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고찰순례외 사찰순례 등

단풍에 물든 안동 옥산사, 제비원 미륵불, 월영교, 국보16호 칠층전탑, 하회마을

청원1 2017. 11. 20. 09:29

 

 

추계사찰순례

안동 옥산사, 연미사, 안동호, 법흥사지 칠층전탑, 하회마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부산동문회

불기 2561(2017)년 11월 12일(일요일)

 

       이하 <옥산사>

농촌의 무르읶은 가을풍경에서 추수가 마무리된 고향 마을에 온 듯한 정감을 담뿍 느끼며, 

<옥산사(玉山寺)>에 이르러는 길은 한적한 마을을 지나 30~40여분

산비탈을 올라야 하기에 만만치는 않았다.  

문화재를 연구 탐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타지인은 쉽게는 친견하고 참배하기가 힘든 옥산사 약사여래부처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1호 <옥산사마애약사여래좌상(玉山寺磨崖藥師如來坐像)>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장기리 자연암벽에 새겨진 불상으로,

이중으로 된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다.

마애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양옆에 보살이 있는 삼존불(三尊佛)로 추정된다.

육계가 높고, 상호에는 미소를 띠고 있으며, 목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법의는 우견편단, 앞가슴에는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위에 올리고 왼손은 아랫배 부분에서 작은 약합을 든 약사여래(藥師如來)이다.

위 사진 왼쪽 아래부분에 우협시보살의 무릎 아래부분만 남아 있어 많이 안타까웠다.

전신이 보존되어 있었다면 국가지정문화재로도 손색이 없었으리라 추정되어 아쉬웠다. 

 

 

       이하 <연미사>

보물 제115호 고려시대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이천동석불은 흔히 <제비원미륵불>로 불려져 온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석불의 높이는 12.4m이며 턱에서 머리끝까지 250cm 정도로서

자연 암반에다 선각으로 불신을 그리듯 새기고,

그 위에 입체적(환조)으로 조각한 불두(佛頭)를 따로 만들어 올린 거대 불상이며,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 보물 제93호)도 이와 거의 같은 수법을 보여준다.

연미사의 대웅전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서쪽을 향한 높은 암벽에

불신(佛身)을 새기고 불두(佛頭)를 따로 만들어 올렸는데

머리 뒷부분이 일부 손상된 것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제비원(院)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조선 시대에 영남지역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또 서울로 갈 때에는 반드시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만 하는데,
안동의 초입에 '연비원(燕飛院)'이라는 여행자들의 숙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비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전설의 배경이었던 '연(燕)' 즉 '제비'에

숙박시설인 원(院)이 결합 되어 ‘제비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어 거구의 불상임에도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스럽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불상과 제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무가(巫歌)인 ‘성주풀이’ 사설에 나오는
“성주의 본향이 어디메뇨
경상도라 안동 땅에
제비원이 본일래라”라는
가사에서 보듯이 우리 민속 신앙인 성주신앙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수인(手印)은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은 복부에 대고

왼손은 손등이 보이도록 가슴 위로 올려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 을 취하고 있으며

수인(손의 자세)으로 보아서는 아미타불인데, 이 지역에서는 미륵불로 불리어오고 있다.

수인과 불상이 서쪽을 향해 서 있는 것이 서방정토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불상을 아미타여래로 보는 견해도 있고,

신라말과 고려초 이후 유행한 미륵신앙의 유행을 근거로 미륵불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연미사(燕尾寺)는 안동시 이천동 산 21번지 오도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본사 고운사의 말사이다.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명덕이란 승려가 창건하였다는 이야기와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 중 한 명인 명덕이 바위에 불상을 새겨 모시고

연구사(燕口寺)라고 한 것이 시초라는 이야기가 있다.

 

불상을 덮은 지붕이 제비와 비슷하여 연자루(燕子樓)라고도 하였고,

승려가 거주하는 요사가 제비꼬리에 해당한다고 해서 연미사(燕尾寺),

또는 법당이 제비부리에 해당한다고 해서 연구사(燕口寺)라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규모가 작지만 예전에는 꽤 많은 전각을 갖춘 사찰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절 연미사는 1918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하 <안동호>

월영교 앞 까치구멍집에서 헛제사밥으로 점심공양.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430년전 병석에 누운 남편의 쾌유를 빌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한 켤레의 미투리를 삼은 지어미의 애절하고 숭고한 사랑을 담은 <월영교>

 

"워늬 아바님께 샹백 - 병슐 뉴월 초하룬날 지비셔"

(원이 아버님께 올림 - 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자내 샹해 날다려 닐오대 둘히 머리 셰도록 사다가 함께 죽쟈 하시더니

엇디하야 나를 두고 자내 몬져 가시노.

날하고 자식하며 뉘 긔걸하야 엇디하야 살라하야 다 더디고 자내 몬져 가시난고.”

(당신 늘 나에게 이르되, 둘이서 머리가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자식은 누구한테 기대어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편의상 아래 아는 ㅏ로 표기)

 

       이하 <법흥사지 칠층전탑>

국보 제16호 통일신라시대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法興寺址 七層塼塔)>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된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위로 7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세워놓았고,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도록 하였다.

탑신은 진한 회색의 무늬없는 벽돌로 쌓아 올렸으며,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금동제 상륜이 있었는데

철거되어 객사 건물에 쓰였다고 '영가지'에 기록되어있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아 아쉬움을 남기는 이 탑은 7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탑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한국전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탑이다.

또한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전탑은 모두 다섯 기, 그 가운데 여주 신륵사의 전탑을 제외하고

네 기가 경상북도 지방 그것도 세 기가 안동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또한 안동을 비롯한 영양, 봉화 등지에는 폐전탑이 다수 있다.

 

안동은 유교적인 문화가 깊이 뿌리박혀 있으나

그 이전부터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웠던 곳이기도 하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봉정사를 비롯하여

곳곳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전탑과 석탑들이 그것을 증명하듯 이곳 저곳에 우뚝 서 있다.

 

 

 

 

       이하 <하회마을>

경상북도 기념물 제163호 <화천서원(花川書院)>

부용대 아래 자리하고 있는 화천서원은 도산서원 등 향촌 사림의 동의를 얻어

1786년(정조 10)에 건립하였다.

건립 후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을 주향으로 하고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과

종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를 배향하고

100여 년 이상 춘추로 향사를 지내오다가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에 의해

강당과 주사만 남기고 훼철됐다.

서원의 훼철을 아쉬워하던 후손들은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사림들의 공론으로

1996년에 복설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경내에는 사당인 경덕사(景德祠), 강당인 숭교당(崇敎堂),

동재(東齋-尊賢齋)와 서재(西齋-典學齋), 문루 지산루(地山樓), 원문 유도문(由道門),

주소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강당과 주사외엔 모두 복원 된 건물들이다.

 

조선시대 서원이나 향교는 제향(祭享)과 강학(講學)의 두 공간으로 이루어지고,

전묘후학(前廟後學) 또는 전학후묘(前學後廟)라 일컫는 원칙이 있었다.

평지인 경우는 전면에 배향공간이 오고 후면에 강학공간이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대지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룬다.

전학후묘(前學後廟)와 전강후사(前講後祠)는 같은 의미이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안동 <하회마을>

물이 돌아나간다고 해서 ‘물돌이동’이라 하고,

한자로는 ‘하회’(河回)라고 불리는 하회마을은

일반적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명당으로 볼 때,

물이 삼면으로 휘감아 흐르는 지형은 그다지 적합한 형태는 아니라 할 수도 있으나,

 

마치 우리 동네(당리동 반도보라)가

낙동정맥으로 부터 분벽된 용맥이 승학산 정상으로 입맥하고

서진(西進)하려는 용맥의 기운을 낙동강 물길이 되돌려 승학산 중봉(학머리)에서 취기후

남(南)으로 나아가게 하고 몇번의 취기를 거쳐

반도보라(학날개, 동네자랑~ㅎㅎ)에서 혈(穴)을 맺고 기운을 갈무리한 것처럼,

하회마을을 감도는 물길도 설기를 맊아 기운이 응축되는 듯 하다.

 

풍수지리적으로는 태극형, 연화부수형, 행주형으로 일컬어지며,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즉 마치 연꽃이 물 위에 뜬 형상으로 특별한 길지의 하나로 꼽힌다.

     땅 모양 자체는 배 모양 즉 ‘행주형’이므로 마을에 돌을 쌓으면

배에 돌을 가득 싣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곳은 돌담을 쌓지 않는 관습이 있고,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나서 가라앉게 되기 때문 마을에 우물을 파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위 아래 사진은 마을 전경을 광각으로도 다 담을 수가 없어 파노라마 모드로 촬영하였습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89호 <겸암정사(謙菴精舍)>

이 집은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맏형인 겸암 유운룡(1539∼1601) 선생이

학문 연구와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선 명종 22년(1567)에 지었다고 하며 부용대 서쪽 높은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겸암정사에 게시된 현판 중에 ‘겸암정(謙巖亭)’이라고 쓴 현판은

스승인 이황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높은 절벽 아래 굽이도는 강줄기, 자연이 어우러진 진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정사(精舍)다운 지형 요건과 전통이 배어 있어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