓은 時機尙早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이와쿠라 도모미·오쿠보 도시미치·기도 다카요시 등은 朝鮮 출병보다 국내문제의 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 內治派는 征韓派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 결과, 征韓論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정부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의 주체세력은 완전히 둘로 갈라섰다. 근대화 정책에 반대하는 불평 士族(사무라이)의 요구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사이고·이타가키 중심의 세력과 불평 士族의 반대를 억압해서라도 徵兵令 및 地租 개정과 같은 근대화 정책을 강행해야 한다는 오쿠보·기도 중심의 세력 사이에 벌어진 노선 충돌이었다.   
  
 
사이고의 私學校 설립  
  사이고의 參議·近衛都督職 사표는 수리되었지만, 육군대장의 사임은 인가되지 않았다. 1873년 10월28일, 그는 육군소장 키리노 토시아키(桐野利秋)와 함께 요코하마를 출발, 11월10일 가고시마로 돌아왔다.   
  사이고의 사임과 함께 近衛局長인 육군소장 시노하라 쿠니모토(原國幹) 이하 소좌 別府晉介 등 많은 將士들이 사표를 내고 사이고의 뒤를 따라 歸縣했다. 이 밖에도 관리·警部 등 100여 명이 연명으로 사직했다.   
  辭職 歸縣했던 추종자들에게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에 사이고는 1874년 6월, 私學校를 설립하여 이들의 조직화를 꾀했다. 우선, 옛 역참 터(현재 縣廳 안)에 舊근위보병을 수용하는 銃隊학교, 포병 출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砲隊학교를 만들었다. 銃隊학교는 시노하라, 포대학교는 外遊 후 귀국한 무라타 신하치(村田新八)가 감독을 맡았다. 이런 本校 이외에 시내 여러 곳 및 각 鄕에 分校를 두었다. 생도는 輪番으로 본교에 출석, 군사교육과 漢籍 등의 수업을 받게 했다. 분교의 수는 100개를 넘었는데, 경비는 縣令 오쿠마 츠나요시(大山綱良)의 재량으로 縣廳에서 지급되었다.   
  이 밖에도 현재의 照國神社 경내에 士官 양성을 위한 幼年學校, 시역의 변두리에 吉野寺山에 開墾社(개간사)를 만들었다. 유년학교는 漢學 이외에 洋學을 가르쳤는데, 縣 고용의 외국인 교사도 출강했다. 생도들 중에서 우수한 자는 유럽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사이고 등의 賞典祿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賞典학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개간사에서는 舊교도단 생도를 수용, 原野를 개간해서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학업을 닦게 했다.   
  사이고는 私學校의 특별한 직책을 가지지 않았지만, 사실상의 중심인물이었다. 많은 청년들이 그의 덕망을 흠모하여 입교했다. 사이고는 스스로 사학교 綱領과 戊辰전쟁 전사자를 위한 祭文을 지어 각 학교에 게시했다. 사쓰마번 고유의 정신을 북돋워, 국가비상時에 몸을 던지는 인재를 양성하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단순한 학교라기보다 군사교육 또는 정신수양의 단체로서의 경향이 강했고, 더욱이 정치적 불만을 가진 歸縣했던 사람 중심으로 설립되었다는 사정 때문에 정치결사적 성격이 농후했다.   
  
 
不平 士族의 반란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이 진행됨에 따라 舊무사계급의 특권은 秩祿處分(질록처분: 막부 시대 이래의 家祿과 戊辰전쟁의 功績에 대한 賞典祿을 대폭 삭감)·徵兵令(징병령: 국민개병제 실시)·廢刀令(폐도령: 사무라이에게 칼을 차지 못하게 함) 등으로 잇따라 부정되었다. 그 결과, 신정부에서 자리를 얻지 못한 士族의 다수는 생활이 궁핍하게 되었다. 게다가 征韓派의 패배는 그들에게 기대를 걸었던 불평 士族을 점점 정부로부터 이반케 했다. 이들은 전제적인 오쿠보를 중심으로 추진되는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대해 반대운동을 벌였다.   
  특히 征韓論爭에서 패배하여 參議를 사직하고 고향 사가(佐賀)로 돌아간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는 征韓黨의 수령이 되어 양이론자 島義勇 등 憂國黨의 불평 士族과 함께 1874년 7월 거병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오쿠보가 선두에 서서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에토는 사형에 처해졌다(佐賀의 亂).
 
  구마모토(熊本)의 반동적인 불평 士族들도 神風連이라는 복고적·양이주의적 조직을 만들어 1876년 폐도령 공포에 격분하여 거병했지만, 구마모토 鎭臺兵에 의해 진압되었다(神風連의 亂). 또한 국권확장을 주장하는 후쿠오카(福岡)현의 舊 秋月藩士도 거병했지만, 이것 역시 실패로 끝났다. 한편 동년인 1876년, 옛 조슈 討幕派의 지도자였던 前 參議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도 향리 야마구치현에서 불평 士族을 조직해 하기(萩)에서 거병했지만 근대적 장비를 갖춘 정부의 상비군에게 진압되었다. 이런 인근 지역의 반란에 가고시마의 士族도 동요했지만 사이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사쓰마 士族의 다수는 征韓論을 통해 이미 反정부적이었고, 가고시마현은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地租개정 및 징병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조슈派의 參議 기도 다카요시는 가고시마현을 半독립국 같다고 비난했다.   
  정부는 「가고시마 不穩」의 정보에 大警視(대경시) 川路二良을 비롯한 警部 등 20명을 가고시마에 급파하여 私學校의 동향에 대한 내사를 벌였다. 드디어 1877년 1월 말, 미쓰비시汽船을 파견하여 가고시마에 있는 육·해군의 탄약·병기 등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다.   
  
 
西南戰爭의 폭발   
 
  이에 흥분한 私學校 생도들이 1월29일부터 2월2일에 걸쳐서 정부의 탄약고를 습격, 탄약 등을 약탈했다. 그때 사이고는 오스기(大隅) 방면에서 수렵 여행 중이었다.   
  때마침 私學校 측에 억류된 警視廳組의 1인이 가고시마에 파견된 목적을 「사이고 암살」이라고 자백함으로써 私學敎徒들은 격분했다. 이후 私學校 측은 警視廳組 등을 「정부의 스파이」라고 주장, 잇달아 체포했다.   
  사이고를 정점으로 하는 私學校軍 1만3000명은 보병 5대대, 포병 2대 및 前衛 2대대로 편제, 15일부터 17일에 걸쳐 북상했다.
 
  사이고의 암살을 오쿠보·川路가 명했다는 사학교 측의 주장은 지금도 그 진위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이고 암살 기도」라는 개인적 색채가 강한 문제를 擧兵의 최대 이유로 내걸었다는 점에서 擧兵 목적의 왜소화된 감이 없지 않았다.   
  한편 정부는 일시 海軍大輔(해군차관) 중장 川村純義를 가고시마에 파견하여 사이고와 면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2월19일 征討令을 발했다. 타루히도 親王이 征討總督, 陸軍卿 육군중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川村純義가 參軍에 임명되었다. 정토 본영은 후쿠오카에 설치되었다.   
  오쿠보는 처음엔 사이고의 반란 가담을 믿지 않고 사이고와 私學校黨을 구분하면서 私學校黨 박멸의 호기로 보고 있었다.
 
  사쓰마軍의 대거 北上을 맞아 구마모토 鎭臺사령장관 타니 칸조(谷干城) 소장은 징병령에 의해 이제 막 신설된 농민 출신 鎭臺兵으로선 歷戰의 사쓰마 士族軍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 농성을 하면서 원군의 도착을 기다리는 작전을 세웠다.   
  사쓰마의 全軍은 20일 구마모토에 진입, 그 主力이 구마모토城을 포위, 2주야에 걸쳐 맹공을 가했다. 구마모토城은 4000여 명의 鎭臺兵이 지켰지만,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천하의 名城이었던 만큼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다니 少將은 小倉 제14연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소좌에게 來援을 명해 그 부대 일부가 19일 구마모토城에 입성했지만, 노기의 本隊는 입성하지 못했다. 후일 러일전쟁 때 요동반도의 旅順요새를 함락시킨 노기는 이때 패주하면서 軍旗까지 빼앗겨 팽생의 부끄러움이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최후

   구마모토城 공략의 어려움을 감지한 사쓰마軍은 일부 병력으로 성을 포위한 채 主力은 南下하는 정부軍을 迎擊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사쓰마軍 주력은 3道로 북진, 2월25일 高瀨 점령을 시도했지만, 병력·군수의 결핍으로 실패했다. 이날 사이고는 官位를 삭탈당했다.
 
  정부軍은 구마모토城 구원이 戰局의 대세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고 田原고개 돌파에 전력을 기울였다. 田原은 천연의 요새로서 여기에 용맹한 사쓰마軍이 들어가 있어 공략은 쉽지 않았다. 정부軍은 우선 3월3일과 4일, 田原의 남방 吉次고개에 맹공을 가했지만, 돌파하지 못했다. 정부軍 사상자는 300명이 넘었고, 사쓰마軍에서도 시노하라 쿠니모토가 전사했다.   
  정부軍은 6일 이후 吉次 방면에선 수비만 하고 田原 공격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후 10일간 처절한 전투가 거듭되었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사쓰마軍에서는 得意의 拔刀隊가 종횡으로 활약, 정부軍의 인명피해는 1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사쓰마軍도 탄약이 부족, 돌을 탄환 대신 사용하는 형편으로 2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정부軍은 3월20일 이른 아침, 큰비가 내리는 가운데 不意의 총공격을 감행, 드디어 田原坂을 함락시켰다. 정부軍의 사상자 3000명, 탄환도 1일 평균 21만 발을 소모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구마모토城과의 연락을 취할 수 없어 초조했던 정부軍은 사쓰마軍의 背面을 찌르는 작전을 수립했다. 3월1일부터 나가사키(長崎)의 부대를 규슈의 중부 해안지역인 日奈口·八代 방면에 상륙시켜 여기서부터 구마모토로 북진시켰다. 參軍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가 이끈 背面軍은 도중 각지에서 사쓰마軍과 전투를 벌이면서 4월14일 구마모토에 도착, 15일 入城했다.
 
  정부 背面軍의 구마모토 입성에 따라 등 뒤에 적을 맞게 된 사쓰마軍은 木山 방면으로 철퇴했다. 그러나 木山도 4월21일 함락되면서 구마모토 남부의 仁吉로 후퇴했다.   
  한편 사쓰마軍의 병참기지 가고시마의 점령을 노린 정부軍은 4월27일 다무라 參軍의 통솔 아래 海路로 남진,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縣廳 수뇌부를 체포하고 가고시마의 방비를 굳혔다.   
  가고시마를 점령한 정부軍은 大隅·日向 2州의 사쓰마軍을 서쪽으로부터 압박하는 형세였다. 사쓰마軍은 후퇴를 거듭, 宮崎·延岡 등지를 전전하다가 長井村에 이르렀지만 정부軍에 포위되었다. 사이고는 휘하 諸隊에 대해 향후의 진퇴를 자유에 맡겼다.   
  사이고는 본대와 함께 長井村 배후의 可愛岳(표고 728m)의 절벽단애를 넘어 三田井 방면으로 탈출했다. 사쓰마軍은 규슈 곳곳을 전전하다가 출전 199일 만인 9월1일, 정부軍에게 점령당한 가고시마로 돌입하여 한때 米倉(現 가고시마 시청)을 제외한 가고시마 시가를 제압했다.   
  사쓰마軍은, 9월2일부터 3일에 걸쳐 정부軍이 陣을 친 米倉 공방전을 전개했지만, 증강된 정부軍을 밀어내지 못하고 이후 私學敎와 城山을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이에 대해 정부軍은 8개 여단을 가고시마에 집결시켜 400여 명의 사쓰마軍이 방어하는 城山을 완전 포위했다.   
  정부軍은 1877년 9월24일 오전 4시, 총공격을 개시했다. 사이고는 유탄에 맞고 쓰러져 심복 別府晉介의 가이사쿠(介錯: 割腹한 사무라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쳐 줌)로 51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西南전쟁에 동원된 사쓰마軍의 총병력은 출진 당초의 1만3000명에다 그 후의 징모 등에 의해 3만3000명에 달했다. 이에 비해 정부軍은 2배에 가까운 6만 명. 장비에 있어서도 사쓰마軍은 질·양 모두 정부軍에 비해 열등했고, 장비보충도 되지 않았다.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日向에서 西鄕札, 즉 軍票를 발행하기도 했다.
 
  1878년 5월1일 아침, 후쿠시마 현령 야마요시 모리노리(山吉盛典)는 출근 전의 參議 겸 內務卿 오쿠보 도시미치를 방문했다. 縣勢의 보고를 마친 야마요시는 돌아가려고 했는데 오쿠보가 그를 불러세워, 『메이지 유신을 완성시키는 데에는 30년이 걸릴 것이다. 메이지 元年으로부터 10년까지의 제1기는 창업기로서 兵事가 많았다. 20년까지의 제2기는 가장 중요하여 內治를 정비하고 民産을 증식시키는 시기이기 때문에 不肖 토시미치는 전력을 기울일 心算이다. 이후 제3기는 後進 諸君에 맡기고 싶다』라고 말했다.   
  
 
오쿠보의 被殺  
  그러나 그 제2기의 출발 초기에 오쿠보는 不意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오쿠보가 마차를 타고 출근하려고 하는 순간 늦둥이 딸인 芳子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그치지 않았다. 이에 오쿠보가 芳子를 마차에 태워 현관 앞을 한 바퀴 돌고서야 芳子는 울음을 그쳤다. 그 직후에 오쿠보는 암살되었다.   
  오전 8시경, 오쿠보의 마차는 紀尾井 오르막길을 접어들었는데, 길가에 있던 書生風의 남자 둘이 갑자기 달려들어 칼로 말의 앞다리를 베었다. 마차가 급정거하자 숨어 있던 다른 남자 넷이 저마다 손에 단도를 들고 마차로 돌진했다. 마차 안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오쿠보는 급히 좌측 문으로 나오려다 자객과 마주치자 「無禮者」라고 일갈했지만, 미간을 베였다. 자객은 오쿠보를 마차로부터 끌어내려 난자했다.   
  이렇게 오쿠보는 4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오쿠마 시게노부·이노우에 가오루 등 다른 維新의 원훈들이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던 때에 오쿠보는 여전히 관저에서 생활했다. 그의 死後에는 8000엔이라는 빚만 남아 있었다.
 
  필자는 10년 전인 1983년, 오쿠보의 피살현장 가까이에 위치한 오쿠라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오쿠라 호텔은 도쿄의 최고급 호텔로서 주위에 인적이 드물어 매우 조용한데, 가까이에 일본 총리 공관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의 총리 공관이 오쿠보가 출근하려 했던 당시의 赤坂(아카사카) 假御所였다. 
   하수인은 이시카와(石川)현 士族 시마타 이치로(島田一良) 등 6명이었다. 그들은 가고시마 私學校派에 공감, 西南전쟁에 호응하여 거병을 기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쿠보 암살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들의 斬奸狀(참간장)에는 「公議를 두절하고, 민권을 억압하고, 이로써 政事를 사사로이 했다」, 「有司專制의 폐해를 고치기 위해 「奸魁(간괴)를 참한다」고 쓰여 있었다. 범행 후 제 발로 자수했던 그들은 동년 7월 모두 참형에 처해졌다.   
  한편 사이고·오쿠보와 더불어 「維新3傑」의 1인으로 회자되는 조슈번 출신 參議 기도 다카요시는 오쿠보보다 1년 전에 44세를 일기로 病死했다. 기도의 死後, 조슈파의 정치기반은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다 아리토모가 이어받았다. 일찍이 松下村塾에서 同門修學한 두 사람은 메이지 정부 제2기를 주도하게 된다.   
  
 
사이고와 오쿠보의 차이점  
  메이지 유신 이후 사쓰마-조슈 人脈 중심의 藩閥정치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번벌정치의 반대 방향을 걸었던 사람이 오쿠보였다. 人材양성을 제일 중시한 그는 행정조직도 그 중심은 人間이라고 보고 번벌 등에 구애됨이 없이 널리 適材適所의 人材를 구했다.   
  조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도 『오쿠보는 누구의 계통인가 또는 어느 藩 출신인가를 전혀 문제로 삼지 않고 有能有益한 인물만을 등용했다』고 상찬했다. 이 때문에 의욕적인 인물들이 오쿠보의 밑에 몰려들었다.
 
  일본 사회에서는 「담력의 사이고, 지혜의 오쿠보」라든가 「사이고는 영웅, 오쿠보는 정치가」 등으로 두 사람을 비교한다. 대중적 인기 면에서 오쿠보는 물론 사이고에 미치지 못하지만, 智略 및 人事에 관한 한 오쿠보의 識見은 탁월한 바 있었다. 일본의 여론조사 같은 데서 近代 일본 최고의 인물로 손꼽히는 사이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매우 신랄한 평가도 있다.   
  『가고시마 있는 것은 알고 일본 제국 있는 것은 몰랐고, 사쓰마 武士 있는 것은 알고 海陸의 官軍 있는 것은 잊었다』   
  西南전쟁과 관련, 사이고에 대한 비판이다. 擧兵, 그것이 그의 주위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어쩔 수 없이 끌려들었다고 할지라도 征韓論 등에서 보인 사이고의 사고방식은 始終 사쓰마 士族 옹호에 기반하고 있었다. 반면 오쿠보는 그 對極點에 서서 국가이익을 먼저 생각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사이고에 대한 메이지 천황의 애정은 변함 없었다. 당시 東京제국대학 교수로서 궁중 사정에 정통했던 그리피스 교수는 『메이지 천황이 사이고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만세 부르는 것까지 금지했기 때문에 (西南전쟁의) 개선군대가 쓸쓸함에 휩싸여 몹시 삼가는 모습으로 東京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개선군대는 古今東西에 유례가 없다』라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해 늦가을 메이지는 황후·女官들과 함께 사이고를 추도하는 歌會를 열었다. 이때 천황은 『사이고의 罪過는 모르는 체하고 詩作을 하라. 이번 暴擧만을 논하면 維新의 大功을 덮는 것이 되니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왜 메이지 천황은 이미 「朝敵」으로 규정되어 戰死한 사이고에게 그처럼 연연했던 것일까. 그것은 『메이지 천황이 사이고에 의해 武士化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16세에 즉위했던 무렵만 하더라도 어쭙잖은 일로 졸도하는 등 유약한 모습을 보였던 메이지 천황도 어느덧 강인한 專制君主로 변모했는데, 그것은 「典型的 사무라이」 사이고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死後 12년 만에 사이고는 赦免令에 의해 명예를 회복했다. 陸軍大將 사이고 다카모리에게는 正3位의 官位가 追贈되었다.●

  

◆ 義慈王의 아들이 定着한 미야자키縣의 百濟마을
미야자키縣 東우스키郡 南鄕村(난고손) 百濟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2월 중순의 2박3일간 倭國에 망명한 百濟王族들의 넋을 위로하는 사와스마츠리(師走祭)가 펼쳐진다. 이 마을의 전설에 의하면 師走祭가 열리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서기 660년 羅唐연합군에게 百濟가 멸망하자 王族들은 대거 倭國의 수도권인 近畿지역으로 망명했는데, 그중에 義慈王의 아들로서 일본에서 禎嘉王이라 불린 인물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百濟系 도래인이 탄압을 받게 되는 정변(壬申의 亂으로 추정됨)의 발발로 禎嘉王 가족 일행은 배 2척에 분승하여 하카타(博多) 방면으로 도주했는데, 大風을 만나 표류하다가 규슈 동해안에 상륙하여 南鄕忖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다른 배를 탄 아들(福智王)의 상륙장소가 아버지 禎嘉王의 상륙 장소로부터 90km 떨어진 木城町이라는 곳이어서 父子는 헤어져 살게 되었다. 師走祭는 1년에 한 번 禎嘉王 부자가 재회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축제이다』

百濟마을에는 禎嘉王을 모시는 神門(미카도)神社가 보존되어 있다. 서기 718년에 건립된 것인데, 일본의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수년 전 이 神社의 지붕을 보수하다가 百濟 양식의 銅鏡 24점을 발굴했다. 이것들 중 몇 개는 일본황실의 보물창고인 正倉院(奈良市 東大寺 소재)에 보관 중인 銅鏡과 동일한 양식과 수준이다.
이런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백제마을에는 奈良(나라)의 正倉院과 한치의 차이도 없는 「西정창원」이 건립되어 있다. 또 扶餘의 왕궁 터에 세워진 客舍를 모델로 한 「百濟의 館」은 한국인 기술자가 한국의 建材를 사용하여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백제문화를 소개하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런 백제마을을 조성하는 데 18억 엔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日本 속의 百濟마을을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인 사람은 남향촌의 前 촌장이라고 한다. 필자가 백제마을을 찾아갔을 때 그는 경내 연못의 붕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이 마을을 찾는 한국인들을 안내하기 위하여 駐韓일본대사관이 뽑아서 보낸 韓國 여성 「미스 朴」은 남향촌과 자매결연을 한 부여 군청 파견 직원이다. 그녀는 『前 촌장님은 평소 「나는 百濟의 후손이다」라고 하는 분』이라고 소개했다. 필자는 口傳되어 온 전설 하나로 미야자키縣 관계자와 남향촌 주민들을 설득, 「百濟마을」을 재현한 그의 추진력에 敬意를 표했다.

필자는 구마모토 방면에서 阿蘇山의 고지대 등지를 관통하여 南鄕村의 百濟마을로 들어왔지만, 훨씬 쉬운 길이 있다. 仁川국제공항에서 미야자키(宮崎) 국제공항까지 여객기로 90분, 이후 자동차로 미야자키에서 휴가(日向)시까지 60분, 휴가에서 백제마을까지 50분이 걸린다.

◆ 征韓派와 內治派
征韓논쟁에 패해 정부에서 물러난 征韓派는 西鄕隆盛·板垣退助·後藤象一郞·江藤新平·副島種臣(이상 參議)을 비롯 사이고 直系의 사쓰마 출신 士官(桐野利秋·시노하라 등) 및 板垣 계열의 도사번(지금의 高知) 출신 士官들이 많았다.
이들의 征韓論은 대륙침략의 제1보인 韓半島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몰락해 가는 士族을 내란으로 몰지 않고 대외전쟁에 돌림으로써 그들에게 活路를 열어 주려는 것이었다.

征韓派가 군인파였던 데 비해 內治派는 관료파였다. 岩倉具視, 大久保利通, 木戶孝允, 大木喬任, 大常重信(이상 參議) 이외에 伊藤博文·黑田淸隆 등이다. 太政大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있었던 三條實美는 최후까지 兩論 사이에서 헤매는 모습이었다.
內治派도 물론 征韓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朝鮮 침략을 실행하기 위해서라도 독재적인 중앙집권적 관료정부를 확립, 군대·경찰을 강화하고, 산업을 진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歐美제국을 직접 시찰하면서 받은 강렬한 감명이 征韓派의 사무라이적 사고방식을 배제시킨 것이다.

◆ 加藤淸正이 쌓은 名城―구마모토城
구마모토城은 일본의 3大 名城 중 하나다. 이 성은 築城의 名人으로 이름난 武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1601년부터 7년간에 걸쳐 쌓았다. 성곽의 넓이는 98만㎡이며, 둘레는 약 9km에 달하는 웅대한 요새이다. 구마모토城의 축성은 규슈 남방의 雄藩 사쓰마의 北上을 저지하기 위한 도쿠가와 幕府의 뜻을 가토가 실현한 것으로 보인다.
가토家의 구마모토 통치는 2代 44년밖에 계속되지 못했다. 기요마사의 아들이 막부에 의해 藩主의 지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 직후 호소카와 타다도시(細川忠利)가 藩主가 된 이래 호소카와家가 11代 239년간 이곳을 통치했다.

구마모토城의 우수성은 1877년 西南전쟁 때 입증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쓰마군이 구마모토城을 공격했지만 고립무원의 수비군은 50여 일간 농성하여 완강하게 버텼다. 이때 天守閣 등 많은 木造 시설물들이 불타 1960년 구마모토市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러나 돌
담 등은 健在하여 그 압도적인 곡선미를 자랑하고 있다. 天守閣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는데, 이곳엔 가토 기요마사가 썼던 투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joba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