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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옆 나뭇가지에는 까마귀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 있습니다. 예전에 주지스님께서 '까마귀 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를 어림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한철 같으면 사람의 숫자를 세느라 계곡 저 아래쯤서 깍깍거리며 머리 위에서 날고 있었을 까마귀들도 오가는 사람 뜸해지니 절집 근처로 모여들었나 봅니다. 겨울 봉정암은 한중망(閑中忙) 속 망중한(忙中閑)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두리번거리다 비닐이 덧대어진 공양간 앞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지난 여름에 비가 와도 비 맞지 않으며 식사를 하거나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며 공양간 처마 끝을 이어내더니, 겨울이 되어 비닐을 두르고 출입문을 덧대니 실내 같은 아늑한 공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불어오는 산바람, 많이 내린 눈에 먼저 덧댄 비닐이 찢어지기라도 했는지 스님은 안쪽에서 비닐을 덧대고 계셨습니다. 봉정암에 가면 누구나 머무는 동안 기거할 방사를 배정받거나 신청하기 위해 한 번쯤은 꼭 뵈었을 비구니스님입니다. 난방은 물론 시설물 관리에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평소에 사용하던 종무소는 문단속을 해놓고 공양간 배식장소 옆에 임시종무소를 마련해 겨울 동안 사용하고 계신 듯합니다.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더니 종각 뒤쪽에서도 어느 처사님이 눈을 치우며 뭔가를 손보고 계십니다. 공양간 안쪽에서도 저녁공양을 준비하는지 뭔가를 다듬거나 손질하는 듯 분주한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그렇게 종종걸음을 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북적거리는 한철에 비하면 망중한의 시간이 될 듯합니다. 어떤 때는 입추의 여지 없이, 정말 송곳 하나 꽂을 공간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듭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나 심장소리로만으로도 덩달아 분주해지기 마련이지만, 겨울에는 이따금 풍문처럼 찾아드는 신도들이나 등산객들이 고작이니 상대적으로 망중한의 여유가 있을 듯합니다. 이런저런 사람들 만나는 자체가 수행 같은 탁마(琢磨) 겨울이 되면 스님들 대부분은 산을 내려가 다른 절 선방이나 토굴에서 동안거에 드시고 몇 분의 스님들만 봉정암에 남아 기도를 하며 겨울을 나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차 한 잔을 주시겠다면서 임시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일의 경중(輕重)보다 대인관계'라고 할 만큼 인간관계는 사람을 힘들게도 하고 신명나게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러기에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하여야 하는 서비스업 종사자야말로 근기와 뚜렷한 직업의식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릅니다. 스님이 하고 맡고 계신 소임이 사회적 서비스업은 아니지만 어느 때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고 다양한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는 데서 오는 우여곡절이나 애로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개인 성격에서 비롯되는 일이겠지만 힘들게 하거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칫 스트레스나 수행에 마(魔)가 될 수 있는 분노(瞋恚毒)를 참다보니 그 참아내는 순간 순간들이 울화를 쪼아내는 정이 되고, 거칠어진 심성을 갈아내는 숫돌이 되어 스스로를 가다듬는 탁마(琢磨)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법문에 나오는 자구(字句) 하나를 놓고 그 자구에 담겨 있는 심오한 가르침을 깨우치는 것도 커다란 구도겠지만, 수도승들이 탁발만행을 하듯 이런저런 사람들과 부닥뜨리며 거기서 생길 수 있는 내면적 갈등을 선으로 승화시켜나가는 것도 또 하나의 수행이겠다는 생각입니다. 하나의 물도 보는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일컫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도 있는 억지나 사리 없는 언행, 몰경위한 행동이나 트집까지도 자신을 다듬는 수행의 도구로 받아들인다고 하니 넘어야 할 반야의 언덕이 스님에게는 멀지 않을 듯합니다.
몇 분 스님밖에 계시지 않지만 책임시간을 정해 돌아가며 하고 계시니 겨울이라고 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뜸하다고 해서 기도하는 목탁소리나 염불소리가 멈추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법당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 이따금 바람결에 딸그랑거리는 풍경소리가 귓전을 넘쳐흘러 가슴 속으로 녹아듭니다. 사리탑에 올라 바라 본 나상의 공룡능선과 용아장성 부처님의 뇌사리가 봉안된 사리탑 가는 길에 쌓였던 눈들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습니다. 사리탑에 오르니 바람이 많이 붑니다. 바람에 날려 온 눈들이 여기저기 골을 이뤄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험준한 산정이다 보니 북풍설한을 그대로 맞아들여야 하는 사리탑이지만 천년의 세월을 그래왔듯 여여한 모습으로 천지간을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무슨 원이 있어 봉정암엘 왔고, 어떤 애절함과 지극한 간절함이 있어 엄동설한 마다않고 사리탑에 올라 저렇도록 눈물 철철 날 것 같은 108배를 올리는지 모르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진지함은 가슴 울컥하게 하는 싸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용의 이빨처럼 솟아 있다는 용아장성, 그 산세가 공룡의 등줄기를 닮았다는 공룡능선을 이루고 있는 기암의 바위들이 나상으로 드러납니다. 허세나 겉치레처럼 시야를 가렸던 모든 이파리들 다 떨치고 높낮음의 산세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따금 악착같이 붙어 있는 하얀 눈들이 눈꼽처럼 매달려 있지만, 치부처럼 드러내지 않던 깊고도 그늘진 곳까지 스스럼없이 드러냈습니다.
현기증이 날 만큼 아찔한 벼랑에 서서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을 머리에 담아냅니다. 바람에 실린 한기가 살갗을 파고듭니다. 가부좌라도 틀고 벗겨진 산하를 더 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돋아 오르는 소름을 참지 못하는 살가죽의 한기가 '더 있을까 내려갈까'를 선택해야 하는 갈등으로 다가옵니다. 추위를 녹이고 어둠을 밝혀내는 밤샘기도 서녘하늘에 걸렸던 햇살도 주변이 어슴푸레할 정도로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더 이상을 버틴다는 것은 아집이며 어리석음이라는 생각에 사리탑을 내려옵니다. 공양시간이면 줄을 서던 진풍경도 겨울에는 생략되었습니다. 몇몇이 둘러앉아 소꿉놀이를 하듯 저녁공양을 마칩니다.
다른 때에 비해 텅 빈 듯한 법당이지만 기도하는 마음과 예불 올리는 진지함만큼은 사람의 숫자에 비해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염불소리가 멈추면 기다렸다는 듯 겨울바람이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들이 '뎅그렁~ 뎅그렁~' 울려줍니다. 기도하는 마음들이 추위를 녹이고, 소원하는 염원들이 어둠을 밝혀줍니다. 밝은 마음 더 밝게 깨우쳐주려는 듯 정월대보름달이 휘영청 비춰줍니다. 새벽기도를 알리는 도량석 목탁소리를 들으며 사리탑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달빛에 드러난 사리탑이 참으로 요염하고도 오묘한 자태입니다. 시름 가득한 모습으로도 다가오고, 눈물 훔치며 떠나는 고별의 뒷모습처럼도 다가옵니다. 어찌된 일인지 진지한 신심보다는 감성의 그림자가 너울댑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리탑을 정점으로 달빛과 별빛이 밝음으로 모여들었고 나그네가 만들고 있는 감성의 그림자만 형형색색으로 너울댈 뿐 바람조차도 침묵을 지키는 조용한 시간입니다. 망상과 번뇌의 형색, 탐욕과 어리석음의 형색이 무지갯빛 오욕칠정이 되어 형형색색으로 변모해가며 잠재 된 자화상에 기대어 이리저리 꿈틀대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른 아침 공양을 마치고 바랑처럼 짊어질 육신의 무게를 챙깁니다. 오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봐야만 할 정월대보름날 일출이 있었기에 눈길 헤치며 대청봉으로 올라갑니다. 길동무처럼 산행 길을 밝혀주던 달님은 속세의 방자함이 미덥지 않은 듯 햇살이 돋을 때까지 밝은 빛으로 동행을 해줍니다.
헐거워진 아이젠을 다시 채우고 스님께 합장 삼배로 인사를 드리며 연이 닿아 또 뵐 수 있기를 소원하며 뚜벅뚜벅 걸어봅니다. 겨울 봉정암에는 한가로움 속에서도 바쁘고 그 바쁨 속에서도 한가로움(한중망 속 망중한)에서 느끼는 진한 행복감과 넉넉한 여유로움이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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