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속에 비친.....

[스크랩] [茶器의 미학④] 찻잔과 찻사발(다완)

청원1 2017. 11. 15. 06:21
[茶器의 미학④] 찻잔과 찻사발(다완)  

찻잔-잎차용 잔
다관에서 우린 잎차를 담는 찻잔은 잔(盞)과 배(杯, 盃)가 있다. 보통 잔에 비해 바닥의 굽이 높은 것을 배라고 부른다. 배에는 무사가 말을 타고 한 손으로 들고 마시는 굽이 높은 마상배(馬上盃) 등이 있다. 문향배(聞香盃)는 중국인이 차향을 즐기기 위해 고안한 잔이다.

중국인은 좁고 긴 문향배에 차를 따르고 그 차를 다시 마실 잔에 옮긴 다음 문향배를 코 가까이 대고 향을 맡는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가슴 높이에서 향을 즐기는 우리의 정서나 품격에는 알맞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찻잔의 형태

찻잔은 형태를 중심으로 분류하면 범종을 거꾸로 세운 듯한 종형과 위아래 크기가 비슷한 통형, 굽에서 위로가면서 벌어지는 사발형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고 이 기본형으로 부터 많은 변형이 나온다. 잔은 입술이 안으로 많이 옥으면 마실 때 목을 젖혀야하므로 좋지 않고 잔의 입술이 너무 두꺼우면 차 맛을 예민하게 느낄 수 없다.

▲ 찻잔은 개인의 취향과 차의 종류에 따른 선택이 필요하다. 사진/티&피플 제공

찻잔의 색과 크기

찻잔 빛깔에 대한 취향이나 기호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이는 당시에 마시던 차의 종류에 따라 찻물색이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수색이 붉게 나오는 덩이차를 마시던 중국 당대에는 월주요에서 구워진 청자를 최고로 여겼다. 이는 형주 가마에서 만들어진 백자에서는 덩이 찻물이 붉게 보이는데 비해 월주의 청자는 찻물의 빛깔이 백록색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육우가 쓴 ‘다경(茶經)’은 기록하고 있다. 같은 덩이차를 마시던 송대에도 청자가 주로 사용되다 11세기에 이르러서는 흑유(천목) 찻잔이 애용되기 시작해 13세기에 절정에 이르고 14, 15세기에는 내리막 길에 들어선다. 그뒤 잎차를 마시기 시작한 명나라 때에는 잎차의 황금색이나 연두색 찻물색이 잘 보이는 백자를 좋아했다.

▲ 한국의 도공들이 만들어낸 각종 찻잔, 과거 조선은 세계 도자기 강국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쇠퇴의 길을 걷고 일본은 오늘날 세계 도자기 강국이 되었다. / 변희석 기자


조선시대 초의(草衣)스님이 쓴 다신전(茶神傳)에는 잔은 설백색이 가장 좋고 남백색(藍白色) 은 색을 해치지 않으니 다음으로 좋다고 했다. 찻잔의 색은 찻물의 색을 정확히 내려면 백자나 분청자기의 흰색이 제격이겠지만 차를 마시는 일이 찻물색만 보는 것은 아니므로 그 날의 기분과 손님에 따라 다양한 색의 찻잔을 골라 쓰는 즐거움 또한 크다. 찻잔의 크기도 오랫동안 다담을 나눌 때는 좀 작은 잔을 사용하고 일상적인 찻자리에서는 중간 크기의 찻잔을 사용한다. 혼자서 찻일 조차 번거롭고 그저 생각에 젖고 싶을 때는 큰 잔에 차를 가득 담아 천천히 나누어 마시는 것도 괜찮다.

 

찻사발 [茶碗] - 가루차용 사발

▲ 가루차용 찻잔은 다완(茶碗) 또는 찻사발이라 부른다. 주로 한국이나 일본에서 사용한다./ 변희석 기자


가루차는 찻잎을 곱게 갈아 만든 분말을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차솔로 휘 저어 거품을 만들어 마신다. 이때 쓰는 사발을 다완(茶碗) 또는 찻사발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찻사발은 신라 때는 토기사발, 고려 시대에는 청자사발, 조선시대에는 백자, 분청 자기, 지방자기로 만든 사발이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찻사발은 형태에 무리한 모습이 없고 어디에 놓여지든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한 모습으로 차의 중용사상이나 겸양지덕의 정신과 잘 어울린다.

 

조선찻사발 위에 세워진 일본다도

일본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워지는 임진왜란을 통해 수 많은 조선의 사기장들을 일본 으로 끌고 갔고 찻사발과 많은 도자기를 약탈해 갔다. 이때 끌려간 조선의 사기장과 가져갔 던 도자기는 일본의 도자산업을 일으켜 국가 경제를 부흥시켰고 식생활과 차문화를 바꾸었 으며 일본 다도의 초석이 되었다.

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일본의 모든 문화를 그 속에 아우르고 있다는 일본 다도는 조선 의 찻그릇 위에 세워진 ‘심미주의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차 문화의 싹이 튼 15세기,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의 미 의식은 적막함, 쓸쓸함, 그리고 스산함이였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활약했던 모모야마(桃山)시대는 일본다도가 완성된 시기이다. 승려이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스승이고 일본 와비차 다도를 완성시킨 센리큐(千利休)는 자연으로 돌아가 꾸밈없이 사는 소박한 삶과 완벽하고 화려한 미(美)로 부터 불완전하고 검소한 것으로 돌아오는 미의식의 세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와비차 정신을 담아내는데 가장 적절한 찻그릇으로서 조선의 사발을 선택했다. 센리큐가 제창한 이런 차 문화의 영향으로 조선의 찻사발 하나는 당시의 오사카성(城) 하나와도 바꾸지 않을 만큼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일본 다인들의 명예와 부의 상징이 되었다.

일본의 고려 다완 연구가 하야시의 조선 찻사발에 대한 평가는 매우 솔직하고 함축적이다. “이 고려다완은 물론 조선 시대의 막사발이긴 하지만 우리 일본인들에게는 신앙 그 자체 였으며, 우리에게는 단순한 보물이 아닌 우리들의 마음을 한없이 평화롭고 기쁘고 또 숭고하게 했으며 우리의 마음을 영원한 안식처로 이끌어 주었던 마치 신과도 같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일본 다인들에 의해 국보로 지정되었고 일본 천황도 무릎 꿇고 보아야한다는 ‘신같은 존재’ 로 신앙의 대상이 된 조선 찻사발은 형태의 단순성, 꾸밈이 없는 무위성(無爲性), 무욕의 마음에서 나오는 소박성이 투영된 자연주의적 미학의 산물이다.

/김동현 (차문화 연구가)

김동현은 다회(茶會) '작은 다인들의 모임' 회장이고 차문화 공예연구소 운중월(雲中月)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는 흙과 나무로 차 생활에 소용되는 기물을 만들며 그 것들을 사용함으로써 생활이 생기 있고 아름다워지기를 원한다.

(출처: 조선일보 2003.0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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