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상원사 불기 2558(2014)년 7월 13일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
예정에 없던 중대 사자암 적멸보궁에서의 금강경 독송 기도에 동참하게 되어, 계획된 시간보다 늦게 상원사에 도착하게 되었지만, 적멸보궁에서의 금강경 독송 기도 인연공덕을 짓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五類聖衆)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 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元年)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쫓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여기까지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임)
고려 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거세어져 불교는 극박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또 나아가서는 권근(權近) 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게 하라'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 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관대걸이 / 상원사 주차장에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옆에 서 있는 관대걸이는 조선 세조 대왕이 이곳에 의복을 벗어 걸고 목욕하여 병이 나은 곳이다.
문수전(文殊殿) / 문수전은 상원사의 본전으로 1947년 월정사 주지 지암 스님이 금강산 마하연의 건물을 본떠 지었다. 동북 45도 방향 정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육이오 전쟁때 군인들이 법당을 불태우려 하자 한암스님께서 목숨을 걸고 지켜낸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 사진은 금년 1월 1일 낙산사에서 일출을 본 후 사자암 적멸보궁과 상원사 월정사 순례시 사진인데 막바지 더위도 시원하게 날려 보내라고.......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像) -국보 제221호 목조문수보살좌상 - 보물 제1811호 문수전 안에 봉안된 세조때 조성한 목조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과 현종2년에 조성된 목조문수보살좌상(보물 제1811호) 영락이 달린 목걸이와 통견의 천의를 걸치고 阿彌陀九品印(아미타구품인)을 하고 있는 목조 문수동자상은 조각 수법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1984년 7월 문수동자상에서 조성발원문 등 23점의 복장(腹藏)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 불상이 조선 세조 12년(1466)에 조성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발원문과 함께 나온 조선시대 초기의 의상과 다수의 불경은 조선 복식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문수동자상은 조선 세조 대왕이 직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고양이 석상 / 오대산에서 불치의 병을 고친 세조는 이듬해 다시 이적의 성지 를 찾았다. 상원사에 당도한 세조는 곧바로 법당으로 올라가 예배를 올리고자 하였다. 그때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는데 알고 보니 법당 안에 자객이 숨어 들어 있었다 한다. 세조는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에 고양이를 위한 밭[猫田(묘전)]을 하사하고, 한 쌍의 묘상(猫像)을 석물로 만들어 안치하였다. 그리고 고양이를 죽이지 말고 잘 보호하라는 왕명을 내렸고, 서울 근교에도 여러군데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다는 것이다. 지금도 서울의 봉은사에 있는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문수전에 걸려 있는 주련의 글씨는 탄허스님의 글씨입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찬탄한 게송으로 조인(祖印)이란 조사의 심인(心印)이란 뜻으로 해석되며 세간의 인형(印形)처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심인(心印)이라 하는 듯 합니다. 칠불(七佛)은 과거칠불(過去七佛)로 문수보살을 일러 칠불(七佛)의 사(師)라고 하는데, 과거 장엄겁(莊嚴劫)중에 출현한 제1 비바시불, 제2 시기불, 제3 비사부불, 현겁(賢劫) 중에 출현한 제4 구류손불, 제5 구나함모니불, 제6 가섭불, 제7 석가모니불의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대품반야경>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왼쪽에 서서 상징하는 지혜, 즉 반야는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또, <불설방발경(佛說放鉢經)>에 “지금 내가 부처가 되어 32상과 80종호를 갖추고 존귀한 위신(威神)으로 시방의 모든 중생들을 도탈(度脫)시키는 것은 다 문수사리의 은혜이니라. 그는 본래 바로 나의 스승이고 과거의 무수히 많은 모든 부처님이 바로 문수사리의 제자이며, 앞으로 올 부처님들도 다 그의 위신과 은혜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라.”(아래 사진 고려대장경 인경본 빨간 줄친부분)를 참조하면 위 게송중 ‘칠불의 스승’이란 표현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근대 禪의 중흥조이신 경허스님의 선시이다. 경허집에 與永明堂行佛靈途中(여영명당행불영도중 : 영명당과 함께 불령으로 가는 도중에 혹은 불영 가는 길에 영명당에게 주다)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선사의 선지가 번뜩이는 선시를 어찌 가늠이라도 하랴마는, 내 나름대로 대략의 뜻을 유추해 보면, 참이나 거짓 모두가 실체나 자성이 없이 경계에 끌려다니는 망념에서 왔으니, 마치 안개가 드리우고 무성한 나뭇잎에 덮인 청산이 청산 본래 모습이 아니라, 안개 걷히고 낙엽진 청산이 청산의 본래 모습이듯, 참과 거짓이라는 나뭇잎과 안개같은 망념을 걷어내면 본래 모습이 드러난다고 풀이해 봅니다. 옳은 풀이인지 경허스님께 물어 봐도 답은 없으리라 봅니다.
영산전(靈山殿) / 오대산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이며, 1946년 화재시 유일하게 화마를 피한 전각이다. 법당에는 석가모니 삼존상과 십육 나한상을 봉안 하였는데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영산전이라 한다. 또한 세조가 희사한 39함의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었다. 현재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장경은 본래 다섯 질을 인행하여 삼보사찰과 설악산 오세암, 상원사에 봉안하였는데, 오세암 장경은 소실되고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월정사에만 보존되어 있다.
상원사 영산전 석가삼존ㆍ십육나한상 및 권속 (上院寺 靈山殿 釋迦三尊ㆍ 十六羅漢像 및 眷屬)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이 불상들은 조각수법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제작연대(1711년) 및 작자를 명확히 알려주는 복장유물을 동반하고 있고, 개성 있고 다양한 모습의 특징 있는 형태들로 당대 16나한상 연구에 중요시 되어야 할 작품이다.
영산전 탑 /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영산전 석탑은 기단부터 상층부에 이르기까지 탑 전체가 여러가지 무늬와 불상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심하게 파손되어 탑신의 형체를 알 수 없고 층수 마저도 파악되지 않은 채 보전돼 있다. 기단에는 구름과 용, 연꽃 등의 무늬와 탑신에는 통일신라 양식의 불상이 한 면에 4존씩 조각되어 있으며, 비록 복원이 어려운 상태로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소박하면서도 당당하게 천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鍾) - 국보 제36호(종각이 수리중이어서 위사진은 2010년 6월 27일 14차 고찰순례시 사진임)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현존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종으로,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있고 그 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어 있다. 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채로 음각되었는데 첫머리에 '개원 십삼 년 을축 3월 8일 종성기지(開元 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鍾成記之)'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4개의 연곽에는 각 9개의 연뢰가 있으며, 종복(鐘復)에는 당좌(撞座)와 교대로 있는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의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나 또 공후(箜篌)와 생(笙)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종은 안동 근처의 어느 사찰에 봉안되어 있다가 태종이 불교를 박해할 때 안동 문루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조 때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팔도에서 찾고 있던 중 안동에 있던 이 종이 선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승하한 직후인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도달했다고 한다. 종을 안동에서부터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斤)이나 되는 큰 종이 장차 죽령(竹嶺)을 넘으려 하는데 노상에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종 꼭지를 하나 떼어서 안동으로 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설을 입증하듯 네개의 연곽중 하나에 연뢰 하나가 없다.(사진 화살표 부분)
<비천상에서 고조선시대 시가로 알려진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연상시킨 글이 있어 아래에 옮겨와 봤습니다.> 상원사종의 종복(鍾腹)에는 대칭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두 명의 비천상이 공후와 생황을 연주하는게 보인다. 비단 옷깃을 날리면서 구름을 타고 있는 비천은 금방이라도 날아 가버릴까 염려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잘 보니 공후를 타는 비천은 분명 백수광부의 아내인 것이다. 미쳐버린 남편을 쫓아가 공후를 뜯으며 부르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내의 슬픔이 하늘을 향해 오르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승화되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남편을 부르는 여인의 노래가 청승맞기는커녕 듣는 이의 애까지도 끊어놓을 정도인 것이다. 公無渡河(공무도하) 님이여 저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下(공경도하) 그러나 님은 저 물을 건너고 마네.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빠져 죽고 말다니, 當奈公何(당내공하) 어찌할거나 아 어찌할거나 [출처] 노래가 들리는 신라의 범종|작성자 지중해
사진 위 중창권선문표지, 아래 중창권선문수결인기부분 (사진출처:문화재청) 상원사 중창권선문 (上院寺 重創勸善文) - 국보 제292호 세조 10년(1464) 세조의 왕사인 혜각존자 신미(信眉)스님이 학열(學悅), 학조(學祖)스님과 함께 상원사를 중수하려 하자, 이 말을 들은 세조는 쌀, 무명, 베, 철 등의 하사품과 함께 그 취지를 쓴 글을 보냈고, 신미가 그 하사품을 받고 쓴 글 등을 2책으로 함께 구성한 것이 상원사 중창권선문이다. 중창권선문의 세조가 쓴 글에는 세조와 왕세자의 수결과 인기(印記), 효령대군 이하 여러 종실과 신하들의 이름과 수결이 있고,
다른 한 책은 권선문을 한문으로 쓴 다음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을 붙이고 뒤에 「불제자승천체도열문영무조선국왕이기(佛弟子承天體道烈文英武朝鮮國王李玘)」라고 쓰고 수결을 한 뒤에「체천지보(體天之寶)」라고 새긴 옥새를 찍었으며,
다음 줄에 「자성왕비윤씨(慈聖王妃尹氏)」라고 쓴 아래 「자성왕비지보(慈聖王妃之寶)」라고 새긴 왕비인을 찍고 다음에 왕세자, 세자빈 한씨 이하 관인들의 인기를 찍었다. 권선문 끝에 천순팔년납월십팔일(天順八年臘月十八日)이라 씌여져 세조 10년 즉 1464년 12월에 제작된 것으로 풀이된다. 권선문은 훈민정음을 제정한 이후 직접 묵서(墨書)한 가장 오래된 필사본인데다 세조와 상원사, 신미와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 당시의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월정사 성보박물관(보장각寶藏閣)에 소장되어 있다.
위 문수동자좌상복장유물 위 문수동자좌상복장유물중 묘법연화경 위 아래 문수동자좌상복장유물중 오대진언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像 腹藏遺物) -보물 제793호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에서 1984년 7월 불상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 2개의 발원문(發願文)과 조선 전기의 복식, 전적류 등 23점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발원문은 상원사문수동자상 및 여러 불·보살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고, 전적 중 제진언은 조선 전기 필사본으로는 유례가 드문 것이며, 그밖에 활자본과 목판본은 나름대로의 서지학적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복식류는 조선 전기의 의류로 현재까지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서쪽으로 돌아간 달마의 남겨둔 짚신 한짝은....? 아직도 한쪽이 맨발입니다. ...ㅎㅎㅎ
상원사 순례를 마치면서 전소될 위기를 법력으로 맊아낸 한암스님의 자취를 느껴봅니다.
시봉하던 제자마저 일부러 심부름을 보내고 홀로 자리에 앉은채 좌탈입망(坐脫立亡)하신 스님, 마침 절에 들른 국군8사단 정훈장교인 김현기대위가 그 열반 직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스님의 마지막 모습은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김현기대위의 육사동기이며 인접 사단에서 정훈장교로 근무하던 소설가, 선우휘는 한암스님의 상원사 이야기를 전해 듣고,1969년 1월의 '월간 중앙'에 "상원사"라는 단편소설을 기고했다.
한암스님(1876~1951) 1925년 봉은사 조실로 계실 때 조선총독부에서 협조를 요청하자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익히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에 은둔, 입적하실 때까지 27년간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6.25 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한암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이어 1.4후퇴 때에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잠깐 기다리라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수(垂)하고 법당에 들어가 정좌한 뒤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당신이 군인의 본분에 따라 명령에 복종하듯이
절을 지키는 것도 나의 도리이다. 중이 죽으면 어차피 화장을 해야 하는 것, 이제 불을 지르시오." 했다. 스님의 법력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불을 지르고 떠났다.
입적하기 15일 전부터 사바세계의 연(緣)이 다함을 알고 물외에는 먹지 않았다.
1951년 3월 21일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세수 75세, 법랍 54세) (출처:조연현기자, 한계례)
* 경허-한암 : 스승과 제자의 이별시
초대종정 한암스님 21살 때 금강산에서 출가한 한암은 대도인 경허 선사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헤맨 끝에 23살때 경북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를 친견한다. 경허는“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금강경〉한 구절로 아직 외형만을 향하던 청년 한암의 심안을 열어주었다.
경허는 바람이었다. 한곳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경허는 누구에게도 집착하는 법이 없었다. 말년에 홀연히 함경도 삼수갑산에 머리를 기르고 숨어든 그를 애제자 수월이 찾아왔을 때도 방문을 열지 않은 채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는 말 한마디로 돌려보낸 경허다. 그런 경허가 한암에게만 예외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도암과 해인사에서 1년을 함께한 뒤 경허는 한암과 헤어짐을 너무나 아쉬워했다.
(출처:http://bosal.hihome.com/Import!!!!!edFiles/woljeong/wj_fm80.htm)
경허 화상이 한암스님에게 준 전별사 “나는 천성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 겸하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삽살개 뒷다리처럼 너절하게 4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히 해인정사에서 한암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성행(性行)은 순직하고 학문이 고명하여 1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평생에 처음 만난 사람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오늘 서로 이별을 하는 마당을 당하게 되니 조모(朝暮)의 연운(煙雲)과 산해(山海)의 원근(遠近)이 진실로 영송(迎送)하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즉, 이별의 섭섭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고 하지 않았는가.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 마음이 통하는 친한 벗)이 되랴. 그러므로 여기 시 한 수를 지어서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
捲將窮髮垂天翼 (권장궁발수천익) 謾向槍楡且幾時 (만향창유차기시) 分離尙矣非難事 (분리상의비난사) 所慮浮生杳後期 (소려부생묘후기) 북해에 높이 뜬 붕새 같은 포부로, 부질없이 얼마나 나뭇가지를 넘나들었던가! 이별은 예사라서 어려운 게 아니지만 덧 없는 인생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나리.
한암스님은 이와 같은 경허 화상의 전별사(餞別辭)를 받아 보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로 답을 하고 이별을 아쉬워했을 뿐 경허화상을 좇지는 않았다. 霜菊雪梅纔過了 (상국설매재과료) 如何承侍不多時 (여하승시불다시) 萬古光明心月在 (만고광명심월재) 更何浮世謾留期 (갱하부세만류기) 서리 국화(霜菊) 설중매 이제 막 넘었는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을 수 없나이까!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이 있는데, 뜬 세상 뒷날의 기약은 부질없습니다. (출처: 한암 일발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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