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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에서 넓은 옥천벌을 지나 강진으로 가려면 병치재를 넘어야 한다. 병치재는 강진과 해남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인 셈인데 이 고개를 넘으면 강진군 도암면이 나온다. 이곳에서 강진읍 방면으로 5분쯤 가다 보면 도암면 계라리 마을이다. 이곳은 해남윤씨가의 시조를 모신 영모당(永慕堂)이 있다. 이곳 한천동 영모당 입구로 들어서면 해남윤씨가의 영역임을 표시하는 '해남윤씨세천(海南尹氏世阡)'이라 쓰인 비가 서 있다. 흔히 자신들의 씨족들이 일족을 이루고 살던 곳에 이러한 비를 세운 것을 볼 수 있는데 해남윤씨들의 세거지 임을 알리는 표지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해남윤씨가의 시원지답게 강진군 도암면에는 해남윤씨의 일족들이 많아 퍼져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동족마을들이 많이 형성되어 있다. 해남윤씨가는 3곳의 중심영역이 있다. 가장 크고 장대한 영역을 가지고 있는 곳은 물론 해남읍 백련동(白蓮洞)에 자리 잡고 있는 '녹우당'이다. 어초은 윤효정 이래 지금까지 고산 윤선도를 중심으로 한 종가의 전통을 5백년 이상 잘 지켜오고 있는 곳이다. 지금까지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종택으로서 5백년 가업이 이어져 오고 있는 곳이다.
또한 녹우당에 뿌리를 내린 어초은 윤효정이 태어나고 그의 아버지 경(耕)과 조부인 사보(思甫)가 모셔져 있는 곳이 도암면 강정리 '덕정동(德井洞)'으로 이곳은 해남윤씨가의 세거시원지(世居始源地)라고 할 수 있다. 해남윤씨가들이 터를 잡고 그 씨족들이 번창해 나가기 시작한 곳이다. 따라서 보통 '한천동', '덕정동', '백련동'을 해남윤씨가의 3대 유적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곳 강진군 도암면 계라리 '한천동'은 해남윤씨가의 시원을 찾아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이와 함께 양반사대부가의 전형적인 문중제각을 살펴볼 수 있다. 이곳 한천동으로 들어서면서 느껴지는 것은 해남윤씨가의 시조를 모시고 있는 곳 치고는 듬직하고 장대한 산세에 들어서 있는 명당 같다는 느낌을 단박에 느끼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천천히 입구를 들어서면서 제각의 규모가 잘 갖추어져 있는 '영모당'과 선대의 묘역, 그리고 주변 형국이 풍수지리의 산세를 잘 갖추고 있는 것을 보면 천천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러한 자연친화사상을 문학적으로나 삶으로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고산 윤선도라고 할 수 있는데 해남윤씨가의 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이러한 자연(풍수)사상이 곁들여졌기 때문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같다. 해남윤씨가의 시조를 모시고 있는 '영모당'이 자리잡고 있는 한천동의 지형을 살펴보면 영봉 덕암산(德岩山)-연동의 덕음산과 이름이 비슷해 유독 '덕(德)'자와 인연이 깊은 집안이라 이곳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을 주산으로 하고 좌청룡 우백호가 겹으로 잘 짜여지고 주작으로는 석문산과 풍덕산이 둘러서 있다. 또한 동편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한천동을 감아 돌고 있다.
해남윤씨가 족보에는 풍수지리의 형국이 그려진 묘도(墓도)가 나온다. 풍수지리의 개념을 잘 보여주는 묘도로 흔히 사대부 집안의 족보에 첨가되는 이러한 묘도는 이들이 풍수사상을 얼마나 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풍수사상이 반영된 입구의 연못 고산 윤선도를 통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해남윤씨가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 속에 인공을 가해 좀더 완벽한 조경 자연을 통해 풍수의 형국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공적 조영(造營) 자연을 만들어 가는 것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일반적으로 물의 취약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연못(池)이다.
당시 신분사회에서 이러한 인공적인 연못의 조영은 사대부가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이곳 한천동을 비롯한 덕정동, 백련동(연동), 금쇄동 멀리 보길도에 남아있는 고산의 유거지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하나의 일관된 가풍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현재 해남윤씨가의 대표적인 원림(苑林)유적으로 남아있는 녹우당과 금쇄동, 보길도의 세연정에서 볼 수 있듯이 연못은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마을이나 집 앞에 일상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연못은 지금에서 보면 조경적 차원에서 흔히 만들어지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배산임수의 풍수적 차원을 훨씬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당 앞의 연못이 아니라 동네로 들어오는 입구나 배산임수의 형국을 위해 마을 앞의 물(하천)을 보완하는 성격으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모당 입구의 연못은 경사진 지형에 들어서 있는 계단식 논의 아래쪽에 조영되어 있다. 집앞에 정원의 개념으로 조성된 것과는 달리 거리상으로 '영모당'과도 상당히 떨어져 있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어 풍수적 형국을 더 고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연못은 지형적 조건을 이용해 조성한 탓인지 아래쪽에 둑을 쌓고 그 둑에 동백나무와 소나무 등을 심어 조경의 효과와 함께 들어오는 입구가 훤히 터진 이곳의 허한 지형을 보완해 주는 비보 역할까지 하고 있다. 이는 녹우당의 연지 앞에 심어져 있는 소나무 숲과 같은 형식이다. 이 연못은 사방형의 연못 가운데에 석축을 쌓아 만든 둥근 섬이 2곳 있고 섬 안에는 백일홍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곳 일대를 보통 한천동(寒泉洞)이라 부르고 있는데 한천(寒泉)은 '차가운 샘'이라는 할 수 있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泉洞'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 연못 옆에는 오래전부터 명천(名泉)이 있어 '참샘'이라고 불렀다 한다. 얼마 전까지도 주막 같은 작은 집이 있었던 곳으로 고갯마루인 이곳에서 길가던 행인들이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고 쉬어갔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좋은샘'이 있는 곳에 자리한 해남윤씨가의 시원지여서인지 아마도 좋은 물을 먹고 발복(發福)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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