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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茶道의 宗家(우라센께:裏千家) - 세번째

청원1 2016. 10. 23. 22:30
Ⅲ. 우라센께(裏千家)의 가계

▣ 초조 센리큐(千利休 : 1522-1591년)
센케(千家)의 시조 리큐(利休)는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밑에서 차일을 담당했던 센 아미(千阿彌)를 조부로 사카이(堺)의 상인 다나카 요헤(田中與兵衛)를 아버지로 태어났다. 요헤는 그후 사카이의 아마이치시에서 상인이 되고 요시로(與四郞)를 낳았다. 그가 간소하고 차분한 다도를 완성시킨 리큐가 태어난 것이다.
14세때 요시로라고 불렸던 리큐가 23세때 소에키(宗易)란 법명으로 등장한 것은 그가 이 무렵에 출가했기 때문이다. 소에키는 17세때부터 차를 즐겨 도진(道陳)한테 배웠다. 도진의 소개로 소구(紹鷗)의 제자가 되었다. 서원정자의 다법은 도진으로부터 배웠고 작은 방에서의 다법은 소에키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후 1575년 묘각사(妙覺寺)에서 개최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다회에서 리큐는 다도역(茶道役)을 맡았다. 노부나가의 돌연한 사망으로 그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차지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천하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지반구축에 나선다. 이 무렵 리큐가 천하제일의 다도사범의 지위를 확립한다.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전망이 서자 종구(宗久)와 리큐 두사람을 불러 정자다법을 경쟁시켰다. 여기서 이긴 리큐는 히데요시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게된다.

이 무렵 리큐는 현재 산기(山岐)의 묘희암(妙喜庵)에 전해내려 오는 차분하고 간소한 초암다실(草庵茶室)을 세우고 다도를 발전시켰다.

1591년 리큐의 보호자였던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秀長)의 죽음과 함께 대덕사(大德寺) 산문문제가 표면화되었다. 또 히데요시의 정책변화에 따른 사카이 지방의 상인 퇴락과 하카다 시민의 부상으로 1591년 2월 리큐는 돌연 사카이에 칩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70세에 생애를 자결로 마감했다.


▣ 2세 소암종순(小庵宗淳 : 1546-1614년)
리큐는 1577년 정실부인을 잃었는데 그 사이에 장남 도안(道安 : 1546-1607)을 비롯하여 세딸을 두었다. 리큐의 후실은 전남편과의 사이에 소암(小庵)을 두었는데 소암은 리큐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종단(宗旦)을 낳았다.
소암이 다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형 도안보다 약간 늦다. 소암은 위명을 사랑(四郞) 또는 사랑좌위문, 길병위, 저원조라고 했으며 호는 종순(宗淳)이라 했다. 종단이 태어난 것은 33세 때였다.

1591년 리큐가 자결한 후 소암은 와카마쓰 성주의 보호 아래 그 곳에서 지냈다. 얼마 후 천가(千家)의 재건이 허가되어 본법사( 本法寺) 앞에 집을 얻어 불심암(不審庵)을 재건하고 천가다도( 千家茶道)의 기초를 닦았다.

천가(千家) 2세를 계승한 소암은 1595년 대덕사의 선악종동(仙岳宗洞) 에게 "이휴(理休)"란 호의 뜻을 묻는다. 리큐의 혈통을 이은 종단(宗旦)에게 대를 물려주기로 하고 일찍 은거하였다.


▣ 3세 원백종단(元伯宗旦 : 1578-1658년)
종단은 1578년 정월 초하루에 사카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대덕사의 춘옥화상 아래서 수행을 쌓았다. 그가 14세 때 천가에 중대사건이 일어났다. 조부 리큐의 자결이다. "거지종단"이란 별명을 얻으면서까지 평생 권력층을 섬기지 않고 지낸 것은 이때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라 생각된다.
리큐의 자결로 단절된 천가의 재흥은 뜻밖에 일찍 이루어졌다. 리큐의 생존 당시 히데요시는 자주 리큐의 집을 찾아왔는데 거지꼴을 하고 있는 종단이 심부름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히데요시는 천가재흥을 종단에게 맡기려했다. 천가를 대대로 이어갈 중책이 종단에게 맡겨진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에 따른 시대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그는 무사들에게 접근했고 왕실귀족과도 교류를 했다. 당시 실력이 신장되었던 평민사이에 다시 일어난 차에 대한 열기에 따라 이들과의 교류도 갖게 되었다.

다다미 두장 넓이의 아주 작은 금일암(今日庵)을 세운 후 은거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4세 선수종실(仙수宗室 : 1622-1697년)
종단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선수종실은 처음엔 의술을 지향해서 의학을 수업받았다. 그런데 그의 의학스승이 급사함에 따라 종단으로 돌아와 리큐직계의 다도수련을 받게 된다.
가하로 간 선수는 이 지방에서 자신이 길러낸 가마솥 제작자와 솥뿐 아니라 종, 갑옷 등을 만들었다. 선수는 1687년 사직원을 내고 교토로 돌아왔다. 북쪽 지방을 여행한 경험이 반영되어 그의 간소하고 차분한 다도에 많은 풍물을 첨가했다.


▣ 5세 불휴제 상수(不休齊 常수 : 1673-1704년)
상수종실은 가하에서 태어았다. 이 지방 성주의 다두가 되어 있던 선수가 이곳에서 후처를 맞아 이들을 낳았는데 이가 상수이다. 후에 상안이라 바꾸고 호를 불휴제라 했고, 선수사후 종실을 이었다. 그는 1704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 6세 육한제 태수(六閑齊 泰수 : 1694-1726년)
불휴제 상수의 아들로 태어난 태수는 11세 때 아버지를 잃고 리천가 6세로 자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런 만큼 다도가문을 지켜가는 각오는 각별했다. 한학을 수학하고 취미도 익혔다. 그는 재주가 많고 필체도 뛰어났으며 33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 7세 최최제 축수(最最齊 竺수 : 1709-1733년)
종건(宗乾)이 7세가 된 시기는 차가 사회적으로 크게 성행할 때이다. 다도의 확대에 따라 증가하는 다법을 애호하는 평민들에게 다법을 전수하기 위해 茶宗家측에서는 종래와 다른 대응방식이 필요했고 그것이 천가7가식(千家七家式)으로 제정되었다.
종건(宗乾)은 호를 최최제라고 하기도 하고 축수(竺수)라고도 했다. 그도 25세의 젊은 나이에 결혼도 안한 채 죽었다.


▣ 8세 우현제 일등(又玄齊 一燈 : 1719-1771년)
축수가 죽은 후 이천가를 계승한 사람은 동생 십일랑(十一郞) 이었다. 당시 15세였는데 후에 우현제 일등종실이 되어 형인 여심제 종좌(如心齊 宗佐)와 더불어 천가에 비약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리큐의 도통을 지켜려는 자각을 바탕으로 엄격한 참선을 거듭했다. 그 결과 천가7사식(千家七事式) 제정의 결실을 보아 이천가 다도가 비약적으로 발전되었다.


▣ 9세 불견제 석옹(不見齊 石翁 : 1746-1801년)
불견제 석옹은 8세 일등종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14세였던 1760년에는 보경사(寶경寺)의 법통을 계승하는 스님의 부탁을 받아 현실(玄室)이 궁중에서 다회를 개최 국화향합을 하사 받았다.
그가 43세가 되던 1788년에 사조(四條)가 모가와의 동쪽에서 화재가 발새하여 밤낮 3일을 계속하여 쿄토의 9할이 불타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두 이천가 집에 연소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집기, 보물 등을 건져나올 수 있었다.

이 큰 화재로 소실된 천가의 건물을 재건하는 것이 현실의 큰 숙제였다. 다음 해에 재빨리 건물을 복구 재건하여 리큐 5백주기 다회를 개최하였다. 일등에 의한 다도중흥에 이어 새 이천가 다도의 방향을 확립한 불견제는 1801년 6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10세 인득제 백수(認得齊 栢수 : 1770-1826년)
9세 석옹(石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 우은(又隱)에서 첫 다회를 개최했다. 다가의 행사로서 또한 다사 자체로서 가장 중요한 첫 다사를 14세 때 개최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이천가 10세를 계승한 인득제(認得齊)는 에도시대 후기의 성숙한 문화의 정점에서 이 시대를 정관하면서 1807년에는 막부의 실력자를 비롯한 많은 무사들과 부를 쌓은 평민을 초청한 가운데 元佰宗旦 150주기, 一燈 50주기, 小庵 200주기, 不見齊 13주기, 25주기, 태수 100주기 등 많은 遠忌茶會를 개최했다.

인득제는 장남을 비롯하여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자 삼하국오전영주 (三河國奧殿領主) 송평승우(松平乘友)의 아들 영오랑(榮五郞)을 양자로 삼았다. 영오랑은 상제(相齊)의 딸 마찌꼬와 결혼해서 이천가 11세를 계승해서 현현제 종실(玄玄齊 宗室)이 된 사람이다.


▣ 11세 현현제 종실(玄玄齊 宗室 : 1810-1877년)
현현제는 1819년 10세 때 이천가 10세 인득제의 양자로 들어왔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송평승우(松平乘友), 형 승선(乘羨)과 인득(認得) 과의 다도를 통한 깊은 관련을 말해준다.
현현제 이천가 11세를 계승하고서는 다이묘(大名:번주)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자부심과 이천가가 발전을 생각하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현현제는 여러지방 다이묘가에 출사했고 그들과 교류했다. 출사와 교류의 범위가 넓었다. 현현제에게 차 상자에 대한 기호가 많았던 것은 각지방을 왕래하면서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천가 11세 당수가 된 후에 최초이자 최대의 행사는 리큐 2백50주기의 법요와 다회였다. 이 행사를 위해 현현제가 리천가의 모습을 크게 바꿀 정도의 대대적인 공사를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에 정변이 일어난 1860년에 현현제는 궁중에 헌다(獻茶) 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왕실당국에 제출하여 승인을 얻었다. 이같은 경사를 축하하여 "화건점(和巾点)을 부흥하고 그 피로연을 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시대상황의 흐름은 현현제에게 즐거운 것이 못됐다.

격동하는 세대는 전통문화를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1871년에 양자를 맞아들어 딸과 결혼을 시켰다. 이 양자가 12세를 계승한 우묘제(又妙齋)이다.


▣ 12세 우묘제(又妙齊 : 1852-1917년)
현현제에게는 2남1녀가 있었는데 장남은 요절하고 2남 일여제(一如齊)도 17세까지는 성장했으나 역시 젊어서 죽었다. 그후 그의 외동딸 유록자( 猶鹿子)가 22세 때 교토의 명문가이며 거상인 각창다궁현령 (角倉多宮玄寧) 의 2남을 양자로 맞이했다.
그가 이천가 12세가 된 우묘제 직수종실(直수宗室)이다. 그의 부인 유록자는 후에 진정원(眞精院)이라 칭하고 당대 제일의 여류다인이 된 여걸이다.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구길(駒吉)이라 했다. 후에 13세가 된 원능제 종실(元能齊 宗室)이다. 구길이 14세가 된 1885년 우묘제는 집안을 물려주고 산기(山崎) 묘희암(妙喜庵)에 은거했다.

우묘제 만년을 장식하는 최대의 다회는 1909년의 현현제 33주기이다. 2년 전에는 "금일암월보(今日庵月報)" 와 " 소습사1개조 전기"가 발간되었고 1903년에는 우묘제 원능제의 공저 "다도병(茶道병)의 진사 (眞砂)가 발간되어 종가 스승의 노력에 의한 이천가 다도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 13세 원능제 철중(元能齊 鐵中 : 1872-1924년)
원능제가 18세 된 1889년에 부친 우묘제가 은퇴하고 종실을 이어받아 13세 종실이 됐다. 다음 해 결혼한 그는 금후 다도계의 중심은 도쿄가 된다고 생각하고 신혼초에 도쿄로 가서 지반확립을 추진했다. 이때 원능제는 각 왕실 귀족들에게 다도를 가르치게 되었으며 왕의 친척 북백천능인 (北白川能人) 으로부터 "원능(元能)"이란 재호(齋號)를 받아 이때부터 원능제라고 칭했다.
불혹의 나이가 된 원능제는 학교교육에 활용하기 위한 다법으로 "분략다법(盆略茶法)" 이라는 새 예법을 고안했다. 이밖에도 여러가지 격식을 부활하는가 하면 새규법을 마련하기도 했다.

차, 꽃, 향을 조합한 사우지식 (四友之識)을 7사식(七事式)의 하나로 추천한 것이 그 하나다. 새로운 시대에 대응해서 많은 새로운 다법을 고안한 원능제는 1924년 53세로 일생을 마쳤다.


▣ 14세 무한제 석수(無限齊 碩수 : 1893-1964년)
원능제의 장남으로 태어나 쿄토 부립사범학교 부속 유치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원능제 제자 부인의 권고로 동지사(同志社) 보통부에 입학했다. 이 무렵 원능제의 다도보급이 결실을 보아 동분서주한 나날이 시작된다.
18세 때 교토에서 불사 헌다식을 했고 다음해 종가의 적자로서 최초의 다사를 개최했다. 1940년 이천가의 통합을 위해 람교회를 결성, 전국 각지에 설치하여 지방문화의 향상을 꾀했다. 1949년엔 재단법인 금일암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고 리큐 이래의 유적보존사업을 했다. 1957년 오랜 다도진흥과 문화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을 받았다.


▣ 15세 붕운제 종실(鵬雲齊 宗室 : 1923 ~)
무한제 석수의 장남으로 태어나 동지사(同志社) 대학 법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하와이 대학에서 수학했다. 대학 재학중 해군 비행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특공대원으로 활동하다가 패전으로 생환,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는다.
1951년 그는 다도사절로서 단신으로 도미한 이래 유럽, 남북아메리카, 중근동, 동남아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 50개국을 순방하면서 다도보급과 평화를 역설하고 다녔다.

1964년 14세인 무한제 석수종실의 사망에 따라 리큐거사 15세를 계승 금일암주 (今日庵主) 가 되었다. 그는 일본 전통문화 계승자의 대표적인 역활을 수행하고 사회활동에도 열의를 보여 일본청년회의소 회장, 국제청년회의소 부회장, 중앙교육심의의원, 대학심의의원 등 많은 요직을 역임했고 또 하와이 대학교수, 중국 천진상과대학 객원교수로서 강의도 하는 등 차를 통해 세계평화와 국제협력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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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출처 : 다담 (1994년 8월호)
● 자료편집 : 1997.5.2
출처 : 찻잔속에 담는 풍경
글쓴이 : 안티아조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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