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차와 기타

[스크랩] 일본 茶道의 宗家(우라센께:裏千家) 첫번째

청원1 2016. 10. 23. 22:29
Ⅰ. 일본다도의 교조 리큐(利休)
Ⅱ. 리큐류 다도의 전통
Ⅲ. 우라센께(裏千家)의 가계

이렇게 세편이 있는데, 세번에 걸쳐서 옮깁니다.
차삼국지(자료게시판)에 이광주 교수의 <차로 읽는 동서문화>의 일본편(9, 10편)에 덧붙여서 읽어볼만한 일본다도문화 관련 자료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에게 조그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Ⅰ. 일본다도의 교조 리큐(利休)

▣ 일본 다도의 교조 리큐(利休)
일본 다도의 시조는 무라타 슈코(村田珠光), 중흥조는 다케노 쇼오( 武野紹鷗)지만 교조라고 할 때는 센리큐(千利休)를 뜻한다.
리큐는 노아미(能阿彌)의 흐름을 계승한 다인(茶人) 기타무키 도친( 北向道陳)으로부터 다도를 배우고 후에 도친의 소개로 슈코류(珠光流)의 다인으로 널리 알려진 다케노 쇼오(武野紹鷗)에 사사하여 다도의 극치를 깨우쳤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두 장군 아래서 다두(茶頭)가 되었고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궁중에서 다회를 열었을 때 참여하여 다회의 후견인 역활을 수행함에 따라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천하제일의 다인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다가 1591년 2월 28일 히데요시로부터 자결명령을 받고 자진함으로써 70년의 일생을 마쳤다.

리큐는 다도의 교조로서 뿐만아니라 다도의 수호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다도의 이론을 완성시켰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고안을 통해 다실에서 부터 다정(茶亭), 다구(茶具), 다도예법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일상다반의 생활근원을 개혁하여 문화적으로 향상시키는 동시에 정신적으로 깊이있게 만들었다.

▣ 리큐의 다도개혁
다(茶) 애호가로서의 여러가지 다사(茶事)개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두가 된 그의 만년에 주로 이루어졌다. 예를들면 리큐는 슈코 당시부터 초암(草庵)의 다실로서 출현한 다실풍의 건물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연구 개량을 가해서 개조했다.
다다미방 내부에 고(菰)천장, 통나무 기둥, 칠벽, 작은 출입문 등 설비를 개량했다. 또 다다미 4장반의 다실외에 다다미 3장, 2장, 1장 반의 작은 방도 만들었다. 다다미 3장의 방은 쇼오 때까지는 명물다도구를 갖지 않은 와비차인 전용의 다실이었으나 리큐의 식견에 따라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다다미 3장, 2장의 작은 다실에서 당(唐)에서 들여온 도구를 사용하여 다회를 개최하는 습관이 되었다. 그러나 다다미 두장의 좁은 다실은 귀인이나 와비차인 또는 명인(名人)들이 사용하고 한장 반짜리 다실은 명인의 절대공간으로서 은근하고 극비사(極秘事)였던 것이다.

연회석 요리도 선원의 회석(懷石:茶를 대접하기 전에 내는 간단한 요리)을 바탕으로 간소하게 한 결과, 국 두가지, 반찬 세가지를 무거운 요리로 치고 국 한가지, 반찬 한가지를 가볍게 대접하는 것을 통례로 삼았다.

다실에 꽂는 꽃도 호려하지 않은 계절의 초화를 가볍게 꽂는 것을 상(上)으로 치고 봄,겨울에는 엷은 동백꽃, 여름,가을에는 무궁화를 애호했다. 다인의 복장도 다회에 참석할때는 위에 무명옷을 입는다. 도구를 처음 쓰는 다회나 처음 다회에 초청되어 참석할때는 위에 황색의 새 통소매 옷을 입는 것을 예의로 삼았다. 와비차인은 항상 무명옷, 수수한 종이옷을 입는다.

다회에 나갈때는 휴대품은 띠, 두건, 휴지, 수건 두개, 부채 등인데 매번 새것을 중히 여겼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의 초대를 받고 갈때는 약간 헌옷을 사용해도 되었다. 또 초청객의 몸가짐으로서 속인은 머리를 땋고 수염을 가지런히 하며, 승려나 불문(佛門)에 귀의한 사람은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 다인과 다애호가 및 명인
리큐는 먼저 다인으로서의 자격을 엄격히 규정했는데 보통다인, 애호가, 명인의 3단계로 나누었다. 보통다인은 차맛을 식별할 줄 알고 차도 잘 끓이며 다도의 사범으로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애호가는 훌륭한 다도구를 소유하고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공적이 많은 다도구를 소유하고 뚜럿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공적이 많은 다인을 말한다. 명인이란 다도구를 감식하는 안목이 뛰어나고 차도 잘 끓이며 신념, 창의, 업적 세가지를 갖추고 그외에 당(唐)에서 수입한 다도구를 소유하고 다도에 깊은 의지를 갖는 등 자격을 고루 갖춘 다인을 말한다.
이같은 구분을 보면 리큐시대의 다도는 오늘날과 달리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 차를 끓이는 법
리큐는 차 끓이는 방법도 개혁했다. 말차(抹茶)에는 진한 차(濃茶)와 묽은 차(薄茶)의 구분이 있는데 오로지 묽은 차를 끓여야 하며 그것이 진(眞)의 차라고 하고 있다.
리큐는 60세 무렵까지는 탁자의 차를 진(眞)이라 하고, 풍로(風爐)의 차를 행(行)이라 하며 화로(爐)의 차를 초(草)라고 정했는데 60을 넘은 만년에 이르러 차의 방법이 크게 바뀌었다. 탁자의 차의 고류(古流)에도 정통하고 있는터에 탁자는 애호가에게는 불필요한 장식물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차란 단지 물을 끓여서 차를 달여 마시는 것 뿐"이라는 내용의 리큐의 도가(道歌)가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리큐는 묽은 차를 달이는 것이 진(眞)의 차라고 규정하고 진한 차를 진(眞)이라고 하던 종래의 통설을 부인했다.

▣ 다도수행
리큐는 노(일본연극의 일종)의 연습을 모방해서 다도수행을 규정했다. 일정한 연령을 구분해서 각기 적합한 모습을 요구하고 있는 점이 매우 비슷하다.
즉 15세에서 30세까지는 모든 것을 스승하게 맡기고 그대로 따른다. 30세에서 40세까지는 자기 의견을 들여온다. 다도의 관례와 절차, 여러가지 법칙을 연구하는 것도 기초에 관해 잡담을 나누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10중 5정도는 자기의 의견을 채택한다. 40에서 50에 이르면 대담하게 스승과 반대로 해본다. 스승이 서쪽으로 가면 나는 동쪽으로 간다.

그런 가운데 자기류를 창안해서 훌륭한 다인이라는 평가를 얻게된다. 그리고 50에서 60까지의 10년간은 다시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한잔의 물을 온고히 옮기는 듯이 한다. 이와 동시에 모든 도(道)의 명인의 창위와 태도를 모범으로 삼는다.

▣ 다인이 조석으로 소리내어 읽는 말
리큐는 다인이 조석으로 크게 읽는 말로 첫째 마음은 물론 다도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다도에 깊은 뜻을 가져야 한다. 둘째 인내, 어려운 일, 싫은 일도 꾹참는다. 높은 도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건 인내를 필요로 한다. 세째 그릇 이는 인격을 뜻한다. 다도의 스승도 인간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리큐는 항상 다사를 생계의 방편으로 삼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다도에 몸을 바쳐온 리큐의 순수한 삶의 방식과 그것을 생활의 방편으로 부끄럽게 여기는 기개는 사카이라는 자치도시에서 태어난 애호가의 기백 때문이다.

▣ 득도의 객과 주인
어느날 리큐의 제자 남보 소케이(南坊宗啓)가 다사에 있어서 객(客)과 극인간에 서로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물었다. 리큐는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되는게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음이 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지않다. 다도를 깨달은 객과 주인이라면 특별히 노력할 필요없이 자연히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된다.
리큐는 "득도의 객과 주인은 주.객이 모두 마음속으로부터 공경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출처 : 찻잔속에 담는 풍경
글쓴이 : 안티아조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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