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월정사 불기 2558(2014)년 7월 13일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月精寺)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의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다.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어 왔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3(卷 第三) 탑상제4(塔像第四)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편에 보면 (아래 빨간 줄친곳)>
『동대(東臺)인 만월산(滿月山)에 1만 관음보살[觀音]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고,
남대(南臺)인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수위로 한 1만 지장보살[地藏], 서대(西臺)인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수위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 북대(北臺)인 상왕산 (象王山)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수위로 한 5백 대아라한(大阿羅漢), 중대(中臺)인 풍로산(風盧山) 다른 이름으로 지로산(地盧山)에는 비로자나(毘盧遮那)를 수위로 한 1만 문수보살[文殊]의 진신이 나타나 있었다. 이와 같은 5만 진신에게 일일이 우러러 예배하였다.(如是五萬真身一一瞻禮) <신라의 보천(寳川), 효명(孝明) 두 태자가 오대산에 머물며 정진하던중 하루는 두 태자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가 우러러 배례하려고 하니, 다섯 봉우리에 5만 진신이 나타나 있어 일일이 첨례(瞻禮)하였다는 전후 내용이다.>』
그 오대산의중심 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1400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곳 전나무 숲의 그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僧伽)의 얼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이었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 는 게송을 문수로부터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 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 뒤로 유동(儒童)보살[선혜(善慧)보살 또는 수메다(Sumedha, 無垢光)라고도 함, 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燃燈佛, Dipamkara)에게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이름]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와 또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두타승 신의 스님이 자장율사가 초가를 지었던 터에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 이후로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 있던 이 암자는 수다사(水多寺, 진부면 수항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의 장로 유연스님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로 차츰 규모가 커졌다. 그 무렵의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고려 충렬왕 33년(1377)에 화재로 모두 타버린 것을 이일스님이 중창하고 조선시대까지 계속 법등을 밝혀 왔는데 조선 순조 33년(1833)에 또다시 큰 화재를 입고 말았다. 그런 지 12년 뒤인 헌종 10년(1844)에 이르러 영담, 정암 스님 같은 분이 앞장서서 중건하여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다시 회복하였다. 1911년에는 전국 31본산의 가운데 하나가 되어 강원도 남부의 사찰을 총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랜 역사를 간직해 오던 월정사는 1950년 6. 25 전쟁의 참화로 칠불보전 (七佛寶殿)을 비롯하여 영산전, 광응전, 진영각 등 17동 건물이 모두 불타고 소장 문화재와 사료들도 모두 재가 되어버린 비운을 맞이했다.
지금의 월정사는 1964년 탄허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하고 그 뒤로 만화스님과 현해스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중건하여 이룩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엿한 대가람의 모습을 되찾게 된 월정사는 비록 몇 차례 화재와 전화로 많은 성물(聖物)과 문화재를 잃긴 하였으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지닌 당우들이며 국보로 지정된 팔각구층석탑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중대 사자암 적멸보궁과 상원사 참배를 마치고, 포교사단 강원지역단 사찰문화해설 총괄1팀 최자규 팀장과 정진순 포교사님 등 3분의 안내로 월정사 일주문이나 금강교까지 내려가지 않고, 내려가는 중간에 오대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받도록 '월정사' 정면으로 오대천을 이어주는 '만월교'를 지나 '용금루'로 향하고 있다.
용금루(湧金樓)는 본래 팔각구층석탑 가까이 있던 것을 199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누각의 기초를 화강석 기둥으로 하였고 밑으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한 누마루형식의 건축으로 용금루의 계단을 한단한단 오르면 월정사경내가 마치 불계(佛界)와도 같이 조금씩 가까워오는 구조로 월정사의 장엄함을 경험하게 하는 구조라고 하겠다.
월정사성보박물관 특별전시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으로 팔작지붕이다. 1977년 만화스님이 중건했다.
월정사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을 들고 또 다른 한분이 공양물을 가져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적광전(寂光殿) 팔각구층석탑 뒤에 만월산 자락의 한 기운이 엉긴 곳에 자리한 적광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매우 큰 법당으로,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갖가지 문양이 어우러진 단청은 매우 화려하다.
1930년대의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과거 7불을 보신 칠불보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아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968년에 만화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다시 중건되었다.
적광전 외부 기둥 18개 중 16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이고 2개는 괴목이며, 내부기둥 10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다. 적광전이 소실되기 전에는 칠불보전(七佛寶殿)이라 했다.
대체로 적광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 적광전은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의 불상 형태를 그대로 따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이는 1964년 만화스님 법당 중창당시에는 현판이 대웅전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탄허스님의 오대산수도원을 기념하기 위해 결사의 주(主) 경전이었던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의미로 적광전으로 고쳐 현판을 달았다.
적광전 뒷면 벽화는 10개의 소를 찾아 다니는 이야기를 그린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적광전 현판과 주련柱聯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주련의 넉 줄은 자장율사의 불탑게이다. 월정사 홈피에 주련글은 "자장율사 불탑게"라고 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당나라 때의 속고승전,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찾아보았으나, 위의 글이 "자장율사가 지었다"는 전거를 찾을 수 없었다. 현재 내가 확인한 월정사 적광전 주련글에 대한 문헌상의 전거는 석문의범(釋門儀範1931년 초판 /安震湖 編輯)의 대예참례에 나오는 게송 중의 하나이다.(대예참례중 제9정례, 아래 석문의범 해당면 사진중 빨간 줄친 부분) 통도사 적멸보궁 주련은 다음과 같이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示跡雙林問幾秋 시적쌍림문기추 文殊留寶待時求 문수유보대시구 全身舍利今猶在 전신사리금유재 普使群生禮不休 보사군생예불휴 쌍림에서 열반드심 묻노니 몇년인고 문수보살이 보배를 가지고 때를 기다렸네. 부처님 전신사리가 지금 여기에 있으니 널리 수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쉼없이 예배케 하라.
적광전 석가모니 부처님 삼국유사에 명당으로 기록된 월정사의 혈처가 부처님 바로 뒤라고 하여 부처님 앞에 잠시 좌정 오대산의 응집된 생기를 받았습니다.
삼국유사에서 명당이라고 언급되는 곳은 경주안의 전불시대(前佛時代) 칠처가람지(七處伽籃址)와 울산의 영취사(靈鷲寺) 그리고 월정사(月精寺)로 총 9군데 라고 한다. 이중 칠처가람지와 영취사는 전불시대의 가람지라는 불연(佛緣)에 기초한 명당이고 월정사는 相地者[지관]의 견해라고 되어 있어 지형지세에 입각한 명당이라는 점과 칠처가람지 7군데와 영취사는 경주와 경주 인근인데 비하여 월정사는 경주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명당으로 기록된 점을 보면 월정사가 명당중에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 권 제3(三國遺事 卷 第三) 제4탑상(塔像第四) 대산월정사5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조에 相地者云 國内名山 此地最勝 佛法長興之處云云 땅을 자세히 보는 사람[地師]이 말하기를, “국내의 명산 중에서 이 땅이 가장 좋은 땅이므로 불법(佛法)이 길이 흥할 곳이다……”라고 하였다.
더위 좀 식히라고 아래 위로 올 1월 1일 사진입니다
포교사단 강원지역단 정진순 포교사님이 월정사에 대하여 해설하고 있습니다.
해운대에서 온 통도사 포교사 보살님 번호패에 고추잠자리 한마리가 편안히 앉아 선정에 들어 있습니다.
올 1월 1일 사진인데 탑돌이전 더위좀 식히고 .....
월정사 정진순 포교사님과 수행심 보살님따라 탑돌이 중입니다.
탑돌이 김영임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부처님은 성중의성 중생들의 자부시고 하늘중의 하늘이며 온누리의 빛이시어라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대자대비 상서구름 온누리를 감싸시고 대지혜의 감로수는 모든중생 기르시네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하늘보다 넓고넓은 원력바다 깊으시고 훤칠하신 큰 위덕은 햇살같이 눈부셔라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오 오 오- - 오 오- 오- -오 부처님은 성중의성 중생들 자부시고 하늘중의 하늘이며 온누리의 빛이시어라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대자대비 상서구름 온누리를 감싸시고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대지혜의 감로수는 모든중생 기르시네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하늘보다 넓고넓은 원력바다 깊으시고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오 - - 오 - - - 오- - 오- - - 부처님은 성중성 중생들의 자부시고 하늘중의 하늘이며 온누리의 빛이시어라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도세 도세 백팔번을 도세
팔각 구층석탑 (八角 九層石塔) - 국보 제48호 탑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신 안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고, 몸돌은 모서리마다 귀기둥이 새겨지고 끝은 밑면이 수평이고 위는 곡면으로 처리하여 추녀 끝이 살짝 위로 솟아 가뜬해 보이며 추녀 끝마다 풍탁이 달려 탑은 언제나 바람의 향기를 음미한다.
팔각구층석탑 앞에 있는 이 보살좌상은 근래에 조각되어 조성된 것이고, 원래 석조보살좌상은 현재 성보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밝은색의 복제된 석조보살좌상과 탑이 약간은 부조화 스럽다.
흐트러짐이 없는 정연한 상륜은 보탑의 격조를 한층 더하여 주며, 여기에 금동장식을 더하여 탑 위에 보관을 얹은 듯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하여 보탑의 절정부는 세련된 조형미를 유감없이 발휘 하였다.
석조보살좌상 (石造菩薩坐像) - 보물 제139호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팔각구층석탑앞에는 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공양을 드리는 모습을 한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입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 보살상을 일명 약왕보살(藥王菩薩)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된 이 보살상은 턱이 약간 길고 눈두덩이 두껍고 뺨은 도톰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어 복스럽게 느껴진다. 머리위에 높다란 원통형 관을 쓰고 있는데 관 옆에 작은 구멍이 얕게 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에 장식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발(寶髮)은 양 어깨의 앞과 뒤로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고, 두 귀는 보발 등으로 살짝 감추어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기고 앞가슴은 영락으로 장엄한 채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아 무엇을 잡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금 아래로 내려놓은 오른쪽 팔꿈치는 아래에 받침을 괴었는데, 재미있게도 이 받침은 동자상(童子像)이다.(여기 성보박물관 보살상에는 동자상이 안보임) 대좌는 둥글며 커다란 중판연화문(重辦蓮花文)을 조각했다.
이 보살은 탑을 향하여 한가운데가 아닌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앉아 있고, 상체가 하체에 견주어 큰데 이것은 우리 눈의 착시현상을 감안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것은 고대 인도의 관습에 따라 자신을 낮추고 스승에게 최상의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보살상이 약왕보살임 은 법화경에 잘 나와 있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는 과거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희견보살 (喜見菩薩)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체색신삼매(炫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 환희심에 가득한 보살은 여러 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이백 년 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월정명덕국(日月淨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명덕여래는 그가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러고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칠만 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약왕보살이다.
금강루(金剛樓)
월정사의 금강루는 사천왕문을 지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월정사는 불이문의 자리에 금강문을 두고 있다. 금강문의 오른쪽에는 아금강역사상이라고도 하는 나라연금강이,
왼쪽에는 훔금강역사상이라고도 불리우는 밀적금강이 있으며 특히 밀적금강역사는 지혜의 무기인 금강저를 들고 부처님을 호위한다.
천왕문(天王門)
일명 사천왕문四天王門이라고도 하며 대개 일주문 다음에 천왕문(天王門)이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수미산 중턱에 살고 있는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신장神將을 모신 전각이다. 이 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 서, 남, 북에서 그들 무리와 살면서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며 불법을 수호한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왼손에 비파를 들었고, 남방 증장천왕僧長天王은 오른손에 보검을 들었고,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오른손에 용을 왼손에 여의주를 들었고,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월정사의 천왕문은 조선시대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천왕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벽화에는 중국선종의 제2대조인 혜가, 부모은중경, 자장율사, 지장보살, 포대선인, 기인 한산의 설화가 그림으로 설명되어있다. 1974년 만화스님이 중건했다.
천왕문을 나서 전나무 숲길을 걸어 일주문으로 향하는데.....
광릉 국립수목원, 그리고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길이다. 원래는 소나무가 울창하던 이곳이 전나무 숲이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고려 말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가 부처에게 공양을 하고 있는데 소나무에 쌓였던 눈이 그릇으로 떨어졌다. 그 때 어디선가 나타난 산신령이 공양을 망친 소나무를 꾸짖고 대신 전나무 9그루에게 절을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전나무 숲길을 온몸에 담으려는 듯 맨발로 전나무 숲길을 걷는 괴정동 보살님들..... 덕분에 예정시간보다 늦어지긴 해도....... 홍진에 묻혀 살다가 오랫만에 그런대로 조금이나마 탐진치를 내려 놓고,
잔잔한 힐링산보에 마음속 파도는 사그러들고 심신은 날아 갈듯 맑아집니다.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옛사람 풍류는 탐진치를 떠난 풍류일런가?
삭발기념탑을 보니 마음이 묘해진다. 일주문에 이르기전에 삭발 기념탑이 서 있다. 이 삭발기념탑은 우리나라 유일의 삭발탑이라고 하며, 2004년 단기 출가학교 개교시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보전(寶殿)에 주인공이 꿈만 꾸더니 무명초(無名草) 몇 해를 무성했던고 금강보검(金剛寶劍) 번쩍 깎아버리니
무한광명(無限光明)이 대천세계(大千世界) 비추네 (삭발기념탑 비문 중)
'출가 그리고 삭발. 자기 성찰을 통한 인격체 형성과 삶의 긍정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출가한 이들의 삭발을 기념하여 무명초((無名草)를 묻는다. 사파(裟婆)의 여정에 가끔 이 곳 을 들러 일주문 밖 어디 쯤인가에서 서성이고 있을 초발심 때의 그 간절했던 마음을 추슬러 삶을 좀 더 치열하게 살 수 있는 지남(指南)이 되고자 이 탑을 세운다. 불기 2548년 9월15일 월정사 단기출가학교' (월정사 동은 스님의 글)
일주문 현판 '月精大伽籃(월정대가람)'은 탄허스님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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