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보리암, 용문사, 반야용선사 불기 2559(2015)년 3월 1일
3월 1일, 음력 정월 열하루 대보름을 나흘 앞둔 고찰 순례인지라 여러분이 방생법회를 가지자는 의견이 있어 보리암과 용문사 순례후 남해 노량 해상 법당인 반야용선사에서 방생법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선기자재 업체로 중견기업인 스타코 회장님 사모님이신 여래지 보살님이 방생법회를 위해 20만원, 동아대학교 대학원장과 학생처장, 불자교수회 회장을 엮임하신 오윤표 동아대학교 교수님이 10만원을 보시하시고, 우리 고찰순례단의 집전을 맡아 하시는 전문포교사 수행심 강정희 보살님이 방생법회에 떡, 과일등 공양물 일체를 올리고 동참자 전원에게 간식용 떡을 보시해 주셨습니다. 세분 이 인연공덕으로 불보살님의 자비광명이 항상 함께하고, 더불어 가족들과 인연 있는 모든 분들도 함께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보리암에서 사시불공을 올리기로 하고 공양물로 떡 1말을 현지 방앗간에 주문하였으나, 전날 내린 눈때문에 보리암으로 오르는 길의 통행제한으로, 사시불공은 용문사에서 올리고 용문사 순례를 마치고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의 통행제한 해제후 보리암에 올라 보리암 보광전과 만불전에 공양올리고 수행심 보살님 집전으로 만불전에서 법회를 봉행하였습니다.
칠순을 몇년 앞두고 있음에도 올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한 수행심 보살님께 회원들의 축하의 뜻을 모아 약소하지만 축하금을 드렸습니다.
불교TV '목종스님&선우용여의 이야기쇼 가피' 45회와 46회에 출연하여 직접 경험한 부처님의 진신사리 방광에 대하여 들려 주신 동아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작년에 정년 퇴임하신 고찰순례단 초기 회원이셨던 박학길 교수님도 오랫만에 동참 하셨습니다. 박교수님은 1986년 해인사 재, 개축에 참여해 오늘의 해인사를 있게하고, 통도사 성보박물관의 경우 자연환기법을 적용 설계하고, 단일 사찰로는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제주도 약천사 대적광전을 설계하는 등 많은 불사에 동참하셨습니다.
이번 순례에는 좌석이 부족하여 5분의 동참 신청을 받을 수 없어서 신청한 분들에게 죄송 스러웠습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명제에 따라 순례사찰에 대한 사전지식 습득과 모아두면 하나의
사찰안내 책자가 되도록 칼라로 인쇄된 A4용지 10페이지 분량의 사찰안내 인쇄물
(사진 위)을 배부하였습니다.
출발후 불교TV에서 발매한 새벽예불 DVD가 돌아가면 버스는 도량송과 종송, 타고명종이 울리는 도량이 됩니다. 오분향례가 진행되고 이어서 칠정례가 시작되면 전문포교사인 수행심 보살님의 목탁과 DVD에 따라 예불을 올리고, 이산혜연선사 발원문, 반야심경, 천수경 봉송으로 차내 의식이 봉행되었습니다.
06시 15분경 낙동초등학교 앞을 출발하여 08시경 창선·삼천포대교 삼천포쪽 휴게소에 잠시 쉬면서 바라본 창선·삼천포대교입니다.
용문사(龍門寺) ○개요(槪要) 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의 호랑이가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남해군립공원 호구산(虎丘山 해발 650m)의 중턱에 자리한 용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인데 남해에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절로 알려져 있다. 이 사찰은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3년(802)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의 승려 신운(信雲)이 탐진당(探眞堂)을 짓고 상운(尙雲)이 적묵당(寂默堂)을 세웠으며, 선조(宣祖) 25년(1592)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 절 승려들이 승병으로 참여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불에 타 없어진 것을 현종(顯宗) 2년(1661) 백월당 학진(百月堂 學進)이 길지(吉地)를 찾아 용연(龍淵) 위쪽에 터를 잡고 인근 금산(錦山)의 보광사(普光寺) 건물(建物)을 옮겨와 중창(重創)하면서 ‘용문사(龍門寺)’라고 이름붙였다고 하는데, 보광사(普光寺)는 원효(元曉) 대사(大師)가 세운 사찰이었으나 이곳으로 옮길 당시에는 폐사 직전의 상태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승려들이 용감하게 싸운 호국사찰이다. 훗날 이런 호국의 불심에 감동한 숙종 임금은 용문사를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고 왕실의 축원당을 세웠다. 수국사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나라를 지키는 사찰’의 의미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호국사찰의 증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용문사에 보관 중인 총신 및 총구가 세 개 달린 개인용 화기인 삼혈총통(三穴銃筒)과 그리고 숙종이 호국사찰임을 표시하기 위해 내린 수국사금패(守國寺禁牌)와 봉산수호패(封山守護牌)가 그것이다. 금패(禁牌)란 지방의 관청이나 관리가 사찰을 함부로 하는 것을 금하는 표지이며 봉산수호패에서 말하는 봉산(封山)이란 왕과 왕비의 능묘를 보호하거나 기타 특수한 목적을 위해 벌목하는 행위를 금하기 위한 표지다. 다시 말해서 봉산수호패(封山守護牌)란 용문사가 자리한 호구산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표지인 것이다. 봉산수호패에는 앞면에 ‘남해용문사(南海龍門寺) 향탄봉산수호총섭(香炭封山守護總攝)’을, 뒷면에는 이 패를 발급한 ‘예조(禮曺)’와 그 수결(일종의 싸인)을 새겼다. 숙종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77년이 지난 1674년에 즉위했다. 종전 후 100년이 다 되어서도 용문사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숙종은 이것으로도 감사의 마음을 다 나타내지 못했다고 보았는지 연꽃 모양의 옥등 2개와 촉대 1개를 하사했었으나,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빼앗아갔다고 한다.
현존 건물로는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849호)을 중심(中心)으로 천왕각(天王閣 경남 문화재 자료 제150호), 명부전(冥府殿 경남 문화재자료 제151호), 봉서루(鳳棲樓 경남 문화재자료 제394호), 칠성각(七星閣,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 등이 있고, 절 입구의 일주문 오른쪽 언덕에 9기의 부도군(浮屠群 경남 유형문화재 제425호)이 있으며,
산내 암자로는 영조(英祖)27년(1751)에 세운 백련암(白蓮庵)과 염불암(念佛庵)이 남아 있다. 특히 백련암은 수행처로 이름나,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용성스님,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석우스님, 성철스님이 머문 곳으로 유명하다.
용문사는 철원군 심원사, 전북 고창군 선운사 도솔암, 전북 완주군 송광사, 충남 서산군 개심사, 경주 기림사 등과 함께 지장기도 도량으로 일컬어진다.
문화재로는 괘불탱(보물 제1446호), 대웅전(보물 제1849호)을 비롯하여 석불(石佛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8호) 등 30여점의 시도유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전각 및 성보 문화재 1.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849호)과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南海龍門寺木造 阿彌陀三尊佛坐像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1666년 승려 일향이 창건 (創建)하였고 숙종(肅宗) 29년(1703) 성화가 중건하였는데, 기둥 높이는 대체로 낮으며 약간의 배흘림이 있고, 4귀에 세운 활주의 주춧돌은 4각으로서 높이가 85㎝ 가량으로 조금 높으며,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으로서 앞면의 기둥과 기둥 사이 에는 2구(構)씩 공포(栱包)를 배치 하였는데, 처마 밑의 가운데 칸인 외부 어칸에는 양쪽에 용(龍)의 머리가 조각되 있고, 공포 부분에는 연(蓮)꽃무늬 장식을 하였으며, 내부의 대들보에는 귀면(鬼面)과 단청을 하였고 용(龍)머리를 조각해 붙여 더욱 화려하게 장엄하였다. 천장(天障)은 계단 모양으로 점차 높아지다가 끝에는 수직으로 처리되고 나머지 가운데에는 우물반자로 되어 있으며, 불단(佛壇) 뒤에는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사이에 탱화(幀畵)를 걸었고 윗부분에는 익공계(翼工系)의 장엄 장식을 한 화려한 닫집을 꾸며 놓았다.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南海龍門寺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은 대웅전 중앙에 위치한 장방형 불단 위에 각각의 연화좌를 두고 그 위에 봉안되어 있다. 머리 뒤편 정수리 쪽으로 서너 개의 나발이 결손 되었거나 소매와 군의자락에 도금이 탈락한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인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세 구의 불상은 저부에 마련된 복장공이 모두 열려 있었고, 복장물 역시 대부분이 도난당한 상태였으며, 그중 경전 · 다라니 등이 불상 내부의 목 부분과 팔, 다리 쪽으로 끼워져 남아 있었다. 또한 양측 협시상은 저부의 복장공 외에 배면 중앙에 타원형의 복장공을 따로 만들어 다른 판재로 엉성하게 덧대어 마감되어 있었다. 배면에 마련된 별도의 복장공은 팔의 내부나 머리와 같이 좌상의 밑바닥에서 복장물을 채우기 어려운 것을 쉽게 처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 괘불탱(掛佛幀 :보물 제1446호) 용문사괘불탱은 본존불상 좌·우에 협시보살상만을 배치시켜 삼존도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상은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오른손을 길게 내려뜨리고 왼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 올린 채 두 발을 좌·우로 벌려 연화좌를 딛고 서 있는 입불상으로, 둥글넓적해진 형태에 눈·코·입이 작게 묘사되고 미소가 잘 보이지 않는 경직된 표정의 얼굴은 수평으로 들어올려 각이 진 어깨와 더불어 18세기 후반 이후 불화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 특징이다. 좌협시보살상은 보관을 쓰고서 여의를 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석가모니불의 좌협시인 문수보살상이라 추정된다. 머리 크기에 비하여 어깨가 좁아지고 작아진 발로 인하여 위축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팔에 걸쳐 흘러내린 길고 굵은 천의자락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우협시보살상 또한 좌협시보살상과 표현이 유사하다. 그림 하단부에는 화기가 남아 있다. 이 괘불탱은 인물의 형태 및 표정, 신체 비례 등에 있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의 전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직된 듯 조화롭고 세련된 표현기법을 보여주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 연구의 자료적 가치가 크다.
3. 명부전(冥府殿 : 경남 문화재자료 제151호)과 목조지장시왕상(木造地藏 十王像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6호)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한 이 전각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현종(顯宗) 3년(1662)에 백월(白月)이 건립한 것이지만 지금의 건물은 건축 양식과 내부의 조각상으로 볼 때 19세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불전(佛殿)에는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기까지 무불시대(無佛時代)에 육도(六道)의 중생(衆生)을 교화(敎化) 구제(救濟)하는 보살인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앙(中央)에 모시고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奉安)하였으며, 그 좌우(左右)로는 명부(冥府)의 시왕(十王)을 좌우(左右)로 모시고 있다. 가 직접(直接) 조성하여 백일기도(百日祈禱)를 드려서 대도성취(大道成就)의 기율(紀律)을 삼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4. 천왕각(天王閣 : 경남 문화재자료 제150호)과 목조 사천왕상(木造 四天王像 : 경남 유형문화재 제428호) 전각은 원래(原來) 고려시대(高麗時代)인 1202년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용문사 (龍門寺)와 함께 불탔다가 숙종(肅宗) 28년(1702)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의 겹처마 맞배지붕에 초익공(初翼工) 모로단청(丹靑)으로 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향우측(向右側)에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향좌측(向左側)에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 등 좌우측(左右側)에 각각(各各) 2구(軀)씩의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배치되어 있으며, 발 아래의 생령좌(生靈座)는 모두 따로 만들어 배치한 것으로 특히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인데, 다른 절의 사천왕(四天王)이 마귀(魔鬼)를 밟고 있는데 반(反)해 이곳에서는 발에 밟혀 신음(呻吟)하는 존재가 관리나 부정한 양반들이어서 권력을 탐하거나 아부하지 않고 민초 (民草)들 곁에 있고자 했던 용문사(龍門寺)의 정신(精神)을 대변(代辯)하고 있다.
5. 봉서루(鳳棲樓 : 경남 문화재자료 제394호) 범종루 옆에 자리해 있으며 경내로 들어서는 출입문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누각(樓閣)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에 팔작(八作)지붕 형태를 갖춘 2층 건물인데, ‘佛丘山龍門寺鳳捿樓並序 (불구산용문사봉서루병서 1720년)’ 와 ‘靈山殿天王閣鳳捿樓重修記(영산전천왕각봉서루 중수기1833년)’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최초로 건립된 시기는 숙종(肅宗) 46년(1720) 이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33년경 으로 보인다.
6. 부도군(浮屠群 : 경남 유형문화재 제425호) 용문사 부도군은 모두 9기의 승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승탑은 보존 상태도 좋고, 당호(堂號)를 새기는 표현기법으로 보아 17~18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곳에서 입적하신 해진당 천해대사의 승탑의 경우 자연 암반 위에 사각형의 아래받침돌을 마련하고 팔각의 몸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사각의 지붕돌과 연봉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승탑의 몸돌 아래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연꽃잎 하나 건너 사람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런 경우는 보기 드물며 얼굴의 표정이 다 다르다고 한다.
7. 용화전(龍華殿)과 석불(石佛 : 경남 유형문화재 제138호) 명부전(冥府殿) 뒤에 자리한 이 전각은 정면과 측면 각 1칸씩의 자그마한 규모에 기와지붕을 한 시멘트 건물로서 근래에 지었는데, ‘용화전(龍華殿)’ 편액(扁額)은 근대(近代)의 고승 (高僧)인 구하 천보(九河 天輔 : 1872~1965) 스님의 행서체(行書體) 글씨이며, 내부 불단에 봉안(奉安)된 고려시대의 석불상(石佛像)은 높이 81㎝, 어깨 폭 38㎝, 무릎 폭 66㎝ 크기로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용문사(龍門寺)를 재건할 때 출토 되었으며 본래 석재(石材)로 앉아 있는 보살(菩薩)의 모습을 조각(彫刻)한 것이지만, 뒤에 흰색(色)의 회(灰)를 덧칠하여 본래 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다. 손에 정병(淨甁)을 들고 또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미륵보살상(彌勒菩薩像) 으로 보이는 이 불상(佛像)은 조각 수법이 세밀하고 장식이 화려하며 주홍녹자(朱紅綠紫), 금니(金泥) 등을 사용(使用)한 화려한 채색이 돋보여 고려 초기(高麗 初期)에서 중기(中期) 사이의 작품(作品)으로 추정(推定)되고 있다.
천왕각(天王閣 : 경남 문화재자료 제150호)
봉서루(鳳棲樓 : 경남 문화재자료 제394호)
남해용문사목조 (南海龍門寺木槽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7호)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849호)
용문사 녹차밭
남해용문사목조지장보살삼존상
보리암(菩提庵) ○개요(槪要)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명승 제39호인 금산(錦山 해발 681m)의 정상 부근에 자리잡은 보리암(菩提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末寺)로서 오래된 역사와 절경을 품고 있다.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3년(683) 원효(元曉:617~686) 대사(大師)가 현재의 금산(錦山) 이 마치 방광(放光)하는 듯 빛이 나, 남해 바다를 면(面)한 이 산이 관세음보살의 수월도량 (水月道場)인 동시에 화엄경(華嚴經) 보광전회(普光殿會)의 관음회상(觀音會上)임을 확신 하고 이곳에 초옥(草屋)을 짓고 수도하다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친견한 뒤, 산(山)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하고 절 이름 또한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고 하며, 또 다른 창건(創建) 주인공(主人公)은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王妃) 허황옥(許黃玉)의 삼촌인 장유 보옥(長遊 寶玉) 선사(禪師)로서, 금산(錦山)의 자태에 매혹 되어 이곳에 터를 잡고 인도(印度)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모시고 온 관세음보살(觀世音 菩薩)을 모셨다고도 한다. ‘보광산(普光山)’이었던 이 산(山)이 ‘금산(錦山)’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연유는 이성계 (李成桂)가 천운(天運)의 뜻을 품고서 백두산(白頭山)에 들어갔으나 산신(山神)이 받아주지 않아 다시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갔으나 거기서도 백두산(白頭山)과 마찬가지로 쫓겨나자, 마지막으로 남해(南海)섬 보광산(普光山)에 들어와 백일관음기도를 드린 뒤 꿈에 관세음 보살로부터 금척(金尺)을 하사받았다고 하며 비로소 왕조창업(王朝創業)의 뜻을 이룰 수가 있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왜구들이 남해안을 드나들며 분탕(焚蕩)질을 해대어 최영(崔瑩 1316~ 1388) 장군과 이성계(李成桂)가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이곳까지 내려왔던 적이 있기 때문에 신빙성(信憑性)이 있어 보인다. 왕위(王位)에 오른 이성계(李成桂)는 보광산(普光山)에 은혜(恩惠)를 갚기 위해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려 했지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어서, 이에 한 신하가 “비단으로 산(山)을 감싸는건 비용이 많이 들고 영원한 기념이 될 수 없으니 차라리 이름을 ‘비단 산 [금산(錦山)]’으로 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자, 태조(太祖)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보광산(普光山)’의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 조선조 현종(顯宗) 1년(1660)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이곳에서 백일기도(百日祈禱)를 하고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연 것에 감사하는 뜻에서 왕(王)이 이 절을 왕실(王室)의 원당(願堂) 으로 삼고 ‘보리암(菩提庵)’이라고 바꾸었으며, 그 뒤 1901년(年)에 낙서(樂西) 스님과 신욱 (信昱) 스님이 중수(重修)하였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보리암(菩提庵)은 동해 낙산사(洛山寺) 홍련암(紅蓮庵), 서해 강화도(江華島) 보문사(普門寺)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관음 기도 도량이자, 전국의 3대 기도처 중의 하나이며, 설악산(雪嶽山) 봉정암(鳳頂庵), 팔공산(八公山) 갓바위가 낙산사와 보문사를 대신하기도 하지만, 보리암은 3대 기도처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기도의 효험이 높은 곳이다.
○전각 및 성보 문화재 1. 보광전(普光殿) 1969년에 건립된 ‘보광전(普光殿)’은 원래 고대 중인도(古代 中印度) 마가다(摩迦陀 Magadha)국 보리도량(菩提道場)에 있었다고 하는 불전(佛殿)의 명칭으로 부처가『화엄경 (華嚴經)』을 설(說)하는 아홉 번의 법회(法會), 즉 칠처구회(七處九會) 가운데 제2회와 제7회, 제8회가 각각 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 보광법당중회(普光法堂重會), 보광법당삼회 (普光法堂三會)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마도 여기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내부 블단에는 목조 감실관음보살상(木造 龕室觀音菩薩像)이 모셔져 있는데, 이 보살상은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향(香)나무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으로서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통견(通肩)의 법의(法衣)에 결가부좌한 채 아미타불이 새겨진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오른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그 좌우측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이 협시하고 있다.
2. 극락전(極樂殿, 만불전) 이 전각(殿閣)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서 3층 콘크리트 건물 위에 조성돼 있다. 내부에는 1989년에 조성된 목조 아미타삼존불(木造 阿彌陀三尊佛)이 봉안돼 있는데, 구품인(九品印)의 수인(手印)을 취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존(主尊)으로 하고 좌우 협시로는 보관(寶冠)에 아미타불이 새겨진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보관(寶冠)에 정병(淨甁) 이 새겨진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모셔 놓았으며,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뒤에는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이 걸려 있다.
3. 해수관음보살상(海水觀音菩薩像) 해수관음이 보리암에 세워지게 된 것은 고산 스님의 예언 덕분이다. 고산 스님은 “해수관음을 세우면 중생들에게 더없는 기도 도량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헬기를 이용하여 보리암으로 해수관음을 옮기던 날 광채가 나타나는 이적으로 더 유명해졌다.
4. 삼층석탑(三層石塔 : 경남 유형문화재 제74호) 석탑(石塔)이 서 있는 절벽(絶壁)을 ‘탑대(塔臺)’라 부를 정도로 천길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높이 1.65m 크기의 이 탑은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王妃) 허황옥 (許黃玉)이 인도(印度)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올 때 풍파(風波)를 만나 건너오지 못하다가 배의 밑바닥에 파사석(婆娑石)을 싣고 오자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건너오게 되었다고 전해 오는 돌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가져와 역시 허황옥(許黃玉)이 인도(印度)에서 가져온 불사리(佛舍利)를 모시기 위해 탑을 세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탑은 고려 초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이 삼층석탑은 기단(基壇) 남쪽에 나침반을 가져가면 N극과 S극이 남북(南北)을 반대로 가리키는 자기난리(磁氣亂離) 현상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석탑속에 우주의 기가 흐르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어서 혹은 온천수가 흐르기 때문 이라고도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다. 과학 이상의 그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보광전(普光殿) 감실관음보살상(木造 龕室觀音菩薩像)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고 아미타불의 무량공덕을 찬탄하면서 일체중생의 고통을 거두어 주시는 해수관음보살
나침판의 북쪽을 가리키는 빨간 침이 남쪽인 상주 해수욕장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만불전 목조 아미타삼존불(木造 阿彌陀三尊佛)
반야용선사 방생은 다른 이가 잡은 산물고기·날짐승·길짐승 따위의 산 것들을 사서, 산이나 물에 놓아 살려주는 일이다. 또한 방생은 살생과 반대되는 말이다. 살생을 금하는 것은 소극적인 선행(善行)이지만, 방생은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하는 작선(作善)이다.
방생의 근간은 '금광명경(金光明經)'권 4 ‘유수장자품’에서 비롯되었다. 유수장자가 두 아들과 함께 물이 말라붙어 들짐승 길짐승들의 먹이로 전락한 물고기를 살리기 위해 늪에 물을 채우고 먹을 것을 보시했다는 내용이다. 유수장자는 물 속에 들어가 여래십호를 정근하고 십이인연에 대한 법문을 들려주어 물고기들로 하여금 도리천에 나게 하는 공덕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경전이 나온 이후에 물고기를 방생하고 독경하는 방생법회가 생겨났다. 방생에 얽힌 수많은 일화가 있지만 그 중 중국 북송北宋시대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연수스님은 출가 전 직업이 창고지기였는데,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공금으로 물고기와 새우 등을 사서 방생을 하다 들켜 사형선고까지 받았었다. 출가 이후에도 밤에는 귀신에게 밥을 주고, 낮에는 방생을 하여 스님이 앉아 정진하면 품안에서 새가 둥지를 틀었다고 한다.
인광대사(印光大師) 방생십대공덕(放生十大功德) 첫째는 전쟁의 위험이 없다(一者無刀兵劫일자무도병겁).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죽이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개인이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지키고, 나아가 방생을 하게 되면 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므로, 자연 전쟁의 기운은 형체도 없이 소멸된다. 그러므로 방생은 이러한 전쟁의 위험을 막는 적극적인 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나 교육자, 사업가들이 이것에 주의하여 방생운동을 제창한다면 반드시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둘째는 기쁘고 길상스러운 일들이 모두 모인다(二者諸吉祥이자제길상). 우리들이 자비의 마음을 한번만 일으켜도 그 몸에 기쁜 기운이 모이는데, 하물며 죽어 가는 생명을 놓아서 살려주는 방생을 행한다면 기쁘고 성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원리이다. 셋째는 건강하고 오래 산다(三者長壽健康삼자장수건강). 경에 이르되,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고 방생한 사람은 두 가지 복덕의 과보를 받는다. 첫째는 장수(長壽)요, 둘째는 복이 많고 병이 없이 오래 산다"고 하였다. 넷째는 자손이 번창한다(四者多子宣男사자다자선남). 방생이란 하늘과 땅의 체성(體性)과 같아 태어남을 좋아하는 마음이다. 방생은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므로 자손이 창성할 것은 당연하며, 자식 가운데에서도 남자를 얻는 경사를 맞게 된다. 다섯째는 모든 부처님께서 기뻐하신다(五者諸佛歡喜오자제불환희). 일체의 생물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자식과 같이 본다. 따라서 죽어 가는 한 생명을 구하면 바로 부처님의 한 아들을 구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크게 기뻐하시는 것이다. 여섯째는 은혜에 감응한다(六者物類感恩육자물류감은). 죽음에 임박한 생물을 구하여 살려주면 모두 크게 환희하여 은혜에 감응하게 되므로 만겁(萬劫)의 좋은 인연이 된다. 일곱째는 모든 재난이 없다(七者無諸災難칠자무제재난). 자비로운 사람은 복덕이 날로 늘어나기 때문에 일체의 우환과 재난이 모두 형체도 없이 소멸된다. 여덟째는 천상에 태어난다(八者得生天上팔자득생천상).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고 방생하는 사람은 내세에 사왕천에 태어나 끝없는 복을 누린다. 만약 이런 사람이 정토행(淨土行)을 겸하여 수행하면 곧바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 하며, 그 공덕은 실로 다함이 없다. 아홉째는 모든 악이 소멸된다(九者諸惡消滅구자제악소멸). 현대는 극도로 위험한 시대이다. 잘못된 음주 의 버릇과 성(性)의 문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방생하여 은혜에 보답하면 모든 악이 소멸되고 태평하게 된다. 열번째는 복덕과 수명이 영원하다(十者永遠福壽십자영원복수). 동물은 하급에서 고등으로, 인류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이런 점은 동물과 인간이 서로 같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자들이 말하길, "무릇 생물은 외계의 상태에 따라 변화한다. 사람들이 불살생계를 지키고 방생하는 것을 세세 생생토록 쉬지 않으면 착한 마음이 서로 상응하여 자자손손(子子孫孫)으로 서로 전하여 복덕과 장수를 누린다.
이상의 열 가지가 방생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이다. 인간은 본래 자기의 생명을 귀중히 여긴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 존엄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살생을 금하고있다. 그런데 전쟁과 싸움은 상대를 죽이려는 살생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계에서는 널리 방생을 권해서 살생하려는 악의 씨를 뿌리뽑고, 방생으로 자비의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연지대사 칠종 불살생(蓮池大師 七種 不殺生) 첫째는 생일에 살생하지 말라. 내 몸이 출생한 날은 어머님께서 거의 죽을 뻔 하던 때라 이 날은 결코 살생을 경계하며 재계를 가지고 널리 선사(善事)를 행함이 당연한 도리일 것이다. 어찌 하여 어머니 곤란겪은 경위를 잊고 망녕스럽게 생명을 살해하며 위로 부모에게 누를 끼치고 아래로 자기 몸에 이롭지 못하게 하는고? 생일날 살생하는 것이 온 세상 습관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둘째는 자식을 낳거든 살생하지 말라. 무릇 사람이 자식이 없으면 슬퍼하고 자식이 있으면 기뻐하는데 일체금수도 각각 그 자식 사랑함을 생각지 못하는구나! 내 자식을 낳는 것은 좋아도 남의 자식은 죽게 함은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남에게 적덕(積德)을 못할지언정 도리여 살생하야 업을 짓는 것은 가장 어리석음이라 이것을 온 세상이 습관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셋째는 제사 지낼 때 살생하지 말라. 제사지내는 기일은 마땅히 살생을 경계하여 명복을 빌어야 할 것인데 살생의 재물로 제사 지내는 것은 악업만 더하는구나! 대저 팔진미(八珍味)를 망령 앞에 놓을지라도 어찌 구천(九泉)에 가신 유골을 일으켜 흠향(歆饗)토록 하겠는가? 조금도 이익은 없고 해만 됨이거늘 이것을 온 세상이 습관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넷째는 혼례에 살생하지 말라. 혼인이라는 것은 자식낳아 기르는 시초가 아닌가? 삶의 시초에 살생을 하는 것은 이치가 벌써 틀린 것이요 또 혼례는 길사(吉事)인데 흉한 일을 행함이 참혹하지 않은가! 결혼식은 부처해로(夫妻偕老)를 축사(祝辭)하나니 사람은 해로(偕老)하기를 원하면서 금수(禽獸)는 먼저 죽기를 좋아하는가! 사람은 이별을 괴롭다 하면서 금수의 이별을 낙으로 삼는 혼례살생이 온 세상 습관이 되어서 그 잘못됨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다섯째는 연회(宴會) 할 적에 살생을 말라. 양신미경(良辰美景)에 주빈(主賓)이 상대하여 담담한 다과(茶果)와 소사채갱(蔬食菜羹)이 맑은 취미에 방해됨이 없거늘 어찌 살생을 많이 하여 목을 따고 배를 가름에 슬픈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니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야 어찌 비참하지 아니하랴! 만일 식탁에 아름다운 맛이 도마 위에 고통과, 그들의 원한으로 나의 환락을 위하여 작만하였으니 비록 먹더라도 목이 메일것이어늘 연회살생(宴會殺生)에 온 세상이 습관이 되어 그 잘못됨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여섯째는 기도에 살생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에 남의 목숨을 죽여 나의 목숨을 늘이고져 함은 천리(天理)에 어긋나지 않는가! 살생하여 자식을 구하고, 살생하여 재물을 구하고, 살생하여 벼슬을 구하면서 그 아들과 재물과 벼슬이 다 본인의 악도인줄 모르고 귀신이 신령하다 하야 더욱 믿고 더욱 행하나니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일곱째는 직업을 경영함에 살생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의식을 위해서 혹 전렵(佃獵)도 하며 혹 고기도 잡으며 혹 소도 잡고 개도 잡아서 생계를 하지만은 나는 생각하기를 이 노릇을 안 하더라도 밥 못 먹고 못 입어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노라. 살생으로 직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천리(天理)를 어겼을 따름이라 지옥에 깊은 인(因)을 심고 내세에 악보를 받음이 이보다 심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따로 생계를 구하지 못하는고. 참으로 통곡하고 장탄식할 일이로다.
위 반야용선 관련 사진은 반야용선사 홈피에서 스크랩하였습니다.
적석도인의 칠종방생 적석도인(赤石道人)은 다음의 일곱 가지 경우에는 꼭 방생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첫째는 자식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방생하라(求子孫者放生구자손자방생). 세상 사람이 자식을 얻고자 약 먹기에 힘을 쓰나 한 평생을 먹더라도 효험을 보지못하는 자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병이 있거든 약을 먹고, 자식이 없거든 방생하라.'고 권한다. 천지의 큰 덕은 태어남이다. 진실로 남의 생명을 살려주면 곧 나를 살려주는 것이다. 방생을 하면 원하는 자식을 얻을 수 있다. 둘째는 자식을 잉태하면 반드시 방생하여 산모(産母)를 보전하라(孕胎者放生잉태자방생). 잉태하여 자식을 보는 것은 사람과 만물이 다르지 않다. 만물은 천지(天地)의 낳은[生]바라 짐승의 새끼 가짐을 내가 구해주는데, 내가 자식을 잉태하면 하늘이 어찌 보호하지 않겠는가. 셋째는 기도함에 반드시 방생하여 복을 많이 지어라(所願者放生소원자방생). 태어남을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은 제신(諸神)과 부처님이 동일하다. 이러한 제신과 부처님의 호생지덕을 생각하여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인 생물들을 살려주어라. 만일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는 염불이라도 해주면 자연히 하늘이 감동하여 복을 얻음이 한량 없을 것이다. 넷째는 미리 닦고자 하거든 방생부터 먼저 하라(豫修者放生예수자방생). 세간의 자선(慈善)은 방생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내가 자비의 마음으로 방생하면 반드시 불보살님의 가피의 덕을 입을 것이다. 다섯째는 재계(齋戒)를 가짐에 반드시 방생하라(齋戒者放生재계자방생).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계율 지키는 것을 좋아하심은 만물의 자비심 두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아들 아님이 없다. 진실로 재계를 가지는 날에 방생하면 제불보살이 환희심을 낸다. 여섯째는 복록(福祿)을 구함에 먼저 방생하여 복을 쌓아라 (求祿者放生구록자방생). 부귀명복(富貴命福)은 요행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복을 짓는 자 반드시 명복(命福)을 얻는다. 사람이 어진 마음으로 생물을 어여삐 여겨 그 목숨을 구제해 주면 나의 구제를 입은 자가 기회를 보아 보답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일곱째는 염불함에 반드시 방생부터 하라(念佛信仰者放生염불신앙자방생). 산중에 있어서 참선을 오래도록 하다가 하루 아침에 견성오도(見性悟道)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홍진중(紅塵中)에 있어 염불하는 자는 자비심으로써 방생을 주로 할지라. 물(物)을 구제함이 인(人)을 구제함보다 낫다 함은 아니지만 사람이 극형을 범하는 것은 대개 자작장난(自作障難)이나 동물은 무슨 죄로 참혹한 환란을 자주 만나는가. 누구든지 연지대사와 영명연수선사의 방생으로써 급무(急務) 삼음을 보아 깨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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