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108)천년고찰순례기

[스크랩] 수도산 수도암 순례기 - 불기 2558년 9월 21일

청원1 2014. 10. 28. 12:41

 

 

 

수도산 수도암

불기 2558(2014)년 9월 21일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

 

 

  9월 21일 ‘백팔고찰순례단’의 불령산 수도암, 청암사, 황악산 직지사 순례에는 기존 정회원과

  동아대학교 교수불자회 회장과 학생처장, 대학원장을 엮임한 오교수님 일행, 인근 괴정동 거주

  통도사 사찰 안내팀인 ‘적멸도량회’ 소속 지혜심보살님의 도반들, 통도사 포교사 등의 동참으로

  진행상 필요한 공석 2석을 제외한 탑승 가능 좌석인 42석을 전부 채운 총42명이 동참하기로

  하였는데, 당일 정회원중 한분이 직장일로 불참하게 되어 41명이 동참 순례하였습니다.

 

  이번 순례에서는 안연숙 보살님이 수도암 종무소에 부탁하여 10만원을 수도암에 미리

  송금하고 고맙게도 수도암 종무소 보살님이 현지에서 과일을 구입하여 대적광전에 신선한

  과일 공양을 올렸으며,

  자비명상반 김영희(선법등)보살님이 대광명전과, 약광전, 나한전에

  각각 떡을 공양 올리고, 우리 고찰순례단의 집전을 맡고 있는 전문 포교사인 강정희(수행심)

  보살님이 버스내에서의 순례단원 간식으로 떡을 3되 보시하셨습니다.

  세분 이 인연 공덕으로 복덕이 증장되어 항상 행복하시고

  불보살님의 자비광명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_()_

 

  출발시간 20분전에 불교TV에서 발매한 새벽예불 DVD가 돌아가면 버스는 도량송과 종송,

  타고명종이 울리는 도량이 됩니다. 출발 5분후면 오분향례가 진행되고 이어서 칠정례가 시작되면

  전문포교사인 수행심 보살님의 목탁과 DVD에 따라 예불을 올리고, 이산혜연선사 발원문, 반야심경,

  천수경 봉송으로 차내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명제에 따라 순례사찰에 대한 사전지식 습득과 모아두면 하나의 사찰안내

  책자가 되도록 칼라로 인쇄된 A4용지 10페이지 분량의 사찰안내 인쇄물(사진 위)을 배부하였으며,

  버스내 새벽예불후

  (1)나를 찾아 떠나는 길 암자 ‘수도산 수도암’(20분)

  (2)한국의 명찰 ‘불령산 청암사’(45분)

  (3)한국의 명찰 ‘황악산 직지사’(45분)

  DVD(사진 아래)를 불교TV에서 구입하여 버스내에서 방영하였습니다.

 

  ▲06시 15분에 사하구 당리를 출발하여 2시간 가까이 지났습니다.

  고속도로위를 질주하는 차내에는 백의관음과 미륵보살의 화신인 포대화상의 자비가 충만합니다.

 

  ▲수도암 선원장이신 원인스님께서 2013년에 신축한 '봉황루'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수도암은, 수도산(修道山:해발1,317m) 정상 가까이 해발1,080m에 자리 잡은 청암사 (靑巖寺)의 부속

  암자로 헌안왕(憲安王) 3년(859년)에 도선 국사(道詵 國師)가 창건하였고, 전국 3,800여곳을 돌아 본

  도선국사가 이 절터를 찾은 기쁨에 일주일간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 절은 무수한 수행인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산과 도량 이름을 각각 수도산, 수도암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약 100여년 전부터, 부처님의 영험과 가피가 많다고 하여 사람들이 ‘불령산’ 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으며,

  또한 이 곳 석불 이마에서 자주 방광(放光)이 있었으므로, ‘불령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은 근현대에 한국불교를 이끈 여러 큰스님들이 수행 정진하였으며, 이런 큰스님들의 치열한

  구도 정신이 스며있다.(경허, 한암, 경봉, 보문. 효봉, 동산. 금오. 전강. 구산, 관응, 고송, 석주,

  법전, 보성 큰스님 등)

  근대 한국불교의 최고 선승(禪僧)중 한분으로서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서 경허 선풍(鏡虛 禪風)을

  날린 한암 중원(漢巖 重遠 : 1876~1951) 스님이 이곳에서 일찍이 경허 성우(鏡虛 惺牛 : 1849~1912)

  대선사(大禪師)를 만나 도(道)를 인가(認可)받고는 제자(弟子)가 되었으며,

  그 후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의『수심결(修心訣)』을 읽고서 깨달음을 얻어 다음의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는 곳이기도 하다.

 

  ▲하늘과 맞다은 부처님 세계가 닦아오고.....

 

  ▲부처님전에 올릴 공양물을 어깨에 받쳐든 보살님

 

  ▲대적광전 앞에는 연화봉(가야산 상왕봉)이 서서히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풍수지리적으로는 젊은 여인이 앉아서 비단을 짜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으로 불린다.

  이곳 풍수(風水)의 백미(白眉)는 앞에 보이는 가야산 상왕봉(象王峰:해발1,430m)으로 그 모양이

  연(蓮)꽃을 닮았는데, 이런 모양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마당에서만 제대로 나온다고 한다.

  가야산 상왕봉이 형국론(形局論)으로 베 매는 데 실을 켕기는 제구(製具)인 ‘끌개돌’이 되고,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마당의 쌍탑은 베틀의 두 기둥이 되고,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을 모신자리가

  옥녀(玉女)가 앉아 베를 짜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관음전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베틀에 필요한 물을 제공한다고 한다.

  연못에 물이 가득하면 사운(寺運)이 창성한다고 전한다.

 

  절 왼쪽으로 청룡등이 길고 힘차게 뻗어 수도암 터를 감싸고, 우측으로는 백호등이 웅장하게 내려와

  선방 앞에 묘한 봉우리를 만들어 절을 지켜주고 있다.

  정면의 가야산 상왕봉은 연꽃이 피어난 것처럼 솟아있어 또다른 의미로 지혜와 덕을 표방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가야산을 연화봉이라 부르며, 연화봉 앞에는 일자봉이 있어 연화봉을 받쳐주고 있다.

  연화봉은 공덕을, 일자봉은 평등한 지혜를 상징한다고 하며,

  이런 연유로 수도암은 지혜와 덕을 현출하고 있다고 한다.

 

  지기가 잘 모여 있는 깊고 고요한 최적의 외적인 조건으로 기운이 수승하여

  수행스님이 오래 자지않고 공부할 수 있어 발심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수도암은 청정한 기운이 항상 함께한다.

 

  ▲자태를 드러낸 연화봉(가야산 상왕봉)

  연화봉 촬영할려고 50-200mm 망원렌즈를 가지고 가서 대적광전에서 장착되어 있던 광각렌즈를

  망원렌즈로 바꾸어 끼우고 촬영한 사진입니다. 

 

 

  오전 9시 30분경 수도암에 도착하여 대적광전에 참배후 잠시 좌정후 10시부터 수도암 사시불공에

  동참하고 이어 ‘예불대참회문’으로 89분 부처님 명호를 칭명 염불하면서 108배로 예배, 참회, 발원,

  회향하고 이재홍거사님이 부처님전에 “고찰순례 발원문”을 봉독 하였습니다.

 

  천년고찰 순례 발원문

 

  삼계의 도사이시고 사생의 자부이신 부처님!

  저희들 두손 모아 부처님전에 발원하옵니다.

 

  천년 고찰을 찾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백팔참회로 백팔번뇌를

  소멸해 가고자 하는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 회원인 저희들에게 길을 열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희들이 청정도량 불령산 수도암에서 두손 모은 것은 불보살님과

  인연있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면서, 일심으로 기도하여 불보살님의

  가호로 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복덕과 지혜를 다 구족하신 부처님!

  저희들이 한없는 옛적부터 지금까지 무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육도를

  윤회하며,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었던 탓으로 지은 모든 업장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옵나니 섭수하여 주시옵고 바라던 소원들도 원만히

  이루어지기를 발원합니다.

 

  우주에 충만하사 아니 계신 곳 없으시고,

  만유에 평등하사 두루 살펴주옵시는 부처님!

  백팔고찰순례단원인 저희들은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아울러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발원합니다.

 

  한량없는 광명으로 온 세상 밝게 비춰주시는 부처님!

  오늘 일심으로 두 손 모은 저희들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원들은 이제

  모든 어리석음을 반야의 등불 지혜의 칼로 멸진하여 응어리지고 매듭진

  업장과 업연을 녹이려 하옵니다.

  부처님의 정법 만난 기쁨으로 모든 불행을 씻어 내고, 인연으로 모여 있는

  중생들에게 감사의 정으로 원망을 버리겠나이다.

 

  사바세계를 비추시는 원만한 등불이신 부처님!

  생사의 무명장야를 밝힐 믿음의 법등을 가슴속에 소중히 받쳐 들고

  저희들의 삶을 자비로 채우고 지혜로 빛내겠사오니,

  스스로 빛나는 불성의 빛이 되어 사바를 밝히는 등불이 되게 하옵소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따르며 기뻐하는 불자되게 하옵시고, 언제 어떤

  경우에도 만족의 마음을 잃지 않고 원망과 불만이 불행의 씨앗이며

  윤회의 업연임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끝없는 공덕의 바다이신 부처님!

  늘 부처님을 찬탄하고 따르는 저희들은 오늘 수도암 부처님께 예경 올린

  인연공덕으로 선망부모와 조상,

  인연있는 유주무주 고혼들이 극락왕생 하옵기를 발원하오며,

  여기 동참한 저희들 백팔고찰순례단의 각 가정에 일체 재화(災禍)

  마장이 영원히 소멸되고,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온 가족이

  건강하고 마음이 밝아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원만히 성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부처님께 지성으로 귀의 하옵나니

  님의 바른 법이 다시 이 땅에서

  한 떨기 하얀 연꽃처럼 피어나게 하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수도암의 중심전각으로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한 건물로서 창방(唱榜) 위에 평방(平枋)을 놓고 공포(栱包)를 얹은 다포 형식(多包 形式)을

  취(取)하고 있으며 측면(側面)에는 풍판(風板)을 달아 놓은 1969년에 지어진 전각이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보물 제307호)은 높이 2.5m 의 통일신라시대 석불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거창군 가북면 북석리에서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선국사가 이 부처님을 조성할 때, 수도암 터에 어울리는 석불을 만들 큰 돌을 산 너머 거창 땅

  부처골에서 발견하여 칠 척이 넘는 거대한 부처님을 조성했으나 수도암까지 옮길 일이 막막했다.

  이에 모든 대중들이 지극정성으로 7일 기도를 올리는데 마지막 날 수염이 하얀 노스님이 나타나

  부처님을 옮겨준다며 큰 석불을 등에 업고 나는 듯이 산을 오르고 넘어 마침내 수도암 근처 지금의

  아홉 살이에 이르렀는데 그만 칡덩굴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이다.

  이에 노스님은 수도산 산신을 불러놓고 “부처님을 모시고 오는데 칡덩굴에 걸려 그만 부처님께

  큰죄를 지을 뻔하였다. 앞으로 다시는 이절 주위에는 칡이 자라지 못하게 하라.” 고 호통을 치고는

  부처님을 수도암에 모셔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때문인지 이곳 수도암 주위에서는

  지금까지 칡덩굴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노스님은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표적을 그와 같이 남긴 것이라고 한다.

 

  6.25전쟁 당시 이곳까지 북한군이 들어왔는데 부처님을 향해 총을 쏜 북한 병사가 그 자리에서 죽은

  이야기도 있다. 큰 법당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얼굴에 총알이 스쳐 지나간 자리가, 지금도 자세히 보면

  왼쪽 뺨에 눈물자국처럼 흉터가 있다.

  주의 깊게 보면 비로자나 부처님 뒷편 좌측(向右향우:바라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우측) 기둥에

  좌보처로 문수동자가 사자를 타고 시립해 있다. 

 

 

  비로자나 부처님 뒷편 우측(向左)기둥에 우보처로 보현동자가 코끼리를 타고 시립해 있다.

 

  ▲배(光背)는 없어지고 대좌(臺座)는 남아 있는데, 8각 대좌로 하대에 연(蓮)꽃을 엎어 놓은 모양의

  복련(覆蓮)이, 중대에 안상(眼象)이, 상대에 앙련(仰蓮)이 2줄로 교차되어 있다.

 

  수도암 선원장이신 원인스님께서 당일 서울 '길상사'에 법문 일정이 미리 잡혀 있어,

  선원장 스님의 저희들 순례단에 대한 자상한 배려로 선원장스님께서 지명스님께 부탁하여

  점심공양후 대적광전에서 지명스님의 귀한 법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약광전(藥光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 주심포식(柱心包式)으로

  측면(側面)에는 풍판(風板)을 달았고 대적광전과 함께 1969년에 건축되었다.

 

  ▲석불좌상(石佛坐像 : 보물 제296호)은 머리에 원통형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처럼

  보이지만, 광배와 대좌가 있고 신체 각 부분의 표현으로 보아 여래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높이 1.54m 대좌 높이 1.22m이고 재료는 화강석인 이 불상(佛像)은 도선 국사(道詵 國師)가

  조성(造成)한 것으로 전(傳)하며, 금오산 약사사(金烏山 藥師寺), 직지사 삼성암(直指寺 三聖庵)에

  있는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과 함께 방광(放光)했다고 하며,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불상도 따라서 하품을 한다는 얘기가 전해지는데,

  한 석공이 제작한 ‘삼형제 불상(三兄弟 佛像)’으로 불리고 있다.

  수도암 약광전에서 기도한 후 법당이나 주위 마당에서 한약냄새를 맡으면

  어떤 불치병도 낫는다는 말이 있다.

 

 

  ▲▼동ㆍ서 삼층석탑 (東ㆍ西 三層石塔 : 보물 제297호 )

  대적광전과 약광전 앞에 동서(東西)로 서있는 쌍탑으로, 신라 헌강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온다. 대적광전 앞에는 서탑이 있고, 약광전 앞에 동탑이 서 있어 쌍탑으로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고, 조성기법도 차이가 있어 단탑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동탑(위 2사진)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각형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두고 그 안에 여래좌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3층의 몸돌에는 각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받침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탑(아래 2사진)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크게 줄었으나

  3층 몸돌은 2층과 비슷하다. 1층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만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동탑보다 얇고 넓으며 밑받침은 5단이다.

 

  두 탑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곳곳에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동탑은 1층 몸돌의 위가 좁고 감실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고 서탑은 지붕돌 밑의 간격과 지붕돌이

  넓다는 것이 특징이다.

 

 

  석주(石柱) 약광전 앞에는 한눈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사각의 돌기둥이 하나 서 있다.

  세월의 풍상에 마모가 되긴 했으나 “창주 도선국사(刱主 道詵國師)”라고 돌기둥에 새겨진 글씨를

  알아보는데는 어려움이 없다.

 

  ▲석등(石燈) 이 석등(石燈)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양식인 팔각원당형석등(八角圓堂形石燈)으로서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상의 특징으로 보아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먼저 지대석 위에 복련의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팔각의 간주석(竿柱石)을 세웠으며,

  그 위에 앙련(仰蓮)의 상대석(上臺石)을 놓아 화사석(火舍石)을 받치고, 화사석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덮었으며, 옥개석(屋蓋石)의 정상에는 연(蓮)꽃봉우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올려 놓았는데, 화사석과

  옥개석은 팔각 형태로 되어 있다.

 

  ▲음전(觀音殿) 1969년 법전스님이 부임하여 사찰을 중창 불사하면서 관음전을 지었다.

 

  ▲나한전(羅漢殿)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석가모니를 주불(主佛)로 좌우에

  16나한을 봉안한 법당으로서 후불탱화로는 석가모니후불탱화, 16나한도, 500나한도 등을 모시고

  있으며, 특이(特異)하게도 천장(天障)에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그려져 있다.

 

  수도암의 얘기에 등장하는 나한은 처음에는 큰 법당 옆에 모셔져 있었는데 1969년 법전 스님이 중창

  불사를 하면서 청암사 백련암에 한때 모셨다. 그런데 이 암자에서 수행하는 비구니의 꿈에 나타나

  수도암으로 보내달라고 현몽하시어 다시 지금의 나한전으로 모셨다고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자승도 지금 나한전 왼쪽 맨 끝에 자리하고 있다.

 

 

 

 

 

 

  ▲나한전 16나한

 

  수도암 나한전은 모셔진 나한(羅漢)들이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 여러 얘기가 전해온다. 나한은 조선시대

  초기에 조성했다고 전하나 정확한 조성 연대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옛날 대적광전 뒤에는 큰

  느티나무(혹은 전나무)가 서 있었다. 괴목이 기울게 자라더니 급기야 법당의 기와를 상하게 해 비가 새어

  스님들이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무를 베어 버리려 했으나 건물이 상할 것을 염려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다른 스님은 출타를 하고 노승 한 분이 절을 지키고 있다가 삼매에

  들었다. 그런데 꿈결 같은 소리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깔깔대며 웃는

  동자 소리와 박장대소하는 사람 소리가 들려 황급히 법당 앞으로 나와 보니 그렇게 고민하던 괴목이 뿌리째

  뽑혀 있었다. 정신을 수습한 스님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한전을 들여다보았다. 나한전 안의 16나한들의

  어깨에는 나뭇잎이 얹혀 있고 손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수도암의 영험력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스님들은 나무를 잘라 겨울철 땔감으로 사용하고 나무 밑둥치는 근년까지 남아있었다.

  1969년 선원을 지을 때 나무가 뽑힌자리에 큰 웅덩이가 있었다고 하며 나무가 쓰러지면서 법당 앞 서쪽

  석탑에 부딪혀 탑 일부가 부서지고 요사채 앞에 디딜 방아가 있었는데 나무가 덮쳐 못 쓰게 됬다고 하며

  하지만 큰 괴목이 넘어지면서 법당은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않아 온전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추운 날 거창의 나이 든 불자가 공양미를 갖고 힘들게 산을 넘어오는데 한

  동자승이 나타나 "수도암 스님이 저를 보내 공양미를 받아 오라고 했습니다"라며 쌀가마니를 메고 쏜살같이

  산을 올라갔다. 고맙게 여긴 노인이 절에 도착해 보니 마루에 쌀가마니만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 조용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동자는 없고 스님만 선실에서 공부를 하는지 기척이 없었다. 큰 소리로 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누군데 그 무거운 쌀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나는 듯이 왔을까요"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스님은 "따라오시오"라며 앞장서 노인을 데리고 나한전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나한전 맨

  끝 조그만 동자승 어깨에 짚 검불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스님은 "다른 스님들이 출타하고 나만 절을

  지키고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식량이 떨어져 걱정을 하고 있었다"며 "처사님께서 무겁게 공양미를

  지고 오는 것을 보고 이곳 동자승께서 받아온 게지요. 큰 복을 받으실 겁니다"라고 했다.

 

  또 수도암 아래 수도리 마을에 동지를 맞아 팥죽을 끓이고 있는데 동자승이 나타나 팥죽을 달라고 해

  드시고는 수행하시는 스님들이 팥죽을 드실 수 있도록 가져다 달라고 했다는 것. 마을 아낙이 끓인 팥죽을

  들고 따라나섰는데 앞서 간 동자승이 암자에 들어간 뒤 보이지 않았다. 아낙 이 사실을 스님에게 말하고

  함께 법당 안을 둘러보니 동자승 입가에 팥죽이 묻어 있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수도암에는, 스님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예불을 모시지 않으면 나한님이 법당 종을 쳐서 잠을 깨우고 경책한

  일도 전한다.

  가난한 사람이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부자가 된 이야기,

  기도해서 병 나은 이야기,

  기도해서 득남한 이야기 등 영험담이 많이 전해온다.

 

 

  ▲이번에 받은 수도암, 청암사, 직지사 표구용 인영입니다.

  청암사 인영은 지난번 순례시 파란 스탬프로(아래 오른쪽 사진) 받아서 표구가 부적합하기에

  이번에 지난번 인영까지 50매를 더하여 100매를 받았습니다.  

 

 

 

출처 : 백팔고찰순례단
글쓴이 : 청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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