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선일미(茶禪一味)’의 연원(淵源)
글쓴이:촌안(村顔)・박영환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동국대학 겸임교수)
차를 마시는 일은 참으로 즐겁기도 하거니와 바쁘거나 또는 지루한 일상생활 속에서의 유일한 탈출구이며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에게서의 ‘차 생활’이란 이미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처럼 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나와 더불어 차를 마시는 여러 지인들의 생활 속에서도 어느덧 깊이 뿌리를 내리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기호품 내지는 취미생활로 정착한 모습을 자주 보곤 한다.
이렇듯 차를 즐겨 마시는 이나 혹은 음차생활에 심취한 나머지 아예 차학(茶學)의 연구에 몰두하는 이들, 더 나아가 정식으로 다도를 전공하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늘 차상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 한구석에는 어느덧 찻잔 속에 피어나는 수연(水煙)처럼 어느새 알 듯 모를 듯 묘연한 화두로 뇌리 속을 맴도는 문구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20년 음차생활은 현실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숱한 번민으로부터 나를 편안하고 즐겁게도 해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를 끊임없는 정신세계로 향하도록 매섭게 채찍질하는 화두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선일미(茶禪一味)――혹은 “선다일미(禪茶一味)”――였다.
비록 불가(佛家)에서 비롯된 화두이긴 하나 필자 개인적인 견해로 볼 때, 기본적인 음차생활에서부터 다도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인이라면 한번쯤은 반드시 짚어보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많은 다인들이 ‘차 모임’을 갖거나 ‘차 문화행사’를 하거나 혹은 다도에 관한 연구 토론을 할 때면 심심찮게 자주 거론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가(佛家)의 다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일반 다실에 “다선일미”라고 쓴 편액이나 족자가 걸려 있는 것을 아주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의미를 알고 걸어 놓거나 또 그 실체를 진정으로 깨닫고 걸어놓은 이들은 오히려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그 심오한 의미를 이해했거나 깨닫거나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심오한 뜻이나 깨달음은 각자의 개인적인 근기(根器)에 따라 맡기도록 하고, 필자는 단지 “다선일미”의 문구가 나오게 된 배경이라도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서툰 식견으로 감히 “다선일미”의 연원이나마 간략하게 살펴볼까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일반적인 상식 속에서 자주 거론되는 ‘다선일미’는 대저 그 뿌리를 ‘일본다도’에서 자주 찾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마치 ‘일본다도’의 전유물인 것처럼 고정 관념화되어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물론, 다도에 전문으로 종사하거나 연구하는 이들은 제외되지만) 그 이유는 아마도 일본이 동양 삼국(한․중․일) 중에서 ‘다선일미’ 일구를 가장 널리 선양하고 체계화한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선일미’의 정신은 그 기원을 중국 송(宋)나라 때로 보지만, 그러나 사실 그 기원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당나라 때로 볼 수 있다.
‘다선일미’정신을 일본에 직접적 영향을 준 근원지는 중국 절강성 항주시 여항(余杭)의 경산사(徑山寺)이다. 경산사의 ‘다선일미’ 정신은 다시 당나라 때의 고승이자 협산(夾山:湖南省 常德市 石文縣에 위치)의 개산종조(開山宗祖)이며 협산사(夾山寺)의 주지로 있던 선회선사(善會禪師)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선회로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다선일미’의 정신은 송나라 때에 이르자 협산사에서 선회선사의 ‘다선일미’의 법통을 이어 받은 원오․극근(圓悟․克勤)스님에 의해 더욱 일어나게 된다.
원오․극근 선사는 20여 년간 협산사 주지로 있으면서 ‘차(茶)와 선(禪)의 관계’에만 몰두하여 마침내 ‘다선일미’의 참뜻을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하여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네 글자를 썼으며, 이로 인해 중국의 선풍은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 원오선사의 문하에 크게 촉망받는 제자가 두 명 있었는데 바로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선사와 호구소륭(虎丘紹隆:1077~1136)선사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어려서 출가하여 협산사에서 원오 선사를 20여년이나 스승으로 모시며 정진하였다.
그 뒤, 남송(南宋) 소흥(紹興) 7년(1137년) ‘종고(宗杲)’선사는 승상 장준(張浚)의 추천으로 황명(皇命)을 받들어 항주 여항의 경산사(徑山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아울러 ‘다선일미’의 선풍을 크게 일으키게 된다. 종고선사가 경산사의 주지로 온 이듬해 여름에는 설법을 듣고자 참가하는 승속(僧俗)이 무려 1,700여명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와 신도들을 위한 각종의 다연(茶宴)이 베풀어지고, 이에 따라 《선원청규(禪院淸規)》를 바탕으로 한 각종의 사찰다례의 의식 등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로써 바로 그 유명한 ‘경산다연(徑山茶宴)’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또 일본에도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남송말년 일본다도의 비조(鼻祖)격인 에이사이(榮西禪師1141~1215)는 두 차례나 중국을 다녀가게 되고, 에이사이선사는 이때 원오선사가 지은 《벽암록》과 함께 원오선사가 친필로 쓴 ‘다선일미’의 묵적까지 함께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뿐만 아니라 1191년에는 일본의 ‘다경(茶經)’이라 할 수 있는 《끽다(喫茶)양생기》를 저술하여 광범위하게 선도와 다도를 전파하였다.
해마다 일본의 많은 차문화답사단이 ‘경산사(徑山寺)’를 잊지 않고 찾는 이유는 아마도 일본 다인들의 차생활을 통해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열정과 일본 다도의 최고경지로 일컬어지는 ‘다선일미’의 발원지를 친견하고 싶은 흠모의 마음과 존경심의 발로가 아닐까? 필자가 중국 유학시절 ‘다선일미’의 중흥조 격인 원오․극근 선사의 묘소를 어렵게 찾았을 때, 거기에도 어김없이 일본인 방문시찰단들이 몰려 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묘소를 돌보고 있는 스님의 말에 의하면 참배자들 중에 한국인은 필자 일행이 최초라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솔직히 마음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다. ‘다음에 또 지면이 허락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경산다연‘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서울 불암산 자락에서 村顔・朴永煥 合掌
출처:계간《다담(茶談)》200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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