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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상신록을 보유할수있는 문중은 우리나라에서 경주이씨[백사공계]밖에 없다

청원1 2006. 5. 15. 20:21









동양사상의 깊이만 놓고 이야기한다면 서양철학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유교의 ‘주역’, 불교의 ‘능엄경’, 도교의 ‘도덕경’을 틈틈이 읽어 보라.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보다 깊이가 없는가! 헤겔이나 칸트보다 못한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헤겔보다 ‘주역’이, 칸트보다 ‘능엄경’이 훨씬 감칠맛이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사상의 깊이나 넓이에서는 동양이 서양보다 분명 밀리지 않지만 사회 제도라는 측면으로 들어가면 상황이 다르다. 동양이 서양을 한참 배워야 한다. 서구 시민사회가 구축해 놓은 사회 시스템은 동양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시아 국가가 서구에 밀리는 사회 시스템을 하나 예로 든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닌가 싶다. ‘지도층의 솔선수범’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앞장섰다. 피를 보는 일은 귀족계급이 담당하였다. 그게 카리스마다. 그러니 평민들이 귀족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 귀족들이 보여주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역대 서구사회의 지도층을 관통하는 핵심적 윤리로 자리잡아 왔던 것 같다. 근세의 영국도 마찬가지다.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인 이튼스쿨. 2차 대전 당시 이튼스쿨의 한 학급 출신 전원이 전쟁터에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말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튼스쿨이 누리는 권위는 입학 성적에서 기인한하는 것이 아니라 졸업생들이 가슴에 품었던 사회적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1980년대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 때도 그랬다.

아르헨티나가 보유하였던 엑조세 미사일은 전파교란이 통하지 않는 첨단무기여서 영국 군함에 치명적인 무기였다. 수면 위에 바짝 붙어 저공으로 날아 오는 엑조세 미사일의 방향을 교란시키기 위해서는 헬기 조종사가 목숨을 걸고 교란작업을 담당해야 했다. 영국군 헬기 조종사가 직접 미사일의 진행 방향에 쇳가루를 뿌려 미사일이 군함으로 가지 않고 위로 솟구치도록 유인하는 방법뿐이었는데, 이 위험한 일을 왕실의 에드워드 왕자가 직접 담당하였다고 한다.

여차하면 미사일이 헬기를 명중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일반 사병이 아닌 왕자가 직접 해군 헬기를 조종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영국이라는 사회다. 오죽했으면 영국 신문에서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걱정스러운 표정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여왕도 어머니다’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을까. 영국 귀족의 권위는 이런 데서 나온다.

이런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한국사회에는 이런 것이 없는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영국 사람들만 젠틀맨이고, 한국에는 사람도 없었다는 말인가! 한국사람들은 모조리 졸장부, 소인배들만 있었는가. 한국이라고 이런 경륜이 전혀 없었겠는가. 전통 명문가의 여러 집안들은 각각 한국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어느 형태로든 실천한 집안들이다.

그 중에서 이채로운 집안이 서울에서 살았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집안이라고 생각된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고 일컬어지던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냥 망명한 것이 아니라 전 재산을 판 돈을 가지고 가서 만주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敎)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를 이끌었던 것이다.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인 청산리 전투의 정예요원들은 우당 집안이 내놓은 전 재산을 기반으로 해서 길러진 인재들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우당 집안이야말로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꼽을 수 있는 집안이었음이 근래에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우당 집안의 정신적 배경은 무엇인가. 이 집안의 밑바탕에 흐르는 가풍은 무엇인가. 한번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 내로라 하는 집안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우당 집안은 세간에서 ‘삼한갑족’이라고 일컬어졌다. 조선의 경반(京班:서울에 거주하는 양반)과 향반(鄕班:시골에 거주하는 양반)을 통틀어 최고 명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집안이다. 명문 중에서도 명문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간단하게 그 이유를 말한다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 이래 10명의 재상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9명의 영의정(4명의 贈領議政 포함)과 1명의 좌의정이 바로 그들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때 우당의 동생인 성재 이시영이 부통령을 지냈으니 성재까지 영의정급에 포함시키면 도합 11명의 재상급 인물이 한 집안에서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당 집안은 실로 재상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경주(慶州) 이씨(李氏) 백사공파(白沙公派)인 우당 집안에는‘상신록’(相臣錄)이라고 하는 독특한 이름의 책자가 있다. 한국의 다른 집안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문건이다. 이 집안 후손들 가운데 재상을 지낸 사람들의 행장만 모아 놓은 책이다. ‘상신록’이라는 이름의 책자를 만들 수 있는 자격은 그 집안에서 재상을 10명 이상 배출시켜야만 한다. 10명 미만은 만들 수 없다고 한다.

한 집안에서 재상이 1~2명만 나와도 대단한 영광인데 10명이나 나왔으니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상신록을 보유할 수 있는 집안은 우리나라에서 경주 이씨 백사공파가 유일하다는 이야기를 필자는 이 집안 종친회장으로부터 들은 바 있다.

조선시대의 재상은 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니다. 학식과 인품을 검증받아야 갈 수 있는 자리가 재상 자리다. 조선시대 중급 관리까지는 연줄 따라서 또는 뇌물을 주면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재상 자리는 연줄이나 돈으로 어영부영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고 보인다. 한 마디로 학식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 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백사가 살았던 집터는 현재 서울 종로구 필운동의 배화여고 부근에 있다. 이항복이 권 율 장군의 사위가 되어 집터를 물려받았으니 권 율 장군의 집도 이 근방에 있었던 듯싶다. 현재 집터에는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고, 옛날 사용하던 한옥 대문과 정자 등 일부분이 남아 있다. 참고로 ‘필운’(弼雲)은 이항복의 또 다른 호다.

필운동은 이항복의 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배화여고 교정 뒤편에 가면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 절벽이 있다. 이항복이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산책하다 이곳에 머무르면서 서울시내를 바라보던 곳이라고 한다. 간송미술관에는 겸재 정선이 그린 ‘필운대’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겸재의 그림에도 등장할 만큼 필운대는 당시 서울 사람들에게 알려진 명소였던 모양이다. 남의 집안 족보라서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는 감이 있지만, 워낙 특이한 집안이니 이들 10명의 생몰 연대를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백사 이항복. 명종11년~광해 10년, 고려의 대학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방손이며 참찬공 몽양(夢亮)의 아들.
구천(龜川) 이세필(李世弼·1642~1718). 인조 20년~숙종 44년, 백사의 회손(會孫)이며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 증영의정.
양와(養窩) 이세구(李世龜·1646~1700), 인조 24년~숙종 26년, 항복의 회손이며 목사 시현(時顯)의 아들, 증영의정.
아곡(鵝谷) 이태좌(李台佐·1660~1739), 현종 1년~영조 15년, 항복의 5세손이며 영의정 세필(世弼)의 아들.
입향(立鄕) 이종악(李宗岳·1668~1732), 현종 9년~영조 8년, 항복의 5세손이며 좌찬성 오릉군 문우(鰲陵君 文佑)의 아들, 증영의정.
운곡(雲谷) 이광좌(李光佐·1674~1740), 현종 15년~영조 16년, 항복의 5세손이며 장령 세구(世龜)의 아들.
오천(梧川) 이종성(李宗城·1692~1759), 숙종 18년~영조 35년, 항복의 6세손이며 영의정 태좌(台佐)의 아들.
청헌(廳軒) 이경일(李敬一·1734~1820), 영조 10년~순조 20년, 항복의 6세손이며 도사 종악(宗岳)의 아들, 좌의정.
동천(桐川) 이계조(李啓朝·1793~1856), 정조 17년~철종 7년, 항복의 7세손이며 이조판서 석규(錫奎)의 아들, 증영의정.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88), 순조 14년~고종 25년, 항복의 10세손이며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

백사 이항복의 처신과 판단

이상은 백사 이항복 이래 배출된 10명의 재상 프로필이다. 이 사실은 이 집안 사람들에게 어떻게 작용하였을까. 한편으로는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이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아니었을까. 긍지와 책임감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같이 다니는 법이다.

책임감 없는 긍지는 허황된 자기과시로 흘러버릴 수 있다. 긍지와 자부심은 그렇다치고 사명감과 책임감은 후손들에게 어떻게 작용하였을까. ‘재상의 집안’이 지니는 사명감은 ‘재상의 집안에 걸맞은 처신을 해야 한다’로 이어졌을 것 같다. 노블레스 집안이 행해야 할 처신의 전형을 이 집안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백사 이항복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 명문가는 그 집안의 중시조가 보여주었던 판단의 유형이 후손들에게 가풍으로 유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대목을 유의해 보아야 한다. 문건으로 남겨 가풍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상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해 보여 주었던 행동 유형들이 후손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그 집안의 가풍을 형성하는 핵심 위치에 이러한 일화들이 자리잡고 있다. 백사 집안도 마찬가지다. 집안에 전승되는 일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조 13년 백사는 과거에 급제하여 공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백사가 도승지(비서실장)로 있던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어 가는 형국이었다. 임금이 불가피하게 피난길에 오를 때 신하들이 모두 도망하여 궁궐에는 몇 사람 남지 않았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칠흑 같은 밤에 임금이 궁궐을 떠나 피난길에 나서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임금을 수행하는 신하가 없었다. 잘못하면 임금 혼자 비를 맞으면서 밤길을 떠나야 하는 처참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때 임금의 어가를 앞장서서 이끌고 간 인물이 백사다. 피난 행렬이 임진강에 이르렀다. 비가 쏟아붓는 캄캄한 밤에 어떻게 강을 건널 것인가. 다행히 이러한 사태를 미리 예견한 율곡이 기둥에 기름을 발라 정자를 세워 두었고, 이 정자를 불태워 그 빛으로 무사히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었다.

임진강을 건넌 이후에는 임금의 피난 방향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분분하였다. 동북방(함경도)과 서북방(평안도)으로 가자는 의견으로 양분되었다. 신하들은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로 갈 것을 고집하였으나, 백사는 평안도로 가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였다. “우리나라는 원래 약한 나라입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데 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남은 계책은 중국의 힘을 빌려 다시 권토중래하는 길입니다”라고 밤새 진언하였다고 전해진다.

어가는 이미 함경도쪽으로 가기로 정해져 있었지만 백사가 잠을 자지 않고 밤새 임금을 설득하여 방향을 돌리도록 했던 것이다. 그 설득으로 인하여 임금은 서북방인 평안도로 정했고, 그 대신 왕자들은 동북방인 함경도로 가기로 하였다. 동북방을 고집하여 함경도로 갔던 일행은 중도에 왜군에게 포로가 되는 봉변을 당해야만 하였다.

선조가 동북방으로 갔더라면 역시 왜군의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임금이 포로가 되었더라면 이후의 전쟁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백사의 판단이 예리하게 적중하였음을 알려주는 일화다.

또 한 번의 갈림길이 의주에서 발생했다. 왜군이 계속 북상한다는 정보를 듣고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이때 백사는 임금이 못 건너도록 적극 만류했다. 임금이 그래도 나라 안에 머무른다는 사실이 바로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영호남 3도에 특사를 보내 임금이 요동(만주)으로 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싸운다’는 칙명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항복과 이여송의 외교담판

이 소문이 퍼지자 국민들이 모두 분기하기 시작하였다. 의병을 조직하고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드디어 왜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한편 명나라는 조선이 원병을 청한 이유를 확인하고자 특사인 황응사(黃應賜)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해도 좀처럼 그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백사는 과거 조선의 사신이 휴대하고 온 왜서(倭書)에서 ‘조선과 함께 명나라로 쳐들어가자’는 제안이 있음을 그에게 내보였다. 이를 보고 나서야 명나라는 왜군의 의도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원군을 보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명나라의 원군이 참전하여 왜군을 무찌르고 서울 인근까지 당도하였으나 갑자기 명군이 왜군과 더 이상 싸우지 않고 강화하려 했다. 백사는 강화하는 데 시간을 끌면 결과적으로 서울 탈환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 배경을 명의 장수 이여송에게 역설하여 드디어 서울로 진격하였고, 백사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병조판서(국방장관)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백사가 이여송을 만나 담판했던 데 대해서는 여러 후일담이 전해진다. 조선으로서는 다급하게 구원을 요청하는 상황이었고, 명나라쪽에서는 되도록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담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보아서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외교적 과제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여송과 조선 사신들 사이에 이루어졌던 담판에 관해 3남의 여러 식자층 집안에는 공통적으로 이 담판 과정에 대하여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다. 필자가 하회마을에 가서 류성룡 집안을 취재하는 과정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왔고, 호남의 고경명 집안, 충청도의 노론 계통 후손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약간씩 다르지만 대동소이하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야사들을 간추리면 이렇다.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 이 야사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간접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북핵 문제를 앞두고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지금의 한반도 상황과도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더욱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그 야사는 이렇다.

이여송은 압록강을 건너오려고 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해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는 의도였다. 즉, ‘조선에 인물이 있어야 나도 참여한다. 승산이 있어야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이 이여송의 태도였다.

조선측에서는 이여송을 설득하기 위해 드림팀을 구성하였다. 각 분야 전문가들을 모아 중국측에 보냈던 것이다. 이때 선발된 드림팀이 차천로(車天輅·1556~1615) 한석봉(韓石峰·1543~1605) 이항복(李恒福·1556~1618) 류성룡(柳成龍·1542~1607) 4명이었다고 한다. 당대의 인물들이었다. 차천로는 얼굴은 지독히 못생겼지만 시는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시인이었다.

차천로는 평소 습관대로 낮에는 술만 먹다 밤이 깊어 흥이 오르자 드디어 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이 시를 옆에 있던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받아 적었다. 조선 최고의 명필이 썼으니 얼마나 잘 썼겠는가. 한석봉이 종이에 받아 적어 놓은 시를 이여송에게 전달하는 책임은 백사가 맡았다. 백사가 이 일을 맡은 이유는 ‘좌전’에 정통했기 때문이다.

‘좌전’은 임시변통, 즉 외교적 수사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어서, 평소 이 책을 깊이 연구했던 백사가 돌발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적임자로 선발되었던 것이다. 백사가 시를 가지고 이여송을 만나 밥을 먹는데 갑자기 ‘소상반죽 저분(젓가락)이 아니면 먹지 않겠다’고 버텼다. 소상반죽이란 눈물자국 같은 무늬가 박혀 있는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말한다.

중국 요(堯) 임금은 지방을 시찰하다 소상강에 빠져 죽었다. 요 임금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요 임금의 뒤를 이은 순 임금이 이 딸 둘을 데리고 살아 순 임금에게는 황후가 둘이었다. 이 딸 둘이 아버지가 빠져 죽은 소상강 위의 대나무에 눈물을 뿌렸는데, 그 눈물자국이 어린 대나무를 가지고 만든 젓가락을 소상반죽이라고 하였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젓가락 가운데 최고의 명품이 소상강의 대나무로 만든 소상반죽이었던 셈이다. 난데없이 이여송이 소상반죽을 요구하니 당황할 수밖에. 이때 옆에 있던 류성룡이 품에 지니고 있던 소상반죽을 꺼내 내놓았다고 한다. 류성룡의 형님이었던 류겸암은 예지력이 있던 이인(異人)이었는데, 이여송을 만나러 가는 동생에게 미리 소상반죽을 주었다는 것이다.

겸암은 평소 천장에 소상반죽 젓가락을 만들어 매달아 놓았다. 동생인 서애가 접빈사로 가게 되자 바로 이 천장에 있던 젓가락을 동생에게 주었다. 서애가 “왜 별 필요도 없는 젓가락을 다 줍니까” 하고 투덜거렸는데, 이여송이 느닷없이 소상반죽을 요구하자 품에 지니고 있던 젓가락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여송이 조선의 드림팀 4명의 합작 과정을 보면서 조선에도 인물이 있구나, 이런 인물들이 있다면 전쟁을 해도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참전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다. 국난을 당해 평소 성향이 달랐던 4명의 인재가 성공적으로 연합하였고, 이 연합으로 인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메시지다.

모든 기득권 포기한 우당 이회영의 義氣

이상을 정리해 보면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해 백사가 보여주었던 나라 사랑과 위기의 상황에서도 냉철하게 내렸던 판단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백사 후손들에게 대대로 이어졌다. 국난을 당하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고나 할까.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피신하려고 할 때 소맷자락을 붙잡고 “전하가 이 나라를 떠나면 아니 된다”고 만류하였던 그 정신이다. 10명의 재상을 배출한 집안이 지니고 있던 가풍의 본질은 여기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자들은 할아버지 무릎에서 놀기 시작할 때부터 이런 일화들을 듣고 성장할 수밖에 없다.

‘장판에 때 묻히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가풍이라는 것은 일조일석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듣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울 수 있었던 정신적 배경에는 10대 재상 집안이라는 가풍이 뒷받침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백사의 10세 후손인 이유승(李裕承)은 고종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에게는 6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있었다.

첫째아들은 이건영(李健榮·1853~1940),
둘째 이철영(李石榮·1855~1934),
셋째 이석영(李哲榮·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1867~1932),
다섯째 이시영(李始榮·1869~1953),
여섯째 이호영(李頀榮·1875~1933)이었다. 당시 이들이 살았던 집은 서울 명례방(明禮坊) 저동(苧洞) 일대였다.

현장답사 결과 YWCA 건물과 뒤편의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의 앞부분 일대가 바로 그 집터로 확인되었다. 명동성당을 바라보고 왼쪽에 서 있는 수령 150년 가량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이회영의 아버지인 이유승이 심은 나무라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서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집안이자, 명동의 터줏대감이 바로 이 집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이 잘나가던 집안에는 파문이 일기 시작하였다. 6형제 가운데 가장 호방한 성격을 지녔던 넷째인 우당 이회영은 치욕적인 을사조약을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당은 이동녕(李東寧)·이상설(李相卨)과 함께 상소를 올리면서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밀통하고 있던 일부 대신들이 조약을 맺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외부 교섭국장으로 있던 다섯째 아들 성재 이시영은 항의 표시로 사표를 내고 관직을 그만두어 버렸다. 삼한갑족의 후손이자 승승장구하던 이시영은 을사조약의 체결과 함께 모든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해 버린 셈이다.

하지만 일본의 압력은 나날이 가중되었다. 우당은 만주에 무력항쟁의 기지를 설립할 구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외교적 방법으로는 나라를 찾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회영은 기지를 세울 터를 물색하기 위하여 이상설·이동녕과 함께 만주로 갔다.

한일합방 괴변을 당한 우당의 심경

우당은 이때 간도 용정(龍井)에 잠시 머무르면서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하여 현지 교포들이 민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는 귀국하였다. 그 다음에 생각한 방법이 비밀조직이었다. 어차피 긴 세월을 두고 일제와 싸워야 한다면 비밀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우당은 1907년 상동감리교회 지하에서 전덕기 목사, 양기탁·이동녕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는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의리를 내세워 남은 사람들에게는 그때부터 노비가 아닌 일꾼으로서 임금을 지급하였다. 혁명적인 조치였다. 달라진 정신으로 우당은 대궐의 내시였던 안호형(安鎬瑩)을 통하여 고종 황제와 은밀한 연락을 취하며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파견할 밀사의 신임장을 받아냈다.

우당은 이 밀서를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준에게 건네주어 간도의 서전의숙에 있던 이상설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 준은 그해 4월22일 서울을 출발하여 같은 달 27일 간도에서 이상설과 합류하여 통역인 이위종과 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알고 보면 헤이그 밀사 사건은 우당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1910년 일제의 강점에 의하여 합방이 이루어졌다. 우당은 6형제가 모인 자리에서 중국으로의 망명 결심을 밝혔다. 이때 우당이 밝힌 심경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슬픈 일이외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가족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한 공신의 후예여서 나라의 은혜와 세상의 두텁던 덕이 한순간에 없어졌다고 합니다. 우리 6형제는 나라와 같이 휴척(休戚)할 반열에 있는 것이지요. 한일합방의 괴변을 당하여 이 땅의 산이며 강은 왜놈들에게 넘어가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이에 대대로 명문이라는 소리를 듣는 우리 가문이 왜놈의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다 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 형제는 당연히 죽고 사는 것을 따지지 말고 나이든 이와 젊은 이, 어린이들을 인솔하고 중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식구들을 먼저 옮기고 나서 나는 동지들과 상의하여 국경 부근에 흩어져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모으려 합니다.

그리하여 먼 훗날 하늘이 우리를 도와 왜적이 파멸하고 조국이 광복되도록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의 민족된 사람의 신분이요, 또 왜적과 피 흘리며 싸운 백사 이항복 공의 후손 된 도리라고 믿습니다. 원컨대 형님들과 아우님들은 제 뜻에 거스름이 없으시다면 우리 형제 모두 날을 잡아 하루라도 빨리 떠났으면 합니다.”(李恩淑 自敍 ‘西間島 始終記’)

“그렇게 하세.”
“형님, 그렇게 하십시다.”
“그럼 각자 재산을 처분하는 대로 떠나기로 합시다.”
6형제가 모두 망명에 동의할 수 있었던 배경의 또 하나는 이 집안이 소론 집안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소론은 체제유지적인 노론과, 여기에 강렬하게 도전하는 남인들 사이의 노선을 걸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니다. 좀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소론이 지향하였던 노선은 어느 정도 현실개혁적이며 이상주의자들이 많았지 않나 싶다.

이러한 소론적 분위기가 6형제로 하여금 만주 망명을 합의하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합의가 이루어지자 6형제는 곧바로 재산정리에 들어갔다. 적지 않은 가산이라 부랴부랴 헐값에 처분하는 데도 근 한 달이나 걸렸다.

전답을 포함하여 심지어 조상들에게 제사지내기 위한 용도의 위토(位土)까지 처분하였다. 나라가 통째로 망했는데 조상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서울 명동의 YWCA 자리에 있던 집도 부랴부랴 처분하였다. 이 집을 산 사람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었다.

60명 식솔 이끌고 대규모 망명 단행

우당은 평소 육당을 아꼈다. 우당이 1867년생이고 육당이 1890년생이니 두 사람의 나이차는 23년이다. 우당은 20세의 수재 청년 육당을 아들같이 생각하고 특별히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 집도 헐값에 넘기고, 집안에 내려오던 수많은 고서들도 육당에게 모두 주고 갔다. 책은 육당 같은 수재가 보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고서들은 고려대 대학원 도서관에 일부 보관되어 있다고 들었다.

우당을 포함한 6형제가 처분한 가산은 당시 화폐로 총 40만냥이었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원 정도라고 한다. 당시 서울역 역사를 짓는 데 180만냥이었다. 우당 일가가 처분해 모은 40만냥은 상당수가 집안간이었던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의 재산을 정리한 것이었다.

이유원은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우당의 방계 숙부가 되었다. 1882년 일본이 강제로 제물포조약을 맺을 때 일본측은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우리측은 그 상대자로 귤산이 나갔다. 귤산은 철종때부터 명상이었는데, 영특한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았다. 귤산은 헌종 7년에 과거급제하여 의주부윤과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귤산은 학문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토지와 재산이 많아 일찍이 대원군의 눈밖에 나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대원군이 10년간 세도정치를 할 시기에는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높은 학문으로 ‘대전회통’(大典會通) 같은 법전 편찬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종 10년 대원군의 세도가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민비의 오라버니인 민승호와 더불어 반대원군파로 활약하면서 다시 영의정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귤산의 재산은 어마어마하였다. 귤산의 별저인 양주에서 서울까지 80리. 그는 이 80리 길을 남의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밟지 않고도 서울까지 올 수 있었을 정도로 돈이 많았다(時稱其所往來八十里 皆其田畔路 不踏他人片地 甚言其占田之廣也).

귤산은 외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천연두를 만나 얼굴이 얽은 데다, 그나마 소년 시절에 죽고 말았다. 부득이 유승공(裕承公)의 아들이며 우당의 친형인 이석영을 양자로 삼았다. 그가 필생을 두고 벌어들인 그 막대한 재산은 양자인 이석영이 상속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석영은 동생인 우당이 만주로 망명하자고 하자 이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돈을 보탰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돈이 40만냥이었다. 40만냥의 상당액수가 귤산의 재산이라고 보면 맞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국 나라를 위한 일에 이 돈이 쓰인 셈이다.

우당 일가가 40만냥을 가지고 망명길에 올랐던 시기는 1910년 12월의 혹한이었다. 고통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이는 조선 왕조에서 10명의 영의정을 배출한 집안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호방하면서도 자존심이 강했던 넷째아들 이회영이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 내린 결단이었다.

6형제에 딸린 가솔들을 전부 합하면 60명의 대가족이었다고 한다. 한 집안 60명 전체가 집단망명한 셈이다. 60명 가운데는 데리고 있던 노비들도 일부 포함되었다. 진보적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씨 형제들은 노비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하소’를 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망명하기 전에 노비들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신분해방을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명의 노비들은 행동을 같이 하였다고 전해진다.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60명 대인원이 서울에서 만주로 갈 때 사용한 교통수단은 말이 끄는 마차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기차가 없었다. 마차는 12대였다. 눈 내리는 12월의 날씨에 수 천리 만주벌판을 향해 12대의 마차에 대가족이 나누어 타고 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마치 서부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나라가 망했다는 이유로 부귀영화를 스스로 포기하고 만리 타향 만주로 떠나는 조선 최고의 귀족 집안. 그것도 타의(他意)가 아닌 순전히 자의(自意)로 말이다.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우당 일가족이 두만강을 배로 건널 때도 일화를 남겼다고 한다. 두만강을 건네준 뱃사공에게 아주 후하게 뱃삯을 지불하였던 것. 뱃삯이 10원이었는데 그 두 배인 20원을 지불하였다. 그리고는 고마워 어쩔줄 몰라 하는 뱃사공에게 우당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게 고마워하지 말고 한 가지 일을 해 주시오.”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

“어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제 힘이 닿는 한 독립군들을 배로 실어 나르겠습니다.”
그 두만강 뱃사공은 약속을 지켰다. 그 사실은 탈출하는 투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우당 일가족이 정착한 곳은 서간도(西間島) 유하현(柳河縣)의 삼원보(三源堡)였다. 일제하 실향민의 터전이요, 독립운동의 전진기지는 그렇게 마련되었다. 삼원보 인근의 은양보(恩養堡)에는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다. 자력으로 독립운동을 유지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일하고(耕), 한편 배우고(學), 한편으로 무장한다(武)는 3가지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그후 경학사는 재만주(在滿洲) 교민 자치기관 겸 항일 독립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우당의 고종 망명 계획

2년 후인 1912년 경학사를 중심으로 그 유명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의 교주(校主)는 둘째인 이석영이 맡았고, 교장에는 안동 출신의 이상룡(李相龍),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는 이동녕·윤기섭·이관직·여 준 선생 등이었다.

학비를 비롯한 숙식은 모두 무료였다. 그 비용은 우당 집안이 망명하면서 가지고온 재산으로 충당했음은 물론이다. 제1회 학생은 변영태·김 훈·김도태·이범석·오광선 등이 이 학교를 거쳤다. 1회 학생 가운데는 우당의 아들인 이규학(李圭鶴·1896~1973))도 포함되어 있었다.

img2R이규학은 이종찬(前국정원장)의 부친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930년 폐교될 때까지 모두 3,500명의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했다. 2002년 8월 KBS ‘역사스페셜’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만주 삼원보를 현장답사하여 프로를 제작하였는데, 거기에 보니 신흥학교가 자리잡고 있던 터는 앞으로 강이 흐르고 뒤로는 험난한 산이 가로막고 있는 요새 같은 지형이었다. 산악훈련과 게릴라전 훈련에 적합한 지형이었다. 거기에서 학생들은 아침 6시부터 저녁까지 군사훈련을 포함한 여러 교과목을 배웠다. 교과목을 보면 지리·역사·산술·수신·한문·창가·중국어·총검술·화학·축성학·격검 등이었다.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 산도 신흥학교 출신이다. 이 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독립군의 근간이 되어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를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것이다.

1918년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기숙시키고 교육시키느라 가져간 돈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우당은 할 수 없이 형제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국내로 다시 잠입하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그해 연초에 교서로 밝힌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단연 화제였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큰 용기를 얻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우당은 고종을 망명시킬 계획을 세웠다. 망명지는 중국이었다. 이 계획이 고종의 시종인 이교영(李喬永)과 대원군의 사위인 조정구(趙鼎九) 대감, 그리고 조정구 대감의 아들인 조남승(趙南升)을 통하여 고종에게 전달되었다. 고종이 마침내 이에 동의하여 측근 민영달(閔泳達)이 마련한 자금이 조정구 대감을 통해 우당에게 전달되었다.

우당은 우선 베이징(北京)에 고종이 거처할 집을 마련하도록 하였고, 고종이 신임하는 매부인 조정구 대감에게 그 집을 관리하도록 하는 등 계획을 착착 진행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인 1919년 고종의 행동에 항상 의심의 눈초리를 떼지 않던 일제는 흉계를 꾸며 고종을 독살하고야 말았다.

이 때문에 고종의 망명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인해 임금 자리를 내놓았고, 베이징으로의 망명사건 미수 때문에 독살당한 셈이다. 어떻게 보면 임금 자리를 내놓은 일이나 독살된 일이나 간접적으로는 우당과 관련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헤이그 밀사 사건이나 망명 사건 모두 우당이 계획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우당이 고종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혼맥이 작용했다. 원래는 대원군이 조대비의 도움을 받아 아들인 고종을 등극시켰으니 그 대가로 조대비 집안의 딸을 며느리로 삼아야 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은 조대비를 견제하기 위해 조씨 집안의 딸을 며느리로 삼지 않았다. 대원군은 그 대신 사위를 조대비 집안에서 취했다. 그 사위가 바로 노론인 조정구 대감이다. 대원군의 유일한 딸이자 고종의 누이동생이 바로 조정구의 부인이 된 것이다. 조정구와 고종의 누이동생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조남승(趙南升)과 조남익(趙南益)이다. 그 밑으로 낳은 딸이 조계진(趙季珍)이다.

그런데 고종과 우당을 연결한 인물이 조남승이다. 조남승은 우당과 의기가 서로 투합하는 동지적 관계였다. 조남승을 연결고리로 해서 우당은 고종과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우당을 좋아했던 조남승은 자신의 막내 여동생인 조계진을 우당의 아들인 이규학과 결혼시켰다.

역대 소론 집안이었던 우당 집안과 노론 집안이었던 조씨 집안이 극적으로 혼사를 맺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규학은 대원군의 외손녀이자 고종의 조카딸인 조계진과 결혼한 셈이다. 이 조계진이 바로 이종찬의 어머니다. 로열패밀리로 태어나 곱게 자랐던 조계진은 독립운동가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중국에서 말 못할 고생을 하였고, 해방 후에는 창신동에서 재봉틀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있는 우당기념관에는 조계진이 7세때 찍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1903년 구한말에 찍은 희귀한 사진인데, 여기에 보면 조계진 옆에는 큰오빠인 조남승과 둘째오빠인 조남익이 양복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둘째오빠인 조남익은 당시 양주목사를 지냈다고 한다. 양주목사는 아주 요직이다. 양주에 왕릉이 많기 때문에 양주목사는 이 왕릉을 지키는 직책이다.

왕실의 선영을 관리하는 자리는 아무나 갈 수 없는 직책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임금인 고종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고종 황제의 가마를 가로질러 가는 자가 있었다. 임금의 행렬을 가로질러 가는 자는 목을 자르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고종이 이를 보고 “저놈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양주목사 남 익입니다” 하고 시종이 답변하였다.

“그래? 그렇다면 돌아가자.”
그만큼 양주목사 자리는 보통 목사와는 차원이 다른 끝발 있는 자리였다고 한다.

우당, ‘석파蘭’ 팔아 자금 마련

우당은 가져간 자금이 바닥나 빈털터리 신세로 중국의 빈민가를 전전하면서도 독립운동가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는 한때 돈이 떨어지면 석파란(石派蘭)을 그렸다고 한다. 석파란이란 추사 김정희로부터 난을 배운 대원군이 즐겨 그렸던 화법을 일컫는다.

석파란의 묘미는 난의 잎사귀에 있다. 잎사귀를 그릴 때 ‘삼전지묘’(三轉之妙)라고 하는 수법을 쓴다. 난의 잎이 뻗어 나가는 모습을 그릴 때 3번 돌려 자연스럽게 그리는데, 그 방법이 아주 어렵다. 그래서 고수가 아니면 삼전지묘의 방법을 터득하기 어렵다고 한다. 우당은 명문가의 선비였던만큼 어렸을 때부터 시·서·화에 대한 기본교육을 받았던 모양이다. 특히 대원군의 석파란에 대해서는 상당히 조예가 있었던 듯하다.

중국에 가서 돈은 떨어지고 양식은 필요한 궁지에 몰리자 우당은 중국 사람들에게 석파란을 그려 팔았다. 우당이 그린 석파란은 중국의 식자층들이 곧잘 사갔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이 보기에도 살 만한 그림으로 판단되었던 모양이다.

조계진의 회고에 의하면 우당은 석파란을 그린 후 종이에 담뱃진으로 누렇게 물을 들였다고 한다. 오래 된 골동품으로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값을 많이 받을 것 아닌가. 이렇게 해서 번 돈으로 비상금을 충당하고는 하였다. 중국에서 돌아다니는 석파란의 상당수는 우당이 그린 가짜 석파란이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온 이야기다.

우당기념관에는 이 가짜(?) 석파란이 액자에 넣어져 전시되어 있다. 우리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통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우당은 그림뿐만 아니라 퉁소 연주도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달밤에 절절한 퉁소 연주로 인근에 같이 모여 사는 독립운동가 부인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 우당은 중국에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그러한 고생스러운 삶이 역사평론가 이덕일이 쓴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2001)에 소상하게 나온다.

‘남개(중국의 톈진)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규숙의 옷까지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정화암 자서전)

우당의 사상적 종착지 아나키즘

우당이 독립운동가로서 최종적으로 도달했던 사상적 종착지는 아나키스트였다. 아나키스트의 노선이란 독립운동 내부를 혹독히 비판하는 노선이었다. 또 흥사단의 이른바 무실역행(務實力行)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1921년 이래 독립운동의 대열에서 가뜩이나 이탈하고 투항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무실역행론이 바로 그들의 행동에 구실을 주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img3L그런가 하면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를 아주 싫어하였다. 양쪽에 대한 비판은 양쪽 모두로부터 고립될 수 있다. 우당의 아나키스트 노선이 이제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다 최근 들어서야 조명받는 이유도 이러한 노선에서 연유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아나키스트는 남·북 양쪽으로부터 모두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우당은 연하의 아끼던 동지인 시야(是也) 김종진(金宗鎭)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나는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거나 무정부주의로 사상을 전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우리나라의 독립에 관하여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나의 생각과 방법이 현대사상의 견지에서 보면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창하는 것과 상통하기 때문에 남들이 그렇게 보는 것이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인 지방자치제를 확립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연합으로써 중앙정치기구를 구성하며, 경제 건설에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의 재산은 사회화를 원칙으로 하고 경제의 운영과 합리화를 꾀해야 한다.”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와 달라 반드시 획일성을 요구하지는 않으므로, 그 민족의 습성과 전통 및 문화적·경제적 실정에 맞추면서도 그 기본 원리를 살려 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마음만 있었으면 모든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삼한갑족의 후손 우당은 나라가 망하는 역사의 고빗길을 넘어가면서 이처럼 무정부주의자로 변모했던 것이다. 사유재산을 부정하였지만, 획일적 조직화도 부정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우당은 결국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받다 사망한다. 행동파이며 이상주의자였던 우당과 달리 성재 이시영은 논리적이며 현실주의적 접근을 하였다. 성재는 17세에 식년감시(式年鑑試)에 급제하면서 일찍이 관계에 들어갔다.

19세때 이미 형조좌랑이 되었다. 25세에는 사헌부·사간원을 두루 거쳐 법관으로서의 기초를 모두 갖추었다. 1905년에는 외부(외무부) 교섭국장이 되었으나 당시 외부대신 박제순은 이미 이완용 등과 밀약하여 을사조약을 기안하여 추진하려는 시기였다.
성재는 교섭국장인 실무자로서 반대하였으나 을사조약을 맺는 마지막 어전회의장에는 일본군이 포위하여 접근조차 못하였다. 성재는 즉각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그러나 황제는 다시 성재를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우리나라의 신식 학교가 처음 평안도에 자리잡게 된 것도 성재의 치적 중 하나다. 연말 어전회의에서 이런 보고를 받은 황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일본의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평안관찰사와 같이 도민의 사상을 고취하는 이가 있으면 일률적으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후 성재는 견제를 받아 국민과 직접 접촉하는 지위에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성재는 형님들과 함께 신민회를 비롯한 비밀결사에 가담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중국으로 같이 망명하였던 것이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드디어 해방이 되어 꿈에도 그리던 환국을 하게 되었지만 성재는 착잡하기만 하였다. 당초 1910년 망명길에 올랐을 때는 60여 명의 대가족이었지만 이제는 형제 가운데 살아 돌아온 이는 자기 혼자뿐이었다. 거의 다 중국에서 죽었다. 성재는 부통령으로 있으면서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인재양성 기관을 염두에 두었다.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을 세운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신흥대학은 현 경희대의 전신이다. 우당 집안 6형제 가운데 성재라도 살아 와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집안이 현 상태로나마 재기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말하고는 하였다.

“해방 되면 우당 집안의 재산은 국가에서 되돌려주어야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국은 우당 집안에 빛을 졌다”고….
서울 종로구 신교동 농아학교 앞에는 우당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우당 집안 사람들의 여러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볼 만하다. 우당의 지론 가운데 하나가 “독립을 위해서는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 지론에 따라 우당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1,600여 장학재단 가운데 독립유공자 후손을 돕는 유일한 장학재단이라고 알려져 있다. 1984년 설립되어 올해까지 1,299명의 중·고·대학생들에게 총 3억1,0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삼한갑족이었던 우당 집안의 명맥은 우당기념관에 아직 남아 있다.

후손들을 보자. 6형제 가운데 첫째인 건영의 손자는 종육(鍾毓·1928년생, 외무부 영사) 종환(鍾煥·1935년생, 예비역 대령) 종국(鍾國·1939년생, 한국교원대 교수). 넷째인 회영의 손자는 종찬(鍾贊·1936년생, 국회의원·국정원장) 종걸(鍾杰·1957년생, 국회의원) 종현(鍾炫·1962년생, 매일경제신문 기자)이다.

조용헌(趙龍憲)

1961년 출생. 원광대 철학박사 불교민속학 전공.
지난 15년간 한·중·일 3국의 600여 사찰과 암자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奇人·達士들을 만나 교류를 가짐.
그동안 음지에 갇혀 있던 천문·지리·인사에 관한 담론을 양지로
끌어올려 ‘학문적 시민권’을 얻도록 하는 데 주력하고 있음.
저서로 ‘나는 산으로 간다’(푸른숲) ‘사주명리학 이야기’(생각의나무) 등이 있다.


출처 : 전통의 명문 경주이씨 종친회
글쓴이 : 이민희 中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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