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B

[스크랩] 울산/장생포 부위별 고래고기 <원조할매집>

청원1 2006. 7. 11. 18:37
고래고기 ①

 
 

부위마다 색다른 맛 ‘49가지 진미’

마지막 고래잡이배를 동해로 떠나보내며 해부장 김씨는 눈물을 보인다
김씨의 눈물 방울방울 속으로 스무 살에 두고 떠나온 고향 청진항이 떠오르고 숨쉬는 고래의 힘찬 물줄기가 솟아오른다.


고래는 김씨의 친구며 희망 청진항 고래를 이야기할 때마다
육십 나이에도 젊은 이두박근이 꿈틀거리고

통일이 되면 통일이 되면
청진항으로 돌아가 고래를 잡겠다던 김씨

누가 김씨의 눈물을 멈추게 하겠는가
이제 마지막 배가 돌아오면
장생포여, 고래잡이도 끝나고… (후략)


울산에 사는 정일근 시인의 ‘장생포 김씨’란 시다. 이 시는 1988년 지역문학의 메타비평지 ‘민족과 지역’ 창간호에 실렸다. 현재 밀양연극학교 촌장(村長)인 이윤택과 필자 등이 중심축을 이루고 고(故) 이성선 시인, 나태주 시인, 정일근, 최영철, 서지월, 문충성 등 지역 시인들이 참여한 게릴라적 성격을 지닌 잡지였다. 중앙의 집권문화(문학)를 뒤집자는 잡지였는데 3호까지 나오다 절판됐고, 이윤택은 다시 밀양연극촌을 세워 ‘게릴라-관점21’을 지금까지 내오고 있다.

요즘 강준만(‘인물과 사상’ 발행인)이 쓴 ‘문학권력’이란 단행본이 나온 것도 그로부터 16년 만의 쾌거다. 분단 50년 만에 수평적 정권은 교체됐어도 ‘수평문화(문학)’ 운동의 갈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 모든 지식인이 전리품을 앞에 놓고 쿨쩍거리게 된 시대상황을 뛰어넘어 이윤택 그만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기둥을 뿜고 뛰노는 동해 고래 떼의 장엄한 광경, 신년하례의 도하 신문에서 이 모습과 함께 동해 일출을 보여줬으면 했는데 혀꼬부라진 축시 몇 줄로 대신한 것을 보고 언제부터 우리 삶이 이렇게 왜소해졌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음식기행을 하다 보니 신년 벽두엔 먹어도 고래고기를 먹자 싶어 떠난 곳이 장생포였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할매집(대표 나미자ㆍ017-581-8081, 052-265-9558)의 고래고기를 먹고 나서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그림’까지 보고 오자는 욕심이었다.

태화강 지류의 대곡리 암각화에다 뛰어난 주변 절경을 더한 ‘원시문화 산책로’를 걷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는가. 선사인들의 어로문화 특히 고래와의 싸움, 거기다 공룡그림까지 겸한다면 바다와 육지의 왕자를 한눈에 아우를 수 있는 어로문화의 산책로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유네스코 문화유산 목록에도 빠져 있으니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게 아닐까.

할매집에 앉아 고래고기를 먹으면서도 이 산책로를 필자의 여정때문에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차림표를 보니 가장 맛있는 부위인 우네(뱃살) 한 접시에 3만원, 오배기(꼬리살) 3만원, 생고기 2만5000원, 육회 2만5000원, 수육 3만원이었다. 인근의 원조할매집, 골목할매집, 왕경, 고래막 등 여섯 곳의 고래집과 울산 시내의 장생포전통, 강남 김포수집 등이 아직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고래야말로 장생포의 신화이자 전설이고 삶이다. 그중에서도 귀신고래(鬼鯨)의 회유면이기 때문에 기왕이면 “귀신고래 고기 있어요?” 했더니 무슨 잠꼬대냐는 듯 주인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알고 보니 장생포 귀신고래는 1966년에 5마리가 잡힌 것을 마지막으로 맥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요즘 동해에 넘치고 있는 고래는 밍크고래이기에 밍크고래 고기가 식탁에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지 사정이기도 하다. 광복 후 장생포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부자 동네였다. 그것이 1986년부터는 IWC의 규제 때문에 맥이 끊어졌다.

고래고기는 마흔아홉 부위 정도 맛이 각각 달라 한 번 맛을 보면 일반 육류에 대한 선호도가 뚝 떨어지기 쉽다. LA갈비살이 어찌 이 생고기의 순후한 맛을 당해낼 수 있으랴.

송수권의 풍류 맛기행 | 고래고기 ②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그 맛

제주 말고기집의 말피나 마사시는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필자의 금기식이지만 생고기, 우네(뱃살), 오배기(꼬리), 내장 등으로 이뤄진 장생포 고래고기 ‘부위별 모듬’은 자꾸 생각나 첫 취재한 지 일주일 뒤 다시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태화강변 반구대 암각화를 못 보고 온 게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화가 변종하 선생은 죽음을 앞두고 고래고기가 먹고 싶어 울산에 내려온 일이 있었고, 시인 박목월은 서울에서 고래고기 맛을 알고 교통이 불편한 시절인데도 버스편에 운송해 즐겼다고 한다. 이는 장생포 고래고기와 관련해 한 시대의 미각을 풍미한 선인들의 일화로 남을 만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큰 고래인 대왕고래는 몸길이 33m, 무게 150~170톤, 심장이 자동차만하고 동맥은 강아지가 뛰놀 정도며 코끼리 30마리 또는 성인 남자 2430명의 몸무게와 같다고 보고돼 있다.

장생포 고래는 1910년 이전엔 미국과 러시아가 대량학살로 쓸어갔고, 그 후 1950년까지는 일본이 쓸어갔다. 1950년 이후에야 수염고래 중 가장 작은 밍크고래 정도만 잡았다는 게 포경사의 약술이다. 장생포 김해진옹(75)은 평생 1000여 마리의 고래를 잡았으나 포경의 주요 대상이던 귀신고래(鬼鯨)는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회고한다.

“수면에 파도가 있는 날은 구분이 좀 어렵지. 고요한 바다에서 물살이 약간 갈라지며 흰 파도가 살짝 생기면 틀림없이 고래지. 한평생 고래만 찾아다녔는데 그것도 모를 리 있나?”

지난 5월 국립수산진흥원의 부탁으로 고래자원 조사를 나갔을 때 그는 물살의 움직임만 보고도 고래를 찾아 답사팀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고요한 물살이 폭풍으로 뒤집어지며 밍크고래 떼가 치솟는 광경은 선진국이 지향하는‘고래 구경 산업’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 동해는 밍크고래가 넘쳐 솎아내야 할 정도다.

김옹은 포경이 재개되면 다시 고래배를 타고 나가 포를 쏘아보고 싶다고 한다. 장생포에서 14대째 살아온 심수향씨(울산시인학교)의 증언에 따르면, 포경선이 들어오면 시발택시(스리쿼터)를 불러 타고 내해마을까지 가곤 했다고 한다. 포경선의 뱃고동 소리도 30자, 40자 등 고래 크기에 따라 달리 울렸고 깃발도 따로 걸렸다고 술회한다.

 

뼈는 과수원 거름으로 썼고 기름은 ‘새마을비누’를 만들어 쓴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동행한 제자 박상건(‘OKIVO’<窓> 발행인) 시인은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쓰레기 청소차만 보아도 멋모르던 어린 시절이 아름다웠을 거라고 대창(큰창자) 삶은 고기를 들며 상상력을 발동한다.

지난 주 실패한 경험이 있어 이번엔 할매집(나미자ㆍ052-265-9558)에서 ‘부위별 모듬’(5만원)의 맛을 즐기고 반구대 원시산책로를 걷는다. 전설로만 남은 동해 고래는 경상일보 정명숙 부장의 말대로 반구대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암각화는 너비 6.5m, 높이 3m 가량의 큰 바위면에 인간상 8점과 고래ㆍ물고기ㆍ사슴ㆍ호랑이ㆍ멧돼지ㆍ곰ㆍ토끼ㆍ여우 등 120여점, 고래잡이 배와 어부, 사냥하는 광경 등 5점, 미식별 동물 30여점이 그려져 있는데 1984년도 조사 보고에 따르면 형상을 구분할 수 있는 191개의 조각 중 ‘원시수렵, 어로생활’이 164개나 된다.

 

출처 : 조명래
글쓴이 : 야생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