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허스님의 차' 책에 대한 여연스님의 비평에, 다시 한국전통자생차보존회에 있는 최성민님이 불교신문 2003년 3월 28일자에 기고하신 글입니다... 요즘 논란이 많이 되는 책인데, 이 글도 참고하셔서, 건강한 토론으로 이어지기를 빕니다... 최성림 새날다짐 올림
-------------------------------------------------------------------------------- [옴부즈맨] “일본색 짙은 차문화 모두 책임느껴야” 여연스님 칼럼 ‘茶 알고 써야 茶맛 나지’에 반론
여연스님의 칼럼 `‘茶 알고 써야 茶맛 나지’에 반론한다. 먼저 반론자의 입장부터 밝힌다. 나는 한국전통자생차보존회의 일을 하고 있고, 지허스님의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은 한국 전통차의 참모습〉을 기획했다. 내가 기획자로서 저자를 대신해 반론을 하게 된 이유는, 저자인 지허스님이 ‘격분돼 있는 글에 대한 직접 대응은 모든 격앙이나 분노로부터 벗어나기를 해탈의 길로 삼는 수행자의 모습에 적절하지 않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연스님의 반론은 지허스님의 지적대로 ‘격분’만 빼면 건강한 토론을 통해 문화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여연스님의 글 가운데 동의할 수 없는 부분만을 재반론한다. 여연스님의 말씀대로 요즘 〈지허스님의 차〉라는 책이 화제다. 화제라는 말은 그만큼 다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러겠는가. 여연스님의 말씀대로 그 책 내용의 대부분이 `이미 많은 차 연구가들이 상식적으로 얘기한 것이라면 그러겠는가 말이다. 상식적으로 얘기하고 안하고 보다 그것이 얼마나 대중에게 실용적으로 다가가는가가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그 많은 차연구가들이 상식적인 설파를 해왔음에도 우리 차문화는 어찌 왜색이 도배질하고 있을까? 차연구가들은 내가 먼저 얘기했느니를 다툴 게 아니라 우리 차문화의 현주소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남도 야생차는 아부기茶’ 내용 지허스님의 본뜻이 와전
여연스님은 차나무의 생명에 관하여 식물학자적 견지에서 매우 적확한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차의 부분적인 정확성을 기술한 학문서가 아니라 대체적이며 본질적인 정신을 쓴 차 실용서이다. 지허스님은 50년을 조계산 선암사 차밭과 더불어 살면서 차나무가 자연사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고, 은사스님들로부터도 차나무는 `‘장생불사의 나무’라는 말을 들어왔다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차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강조한 것이니 시비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더 황당한 것은 남도의 산천에 널려있는 야생차는 전부 야부기다여서 자생차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는 말은 여연스님이 책을 자세히 읽지 않고서 하는 말이다. 남도 산천의 야생차를 전부 야부기다라고 한 적은 없고 선암사 징광사 대원사의 자생차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여연스님은 대원사 주지 경력을 내세우며 대원사차가 일제시대 심어졌으니 야부기다라고 단언했다. 대원사차는 분명 자생 재래종이다. 여연스님은 일제시대에 심어진 것은 모두 야부기다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나, 일인들도 한국 자생차를 좋아해 재래종을 많이 심었음은 현재 한국전통자생차보존회의 전라남도 일대 야생차밭 탐사작업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여연스님이 할말을 잃었다고 하는 `죽창으로 지켜낸 선암사 선맥과 다맥 부분에 대해서는 지허스님의 입장을 전한다. 지허스님은 불교분규의 와중에서 선암사에 전통다원과 다맥이 유일하고 완벽하게 남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그 인과관계에 있는 `개혁파와의 대립을 말한 것이다.
‘선암사-대원사-징광사에 우리 자생차 잘 보존’ 강조 의미
지허스님은 우리 모두는 역사의 한 부분을 살고 있으며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불교분규는 분명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손뼉은 홀로 소리내지 못하며 일방적으로 한쪽이 옳고 한쪽이 완전히 그르면 분규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또 선암사 역사에서 단 한번도 한국불교의 전통을 거역해 본 일이 없으며 처자를 도량에 두고 아이들을 기르며 수도 도량을 망가뜨린 일은 꿈에도 없다고 한다. 그는 “예로부터 불교의 종파에는 종지와 종풍이 있어 종이라 하며 모양만 내는 종파는 그 종파를 기만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조계종 측 육조 혜능조사의 종지와 종풍을 생명으로 삼는 것을 삶의 지표로 살아왔다. 육조 혜능대사의 종풍이 제불조사의 법통이요, 마조도일과 임제의현으로 이어져 석옥청공선사로부터 우리나라의 태고보우증조에게 온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분들이 이루어 이를 증명하고 있으니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필자로서 궁금해서 묻는다. 불교분규에서 적지않은 고승대덕들이 기존에 지켜오던 노선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그 분들 중에 넘어가기 전까지 `처를 두고 절간에 애들을 기르며 수도장을 망가뜨린 사람은 없는가?
이 책의 내용과 본질을 달리하는 이 문제들은 필요하다면 따로 기회를 내어 토론하기를 제안한다. 다만 건강하고 논리적인 토론을 버리고 글로써 선동하여 다중의 물리적인 힘에 의존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