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속에 비친.....

[스크랩] [茶器의 미학⑨] 인성을 바꾸는 그릇

청원1 2017. 11. 15. 06:30
[茶器의 미학⑨] 인성을 바꾸는 그릇  

李箱과 항아리 나부랭이

“가령 신라나 고려때 사람들이 밥상에다 콩나물도 좀 담고 또 장조림도 좀 담고 또 약주도 좀 팔고해서 조석으로 올려 놓고 쓰던 식기 나부랭이가 분묘 등지에서 발굴되었다고 해서 떠들썩하니 대체 어쨌다는 일인지 알 수 없다. 그게 무엇이 그리 큰일이며 사금파리 조각이 무엇이 그리 가치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냐는 말이다. 항차 그렇지도 못한 조선시대 항아리 나부랭이를 가지고 어쩌니 하는 것들을 보면 알 수 없는 심사이다.

 

우리는 선조의 장한일을 잊어버려서는 못쓴다. 그러나 오늘 눈으로 보아서 그리 값도 나가지 않는 것을 놓고 얼싸안고 혀로 핥고 하는 꼴은 진보한 ‘컷트 글라스’ 그릇 하나를 만들어 내이는 부지런함에 비하여 그 태타의 극을 타기하고 싶다. 항아리 나부랭이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시대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미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 깨 지기 쉬운 도자기는 다루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심성을 갖게 한다. / 사진 변희석


간혹 꽤 미술적인 요소가 풍부히 섞인 것이 있기는 있으되 역시 여기(餘技) 정도요. 하다못해 꽃을 꽂으려는 실용이래도 실용을 목적으로 한 것임에 틀림 없다. 이것이 오랜 세월 지하에 파묻혔다가 시대도 풍속도 영 딴판인 세상인 눈에 뜨이니 우선 역설적으로 신기해서 얼른 보기에 교묘한 미술품 같아 보인다. 이것을 순수미술으로 알고 왁자지껄들 하는 것은 가경(可驚)할 무지다….”

 

 

1937년 일본 도쿄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이상(李箱)은 소설 9편, 시 90여편으로 한 국 현대 문학사에 뚜렸한 자리를 차지했는데 위의 글은 그가 생전에 남긴 골동벽(骨董癖)이라는 수필에 있는 것이다.

 

위의 글을 보면 이상(李箱)의 도자기를 보는 눈이 ‘항아리 나부 랭이’이거나 ‘사금파리’ 정도로 볼만큼 천박했던 건지 하찮은 도자기 그릇 하나 놓고 왁자지껄 떠드는 세인들의 꼴이 못 마땅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우리 도자기를 보면 정신 못차리는 일본인의 탐욕을 비꼰 것인지는 몰라도 요즘 사람 가운데도 도자기를 사금파리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러나 한국의 조형미술이나 공예 가운데 아직까지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우리의 도자기 뿐이다. 그러면 생활 속에서 일상적인 기물로 쓰여 졌던 도자기가 우리 민족의 심성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인성을 바꾸는 도자기 그릇

매일 쓰는 기물은 그 성질에 따라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깨 지기 쉬운 도자기는 다루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심성을 갖게 한다. 옛날 시부모님을 모시는 며느리는 ‘자리끼'라 하여 매일 저녁 부모님이 주무시기 전에 물 대접을 머리맡에 놓아 드렸다.



 

▲ 오래된 옛 도자기는 대를 이어 사용되면 소중하게 집안에 전래된 전세품 중 하나이다. 다기는 특히 쓰면서 완성되는 생활미술품이다. / 사진 雲.中.月 제공


나이 든 어른들은 입안이 쉬 마르므로 자다 깨어 물을 찾기 때문에 자리끼는 잊어서 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때 물 대접을 쟁반에 받쳐들고 시부모님 방으로 걸어가는 며느리의 발걸음은 물이 엎질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느라 조심조심 걷게 된다. 이런 걸음걸이가 자연스 럽게 여성들을 침착하고 조신한 모습으로 만들어 갔다. 또 그릇의 전 끝이 조금 떨어져 나 간 것을 이가 빠졌다고 하는데 특히 설거지 할 때 이가 잘 빠졌으므로 그릇들이 서로 부딪 치지 않도록 주의했다.

 

 

옛날 어른들은 작은 물건 하나도 매우 소중히 여겼으므로 이 빠진 그릇을 보면 어른들로 부터 심한 꾸지람을 맞기 때문에 주의하여 그릇을 다루었다. 지금 사 람들은 플라스틱 용기나 금속성 그릇 또 일회용품을 쓰면서 물건을 함부로 대하고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습성이 되어 조심성없고 거친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게 된다. 이토록 생활 속에서 도자기는 그것을 쓰는 사람들을 조심성있고 침착하며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그런 사려 깊은 사람으로 바꿔 준다.

 

다기는 심성수련의 기물

차를 마시는 그릇이 도자기인 이상 도자기는 차 문화의 중심이 된다. 해방전 일본인으로서 우리 그릇의 이름에 관한 글을 써 책을 펴낸 사람으로 아사카와 다쿠미가 있다. 그는 저서 「조선 도자명고」에서 “부서지기 쉬운 물건을 정성스럽게 다루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지 닌 미덕이며, 다인들은 그런 수양이 가장 잘된 사람들이다…, 깨지기 쉬운 것을 정성스럽게 애용하는 훈련에는 도자기가 가장 적절한 재료이다.

 

깨지기 쉬운 것을 애용하는 사람에게는 사려, 관용, 너그러움 등의 덕이 자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다인에 있어서 다기는 깨지기 쉬운 그릇을 잘 다룰 줄 아는 훈련 속에서 사려와 관용과 남을 소중히 여기는 심성수련의 기물인 것이다.

 

전세품(傳世品)의 미덕과 다기

오래된 옛 도자기는 보통 유적지나 무덤의 부장품으로 출토된 출토품이거나 아니면 대를 이어 사용되며 소중하게 집안에 전래된 전세품 중에 하나이다. 같은 종류의 동일한 도자기가 있을 때 출토품 보다는 전래품이 골동적 가치로 판단할 때 높이 평가되며 가격 또한 고가이다.

 

전래품이 출토품에 비해 인정받는 이유는 오래도록 사용된 것이 깨지지 않고 흠집 없이 현재까지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행운적 가치가 있고 또 그것을 다루었던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만들어 낸 세월의 분위기가 도자기 겉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다인 또한 다기는 쓰면서 완성되는 생활 미술품이라는 점에서 전래품의 소중함을 잘 알고있다.

 

다인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던 다기가 훗날 누군가 다른이의 입과 눈을 즐겁게 해주고 그의 손에서 사랑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다기는 자신의 것이면서 또다른 다인의 것 임을 잊지 않고 주의하며 섬세하게 다룬다. 다기는 다인들이 손과 가슴과 무릎 위에서 잠시 도 떠나지 않는 다정한 친구이자 엄격한 도반이다.

 

행다(行茶; 차를 내는 일)가 양 손을 벌 릴 만큼의 공간에서 인체의 동선(動線)이 그려 내는 선의 미학이라고 한다면 이때 절제된 행동으로 사용되는 다기는 신성한 그릇이 되어 소중하게 취급된다. 찻일에 사용한 다기는 행다가 끝난 다음 설거지로 마무리하고 처음같이 청결하게 정리해 둔다. 그리고 다인들은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 다기가 언젠가 다음 세대의 훌륭한 다인의 손에 넘어가 귀하게 사용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 김동현 차문화연구가

김동현은 다회(茶會) '작은 다인들의 모임' 회장이고 차문화 공예연구소 운중월(雲中月)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는 흙과 나무로 차 생활에 소용되는 기물을 만들며 그 것들을 사용함으로써 생활이 생기 있고 아름다워지기를 원한다.

(출처: 조선일보 2003.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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