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일본차의 특징
1. 일본의 다도(茶道)
일본에서 말하는 전통문화로서의 다도(茶道)는 일본인의 일상생활 속의 차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특이한 하나의 행사라 하겠다. 즉 보통 장소보다는 거리가 있는 특수한 장소에서 특별히 정한 시간에 엄숙하게 개최하기 때문이다. 다도행사를 보면 우선 복잡한 순서가 있으며 정해진 여러가지 수법(手法)에 따라 행한다. 이러한 작법(作法)은 아주 오랜 역사 속에 만들어졌다.
리큐는 노(일본연극의 일종)의 연습을 모방해서 다도수행을 규정했다. 일정한 연령을 구분해서 각기 적합한 모습을 요구하고 있는 점이 매우 비슷하다.
즉 15세에서 30세까지는 모든 것을 스승하게 맡기고 그대로 따른다. 30세에서 40세까지는 자기 의견을 들여온다. 다도의 관례와 절차, 여러 가지 법칙을 연구하는 것도 기초에 관해 잡담을 나누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10중 5정도는 자기의 의견을 채택한다. 40에서 50에 이르면 대담하게 스승과 반대로 해본다. 스승이 서쪽으로 가면 나는 동쪽으로 간다. 그런 가운데 자기류를 창안해서 훌륭한 다인이라는 평가를 얻게 된다. 그리고 50에서 60까지의 10년간은 다시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한 잔의 물을 온고히 옮기는 듯이 한다. 이와 동시에 모든 도(道)의 명인의 창의와 태도를 모범으로 삼는다. 이처럼 처음에는 차를 마시기 위한 데서 조금씩 생겼지만 점점 예술화하기 시작하여 지금과 같은 복잡한 다도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다도는 두 가지의 목적 하에 거행하게 된다.
하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다도라는 행사를 경험하는 가운데 서로 연대의식을 느끼고 하나의 단결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의 복잡한 생활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 현실의 작법과는 전혀 다른 작법 속에 차를 만들어 마시게 됨으로서 서로가 마음이 통하게 되며 일본인은 하나라는 연대감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둘째는 다도에는 집단의식과는 다른 하나의 정신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혼자서 현실을 떠나 새로운 작법에 의해 차를 만들어 갈 때 쓸쓸한 가운데 차분해지는 마음(일본어로 사비さび라고 함)과 조용히 참는 마음(일본어로 와비わび라고 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 두 마음은 동물과는 달리 인간이 혼자 있을 때 갖게 되는 마음이지만 보통은 그리 깊이 느끼지를 못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다도를 통해 이런 마음을 깊이 느끼며 또한 깊이 느낄수록 남의 중요성을 깊이 느끼게 된다. 일본의 역사를 보면 일본을 단결시킨 많은 현자들이 다도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인들은 다도를 통하여 사비와 와비의 경지를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일본 민족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연대의식을 가지게 되며 나아가 이러한 의식은 일본인의 주체의식이 되어 간다. 물론 일본인이 강한 연대의식을 갖는데는 다도만이 아니다. 일예를 들면 7월13일에서 4일간에 걸쳐 전국적으로 행하는 봉오도리(盆舞, 춤의 한 형태)라는 축제 역시 다도와 같은 하나의 행사라 하겠다.일본의 다도는 한 가지가 아닌 다양한 형식을 띄고 있다. 다양한 형식을 띠게 하는 기준은 춘하추동의 사계절이 뚜렷한 일본의 기후이며 아침 점심 저녁이라는 시간이 된다.
다도의 다양한 종류를 보면 ‘쇼고노다(正午の茶)’ ‘구치기리(口切り)’ ‘요바나시(夜)’ ‘유키미(雪見)’ ‘하츠가마(初釜)’ ‘세츠분가마(節分釜)’ ‘하나미(花見)’ ‘츠키미(月見)’ ‘아사다(朝茶)’ ‘나고리(名殘り)’ ‘하츠후로(初風爐) 등이 있다.
첫째, 이 가운데 ‘쇼고노다(正の午)’라는 다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쇼고노다(正午の茶)’라는 다도는 말 그대로 낮 12시에 시작하는 행사이다.
초빙된 손님들은 차실(茶室)로 들어가 손님 좌석에 가서 주인과 인사를 정중히 나눈다. 겨울 같으면 난로에 첫 석탄을 넣는 의식(쇼즈미初炭라고 함)이 있으며, 끝난 후 배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간단한 따뜻한 음식이나 차를 마시는 의식(가이세키懷石라고함)이 이어진다. 그후 식사를 하게 되며 식사가 끝나면 과자(菓子)를 먹게 된다. 과자를 먹은 후 손님은 자리를 떠나 거실로 옮겨 의자에 앉아 쉰다. 이것을 ‘나까타치(中立)’라고 한다. 쉬는 동안 차실에는 濃茶가 준비된다. 또한 차실에 걸려 있는 장식물 대신 생화가 준비된다. 작은 종소리에 맞춰 손님이 차실로 다시 들어온다. 차실에 걸려있던 장식이나 덧문 등이 치워져 차실은 한층 밝게 된다. 자리에 앉은 후 濃茶를 마신다. 濃茶는 한 팔로 저어 마시기 때문에 격식을 갖춘 분위기 속에 행해지게 된다. 말수도 적어진다. 다음 난로에 석탄을 넣는 의식(아도즈미 後炭라고 함)이 행해진다. 마지막으로 薄茶를 마신다. 薄茶는 느긋한 마음으로 환담하며 즐기면서 마신다. 이와 같은 다도가 행해지는 차실의 분위기는 매우 일본적이며 사용하는 찻잔 등의 모든 기구는 하나하나 모양과 색깔이 다르며 매우 일본적이다. 참가자들은 이들을 감상하면서 사비와 와비의 마음을 강화하며 강화할수록 일본인은 하나로 통합되는 단결심이 고조된다.
둘째, 문인들이 마시는 문인전법은 다관받이(다관 높이의 약1/2이 되는 그릇)가 있어서 다관에 차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뚜껑을 닫고 다관의 물이 식지 않도록 뚜껑 위에로도 끊는 물을 계속 붓는 것이 특징이다. 흐르는 물은 다관받이에서 받으나 찻잔은 들어 있지 않다. 찻잔은 사람 수 만큼 쟁반에 일렬로 세운 후 차를 차례로 부어 나간다. 물붓는 것이 끝나면 한 잔씩 찻잔에 받쳐 손님에게 권한다.
2. 일본의 말차문화
일본에 말차가 전해진 것은 남송시기 중국으로 유학 온 일본승인 남포소명이 중국에서 배운 전차 비법과 경산 다연 등을 가지고 일본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라고 한다.
후세 센리큐(千利休)가 말차를 제도화하면서 일본다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리큐는 차 끓이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말차(抹茶)에는 濃茶와 薄茶의 구분이 있는데 오로지 묽은 차를 끓여야 하며 그것이 진(眞)의 차라고 하고 있다. 리큐는 60세 무렵까지는 탁자의 차를 진(眞)이라 하고, 풍로(風爐)의 차를 행(行)이라 하며 화로(爐)의 차를 초(草)라고 정했는데 60을 넘은 만년에 이르러 차의 방법이 크게 바뀌었다. 탁자의 차의 고류(古流)에도 정통하고 있는 터에 탁자는 애호가에게는 불필요한 장식물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차란 단지 물을 끓여서 차를 달여 마시는 것 뿐"이라는 내용의 리큐의 도가(道歌)가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리큐는 묽은 차를 달이는 것이 진(眞)의 차라고 규정하고 진한 차를 진(眞)이라고 하던 종래의 통설을 부인했다.
지난 23일 우라센케 전 이에모토인 센소시츠(千宗室)의 중앙대 강연내용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국에서 최근 다도가 유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다도는 잎차입니다. 그러나 우라센케의 다도는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한국차는 나무찻잎을 물에 우려서 마시는 것이고 일본 차문화는 말차도입니다. 찻잎을 따서 말리고 부비고 또 그것을 맷돌에 곱게 갈아서 그릇에 넣어 뜨거운 물을 붓고 거품을 일게 해서 마시는 바로 이러한 차가 말차입니다. 일본의 말차 문화는 가마꾸라시대 이후에 일본에 들어와 일본화되었고, 센리큐 이후 일본 다도로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차는 바로 500년 전 우리의 선조가 중국으로부터 들여 온 제다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진정한 다도라고 말할 수가 있지요.”
센소시츠의 강연은 일본 다도가 한국 다도보다 앞선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듯했다. 그의 논지는 진정한 다도는 말차이지 잎차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본 말차도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이도다완이었다.
사무라이를 열광시킨 이도다완이 일본 국보가 되면서 일본에 말차문화 또한 급속도로 발전했다. 일본에 45점의 이도다완이 전해진다. 그들은 조선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찻사발을 주문해 그들 나름대로 심미안을 터득한다.
오늘날 일본에 말차도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찻사발을 보는 안목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3. 일본의 농차 문화
한잔의 차를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나누어 마시는 것입니다. 이런 다법은 일찍이 일본 풍속에 없었던 것인데, 13세기 이후 교토의 세이다이 사(西大寺) 부근 서민들 속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막부를 무너뜨리고 일본의 절반을 자신의 지배하에 통일시키는 과정에서 일본의 정치상황은 모반과 투쟁으로 점철되어 사무라이사회는 불신과 배반이 팽배하여 다회(茶會)가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악용되기 시작했다. 신뢰가 돈독해지고 즐거워야 할 다회를 엿보던 노부가다는 센리큐의 의견을 받아들여 큰 다완에다 차를 가득 부어 초청자인 오다 노부나가 자신이 먼저 한 모금을 마셔보였다. 초청받은 사무라이들이 숨을 죽인 채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노부나가의 행동은 이채로웠다. 그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다완을 넘겨주었고 맨 마지막 사람에게까지 돌아갔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다. 오랜 불신과 의혹이 신뢰로 바뀌는 자리였다. 농차의 완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에 와서였다. 황폐해진 무사들과 지친 민중의 마음을 위로하고 화해시키기 위해 차실에 초대받은 손님을 편안하게 하고, 차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다법으로 센리큐에 의해 발전하였다.
4. 茶人과 茶愛好家 및 명인
리큐는 먼저 다인으로서의 자격(資格)을 엄격히 규정했는데 보통다인, 애호가, 명인의 3단계로 나누었다. 보통다인은 차맛을 식별할 줄 알고 차도 잘 끓이며 다도의 사범으로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애호가는 훌륭한 다도구를 소유하고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공적이 많은 다인을 말한다. 명인이란 茶道具를 감식하는 안목이 뛰어나고 차도 잘 끓이며 신념, 창의, 업적 세 가지를 갖추고 그 외에 당(唐)에서 수입한 茶道具를 소유하고 다도에 깊은 의지를 갖는 등 자격을 고루 갖춘 다인을 말한다.
이 같은 구분을 보면 리큐시대의 다도는 오늘날과 달리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제4장 일본의 다인 및 종가
1. 다인
(1) 명혜상인 (明慧上人)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일본 화엄학의 집대성자이며 일본에서 처음으로 차문화를 퍼뜨린 명혜상인은 명문 출신으로 9살 때 도다이 사(東大寺)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일찍부터 화엄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신라의 승려였던 원효을 알게 되어 그를 성인이라 추앙하였다. 저술로는 화엄연기회권(華嚴緣起會卷) 6권이 있다.
(2) 노아미 (能阿?)
무라타주코의 스승으로 집권자 아시카사 요시미쓰(足別義滿)에게 차를 가르쳤으며, 주코 선사의 차법이 지닌 여러가지 특징을 가르쳤으며 무라타주코를 요시미쓰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 때, 도호슈(同明衆)라는 직책을 지니고 있었는데, 장군의 측근에서 예능, 잡역을 맡아하는 직책이다. 실제로 그는 장군가에서 수집한 미술품을 감정, 관리, 장식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다도의 예법을 세련되게 정리하는 공을 세워 서원차를 확립시킨 인물이다.
(3) 무라타 주코 (村田珠光)
나라(奈良) 출신으로 쇼메이 사(稱名寺) 승려였습니다.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차인이라는 노아미를 스승으로 茶를 배웠다. 차에 깊이 빠져들어 나라류(奈良流)라는 토유차(鬪茶) 놀이를 탐닉, 절에서의 수행이 게을러 절에서 추방되어 방랑생활을 하였다. 25세 때에는 교토 변두리에서 집을 짓고, 차 농사도 짓고, 사람들에게 차를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다이토쿠 사 신쥬안(眞珠庵)에서 수행 중이던 일휴선사를 만나 참선 수행을 배우게 된다. 수행이 깊어진 이때에 나이는 61세였으며, 집권자 아시카사 요시미쓰를 소개 받은 것도 이때 이다. 그런 주코가 만년에 시도한 초암차는 차실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무라타 주코를 초암차의 원조라 하는 것은 종래 서원차의 武家 건축에서 목재와 대나무 중심의 훨씬 소박해진 작은 규모의 차실로 바뀌었기 때문이며, 이때부터 ‘스키야’, 즉 茶室이라는 말이 태어났다. 또한 주코는 차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一味淸淨과 法喜禪悅이며, 이 경지는 이미 趙州禪師가 설파한 것이라 했다.
(4) 다케노 조오 (武野紹鷗)
사카이의 피혁상 후예로서 젊은시절에는 주로 장사를 하여 큰 돈을 모았다. 장사를 하면서도 예능 방면에 취미를 가져 일본 전통 노래에 심취했고, 무라타 주코 유파를 잇는 차인들로부터 다도를 배웠다. 이는 사카이에서 사업하는 이들의 특징이며 풍속과 관련이 많다.
1532년 31세 때 삭발하고 호를 조오라 하여 다도에 전념하였는데 48세 때에는 난소 사(南宗寺)의 대림선사로부터 ‘일휴거사’ 칭호를 받았다. 만년에는 교토에 차실 ‘大黑庵’을 세우고 초암차를 한 단계 끌어 올렸다.
(5) 일본 다도의 교조 리큐(利休)
일본 다도의 시조는 무라타 주코(村田珠光), 중흥조는 다케노 조오(武野紹鷗)지만 교조라고 할 때는 센리큐(千利休)를 뜻한다.
리큐는 노아미(能阿彌)의 흐름을 계승한 다인(茶人) 기타무 키 도친(北向道陳)으로부터 다도를 배우고 후에 도친의 소 개로 주코류(珠光流)의 다인으로 널리 알려진 다케노 조오(武野紹鷗)에 사사하여 다도의 극치를 깨우쳤다. 다케다 조오를 만난 것을 계기로 센리큐는 교토 다이토구 사의 쇼오레이 선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 때 소우에키(宗易)란 새로운 이름을 짓고 성도 조부의 성인 센나미(千阿彌)에서 한 자를 따서 센(千)이라 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두 장군 아래서 다두(茶頭)가 되었고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궁중에서 다회를 열었을 때 참여하여 다회의 후견인 역활을 수행함에 따라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천하제일의 다인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다가 1591년 2월 28일 히데요시로부터 자결명령을 받고 자진함으로써 70년의 일생을 마쳤다.
리큐는 다도의 교조로서 뿐만 아니라 다도의 수호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다도의 이론을 완성시켰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고안을 통해 다실에서부터 다정(茶亭), 다구(茶具), 다도예법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일상다반의 생활근원을 개혁하여 문화적으로 향상시키는 동시에 정신적으로 깊이 있게 만들었다.
(6)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야나기는 1889년에 출생하여 1961년에 72세로 세상을 떠난 일본의 대표적인 미학자이자 종교학자이며 민예(民藝)학자이다. 1913년 동경(東京)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종교학과 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생활주변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민간예술에 몰입했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모아 ‘민예운동’을 전개하여 생활 잡기가 지닌 미술적 가치에 사람들이 눈을 뜨게 했다.
야나기의 젊은 시절은 한반도에 몰아닥친 풍운과 함께 했다. 학습원(學習院) 재학 중에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동경대학 재학 중에는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저항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보았다. 대학을 졸업한 2년 뒤 야나기는 조선의 실상에 접해 보기위해 직접 조선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19년 3월 1일, 조선민족이 만세를 부르며 궐기하여 일본에 항거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해 5월 야나기는 조선문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여 「朝鮮人을 생각한다」는 글을 일본의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 발표했다. 그의 글은 조선의 예술에 빗대어 일본의 조선탄압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는 그의 옹졸함에 비판의 화살이 집중되기도 했다. 그는 이 글의 말미에 “우리나라(일본)가 올바른 인도(人道)를 행하고 있지 않다는 분명한 반성이 우리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야나기는 그것을 계기로 조선과의 인연을 깊이하기 위해 애를 썼다. 민예운동에서도 조선의 생활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을 강조하였고, 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광화문을 허문다는 소식을 듣고 「사라져가는 한 조선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일본의 월간지 『改造』에 발표하여 물의를 야기하가도 했다. “너를 죽음에서 구하려는 사람들이 반역의 죄로 몰리고 있다”고 개탄한 야나기의 글은 그가 살아 온 시대의 한 단면을 들어낸 것이다. 야나기는 부인과 함께 서울을 방문하여 음악회를 열고 그 수익금을 모아 미술관을 건립하는 등 문화활동에도 열중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다도를 하나의 필수과목처럼 생각한다. 야나기는 민예운동의 대표적 대상물인 도자기를 통해 다도에 더욱 가깝게 접근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하게 꾸미고 화사하게 연출하는 다도를 싫어했다. 민예품과 같은 서민적이고 검소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다구(茶具)에 있어서도 아름다움에 치우치지 않는 용(用)과 미(美)의 균형을 주장했다.
예술과 생활을 관통한 그의 정신은 일본 다도의 신선한 충격으로 평가되어 오늘까지도 그 생명이 이어지고 있다. 그가 동경(東京)에 설립한 日本民藝館은 산업 디자인의 대가인 장남 무네미치(宗理)가 경영하고 있으나 전시물은 접하는 사람들은 야나기의 폭넓은 관심에 감탄한다.
2. 종가
(1)오모테 센케(表千家)
오모테 센케는 센케의 정통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센리큐로부터 현재 13세 소쿠추사미 소사에 이르고 있다.
오모테 센케의 종가는 현재 경도시 상경구 소천통 사지내상 불심암(京都市 上京區 小川通 寺之內上 不審庵) 안에 있으며 구전가(久田家)와 굴내가(堀內家)를 두 날개로 하며 명고옥시(名古屋市)의 요시다 다카부미를 표현각(表玄閣)이라 칭하고 도쿄와 오사카에도 연습소를 두어 종가의 스승이 직접 출장교수하고 있다. 교토시의 하원서점(河原書店)에서 "다도잡지"란 기관지를 월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2)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
센 소탄의 차남인 일옹종수(一翁宗守)가 고송번(高松蕃) 송평가(松平家)의 다두에서 물러나 귀향, 코토의 무샤노코지(武者小路)에 다실 관휴암(官休庵)을 짓고 관휴암 1세라고 한데서 비롯되어 현재 10세 유인제 종수(有隣齊 宗守)에 이르고 있다.
무사노코지 센케는 쿄토를 기반으로 하여 종가의 선조인 인연으로 고송(高松)에도 확고한 지반을 구축했다. 도쿄에는 과거 유호제 종수(愈好齊 宗守)가 직접 출장 지도한 인연으로 주로 지식층간에 보급시켰다.
(3) 우라센케(裏千家)
센 소탄(千宗旦)의 4남 선수종실이 아버지 소탄이 세운 다실 곤니치안(今日庵)을 계승, 곤니치안 1세라고 칭한데서 비롯되며 현재의 12세 붕운제 종실(鵬雲齊 宗室)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라센케 종가에서는 센리큐를 1세로 하고 현재 15세라고 부른다.
우라센께(裏千家)의 가계
▣ 초조 센리큐(千利休 : 1522-1591년)
센케(千家)의 시조 리큐(利休)는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밑에서 차일을 담당했던 센 아미(千阿彌)를 조부로 사카이(堺)의 상인 다나카 요헤(田中與兵衛)를 아버지로 태어났다. 요헤는 그후 사카이의 아마이치시에서 상인이 되고 요시로(與四郞)를 낳았다. 그가 간소하고 차분한 다도를 완성시킨 리큐가 태어난 것이다.
14세때 요시로라고 불렸던 리큐가 23세때 소에키(宗易)란 법명으로 등장한 것은 그가 이 무렵에 출가했기 때문이다. 소에키는 17세때부터 차를 즐겨 기타무키 도진(道陳)한테 배웠다. 도진의 소개로 다케노 조우(紹鷗)의 제자가 되었다. 서원정자의 다법은 도진으로부터 배웠고 작은 방에서의 다법은 소에키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1575년 묘각사(妙覺寺)에서 개최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다회에서 리큐는 다도역(茶道役)을 맡았다. 노부나가의 돌연한 사망으로 그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차지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천하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지반구축에 나선다. 이 무렵 리큐가 천하제일의 다도사범의 지위를 확립한다.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전망이 서자 종구(宗久)와 리큐 두사람을 불러 정자다법을 경쟁시켰다. 여기서 이긴 리큐는 히데요시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게된다. 이 무렵 리큐는 현재 산기(山岐)의 묘희암(妙喜庵)에 전해내려 오는 차분하고 간소한 초암다실(草庵茶室)을 세우고 다도를 발전시켰다.
1591년 리큐의 보호자였던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秀長)의 죽음과 함께 대덕사(大德寺) 산문문제가 표면화되었다. 또 히데요시의 정책변화에 따른 사카이 지방의 상인 퇴락과 하카다 시민의 부상으로 1591년 2월 리큐는 돌연 사카이에 칩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70세에 생애를 자결로 마감했다.
▣ 2세 소암종순(小庵宗淳 : 1546-1614년)
리큐는 1577년 정실부인을 잃었는데 그 사이에 장남 도안(道安 : 1546-1607)을 비롯하여 세딸을 두었다. 리큐의 후실은 전남편과의 사이에 소암(小庵)을 두었는데 소암은 리큐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종단(宗旦)을 낳았다.
소암이 다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형 도안보다 약간 늦다. 소암은 위명을 사랑(四郞) 또는 사랑좌위문, 길병위, 저원조라고 했으며 호는 종순(宗淳)이라 했다. 종단이 태어난 것은 33세 때였다.
1591년 리큐가 자결한 후 소암은 와카마쓰 성주의 보호 아래 그 곳에서 지냈다. 얼마 후 천가(千家)의 재건이 허가되어 본법사(本法寺) 앞에 집을 얻어 불심암(不審庵)을 재건하고 천가다도( 千家茶道)의 기초를 닦았다.
천가(千家) 2세를 계승한 소암은 1595년 대덕사의 선악종동(仙岳宗洞) 에게 "이휴(理休)"란 호의 뜻을 묻는다. 리큐의 혈통을 이은 종단(宗旦)에게 대를 물려주기로 하고 일찍 은거하였다.
▣ 3세 원백종단(元伯宗旦 : 1578-1658년)
종단은 1578년 정월 초하루에 사카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대덕사의 춘옥화상 아래서 수행을 쌓았다. 그가 14세 때 천가에 중대사건이 일어났다. 조부 리큐의 자결이다. "거지종단"이란 별명을 얻으면서까지 평생 권력층을 섬기지 않고 지낸 것은 이때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라 생각된다.
리큐의 자결로 단절된 천가의 재흥은 뜻밖에 일찍 이루어졌다. 리큐의 생존 당시 히데요시는 자주 리큐의 집을 찾아왔는데 거지꼴을 하고 있는 종단이 심부름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히데요시는 천가재흥을 종단에게 맡기려했다. 천가를 대대로 이어갈 중책이 종단에게 맡겨진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에 따른 시대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그는 무사들에게 접근했고 왕실귀족과도 교류를 했다. 당시 실력이 신장되었던 평민사이에 다시 일어난 차에 대한 열기에 따라 이들과의 교류도 갖게 되었다.
다다미 두장 넓이의 아주 작은 금일암(今日庵)을 세운 후 은거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4세 선수종실(仙?宗室 : 1622-1697년)
종단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선수종실은 처음엔 의술을 지향해서 의학을 수업 받았다. 그런데 그의 의학스승이 급사함에 따라 종단으로 돌아와 리큐직계의 다도수련을 받게 된다.
가하로 간 선수는 이 지방에서 자신이 길러낸 가마솥 제작자와 솥뿐 아니라 종, 갑옷 등을 만들었다. 선수는 1687년 사직원을 내고 교토로 돌아왔다. 북쪽 지방을 여행한 경험이 반영되어 그의 간소하고 차분한 다도에 많은 풍물을 첨가했다.
▣ 5세 불휴제 상수(不休齊 常? : 1673-1704년)
상수종실은 가하에서 태어났다. 이 지방 성주의 다두가 되어 있던 선수가 이곳에서 후처를 맞아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상수이다. 후에 상안이라 바꾸고 호를 불휴제라 했고, 선수사후 종실을 이었다. 그는 1704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 6세 육한제 태수(六閑齊 泰? : 1694-1726년)
불휴제 상수의 아들로 태어난 태수는 11세 때 아버지를 잃고 리천가 6세로 자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런 만큼 다도 가문을 지켜가는 각오는 각별했다. 한학을 수학하고 취미도 익혔다. 그는 재주가 많고 필체도 뛰어났으며 33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 7세 최최제 축수(最最齊 竺? : 1709-1733년)
종건(宗乾)이 7세가 된 시기는 차가 사회적으로 크게 성행할 때이다. 다도의 확대에 따라 증가하는 다법을 애호하는 평민들에게 다법을 전수하기 위해 茶宗家측에서는 종래와 다른 대응방식이 필요했고 그것이 천가7가식(千家七家式)으로 제정되었다. 종건(宗乾)은 호를 최최제라고 하기도 하고 축수(竺?)라고도 했다. 그도 25세의 젊은 나이에 결혼도 안한 채 죽었다.
▣ 8세 우현제 일등(又玄齊 一燈 : 1719-1771년)
축수가 죽은 후 이천가를 계승한 사람은 동생 십일랑(十一郞) 이었다. 당시 15세였는데 후에 우현제 일등종실이 되어 형인 여심제 종좌(如心齊 宗佐)와 더불어 천가에 비약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리큐의 도통을 지키려는 자각을 바탕으로 엄격한 참선을 거듭했다. 그 결과 천가7사식(千家七事式) 제정의 결실을 보아 이천가 다도가 비약적으로 발전되었다.
▣ 9세 불견제 석옹(不見齊 石翁 : 1746-1801년)
불견제 석옹은 8세 일등종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14세였던 1760년에는 보경사(寶?寺)의 법통을 계승하는 스님의 부탁을 받아 현실(玄室)이 궁중에서 다회를 개최 국화향합을 하사 받았다. 그가 43세가 되던 1788년에 사조(四條)가 모가와의 동쪽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밤낮 3일을 계속하여 쿄토의 9할이 불타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두 이천가 집에 연소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집기, 보물 등을 건져 나올 수 있었다. 이 큰 화재로 소실된 천가의 건물을 재건하는 것이 현실의 큰 숙제였다. 다음 해에 재빨리 건물을 복구 재건하여 리큐 5백주기 다회를 개최하였다. 일등에 의한 다도중흥에 이어 새 이천가 다도의 방향을 확립한 불견제는 1801년 6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10세 인득제 백수(認得齊 栢? : 1770-1826년)
9세 석옹(石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 우은(又隱)에서 첫 다회를 개최했다. 다가의 행사로서 또한 다사 자체로서 가장 중요한 첫 다사를 14세 때 개최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이천가 10세를 계승한 인득제(認得齊)는 에도시대 후기의 성숙한 문화의 정점에서 이 시대를 정관하면서 1807년에는 막부의 실력자를 비롯한 많은 무사들과 부를 쌓은 평민을 초청한 가운데 元佰宗旦 150주기, 一燈 50주기, 小庵 200주기, 不見齊 13주기, 25주기, 태수 100주기 등 많은 遠忌茶會를 개최했다.
인득제는 장남을 비롯하여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자 삼하국오전영주 (三河國奧殿領主) 송평승우(松平乘友)의 아들 영오랑(榮五郞)을 양자로 삼았다. 영오랑은 상제(相齊)의 딸 마찌꼬와 결혼해서 이천가 11세를 계승해서 현현제 종실(玄玄齊 宗室)이 된 사람이다.
▣ 11세 현현제 종실(玄玄齊 宗室 : 1810-1877년)
현현제는 1819년 10세 때 이천가 10세 인득제의 양자로 들어왔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송평승우(松平乘友), 형 승선(乘羨)과 인득(認得) 과의 다도를 통한 깊은 관련을 말해준다. 현현제 이천가 11세를 계승하고서는 다이묘(大名:번주)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자부심과 이천가가 발전을 생각하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현현제는 여러 지방 다이묘가에 출사했고 그들과 교류했다. 출사와 교류의 범위가 넓었다. 현현제에게 차 상자에 대한 기호가 많았던 것은 각지방을 왕래하면서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천가 11세 당수가 된 후에 최초이자 최대의 행사는 리큐 2백50주기의 법요와 다회였다. 이 행사를 위해 현현제가 리천가의 모습을 크게 바꿀 정도의 대대적인 공사를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에 정변이 일어난 1860년에 현현제는 궁중에 헌다(獻茶) 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왕실당국에 제출하여 승인을 얻었다. 이 같은 경사를 축하하여 "화건점(和巾点)을 부흥하고 그 피로연을 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시대상황의 흐름은 현현제에게 즐거운 것이 못됐다. 격동하는 세대는 전통문화를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1871년에 양자를 맞아들어 딸과 결혼을 시켰다. 이 양자가 12세를 계승한 우묘제(又妙齋)이다.
▣ 12세 우묘제(又妙齊 : 1852-1917년)
현현제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는데 장남은 요절하고 2남 일여제(一如齊)도 17세까지는 성장했으나 역시 젊어서 죽었다. 그 후 그의 외동딸 유록자(猶鹿子)가 22세 때 교토의 명문가이며 거상인 각창다궁현령 (角倉多宮玄寧) 의 2남을 양자로 맞이했다. 그가 이천가 12세가 된 우묘제 직수종실(直수宗室)이다. 그의 부인 유록자는 후에 진정원(眞精院)이라 칭하고 당대 제일의 여류다인이 된 여걸이다.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구길(駒吉)이라 했다. 후에 13세가 된 원능제 종실(元能齊 宗室)이다. 구길이 14세가 된 1885년 우묘제는 집안을 물려주고 산기(山崎) 묘희암(妙喜庵)에 은거했다.
우묘제 만년을 장식하는 최대의 다회는 1909년의 현현제 33주기이다. 2년 전에는 "금일암월보(今日庵月報)" 와 " 소습사1개조 전기"가 발간되었고 1903년에는 우묘제 원능제의 공저 "다도병(茶道병)의 진사(眞砂)가 발간되어 종가 스승의 노력에 의한 이천가 다도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 13세 원능제 철중(元能齊 鐵中 : 1872-1924년)
원능제가 18세 된 1889년에 부친 우묘제가 은퇴하고 종실을 이어받아 13세 종실이 됐다. 다음 해 결혼한 그는 금후(今後) 다도계의 중심은 도쿄가 된다고 생각하고 신혼 초에 도쿄로 가서 지반확립을 추진했다. 이때 원능제는 각 왕실 귀족들에게 다도를 가르치게 되었으며 왕의 친척 북백천능인 (北白川能人)으로부터 "원능(元能)"이란 재호(齋號)를 받아 이때부터 원능제라고 칭했다. 불혹의 나이가 된 원능제는 학교교육에 활용하기 위한 다법으로 "분략다법(盆略茶法)" 이라는 새 예법을 고안했다. 이밖에도 여러 종류의 격식을 부활하는가 하면 새 규범을 마련하기도 했다.
차, 꽃, 향을 조합한 사우지식 (四友之識)을 7사식(七事式)의 하나로 추천한 것이 그 하나다. 새로운 시대에 대응해서 많은 새로운 다법을 고안한 원능제는 1924년 53세로 일생을 마쳤다.
▣ 14세 무한제 석수(無限齊 碩? : 1893-1964년)
원능제의 장남으로 태어나 쿄토 부립사범학교 부속 유치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원능제 제자 부인의 권고로 동지사(同志社) 보통부에 입학했다. 이 무렵 원능제의 다도보급이 결실을 보아 동분서주한 나날이 시작된다.
18세 때 교토에서 불사 헌다식을 했고 다음해 종가의 적자로서 최초의 다사를 개최했다. 1940년 이천가의 통합을 위해 람교회를 결성, 전국 각지에 설치하여 지방문화의 향상을 꾀했다. 1949년엔 재단법인 금일암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고 리큐 이래의 유적보존사업을 했다. 1957년 오랜 다도진흥과 문화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을 받았다.
▣ 15세 붕운제 종실(鵬雲齊 宗室 : 1923 ~현재)
무한제 석수의 장남으로 태어나 동지사(同志社) 대학 법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하와이 대학에서 수학했다. 대학 재학 중 해군 비행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특공대원으로 활동하다가 패전으로 생환,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는다.
1951년 그는 다도사절로서 단신으로 도미한 이래 유럽, 남북아메리카, 중근동, 동남아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 50개국을 순방하면서 다도보급과 평화를 역설하고 다녔다.
1964년 14세인 무한제 석수종실의 사망에 따라 리큐거사 15세를 계승 금일암주 (今日庵主) 가 되었다. 그는 일본 전통문화 계승자의 대표 역할을 수행하고 사회활동에도 열의를 보여 일본청년회의소 회장, 국제청년회의소 부회장, 중앙교육심의의원, 대학심의의원 등 많은 요직을 역임했고 또 하와이 대학교수, 중국 천진상과대학 객원교수로서 강의도 하는 등 차를 통해 세계평화와 국제협력에 기여하고 있다.
제5장 일본의 다실(茶室)
일본의 다실은 한 칸짜리 작은 초가집이다. 이것은 일시적인 집이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단지 최소한의 심미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 뿐 일체의 호화로운 장식은 배제된다.
다도의 理想은 16세기부터 일본의 건축양식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 일본의 실내장식이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하며 간단하여 마치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영향을 받은 때문이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독립적인 茶室을 만들어낸 사람은 센리큐(千利休)였다. 초기의 다실은 독립적인 가옥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는데 단지 병풍을 치고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수 있는 객실의 일부만을 의미할 뿐이었다.
지금은 집안의 어떤 부분에도 종속되지 않은 채 집밖, 마당에 세워진 단독적인 공간을 다실이라 부르고 있다.
다실은 네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지는데 다실 자체는 다섯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이다. 그리고 다구를 씻는 곳이 있고 초대된 손님이 다실에 들어가지 전에 기다리는 공간과 노지(露地)라고 불리 우는 화원의 작은 길이 있다. 이것은 다실과 손님이 기다리는 공간을 연결시켜주는 길이다. 다실의 외관은 무척 작으며 평범하게 보인다. 건축재료 또한 그들의 소박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수수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소박하기 그지없이 보이는 다실에 나름대로의 심원한 예술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그 세부적인 설계라든가 심혈을 기울이는 정도가 대단히 호화로운 궁궐을 지어내는 것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정통적인 다실의 규모는 다다미 4장반 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크기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은 규모가 불경 중 하나인 유마경으로부터 규정되어 지고 있다는 점이다. 유마힐은 이처럼 작은 공간에서 문수보살과 4만8천의 제자를 맞이한다. 이것은 진정한 도를 깨우친 자는 공간적인 제약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지(露地)는 손님을 다실로 안내하는 작은 길로 다회에 초대되어온 손님을 외부의 세계와 단절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번이라도 노지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밟고 지나간 돌이 황혼의 빛을 받아 촉촉하게 반짝이는 것이나 양옆으로 줄지어 선 뽀족한 잎사귀를 가진 소나무들, 푸르슴한 이끼를 이고선 화강암 석등이 주는 분위기를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노지(露地)를 지나며 왠지 일상의 세계에서 벗어난 듯한 감상에 싸인 손님들이 다실 앞까지 이르렀을 때 만약 그가 무사라면 반드시 옆구리에 차고 온 칼을 벗어서 처마 밑에 마련된 시렁에 걸어야 한다. 다실은 절대적인 평화의 공간인 까닭이다. 그 다음에는 허리를 굽히고 작은 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무릎을 꿇고 들어가는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이 다회에 초청된 손님의 의무이다.
다실에 들어오기 전에 노지 밖에서 기다리며 순서를 정했기 때문에 다실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앉을 때 아무런 혼란도 없다. 그들이 자기 자리에 조요히 앉는 동안 다호 안에는 끓고 있는 물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한동안의 고요가 흐른 뒤에야 비로소 주인이 입실한다. 다호 밑바닥에 철판을 깔아놓았기 때문에 물이 끊는 소리는 매우 특별하게 들린다.
그 소리는 마치 짙은 연기를 뿜으며 떨어지는 폭포의 소리와도 같고, 큰 바위에 부딪치는 먼 바다의 파도소리와 같으며 대나무 숲을 스치는 빗소리, 소나무 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와도 비슷하다. 날이 밝은 때에도 경사진 지붕과 극히 낮은 처마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실내가 지나치게 밝아서 산만한 느낌을 주는 법이 없다. 천장에는 바닥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물건들은 말쑥하고 아담 하다.
다실은 소박하고 다구는 헌것이지만 다실 안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으로 깨끗하다. 어두운 다실 한 구석 어디라도 먼지 단 한 톨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만약 단 한 톨의 먼지라도 발견될 경우에 주인은 훌륭한 다인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판정받고 만다. 다인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청소하는 법, 청결히 하는 법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청결과 청소 자체도 하나의 예술로 인정하고 철학을 심어 놓았다. 그들은 고대의 금속작품을 반질하게 닦는 법에 정통하면서 화병에 떨어진 물방울을 닦아내는 법은 없다. 물방울은 이슬을 닮았기 때문이다.
다실의 장식이나 다구의 색깔, 모양 그 어떤 것도 중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매우 엄격하다. 만약 꽃을 꽃아 놓았다면 화분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것이며, 둥근 다호를 준비했다면 물주전자는 각진 것으로 마련해야 한다. 검은색의 천목 다완은 검은색 차통과 함께 있을 수 없다.
실내의 한가운데 위치한 감실에 향로나 꽃병을 놓을 경우에도 그것이 감실의 정중앙을 차지해서 전체 공간을 반으로 나누지 않도록 한쪽으로 살짝 비켜선 곳에 둔다.
1. 무라다 주코의 초암다실
드넓은 차실의 공간을 병풍으로 둘러막아 다다미 4첩(疊)반의 넓이로 대폭 좁힌 곳에서 차를 마시게 된 것이다. 다다미 4첩 반은 사방 열 자 넓이인데, 3.3㎡ 이다. 1첩은 대략 0.74㎡ 이어서 뒷날 센리큐가 완성한 2첩반 차실의 넓이는 겨우 1.64㎡에 불과하여 두사람이 함께 차마시기에도 비좁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차실의 폭 1.8m 되는 벽에는 매끄러운 고급벽지를 바르고, 천정은 삼나무 널빤지를 붙인다. 기와를 얹었던 지붕은 기와를 벗겨내고 얇은 널판조각을 얹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너와집’과 유사한 모습이다.
차실 안의 네모진 큰 기둥은 대나무로 바꾸고, 청동 꽃병은 대나무로 만든 꽃병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차실에서 사용하는 차 도구들, 특히 찻그릇은 아직 카라모노(唐物)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2. 다케노 조오의 초암 다실
무라타 주코가 지붕에 얹었던 얇은 널판 조각을 들어내고 조선의 농가를 모방한 짚으로 지붕을 완성시킨다. 본격적인 초암이 시작된 것이다. 차실의 규모는 주코와 같은 4첩반을 유지하지만 방안에다 이로리(理爐裏) 즉, 땅화로를 끌어들였다. 짚 지붕과 땅화로의 등장으로 초암은 점점 완성에 다가서고 있었다.
차도도도 카라모노(중국에서 들여온 회색, 감색의 유약 빛깔을 지닌 천목다완)나 소위 주코 청자다완 대신, 시가라키(信樂) 등에서 만드는 씨앗단지나 소금 단지 등 일용품으로 구어낸 잡기류 속에서 골라내어 찻그릇으로 사용햇습니다. 주코도 시가라키의 잡기류를 찻그릇으로 쓰기는 했지만 주된 차 도구는 카라모노였던 데 비해, 조오는 주된 차 도구를 잡기류에서 골라 쓴 것이 두 사람의 차이점이다.
조오가 최초로 발견한 것이 ‘타케노이드 다완(武野井戶 茶椀)인데, 이는 이도다완(井戶茶椀)중에서 일본 초암차 역사상 가장 먼저 선을 보인 것이다.
3. 센리큐의 초암 다실
초암다실을 완성시켜 현재의 일본 다도의 상징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특징을 살펴보면
① 차실의 크기를 더욱 줄였는데, 종래의 4첩 반을 2첩으로 줄인 뒤 이를 다시 1첩의 매우 작은 방으로 줄였다. 2첩 넓이의 차실은 2㎡가 채 못 되는 좁은 공간인데, 센리큐의 사상이 집대성 되어진 초암차실로서 야마자키 묘희암(山崎妙喜庵)안에 있는 차실 대암(待庵)이다.
② 차실 내부는 모두 흙벽이다. 다케노 조오 때까지 고급벽지를 바르거나 정교하게 짜 맞춘 미닫이 문이었던 안쪽 벽체를 모두 흙벽으로 바꾸어 폐쇄적인 느낌을 준다. 벽을 바른 흙에는 짚을 썰어 넣어서 흙이 마른 뒤 균열이 생기는 것을 막았다.
③ 차실의 뼈대를 이루는 기둥과 기둥사이에 가로로 걸쳐 힘과 균형을 잡아주는 목재들의 몸이 드러나도록 흙벽을 발라서 차실을 유지시키는데, 목재의 골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④ 천정은 매우 낮아서 손을 뻗으면 닿습니다. 일본의 기후는 고온다습하며 특히 여름은 더욱 그러하다. 차실의 서늘하고 쾌적한 분위기를 위해서 무라타 주코, 다케노 조오는 비록 차실의 공간은 좁지만 천정높이는 3m 정도를 유지했다. 그런데 센리큐는 폐쇄적이라 할 만큼 좁은 방, 낮은 천정을 만들었다.
⑤ 차실 내부에 세운 기둥은 반드시 소나무를 쓰는데 자연스럽고 굽고 휘어진 것을 선택했다.
⑥ 차실의 지붕은 볏짚으로 이엉을 덮고 용마루도 들어서 얹었다.
⑦ 차실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낮아서 무릎과 가슴이 닿도록 잔뜩 몸을 구부리고 손으로 문턱을 짚고 들어가야 하도록 만들었다.
⑧ 문밖에는 신발을 벗어 얹어두는 돌을 놓아두는데, 사람의 손길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이다.
⑨ 하얀 맹장지를 바른 테두리 없는 창문인 타이코 부스마가 흙벽에 나 있습니다. 귀틀은 옻칠을 하지 않아 나무의 자연스런 결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⑩ 차 도구는 흠집이 있거나 깨어져 금이 간 것도 소중하게 사용한다.
⑪ 차실 바닥으로는 풀잎으로 만든 자리를 이용합니다. 차실 안에 앉아 있으면 정원의 돌로 만든 물통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데, 차실 주위의 샘물에서 대나무를 통하여 끌어들인 물이다.
⑫ 손님이 차실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기다리는 대합실인 마치아이(待合)가 있고, 대합실과 차실을 연결하는 잘 정돈된 뜰이 있는데 노지(露地)라 한다. 대합실에서나 차실에서 바라보면 싱싱하게 푸른 상록수나 활엽수들이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줍니다. 이 작은 뜰은 태고의 신비와 고요를 느낄 수 있도록 괴석, 이끼, 괴목 분재, 향기 짙은 꽃나무 등을 심는다. 대나무를 이용하여 끌어들인 물이 계곡을 연상시키고, 물기 머금은 이끼와 괴석은 깊은 숲속을 떠올리게 한다.
⑬ 화려한 중국의 청동 꽃병, 청자 꽃병 대신에 투박하고 검은 빛깔이 나는 조선에서 들여온 씨앗을 넣어 두거나 숙주나물이나 콩나물을 키우는 질그릇 단지를 꽃병으로 씁니다. 그리고 굵은 대나무로 만든 꽃병이나, 칡넝쿨 등으로 엮어 만든 꽃병은 차실에 둔다. 꽃은 살아 있는 느낌을 갖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하며 줄기를 길게 뽑아내며 꽃송이에서 흘러내리는 선을 감상하도록 합니다. 꽃은 한 송이만 꽂습니다.
⑭ 문에는 창호지를 바른다. 땅 화로를 만든다. 숯을 담아두는 통은 박을 이용하거나 유약을 입히지 않은 초벌구이만 한 맨몸의 그릇을 사용한다. 차도에 와카(和歌)를 끌어들여 차와 차인의 마음가짐으로 삼는다.
⑮ 농차(濃茶)를 펼 때는 반드시 이도다완을 사용한다.
제6장 우리가 배워야할 점
1. 차나무 산업 육성
(1) 신품종 육성 및 전파
(2) 기계화 작업 (차잎따기, 유념기 등)
2. 차 문화 전파
(1) 차문화관 개설 - 차명관(茶茗館), 차체험랜드, 티월드(Tea world)
(2) 전국 차업 조합의 결성 - 세계시장에서의 상품화 (박람회, 수출장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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