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鏡峰의 선차관禪茶觀Ⅰ
- 조주 喫茶去와 경봉 幾杯喫茶의
연속과 불연속 -
고영섭(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1. 문제와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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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선사와 삼절의 문화인으로는 널리 알려져 왔지만 차인으로서의 경봉의 풍모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경봉의 차 관련 독립 저작은 없지만 그의 여러 저작과 서간에는 차와 선을 통섭한 차인으로서의 경봉 가풍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현대 우리나라 선차를 중흥시킨 응송(應松) 박영희(朴英熙·1892~1990, 대흥사)와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1905~1979, 다솔사)에 가려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 스스로도 선사로서의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왔기에 차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하여 오랫동안 선방에 주석한 경봉은 차를 즐겨 마시는 정도의 선사로만 알려졌을 뿐 정작 일가를 이룬 차인으로서의 풍모는 소개되지 못했다. 하지만 경봉은 '조주법차(趙州法茶)'와 '운문호병〔雲門胡/Ïé甁〕'에 대비되는 독자적인 차의 가풍을 세운 차인이었다. 그것은 조주(趙州·778~897)와 운문(雲門·864~949)의 연속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불연속면을 열어젖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차 달여 와라[拈茶來]'에서 시작하여 '차 몇 잔 마셨나[幾杯喫茶]'를 거쳐 '차나 한 잔 마시게〔一椀淸茶〕'로 이어지는 경봉이 열어간 일련의 다풍(茶風)은 조주의 끽다거(喫茶去)와 상속되면서도 불상속되는 독자적인 다풍이라 할 수 있다. 경봉은 선풍과 다풍의 통섭과 법차와 호병을 융해하여 자신의 가풍으로 열어갔다. 이 글에서는 선사로서의 경봉과 차인으로서의 경봉을 연속과 불연속의 측면에서 조명해 볼 것이다.1)
1) 선풍과 다풍의 통섭
경봉이 태어났을 즈음(1892) 조선에는 동학혁명(1894)과 갑오경장(1895) 및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났다. 이미 지난 이십여 년간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조선의 항구에 접근하였던 일본과 미국, 프랑스에 이어 이제는 청나라와 러시아까지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은 국명과 국체를 바꾸어 대한제국시대로 치달아갔다.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에 어린 시절을 맞이한 경봉은 7세가 되자 밀양읍내의 한문사숙에 들어가 한적을 익혔다. 경봉은 이곳에서 뛰어난 총명을 발휘하여 한학자 강달수(姜達壽)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다. 13세 때까지 이곳에서 사서삼경을 마친 경봉은 15세 때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실존적 인간의 무상한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단은 경봉의 내적 개안(開眼)의 계기가 되었고 결국 그는 16세에 양산 통도사의 성해(聖海) 선사를 찾아가 출가했다. 그해 청호(淸湖) 화상을 계사로 삼고 사미계를 받았다.
이듬해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明新)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경봉은 졸업 이후 일본의 중학교와 대학교에서 불교공부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은사와 사형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해담(海曇) 화상으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고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에 입학하여 불경을 공부하였다.
강원에서 공부하면서 틈만 생기면 일터나 장터 및 잔칫집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 행방포교(行方布敎)의 길을 나섰다. 한 손에는 먹으로 안수정등(岸樹井藤) 법문의 내용을 묘사한 그림을 매단 석장을 쥐고, 또 한 손으로는 청아한 방울소리를 내는 요령을 힘차게 흔들며 사람들을 모아놓고 구수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마침내 불교의 깊은 진리로 이끌고 들어감으로써 대중들을 불심에 눈뜨게 하였다. 이때의 행방포교가 시서화 삼절(三絶)에다 선과 차까지 아우른 오절(五絶)의 문화인으로 종합되면서 뒷날 경봉의 독자적 가풍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 당·송대 이래 선과 차가 둘이 아니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본디 불교용어였던 선미(禪味)와 차미(茶味)가 동일한 종류의 흥취라는 사실을 보면 이 둘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선차일미(禪茶一味)'라는 사자성어는 송대의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이 일본인 제자에게 써 준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선수행에 있어 차는 필요조건이었으며, 차수행에 있어 선은 충분조건이었다. 그래서 차를 마시며 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선을 하면서 차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유수한 선사들은 이 둘에게서 하나의 맛을 느낄 수 있었고 이 둘은 온전히 분리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일찍이 마조의 삼대 고족인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과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와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4)의 가풍은 이후 남종선의 독자적 살림살이로 자리잡게 된다. 경전은 서당에게로, 선법은 백장에게로 돌아갔고, 선차는 남전을 거쳐 조주종심(趙州從○·778~891)과 신라의 철감도윤(澈鑒道允·798~868)에게 돌아갔다.
특히 조주는 관음원(現 伯林禪寺)에서 끽다거 공안을 통해 천하의 사람들을 '차 한 잔'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게 했다. 그의 '끽다거'는 이후 '다선일미(茶禪一味)'와 '다선일여(茶禪一如)' 등의 가풍으로 계승되면서 선과 차의 통로를 열어주었다. 일상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의 경계가 선이 지향하는 무분별, 무집착, 무소유의 경계와 합치되는 진경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철감도윤 역시 서남 장보고의 청해진(淸海鎭) 세력의 영향권 안에 있는 무주 일대의 쌍봉난야(雙峰蘭若)에 머무르면서 선풍과 다풍을 크게 일으켰다.
이렇게 선풍과 다풍이 통섭될 수 있었던 것은 선과 차가 동일한 종류의 흥취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 둘 모두가 드높은 정신 세계를 추구하고 열어간다는 점에서라 할 수 있다. 그 완성은 곧 선이 추구하는 경계와 차가 열어가는 경계가 융해되는 지점에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봉 역시 이미 선과 차의 경계를 무화시켜 '선차일미'의 가풍으로 육화하고 있었다.2)
2) 조주법차와 운문호병의 통섭
차인 경봉은 평생을 조주와 운문을 화두처럼 생각해 왔다. 그는 조주종심과 운문문언(雲門文偃·865~949)에 집중하여 그들의 선풍을 계승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갔다. 때문에 경봉의 선차 가풍에는 조주 '끽다거'와 '운문 호떡'의 연속면과 불연속면이 공존해 있다. 연속되는 지점에서는 조주와 운문의 선풍이 경봉과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불연속되는 지점에서는 조주와 운문의 선풍이 끊어지고 새로운 가풍이 생겨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3)
고려 말 유행했던 조주 다풍을 이은 경봉은 늘 찻그릇[茶椀]에 차를 가득 채워 음차(飮茶)했다. 이러한 풍습은 조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 말에 특히 유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봉은 조선 찻사발에 말차 대신 잎차를 우려 마셨다. 이 가풍은 지금도 극락암에서 만날 수 있다. 때문에 조주와 운문 이들 두 사람과 경봉의 선차관은 연속되는 지점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불연속되는 지점에서 특수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조주록》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선사가 새로 온 두 납자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
한 남자가 대답했다.
"와 본 적이 없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차나 들게나!"
또 한 납자에게 물었다.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납자가 대답했다.
"차나 들게나!"
원주가 물었다.
"스님! 와 보지도 않았던 사람에게 '차나 들게나!' 하신 것은 그만두고라도, 어찌하여 와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도 '차나 들게나!'라고 하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원주야!"
원주가 대답했다.
"예!"
선사가 말했다.
"차나 들게나!"4)
원주가 막 분별의 고해(苦海)에 떨어질 찰나에 조주는 자비심을 발휘하여 '차나 한 잔 들게!'란 지혜의 언어로 그를 구제해 내고 있다. 선에서는 일체의 생각과 분별을 허용하지 않는다. 선은 일체의 의혹과 근심을 씻어내고, 일체의 망상을 털어내고, 진실하고 순박하게 당하(當下, 當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조주는 전광석화처럼 펼쳐지는 일문일답의 순간 속에서 장차 잃을지도 모를 원주의 마음을 일깨웠던 것이다. 조주는 다녀간 적이 없는 납자나 다녀간 적이 있는 납자나 원주 이 세 사람에게 차별 없이 차를 주었다. 이 무차별이 선의 경계였고, 이 차는 조주의 수용(受用)이자 선심(禪心)이었다. 조주는 이것을 망설임 없이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주는 일찍이 "만일 근기를 따라서 사람을 제접한다면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생기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 '본분사(本分事)'를 가지고서 사람을 제접할 따름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본분사'는 현재 진행 중인 것이며 활발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눈앞에 나타난 자기 마음〔自心現量〕이며 연기된 제법의 진실한 모습〔諸法實相〕인 절대의 마음을 일컫는다. 조주는 이러한 절대적인 경지와 일상적인 경지를 빈틈없이 차 한 잔으로 연계시켰다. 이것이 다선일미의 진제(眞諦)이며 다도 정신의 원천이다.5)
경봉 역시 "옷 입고, 밥 먹고, 차 마시는 일 모두가 다반사"라고 역설하였다. 선이란 우리와 따로 떨어진 어떤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 마시고 밥 먹는 우리의 일상사 모두가 그 경계임을 역설한 것이다. 이처럼 경봉은 "가장 깊고 오묘한 해탈의 진리가 고귀한 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차 마시는 데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생을 조주의 '끽다거' 화두를 선필로 즐겨 쓰며 다반사를 실천하고 살았다.
그것은 '차 달여 와라'와 '차 몇 잔 마셨나' 및 '차나 한 잔 마시게'론으로 체화되었다. 경봉은 '자네 차 몇 잔 마셨나'란 기습적인 선차론으로 상대의 추락하려는 마음의 분별을 끊어주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경봉이 조주의 끽다거를 이으면서도 한 걸음을 더 나아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운문의 호떡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운문은 큰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큰 잔을 높이 들어보이면서 말했다.
"진빵과 만두는 그대들 마음대로 먹어라, 그렇지만 말해 보거라. 이것이 무엇인가?"
제자들이 아무 말이 없자 운문이 말했다.
"마른 개똥이다."
다시 말했다.
"차나 마저 마시거라!"
또 공양하면서 선사가 묻는다.
"호떡은 몇 개 먹었느냐?"
"네 개 먹었습니다."6)
조주가 차의 가풍을 써서 대중을 제접한 것처럼 운문은 늘 호떡의 가풍을 써서 대중을 제접하였다. 때문에 운문의 호떡은 조주의 끽다거에 상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경봉 역시 운문의 호떡을 자주 애용하였다. 경봉은 저녁 여섯 시가 되면 아련야 절로 내려가 석쇠에 떡을 구워 먹었다. 시자가 차를 가져오면 떡과 차를 함께 먹었다.
어떤 날은 한 수좌에게 "다음에 오면 떡을 주마"라고 했다. 다음해 그 수좌가 찾아와 지난해에 먹지 못한 떡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경봉은 "자네는 아직 떡을 먹지 못했느냐?"라고 일갈했다. 이처럼 경봉은 떡을 가지고 자유자재로 대중들을 제접하였다. 이것은 곧 운문의 호떡을 자기화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 떡을 먹지 못했느냐'란 일전어(一轉語)를 통해 아직 분별에 떨어져 있는 수좌의 마음을 일깨웠던 것이다. 경봉은 이 일전어를 통해 운문의 호병을 계승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갔던 것이다.
2. 경봉의 선관
강원을 졸업하고 통도사에서 잠시 사판의 일을 맡았으나 체질에 맞지 않았다. 공부를 해서 자신의 본래자리를 찾고자 하는 염원이 일어나 제대로 사판일이 잡히지 않았다. 하루는 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본디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경구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일어나 자신을 찾는 참선 공부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더 이상 남의 글이나 읽는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는 일대사를 결정지을 참선 공부를 하기 위해 사판 일을 벗어버리고 공부하러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은사와 사형은 사판의 일을 담당할 적임자가 없어 공부하러 떠나는 것을 반대하였다. 자기의 본심을 깨닫지 못하면 만겁의 생사윤회를 면하지 못하고 속가와 불가에 죄만 지을 뿐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자 한밤중에 통도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고승이었던 양산 내원사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았으나 인연이 어긋나서 해인사 선원 조실이었던 제산(霽山) 선사가 주석하는 퇴설당으로 가 피나는 정진을 했다. 졸음과 산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전생의 업장이 얼마나 두텁기에 앉으면 졸고 졸지 않으면 망상에 빠지는가'를 되물으며 정진했다.
뒷날 그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수좌들에게 이때의 체험을 거울삼아 '가끔씩 울어라'라고 가르쳤다. 즉 간절한 마음으로 자기 극복을 위해서 흘리는 뜨거운 눈물이 묵은 업장을 녹이고 공부를 돕는 참눈물이라고 일깨워 주었다. 공부를 좀 더 철저히 하기 위해 경봉은 다시 직지사의 만봉(萬峰) 선사를 찾아가 그곳에 머무르는 남전 선사 문하에서 지도를 받으며 수행하다가 금강산 마하연, 석왕사 선원을 거치며 '이 몸 끌고 다니는 주인공' 찾기에 몰두하였다.
나이 삼십이 넘어 화두 공부가 순일해지자 은사가 계신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으로 돌아와 참선을 하였다. 그 뒤 매년 나락 20섬을 낼 것이니 힘을 합쳐서 통도사 사내에 염불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보우(普雨) 수좌로부터 받고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우의 제안은 운영자금이 모자라 말로만 끝나버렸지만, 경봉은 좌절하지 않고 산중 승려들이 먹고 남은 양식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쌀이 오십여 섬까지 모이고 논도 1만 2천여 평을 마련하게 되자 경봉은 극락암에 염불만일회를 조직(1925. 3. 10)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이후 이 만일회를 백련암으로 옮길 때(1940. 10)까지 그는 의탁할 곳 없는 불쌍한 이들과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는 이들의 제도를 위해서 아낌없이 힘을 쏟았다. 극락암에서 염불을 하면서도 그는 자성자리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곳을 자성자리 찾는 근본도량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영축산 사하촌의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폭력사태까지 일어나자 방향을 바꾸어 화엄산림법회(1927. 11)를 열었다. 해학이 풍부했던 경봉은 《화엄경》을 강의하였고, 유교경전에 해박한 해담(海潭) 선사는 유불을 넘나들며 법문하였다. 두 선사가 교대로 설법을 하면서 경봉은 '이 몸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무엇인가?'란 의단을 들었다. 이러한 물음은 다시 '이뭣고?'로 몰입되었고 점차 오직 '?' 하나만이 남아 온몸과 한 덩어리가 되었다. 법문을 들을 때나 철야를 할 때나 이러한 물음만이 온몸을 감싸면서 졸음과 망상은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화엄산림법회를 시작한 지 나흘째 되는 날 경봉은 갑자기 벽이 무너지듯 시야가 넓게 트이면서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신이한 경지를 경험하였다. 자타와 주객이 모두 무너진 경계가 하나의 둥근 원으로 표출되면서 한 수의 게송이 곧바로 흘러나왔다.
하늘 땅을 삼켜버린 큰 기틀이여
돌 토끼는 학을 타고 진흙 거북 쫓아가는구나
꽃 숲에는 새가 자고 강산은 조용한데
칡덩굴 달과 솔바람은 누구를 희롱하는고.7)
이튿날 또 큰 방에서 공양을 하려고 발우를 펴는데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고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여 공양을 끝내었다. 극락암 영지 옆의 감나무 아래에 이르렀는데 전신이 얼떨떨해지면서 이상한 전류가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다가왔다. 순간 이 몸과 우주가 둘이 아닌 '불이'라는 경지를 체득하였다. 미혹에 가려진 중생들과 달리 이 세상을 번뇌와 갈등 없이 생생하고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입에서는 또 다시 게송이 흘러나왔다.
종소리 목탁소리에 급히 문을 나서니
푸른 하늘 바다인듯 구름 한 점 없구나
한 빛이 터져 삼천계를 비추니
나와 건곤을 분간하기 어렵도다.8)
사람마다 스스로 나아갈 문이 있건만
여러 생을 삼독의 구름 속에 갇혔었네
잠깐 사이에 마음 비워 옛 집으로 돌아가니
산과 강, 범부와 성현을 어찌 따로 나눠보리.9)
두 차례의 깨침을 경험했지만 경봉은 아직 '이뭣고?'의 화두에 대한 의심이 온전히 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초저녁부터 앉아 화두에 몰입한 경봉은 그날 새벽 두시 반 경 바람도 없는 데 촛불이 파파파파 소리를 내며 크게 춤을 추는 것을 보는 순간 '이뭣고?'의 의문 덩어리가 일순간에 녹아내린 것을 체험했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마음이 식어버리자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내가 나를 바깥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도다
하하 이제 만나야 할 의혹 없으니
우담발라 꽃빛이 온 누리에 흐르는구나.10)
연이은 3일의 마지막 날 경봉은 드디어 마지막 관문을 돌파하였다. 천지를 삼키는 일원상을 접하였고, 몸과 우주가 하나인 '여래선의'를 깨달았으며, 나아가 한 점 의혹과 이분이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다. 너무나 자명한 이 우주 법계의 사실을 왜 몰랐던가를 돌이켜본 경봉은 '온누리 중생이 백 년을 산다 해도 참 주인공을 보지 못하면 한갓 꿈속의 잠'이라고 갈파하였다.
이후 그의 선풍은 '바보가 되거라'와 '극락에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및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라는 문구로 널리 퍼져 알려졌다. 이 세 문구는 그의 가풍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메시지이며 그의 살림살이를 압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그의 선관을 입론하는 세 축이 될 수 있다. 경봉의 선관은 일률적으로 조망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가 주로 사용하고 즐겨 활용한 제접방법을 중심으로 그의 선론을 살펴보는 것이 그의 살림살이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바보가 되거라'론
경봉은 화두 공부가 잘 안 되어 찾아오는 구도자에게 언제나 여러 가지 말로써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러한 말들은 경봉의 오랜 가풍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기제라 할 수 있다. '바보'란 이해(利害)와 시비(是非)와 경중(輕重)과 선악(善惡)을 사량 분별하지 못하는 존재를 일컫는다. 그는 이러한 이항 대립의 분별에 구속되지 않은 존재이다. 때문에 그는 자비로운 존재이며 참으로 삶을 제대로 살 줄 아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바보가 되거라. 사람 노릇하자면 일이 많다. 바보가 되는 데서 참사람이 나온다.11)
이 공부는 철저하게 생명을 걸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쪼록 한세상 안 태어난 셈치고 마음을 비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나무칼로 목 베듯 하지 말고 단박에 결판 지을 일이다.12)
쇠가 아무리 굳어도 열이 삼천 도가 되면 녹는다. 죽기를 각오하고 주인공에게 맹세를 하면서 공부를 해도 될듯 말듯 한데 조금만 고통스러워도 못견뎌 하니 어림도 없는 노릇이다. 졸음이 오면 허벅지를 꽉 꼬집어 비틀어서 잠을 쫓아버리고 용맹을 떨치며 공부해야 한다.13)
망상이 일어나거든 '네 이놈, 네 놈 말만 듣고 다니다가 내 신세가 요모양 요꼴이 되었으니 이제는 내 말 좀 들어봐라. 죽나 사나 한번 해보자!'하고 용맹을 내어야 한다.14)
이처럼 경봉은 생명을 걸고 하는 참선공부는 단박에 결판을 짓지 않으면 끝낼 수 없는 공부라고 역설하고 있다. 때문에 무시이래의 아득한 번뇌도 쇠가 삼천 도의 열에서 녹듯이 죽기를 각오하고 주인공에게 맹세를 하면서 공부해야 함을 힘주어 설하고 있다. 졸음과 망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목숨 걸고 용맹스럽게 싸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싸우기 위해서는 눈앞에 보이는 이해(利害)와 시비(是非)와 경중(輕重)과 선악(善惡)을 사량 분별로 가름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존재가 될 것을 역설하고 있다. 바보 같은 존재가 되어야 참사람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경봉은 바보가 되어 말뚝처럼 용맹정진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일대사를 이룰 수 있다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따라서 경봉의 '바보가 되거라'론은 경봉 선관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2) '극락에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론
경봉은 많은 선구를 토해냈고 직접 붓으로 썼으며 그것을 남겼다. '바보가 되거라'론에 이은 경봉의 또 하나의 선관을 알 수 있는 문구가 바로 '극락에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이다. 경봉은 만년의 평생을 자신의 주석처인 극락선원에 머무르며 여러 사람들을 제접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참학자(參學者)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물었다.
"이 극락선원은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이 말에 대답할 안목이 있어야 할 텐데 대꾸가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나를 봐도 보지 못하고 내 말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돌아갈 적에는 무어라고 말해주는가 하면 이 극락선원 대문을 나서면 돌도 많고 물도 많으니 돌에 채여서 자빠지지도 말고 물에 빠져도 옷을 버리지 말고 가라고 한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실은 극락선원에 어디 돌과 물이 많겠는가.15)
경봉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의 정신을 살려주기 위해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단청의 색채 속에 아교풀이 섞여 있어서 칠이 잘 달라붙듯이 진리 역시 보이지 않는 아교풀처럼 평범한 말 속에 있음을 갈파한 것이다. 그는 앎의 돌부리에 걸리고 삶의 물바닥에 넘어지는 이들을 위해서 언제나 발밑이 모든 것임을 환기시켜 주었다. 천 길 낭떠러지의 분별 앞에서도 발 아래만을 정확히 본다면 떨어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봉은 극락의 화두를 통해 그것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3)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보아라'론
'바보가 되거라'론에 이어 '극락에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론은 경봉의 선관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문구이다. 이러한 문구들에 이어 경봉의 선관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문구는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보아라'론이라 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임종게인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로 귀결된다.
경봉은 평소 자신이 머물던 극락선원 삼소굴 방 벽의 누런 벽지에 자신의 가풍을 적어두었다.
5, 6, 4, 3 등의 산만한 숫자가
어찌 1, 2의 실로 다하기 어려움과 같겠는가
몇 줄기 구림빛은 산봉우리로 피어오르고
시냇물 소리는 난간에서 들린다
고운 것은 미워하고 싫은 것은 즐거워하도록 노력하련다
큰 활용은 미간조차 꿈쩍 않는 것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어다.
(할 말이 있는 이는 10분 이내에 하고 나가도록)16)
평소 염할 때 입히는 수의를 짓던 날(1966년 봄) 경봉은 다음과 같은 글을 일지에 남겼다. 아직 중년의 시점이지만 이 일지에는 무상에 대한 그의 인식이 배어 있다.
옷이라도 수의라 하니까 대중의 마음도 이상하게 섭섭한 감이 든다 하고, 나의 생각에도 본래 거래생멸(去來生滅)이 없는 것이지만 세상 인연이 다해 가는 모양이니 무상(無常)이 더욱 느껴진다. 금년 병오년과 무진년 사이는 39년인데 그동안 부고를 받은 것이 대략 640명이나 되니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다들 갔는지 일거(一去)에 무소식이로구나.17)
경봉은 80이 넘어서도 밤을 세우며 정진하였다. 임종 직전까지도 그는 언제나 화두를 놓지 않았다. 91세의 경봉이 임종이 가까워 오자 미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자 명정이 마지막으로 물었다(1982. 7. 17. 오후 4시 25분).
"스님 가시고 나면 스님을 뵙고 싶습니다. 스님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오랫동안 말이 없던 경봉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좌우를 둘러본 뒤 말했다.
"야반삼경에 대문 문빗장을 만져 보거라."18)
경봉은 생전에 '내가 입적한 후에 크게 놀랄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경봉이 임종한 뒤 연화대 다비장에 불이 붙었다. 점화한 지 1시간 50분 뒤인 4시 35분에 갑자기 영축산을 중심으로 캄캄한 먹구름이 이는가 싶더니 일진광풍(一陣狂風)이 휘몰아치면서 뇌성벽력과 함께 하늘에서 양동이의 물을 쏟아 붓는 듯한 비가 약 40분 동안 내렸다.
경봉은 평소 사리에 대해 누가 물으면 이렇게 답하였다.
사리는 사리에 대한 원력을 세우고 삼학을 부지런히 닦으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지만, 수행자가 본분사에 바쁜데 언제 사리에 대한 원력을 세울 수 있나.19)
그의 사리에 대한 소식은 일체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가풍 그대로를 보여주고 떠났다. 평생을 '본분사' 탐구에 철저했던 경봉의 가풍은 사리에 대한 일체의 소식을 불식시킨 대목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경봉의 선풍은 '바보가 되거라'론에서 시작하여 '극락에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론을 거쳐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론에서 극대화된다.
촛불춤을 보고 깨달은 경봉이 마지막까지 화두를 놓지 않고 성성적적 보여주었던 모습은 평소 우리의 일상사와 다르지 않았다. 깨닫고 나서 외친 일성처럼 '중생의 눈과 귀가 미혹으로 짙게 가리워져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을 뿐, 밝고 밝은 법성(法性)의 도량에 달빛은 언제나 투명하고 바람은 항상 맑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을 왜 몰랐던가'라던 반문은 그의 선풍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경봉의 선풍은 '바보가 되거라'론에서 시작하여 '극락에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론을 거쳐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보아라'론으로 입론되었고 그것은 그의 다풍인 '차 다려 와라'론에서 '차 몇 잔 마셨나'론을 거쳐 '차나 한 잔 들게나'론 속으로 깊이 스며들어갔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의 선풍과 다풍이 통섭되고 융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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