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108)천년고찰순례기

[스크랩] 사자산 법흥사 - 6월 24일

청원1 2018. 9. 18. 15:45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사자산 법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본사 월정사 말사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한 곳이다.

  법흥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나라의 흥륭과 백성의 편안함을 도모하기위해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사자산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흥녕사(興寧寺)로 창건했다.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받았던 신라의 선승

도윤칠감국사의 제자 징효절중(澄曉折中)이 886년 이곳에 선문을 여니 이것이 바로

라말여초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1163년 고려 의종 때 다시 중창하였으며, 1730년 조선 영조 6년, 1778년 조선 정조2년,

1845년 조선 헌종 11년까지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며 그 맥을 이어왔다.

그 후 폐사지에 가까웠던 흥녕사가 1902년 대원각스님에 의해 법흥사로 개칭되고 재건되었다.

1912년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33년 지금의 터로 적멸보궁을 이전 중수하였다.

 

    사자산 법흥사의 지명 유래는 산세가 불교의 상징 동물인 사자형상으로 모든 지혈이

한 곳에 모이는 사자의 허리에 해당하는 길지이며, 산봉우리가 불교의 상징 꽃인 연꽃 같이 생긴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로 지금의 전각은 1993년에 중수되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으로 불상을 별도로 봉안하지 않는다.

진신사리는 곧 부처와 동일체로, 부처님 열반 후 불상이 조성될 때까지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예배대상으로 부처님께서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곳이다.

 

 

법흥사부도(法興寺浮屠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와

법흥사석분(法興寺石墳) -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109호)

<부도>는 법흥사 적멸보궁 뒤쪽에 놓여 있는 것으로, 모신 사리의 주인공은 아직 밝혀 지지 않았다. 형태는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추었으며,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넓고 네모진 바닥돌 위에 놓인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겼다.

가운데받침돌은 여덟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탑신의 몸돌은 앞, 뒤 양면에 문짝모양을 새기고, 나머지 6면에는 1구씩의 신장상(神將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급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높게 달았다.

꼭대기에는 축소된 지붕모양과 꽃봉오리 모양을 조각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전체가 8각을 이룬 모습으로 두꺼운 지붕돌 표현이나 높은 지붕돌의 꽃장식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것으로 보인다.

 

<석분> 엮시 법흥사 적멸보궁 뒤에 자리하고 있다.

이 토굴은 자장율사께서 불사리를 봉안 하고 수도하던 곳으로 내부는

가로가1m60cm, 높이가 1m90cm 정도로 한 사람이 앉아서 정진할 수 있는 공간인데

정진 중 주변에 가시덤불을 두르고 정진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옛 스님들께서 수행하던 토굴의 원형으로 그 가치가 크다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석분은 여러 차례 영험을 보였는데,

1945년 8월 9일부터 1주일 동안 서광이 비쳐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의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미리 알려주는 징험이었는데,

밤에도 대낮같이 밝았고 낮에도 닫혀진 석실 문 사이로 흰 빛이 나왔다고 한다.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 - 보물 제612호

흥녕사를 크게 발전시킨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석비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그 위에 용머리가 조각된 머릿돌을 얹었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에 가깝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특히 발가락과 발톱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어 눈에 띈다.

    머릿돌에는 네 마리의 용이 중심을 향해 마주보고 있다.

눈, 코, 입은 사실적으로 새겼으나

몸에 표현된 비늘은 약하게 새겨져 형식에 그치고 있다.

비문에는 절중 스님의 행장과 신라 효공왕이 ‘징효대사’ 라는 시호와

‘보인’이라는 탑명을 내린 것 등을 적고 있다.

비문에 의하면 징효는

19세에 장곡사에서 승려가 되어 75세 되던 효공왕 5년 (901)에 입적하였다.

끝부분에는 대사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도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44년 후인 고려 혜종 원년 (944)에 세워진 비로,

글은 최언위가 짓고 최윤이 글씨를 썼으며 최오규가 비에 새겼다.

영월징효국사부도 (寧越澄曉國師浮屠)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2호 

 통일신라 징효대사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며,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두꺼운 지붕돌 표현,

지붕돌의 높은 꽃장식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사리탑 옆으로 오랜 밤나무(200여년)가 함께 도량을 지키고 있어

세월의 깊이와 숭고한 멋을 느끼게 한다.

 

이전에 수차례 법흥사 순례시 사시불공후는 일반 참배객이 많아 

적멸보궁에서 108배를 할 수 없어 약사전에서 108배를 하였는데, 

이날은 사시불공후 적멸보궁에서 89분 부처님 명호를 칭명하며

예불대참회문 108배로 참회 발원 기도하고,

발원문 봉독으로 1박 2일간의 정암사, 중대 사자암, 법흥사 삼대적멸보궁과

월정사, 상원사 예불대참회 발원 기도 고찰순례를

원만히 회향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백팔고찰순례단
글쓴이 : 청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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