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안성기행 자료집1

청원1 2009. 8. 10. 03:32


부천노동문제연구소 답사

안성지역







 

 

 



2002년 4월 7일 (일)

 

 

안성시(安城市)


경기도 남단에 위치한 시. 동쪽은 이천시-음성군, 서쪽은 용인시·평택시, 남쪽은 천안시 진천군, 그리고 북쪽은 용인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06′~127°31′, 북위 36°53′~37°09′에 위치하며, 면적 554.25㎢, 인구 13만2093명(1999년 현재)이다.

가사(加士)·가현(加峴)·봉산(鳳山)·봉남(鳳南)·숭인(崇仁)·영(榮)·구포(九苞)·동본(東本)·명륜(明倫)·옥천(玉川)·낙원(樂園)·창전(倉前)·성남(城南)·서인(西仁)·신흥(新興)인지(仁智)석정(石井)아양(峨洋)·옥산(玉山)·도기(道基)·계(桂)·중리(中里)·금산(錦山)·연지(蓮池)·대천(大泉)·금석(金石)·사곡(沙谷)·당왕(堂旺)·신건지(新乾芝)·신소현(新蘇峴)·신모산(新茅山)·현수(玄水)·발화(發花) 등 33개 동 12개 면 158개 이로 되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봉산동이다.

이 시는 차령산맥의 지세를 받아 산지와 분지가 발달하고 안성평야 지대에서는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이 곳은 동북부에 마옥산·마이산·무마산·서운산 등이 연봉을 이루면서 산간 계곡이 수려하고 안성천 유역에 주거지가 발달하면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많은 전설과 사찰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고 관광위락시설과 농어촌 위락단지도 조성되고 있어 주요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충청북도에서 서울로 왕래하던 길목에 죽주산성이 자리잡고 있는 안성은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요충지로 유명한 곳이다. 또한, 팔도의 물건들이 모여 들고 각종 농산물과 생활수공품들이 집결되었던 문화의 접경지대로 유명했었다. 󰡐���안성맞춤󰡑���이라고 할 정도로 안성에 가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는 상설시장 기능도 한때 가지고 있던 고장이다. 󰡐���안성맞춤󰡑���이란 안성 유기그릇과 가죽꽃신이 유명하여 생겨난 말이다. 이와 같이 4통8달하는 육로를 따라 삼남과 한양으로 통하는 이 곳의 안성시장 5일장은 조선 3대시장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상업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관광명소로서는 미륵동네와 사찰들이 많고, 서운산 계곡을 비롯한 저수지와 관광과수단지·산성·향교 등이 있다. 특히 안성땅에는 언제나 소박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어 왔던 미륵부처들이 유난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태평 미륵, 기솔리 미륵, 아양동 미륵, 대농리 미륵이 그 대표적이다. 모든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소망을 갖고 마을 어귀나 마을 중심가에 미륵불을 세우고 미륵불의 넉넉한 미소로 그들의 생활에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서운산계곡·칠장사·혜초국사비·죽산리의 당간지주·칠장사 철제당간·죽산5층석탑·석남사·안성향교·죽주산성·안성유기 관광토산물·과수단지·고삼저수지·대림동산 수영장·금광저수지·현충탑·안성컨트리클럽·안성공원·고삼농어촌유양단지 등은 이 지역 관광지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일곱도적이 개과천선해 성인이 되었다는 칠장사와, 남사당의 잔영이 남아 있는 청룡사와 불당골, 서운산 깊숙이 숨어 있는 석남사 등은 그 장쾌함에 가슴 벅차는 곳이다.

또한 우리의 오랜 역사 속에서 민중들이 스스로 형성 발전시킨 유랑예술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남사당패󰡑���는 안성의 뿌리깊은 사회적 관광자원이라 할 수 있다. 안성을 무대로 한 유명한 소설 중 허생전·장길산·임꺽정 등의 무대가 이 곳 안성 땅이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안성의 서남쪽은 비스듬히 펼쳐진 평야지대로서 일찍부터 논농사가 발달했다. 안성평야로 불리는 서남쪽 분지는 평택을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한천과 안성천을 품고 있어, 청미천을 낀 동쪽의 죽산분지와 함께 안성 농업의 중심이 된다. 특히 안성평야의 고삼저수지와 금광 저수지는 모두 천오백만평이나 되는 논에 물을 댈 수가 있어 이곳의 수리 안전율을 78.5%까지 올려준다. 이렇게 안성은 논농사를 짓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인데 이곳에서 나는 쌀은 안성쌀이라고 해서 예로부터 평택쌀, 여주쌀 들과 더불어 그 품질을 높이 쳐주었다.

자연환경

차령산맥의 말단에 위치하고 있어 동북쪽에는 400~500m의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서남쪽에는 100m~200m의 낮은 구릉이 나타나고 있다.

동쪽에는 마옥산(磨玉山, 445m)·묘룡산(妙龍山, 174m)·마이산(馬耳山, 472m)·황색골산(353m)·덕성산(德成山, 521m)·서운산(瑞雲山, 547m) 등이 이천시·음성군·진천군과, 서쪽에는 묘봉(妙峰, 229m)·신선봉(神仙峰, 308m)·덕암산(德巖山, 165m)이 용인시·평택시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에는 쌍령산(雙嶺山, 491m)·경수산(331m)·딸기봉(415m) 등이 용인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부 산록지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안성천(安城川)은 도중에 한천(漢川)을 합류하고 서북부에서 발원하는 도곡천·도량천은 남진하면서 한천에 합류한다. 고남저수지에서 발원하는 한천은 남서진하는 안성천과 합류한다. 군의 중북부에서 발원하는 모두천·기술천 등이 안성천에 합류하고 남부의 금광저수지의 물과 청중천은 서진하면서 안성천과 합류하고 있다.

그리고 안성천은 황구지천(黃口池川)·청룡천(靑龍川)과 합치면서 천안으로 들어간다. 이들 하천은 하천지역에 넓은 충적 평야인 안성평야를 만들고 있다. 동북부에는 청미천이 흐르는데 하천 주변에는 죽산분지가 발달하고 있다.

지질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며, 기후는 대륙성기후에 속한다. 연평균기온은 11.5℃, 1월 평균기온 -4.9℃, 8월 평균기온 26.6℃이며, 연강수량은 1,200mm 내외이다.

유물·유적

죽산면 용설리, 공도면 만정리, 원곡면 칠곡리에서 발굴된 청동기·철기시대 유물이 있다.

성지로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죽산면 매산리의 죽주산성(竹州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69호), 일죽면 금산리의 망이산성(望夷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138호), 양성면 방신리의 무양성(舞陽城)과 조선시대에 축성된 금광면 금광리의 금광산성(金光山城), 비봉산토성, 서운면 북산리의 서운산성(瑞雲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81호)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홍건적을 섬멸한 기념으로 지은 극적루가 시내에 있었으나 지금은 자리만 남아 있다. 현존하는 사찰로는 청룡사·칠장사·청원사·운수암(雲水庵,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5호)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죽산면의 안성죽산리오층석탑(보물 제435호)·안성죽산리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안성죽산리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안성죽산리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호), 매산리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이 있다.

또한 칠장리의 칠장사(七長寺,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 경내에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 보물 제488호)·칠장사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칠장사소조사천왕상(七長寺塑造四天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칠장사당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안성칠장사괘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및 안성봉업사석불입상(安城奉業寺石佛立像, 보물 제983호) 등이 있다.

또한, 금광면 상중리의 석남사(石南寺)에는 석남사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석남사영산전(石南寺靈山殿, 보물 제823호)·석남사마애여래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이 있고, 서운면 청룡리의 청룡사(靑龍寺)에는 청룡사대웅전(보물 제824호)·청룡사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9호)·청룡사사적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4호)가 있다.

그 밖에 삼죽면의 기솔리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호), 대덕면 대농리의 안성대농리석불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6호), 원곡면 성은리의 청원사칠층석탑(淸源寺七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6호), 고삼면의 신창리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0호), 시내의 안성도기동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6호) 등이 있다.

이 곳은 신라시대부터 불연(佛緣)이 많았던 곳으로 혜소국사·언기대사(彦機大師)·벽응대사(碧應大師) 등이 이 곳 출신이다.

유교문화재로는 명륜동의 안성향교(安城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7호), 죽산면 죽산리에 죽산향교(竹山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6호), 양성면 동항리에 양성향교(陽城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8호)와 덕봉리의 덕봉서원(德峰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호)을 비롯하여 도기서원지(道基書院址)·남파서원지(南坡書院址)·계고당(稽古堂)·동안강당지(東安講堂址) 등이 있다.

이밖에 대덕면 토현리의 김중만장군영정(金重萬將軍影幀, 보물 제715호)·김중만장군공신록 및 교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의 인목대비친필족자(仁穆大妃親筆簇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미양면 구수리의 이덕남장군묘(李德男將軍墓, 경기도 기념물 제26호)·홍계남장군고루비(洪季男將軍古壘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1호)가 있다.

또한 낙원동의 안성객사(安城客舍,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4호)·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吳明恒先生討賊頌功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9호), 일죽면 고은리의 영창대군묘(永昌大君墓, 경기도 기념물 제75호), 고삼면 월향리의 서흥김씨삼강정문(瑞興金氏三綱旌門, 경기도 기념물 제77호), 삼은리의 안성유명건묘갈비(安城兪命建墓碣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5호)가 있다.

그리고 기흥읍 상갈리의 경기도립박물관에는 조영복선생영정(趙榮福先生影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9호)·연행일록부연행별장외명현간찰(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4호)·서거정선생묘지석(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6호)이 있다.

또한 보개면 북좌리의 전주이씨서원군파묘역(경기도 기념물 제117호), 서운면 청룡리의 이해룡고가(李海龍古家,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3호), 양성면 덕봉리의 안성오춘환가옥(安城吳春煥家屋, 전통건조물 제2호) 등이 있다.

기독교문화재로는 안성구포동성당(安城九苞洞聖堂, 경기도 기념물 제82호), 양성면 미산리의 미리내성지와 김대건(金大建)신부묘가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유기장(鍮器匠,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의 주물장(鑄物匠)과 백동연죽장(白銅煙竹匠,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7호) 기능보유자가 이 지역에 있다.

보호수로는 죽산면 칠장리의 칠장사나옹노송, 구포동의 느티나무, 원곡면 칠곡리의 느티나무와 지문리의 홰나무, 대덕면 삼한리의 은행나무, 미양면 용두리의 엄나무와 안성향교의 은행나무 등이 있다.

한편 3·1만세운동 현장인 원곡~양성간의 국도변에는 높이 10.7m의 삼일운동기념탑이 건립되어 애국선열의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역사

〔고 대〕 지금까지 이 곳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바는 없지만 인접지역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곳에도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없으며,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죽산면 장원리와 삼죽면 내장리·율곡리에서 민무늬토기와 마제석검 등이 출토되었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했으며, 백제 비류왕 초기에는 안성천을 경계로 마한과 국경을 이루어 마한지역 병탄정책을 실현한 귀중한 병참기지였다. 그 뒤 369년(근초고왕 24) 백제가 마한 전역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도 백제의 영토였다.

그 뒤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이남의 백제영토를 점령하고, 중앙집권적 제도를 실시할 때부터 양원왕 때까지 내혜홀(奈兮忽)로 불렸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가 개혁될 때 백성군(白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 려〕 940년(태조 23) 안성현(安城縣)으로 개칭되었고, 995년(성종 14) 단련사가 두어졌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되었다. 1018년(현종 9) 수주(水州 : 지금의 수원)에 잠시 이속되었다가 뒤에 천안에 이속되었다. 1172년(명종 2) 다시 분리되어 처음으로 감무가 배치되었다. 1236년(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죽주성(竹州城)의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冑)가 죽주산성에 웅거하면서 수주일 동안 선전분투하여 적을 격퇴시켜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송도가 유린되고 왕이 안동으로 피난하는 국난을 당했을 때에도, 양광도(楊廣道 : 지금의 경기도)의 다른 고을은 모두 항복했으나 이 곳 사람들은 계책으로 적에게 거짓항복하여 주연을 베풀어 적장을 유인, 6명을 참수하는 개가를 올려서 적의 침공을 좌절시키고 송도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된 극적루지(克敵樓址)가 안성읍에 있으며, 이 공로로 1362년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수주 관할이었던 양량(陽良)·감미(甘彌)·마전(馬田)·신곡(薪谷) 등 네 부곡이 안성군에 소속되었다. 1366년 공민왕의 총신 김용(金鏞)의 수뢰가 탄로나 마전·신곡은 다시 수주로 환속되었다.

〔조 선〕 1399년(정종 1) 안성군 양양부곡이 분리되어 양지현(陽智縣)이 설치되었다. 안성시는 고려 현종 때 이래 충청도 천안부에 속했는데, 1413년(태종 13)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죽주(竹州)는 이 때 죽산현(竹山縣)으로 개칭되어 현감이 배치되었고 1434년(세종 16)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죽산의 별칭으로는 음평(陰平)·연창(延昌) 등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홍언수(洪彦秀, 일명 洪自修)와 경기조방장(京畿助防將)으로 전후 5년간 3,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적군의 북상진로를 저지하고자 분전하다가 35세로 순절한 그의 아들 홍계남이 있다.

또 홍계남과 같이 기호·호서지방의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한 이덕남 등 두 의병장의 전첩비가 지금의 미양면 구수리에 있다. 이 때 축성한 서운산성(瑞雲山城)이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차령산맥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또 임진왜란 중 경기·충청지방의 군사를 모집하여 천안군과 양성현 일원에 주둔하면서 공수진퇴(攻守進退)의 전술로 왜장 후쿠지마(福島正則)가 거느린 4,500명의 죽산성 주력군을 상대로 황소를 이용한 복개전차대(覆蓋戰車隊) 공격으로 적진을 교란시킨 변이중(邊以中)의 죽산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 무장(武將) 박찬신(朴贊新), 중군(中軍) 박문수(朴文秀)·조현명(趙顯命) 등이 이끄는 정예 정규군과 이인좌의 무리인 정희량(鄭希亮)·박필현(朴弼顯)·남태징(南泰徵)·박필몽(朴弼夢) 등의 반군이 이 곳에서 대진하여 백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전승을 기념하는 도순무사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가 낙원동에 있다.

〔근 대〕 1895년 공주부 안성군·양성군과 충주부 죽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 안성군·양성군·죽산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성군·양성군과 죽산군의 일부가 병합하여 안성군으로 되었으며, 이 때 12개 면 170개 이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1931년 읍내면이 안성면으로 개칭되었고, 1937년 7월 1일 안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의병항쟁으로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던 시내 임근수(林根洙)·김명기(金明起), 보개면의 강태영(姜泰榮), 공도면의 오인근(吳寅根), 양성면의 오장환(吳章煥) 등이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28일부터 4월 2일까지 전개된 원곡·양성지역의 3·1운동은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룡(李熙龍)의 주도로 2,000여 주민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일경주재소(日警駐在所)·우편소와 같은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현 대〕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인군 고삼면이 편입되었고, 1983년 2월 15일 원곡면 용이리·죽백리·청룡리·월곡리와 공도면 소사리가 평택군 평택읍으로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 보개면 양복리 일부가 금광면으로, 삼죽면 남풍리·동평리·가현리가 보개면으로 편입되었다.

1992년 10월 1일 이죽면이 죽산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93년 4월 8일 대덕면 건지리 일부와 소현리 일부가 안성읍에 편입되었다. 1998년 4월 1일에 도농통합으로 새로운 안성시가 되었다.

민속

〔민속놀이〕 이 고장의 중요한 민속놀이로는 남사당(南寺黨)놀이와 거북놀이를 들 수 있다.

원래 남사당놀이는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지만 그 원조는 역시 안성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조선 명종 때였다고 한다. 1860년대 서운면 청룡리에는 남사당집이 여덟 채가 있었다 하여 팔사당마을이라 불렸고, 바우덕이(박우덕, 또는 金巖德)라는 이가 남사당의 꼭두쇠로서 재질이 총명하고 소고와 춤에도 뛰어나 그에 대한 속요(俗謠)까지 전해지고 있을 정도였다.

안성남사당패는 그뒤 안성복만이패-원육덕패-이원보패로 이어지는데, 이원보패에서 상무동을 서며 쇠가락을 전수받은 김기복(金基福)은 오늘날 안성남사당풍물놀이에서 상쇠로 전통 웃다리의 쇠가락을 치고 있다.

남사당패는 우두머리인 꼭두쇠, 기획담당자격인 곰뱅이쇠, 각 연희종목의 연희자 중 선임자격인 뜬쇠, 각 뜬쇠 밑에 있는 기능자들인 가열, 초보자인 삐리, 기능을 잃은 노인들인 저승패, 등짐꾼인 나귀쇠 등 40~50명으로 구성되며, 풍물놀이를 하는 뜬쇠만 해도 꽹과리·징·장구·북·날라리·버꾸 등이 있다.

이들은 다시 상무동님·회덕님(선소리꾼 중 우두머리)·버나쇠(대접돌리기 중 우두머리)·얼른쇠(요술쟁이 중 우두머리)·덜미쇠(꼭두각시놀음 조종자 중 대잡이)·살판쇠(땅재주꾼 중 우두머리)·어름산이(줄꾼 중 우두머리) 등으로 나뉘어 한패거리가 되어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닌다. 이 때 아무 데나 가서 노는 것이 아니라 곰뱅이쇠가 마을에 미리 들어가서 허락을 받고, 터를 빌려주는 곳에서 마당씻이굿을 벌여 구경꾼들을 판으로 끌어들인 다음 한바탕 크게 논다.

남사당놀이는 여섯 마당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는 󰡐���마당풍물놀이󰡑���라 하여 농악으로 통하는 놀이이고, 둘째는 󰡐���버나놀이󰡑���로 대접을 돌리는 묘기인데 양반을 희롱하는 재담과 소리가 곁들여진다. 셋째는 󰡐���살판놀이󰡑���로 앞곤두뒷곤두 등 어려운 재주놀이를 벌이며, 넷째는 󰡐���어름놀이󰡑���라 불리는 줄타기놀이로 재담과 소리를 곁들인다.

다섯째는 󰡐���덧뵈기놀이󰡑���인 탈놀음인데 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의 네 편으로 되어 있고, 여섯째는 끝마당으로󰡐���덜미놀이󰡑���라는 꼭두각시놀이인데 이것도 박첨지마당·평안감사마당 등 일곱 거리로 되어 있다.

〔동 제〕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제로는 일죽면 고은리 마옥산(磨玉山, 일명 五音山)의 산신제와 방초리의 천제를 들 수 있다. 마옥산의 산신제는 매년 음력 10월 초순에 날을 받아 저녁 5시쯤 행해진다. 산 밑 송림이 무성한 곳에 산신당이 있어 이곳에 소머리를 놓고 제를 지내는데, 제물과 절차가 엄격한 관례로 규제된다.

제관은 목욕재계한 다음 사흘간 외부출입을 삼가고 근신하며, 젯날이 결정되면 어느 누구도 동네의 출입이 금지된다. 제관의 축원은 풍년과 태평성세를 비롯하여 가축의 역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나라에 대한 제사인 국소제(國所祭)를 먼저 지낸 다음 산신제를 지내는 것이 특이하다. 산신제를 지내는 동안 동민들도 각각 떡을 쪄서 일제히 집에서 고사를 지내고, 산신제가 끝나면 마을은 축제분위기가 되어 잔치가 벌어진다. 이 곳의 산신제는 한 번도 중단된 일이 없다고 한다. 계동·도기동과 삼죽면 기솔리에서도 이와 동일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안성향교·죽산향교·양성향교 등이 있었다. 안성향교는 1533년(중종 28) 명륜동에 창건되었고, 죽산향교도 같은 해 죽산면 죽산리에 창건되었으며, 양성향교는 17세기 숙종 때에 양성면 동항리에 창건되었다.

1692년(숙종 18)경 봉남동에 홍우원(洪宇遠)을 받들기 위해 그의 후학들이 남파서원을 설립하였으며, 1668년 송시열(宋時烈) 등이 그의 스승인 김장생(金長生)을 추모하여 도기동에 도기서원을 세워 1669년에 사액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철폐되었다. 1695년 양성면 덕봉리에 오두인(吳斗寅)을 배향하기 위해 사림들이 덕봉서원을 설립하여 1697년에 사액되었다.

또한, 홍우원이 수학하였다는 계고당이 대덕면 소현리에 있었으나 1871년 훼철되었고, 유언집(兪彦鏶)을 추모하여 그 문하생들과 유씨문중에서 1786년(정조 10)경 세운 동안강당이 있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2년 이종두(李鍾斗)가 사립 안성소학교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 안성초등학교가 개교한 것이 최초이다. 1907년 양성면 미산리에 강도영(姜道永) 신부가 세운 사립 해성학교(海星學校), 1909년 안성천주교회내에 프랑스 신부 공베르(한국명 孔安國)가 세운 안법학교(安法學校)가 있다.

또한 1910년 양성면 동항리의 적성학교(赤城學校)와 원곡면 산하리에 정응설(鄭應卨)이 설립한 산창학교(山創學校) 등의 사립학교 및 1911년 양성초등학교와 죽산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39년 석정동에 안성농업학교가 개교하였고, 1943년 안성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안성농업학교는 1965년 안성농업고등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1970년 초급대학 과정인 2년제 안성농업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1979년 안성농업전문대학으로 1993년 안성산업대학교로 승격되었다. 또, 1978년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가 설립되었다.

1997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4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7개교와 두원공과대학, 동아방송대학과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한경대학교가 있다. 1955년에 개원한 안성문화원은 향토문화발전에 이바지하며, 백성문화제도 개최되고 있다. 종교기관은 불교사찰 45개, 유교교당 3개, 천주교성당 6개, 개신교교회 110개가 있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50%이상이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지는 34.7%인데, 경지 중 논이 1만2126ha, 밭은 778ha, 과수원은 1267ha 등이다. 고삼(古三)저수지·금광(金光)저수지·마둔(馬屯)저수지·칠곡(七谷)저수지 등이 주변의 농경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옥수수·콩·팥·녹두·감자·고구마와, 채소류로 고추·무·배추·파·마늘·당근, 특용작물로는 참깨·들깨 등이 생산되고 있다. 산지가 많은 이 지역에는 밤·도토리·은행·대추 이외에 표고버섯이 생산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 등이 이 지역을 지나고 있는데 고속도로 변에는 목축업·과수업이 발달하고 있다. 과실류로 포도·배·사과·복숭아가 생산되고 있다.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44%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 인구의 7.7%이다. 주요 제조업은 식료품제조업·화학 공업·비금속공업·조립금속공업이다. 특히 유기제조업이 이 지역의 특산물이다. 상업시설은 일반시장이 3개가 있는데 읍내에 있는 유기 시장이 잘 알려져 있으며 상설시장의 개설에도 불구하고 안성장(5일장)이 열리고 있다. 안성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농산물의 집산지로 안성장은 2·7일에 열리는데 안성장은 전국을 상대로 하는 장이다. 이 곳에서는 곡류·유기제품·제지류·포도를 비롯한 청과류·채소류가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열리는 우시장은 과거에는 옛날에는 활기를 띠었으나 쇠퇴하고 있다. 안성장 이외에 죽산면의 죽산장이 3·8일, 일죽면의 일죽장이 5·10일에 열리고 있다.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서부지역을 남북으로, 중부고속도로가 동쪽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국도 38호선이 동서로 지나고 국도 45호선이 서북부의 원곡면·양성면을 서남~북동방향으로 지나고 국도 17호선이 동북쪽에서 중부고속도로와 나란히 지나고 있다. 지방도로로 339호선·392호선·387호선 등이 안성 시내를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지나고 있어 교통로가 잘 발달한 지역이다. 철도는 안성~천안의 안성선이 있었으나 1989년 폐선되어 교통은 도로에만 의존하고 있다.

안성쌀 못지 않게 널리 알려진 것이 안성포도이다. 안성에서 포도를 키운 것은 1901년부터이다. 그때에 프랑스 신부였던 안토니오 오곰벨이 이나라 사람으로 귀하하면서 그 기념으로 제 나라에서 가져와 심었던 포도나무 세그루가 안성포도의 조상이 되었다. 안성포도의 주된 품종은 그 이름이 마스캇이다.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이 마스캇은 맛이 시지 않고 향기가 독특하다.


칠장사(七長寺)

   

 칠장사부도군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七賢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그 뒤 고려 초기에 혜소국사(慧炤國師)가 현재의 비각(碑閣) 자리인 백련암(白蓮庵)에서 수도할 때 찾아왔던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7인 모두가 도를 깨달아 칠현(七賢)이 되었으므로 산이름을 칠현산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옛날 이 근방에 못된 짓을 일삼는 포악한 악인들 7인이 있었은데 혜소국사가 이 칠장사에 머묵고 있을 때 마침 이들이 어느날 절 아래에서 쉬다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목이 말라 샘까지 왔었다. 그런데 샘가에 놓인 바가지가 순금으로 만든 바가지가 아닌가. 그래서 그 사람은 욕심이 나서 얼른 물을 떠먹고 나서는 그 바가지를 몰래 옷속에 숨겨 가지고 나왔다. 두번째의 사람이 물을 마시러 갔을 때도 역시 금으로 된 바가지가 있었서 그이도 몰래 가지고 돌아왔고, 세번째 네번째의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일곱 사람 모두 순금 바가지를 훔쳐 가지고 돌아왔지만 나중에 각기 만져보니 바가지들은 모두 온데간데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이상하다고 여겨 각자 바가지를 숨겨 가지고 온 사실들을 실토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혜소국사가 조화를 부린 일임을 알게 되어 그들은 그날부터 스님의 교화를 받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이들이 모두 현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증명하듯 혜소국사의 비 바로 옆에는 이 칠현인의 화현이라고 일컬어지는 돌로 된 나한상을 모신 나한전이 있다. 나한전 옆의 소나무는 나옹선사가 심은 것이다. 나옹은 죽산을 지나면서 태조의 진영이 모셔진 봉업사를 들르는 과정에서 이곳 칠장사에도 들러 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혜소국사는 왕명으로 1014년(현종 5)에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그 뒤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내려오다가, 1674년 세도가에게 산을 빼앗겨 승려들이 모두 흩어져서 잠시 빈 절이 되었던 것을 거사(居士) 초견(楚堅)이 다시 찾아 중수하였다.

  

조선 인조 원년에 인목대비가 인조반정으로써 복위가 된 다음 억울하게 돌아간 친정 아버지 김제남과 왕자 영창대군을 위하여 이곳을 원찰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원통전(圓通殿)․명부전․응향각(凝香閣)․천왕문(天王門)․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웅장한 규모, 우아한 조각미와 채색미가 괄목할 만하다. 또한, 천왕문 내의 소조사천왕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비각 내에 보존되어 있는 보물 제488호의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가 있다. 1060년(문종 14)에 건립된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적장인 가토(加藤淸正)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크게 꾸짖자, 화가 치민 가토가 칼을 빼서 베니 홀연히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렸으므로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쳤다고 한다.

현재 국사의 비신(碑身)은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이 밖에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인목대비의 친필 족자를 비롯하여 당간지주(깃발을 걸기 위해 세운 기둥 초석), 수많은 부도군(浮屠群:승려의 유골을 모신 부도들)이 있다. 이 중 족자는 인목대비가 이 절에 와서 수양할 때 쓴 것이다. 또한, 절 입구에 있는 14기의 부도와 절 뒤편의 수많은 부도탑은 이 절의 유구한 역사를 일깨워 준다. 특히, 절 입구에 있는 철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청주 용두사지(龍頭寺址)와 갑사(甲寺)에서만 볼 수 있는 극히 드문 문화재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칠장사의 풍수적 형국이 행주형(行舟形)이므로 이 당간으로 배의 돛대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그 밖에도 고려 말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할 때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있던 사서(寺書)를 이 절로 옮겨서 보관하여 소실을 면한 일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명적암(明寂庵)․극락암(極樂庵)․백련암 등이 있다. 절 일원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자사라는 절 이름은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많이 알려졌을 것이다. 조광조가 자주 미복으로 찾아가서 담론하였다는 갖바치 노롯을 하던 은군자가 만년에 병해대사라는 이름으로 칠장사에 주석하고 있을 때 임꺽정이 그를 만나기 위해 칠장사를 출입하였다는 이야기가 소설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칠장사당간(七長寺幢竿)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에 있는 철당간. 전체 높이 11.5m, 지주 높이 3m, 당간 지름 40㎝.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 양 지주가 남북향으로 서고 그 가운데에 철통을 연결하여 올린 철당간이 고정되어 있다.

화강석으로 조성된 지주에는 아무런 장식무늬가 없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너비가 약간씩 좁아지며 맨 윗면의 외곽은 둥글게 모를 깎았다. 또한 지주의 내측 상단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내고 철띠를 둘러 당간을 고정시켰다.

이들 당간과 당간지주를 받치는 대석은 자세히 조사되지 않아 그 면모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단순한 방형대석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이 당간은 매우 소박한 지주를 갖고 있으며 당간은 현재 길이 60㎝ 가량의 철통 15개만이 연접된 채 남아 있어 약 절반 가량은 결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이 철당간은 조성내력과 관련된 방증자료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어 그 조성연대를 추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며, 다만 고려시대 이후의 철당간으로 비정되고 있다.

 

칠장사 철당간지주

 

칠장사대웅전(七長寺大雄殿)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건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 왼쪽의 원통전과 더불어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원래 다른 곳에 세워져 있던 건물을 1828년(순조 28)에 옮겨다 세운 것이라 한다.

 

 

칠장사 대웅전

기단은 정면에서 볼 때 크기나 두께가 고르지 않은 장대석을 5겹 정도 포개 쌓은 형식으로 고려시대의 기단 축조 기법을 따르고 있다. 갑석은 댓돌 면보다 앞으로 약간 튀어나오게 설치한 다음, 밑면을 두번 궁굴려서 정성스럽게 가공하였다.

계단은 정면 중앙 한곳에만 가설되었는데 층급 9개 중 위에서 아래로 4단까지는 기단과 같은 시기에 만든 것이나, 그 아래 5개의 단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다. 소맷돌 갑석의 다듬기 기법을 보아도 현재의 계단이 두 차례에 걸쳐서 조성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주춧돌 가운데 정면의 네 기둥 주초와 우측면 제2 기둥 밑의 주초는 윗면에 2단 원형 기둥자리를 마련하고 있어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머지 주초는 자연석을 그대로 놓은 덤벙주초여서 건물을 옮겨 지을 때 새로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 후면 중앙에는 평주열(平柱列)에 맞추어 굵기가 가는 고주 2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후불벽(後佛壁)을 친 다음 여기에 기대어 목조 불단을 가설하고 삼존불상을 안치한 뒤 지붕 모양의 천개(天蓋)를 매달아 중앙 부분을 장엄하였다. 이러한 평면 구성은 물론 불단 앞쪽 마루를 모두 예불 공간으로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서 15세기 이후 불전 건물에서 일반화된 형식이다.

창호를 정면 3칸과 좌우 측면의 앞툇간 그리고 후면 중앙간에 설치한 것도 조선 후기 불전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정면 기둥을 제외하면 나머지 기둥은 굵기도 제각각일 뿐 아니라 휜 나무를 간단하게 다듬은 뒤 그대로 활용한 것이어서 짜임새가 좋지 않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하여 재목 선택에 선풍(禪風)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보여 주고 있다.

앞쪽 공포(慊包)는 안팎 삼출목으로 외부 제공첨차 끝의 연꽃장식이나 그 위의 봉두조각, 그리고 내부 제공첨차의 운궁형(雲宮形) 등은 19세기의 작풍으로서, 이는 1828년 이건할 당시에 새로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뒤쪽 공포는 약간 뒤에 오는 양식적 특징을 보여 1857년(철종 8)의 중수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는 한쌍의 괘불대가 양쪽으로 서 있는데 오른쪽의 것의 전면에는 ‘죽산 칠장사 영산회 괘불탱기석 급탱죽 조성기’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요즘 괘불대라고 하는 것을 괘불탱기석이라고 불렀고 거기에다 세우는 받침대는 탱죽이라고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칠장사삼불회괘불탱(七長寺三佛會掛佛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화. 1710년(숙종 36) 작. 삼베 바탕에 채색. 세로 6.28m, 가로 4.54m. 보물 제1256호. 승장(勝藏)․인혜(印惠)․경상(敬尙)․현책(玄冊)․영안(玲眼) 등 5명의 대화사(大怜士)가 그렸다. 화기에 󰡐���대영산회괘불탱󰡑���의 명칭이 있는 이 불화는 한 승려가 주상삼전하(主上三殿下)와 어머니를 위해 발원한 것이다.

석가불좌상을 중심으로 상단에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의 삼불 및 그 권속이 화면을 채운 삼불회괘불탱이다. 키 모양의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를 지니고 결가부좌한 석가불은 8대보살․10대제자(十大弟子)․사리불(舍利弗)․범천과 제석천․사천왕․신중(神衆)․신장(神將) 등으로 에워싸인 군도식(群圖式) 배치 구도이다.

좁은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의 법의(法衣 :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를 걸친 석가불은 신체에 비해 큰 직사각형의 얼굴에 올라간 눈과 내려온 눈썹, 작은 입의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꽃무늬로 장식된 신광(身光 :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지닌 석가불과 마주하여 법을 청하는 사리불의 출현은 인접한 청룡사(靑龍寺) 영산회괘불탱(1658년 작)을 따랐다.

연꽃을 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보관에 화불을 묘사하고 오른손에 연꽃, 왼손에 정병을 든 관음보살 외에는 합장한 자세이다. 둥근 목깃의 복장을 한 범천과 제석천은 천의(天衣 : 천인(天人)이나 선녀의 옷)를 입은 다른 보살들과 구별된다.

상단에는 보탑(寶塔)과 보수(寶樹) 좌우로, 두 손을 어깨 높이에 둔 노사나불좌상과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불좌상이 각기 4구의 보살을 거느리고 있다. 최상단에는 9구의 보살을 반원형의 광배로 구획한 후, 좌우에 타방불(他方佛)․팔부중(八部衆)․용왕과 용녀 등이 묘사되어 있다.

석가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영산회상도를 강조한 이 삼불회괘불탱은 삼신불과 삼세불 신앙이 내포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조선 전기에 대두된 이래, 조선 후기의 괘불탱에 성행하고 있다. 밝은 적과 녹색 외에도 가벼운 느낌의 하늘색이 애용되었으며 옷 문양에 금니(金泥)가 사용되었다.

칠장사에는 현재 명칭과 봉안 장소가 뚜렷한 이 칠장사 삼불회괘불탱 외에 1628년(인조 6년) 작 오불회괘불탱(국보 제296호)이 있다. 이와 같이 한 사찰에서 두 점의 괘불탱이 조성된 예는 영주 부석사에도 있어, 부석사 오불회괘불탱(1745년 작)과 더불어 참고할 만하다.

  

 

칠장사소조사천왕상

칠장사소조사천왕상(七長寺塑造四天王像)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천왕상. 높이 360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 제작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17세기 전반으로 추측되고 있다.

의좌상(椅座像)으로 다른 사천왕상들에 비해 다소 작은 편이다. 서남향의 칠장사 천왕문은 동남향을 하고 있는 대웅전에서 ㄱ자로 구부러진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천왕문 안에는 4구의 사천왕상이 좌․우에 2구씩 목책 안에 안치되어 있다.

천왕문의 입구를 중심으로 하여 오른편의 앞쪽에는 단을 들고 있는 사천왕상이, 대웅전 쪽으로는 비파를 들고 있는 사천왕상이, 왼쪽의 앞쪽에는 오른손에 용을 잡고 왼손 엄지와 검지로 여의주〔寶珠〕를 집고 있는 사천왕상이, 대웅전 쪽으로는 오른손에 당(幢)을 잡고 왼손은 허리에 대고 있는 사천왕상이 있다.

이 사천왕상들은 다른 사찰의 상들에 비해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눈썹과 수염은 곱슬인 듯 동글동글하게 말려 있고, 길게 늘어진 귀에는 구슬형의 귀걸이를 달고 있다. 머리에는 4구 모두 비슷한 모양의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머리의 양옆으로 보관 끈이 휘날리는 듯이 표현되어 있다.

허리 부분이 길게 드러나고 있는 신체에는 조선시대 사천왕상과 공통의 갑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팔을 구부리고 있는 자세가 조금 어색하게 표현된 것으로 보아 제작자의 기술이 그다지 숙달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갑옷 위로는 천의(天衣 : 천인(天人)이나 선녀의 옷)가 구불구불한 곡선을 그리며 신체에 붙여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불꽃무늬는 생략되어 있다.

기다랗고 굴곡이 심하지 않은 허리 부분은 직지사(直指寺) 사천왕상(임진왜란 이전 제작 추정)이나, 법주사 사천왕상(1624년 작)과 유사한 감이 있다. 양쪽 발밑에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하고 밟혀 있는 악귀들이 버둥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8구 모두 대부분 심하게 부서져 있는 상태이다.

사천왕의 상호는 무인장수의 상호를 제대로 갖추었으며, 인체 해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조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천왕상의 제작 연대를 17세기 전반으로 추측하고 있는 이유는,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 이후 복위된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은 부친 김제남(金悌男)과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위하여 칠장사를 그 원찰(願刹 :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법당)로 삼아 여기서 기도 정진했다는 사실과의 연관성에 근거한다.

인목대비는 이 기간 동안 이곳에서 ≪금광명최승왕경≫ 1책(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을 사경하였다. 그리고 친필 족자(경기도유형문화재 제34호)에 시 한 수를 남기기도 하였다.

≪금광명최승왕경≫은 사천왕 신앙의 소의경전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당시 이 사찰을 원찰로 삼았던 인목대비와 사천왕 신앙과의 연계성을 통해 칠장사 사천왕상의 제작 연대를 이 시기로 추정해 보는 것이다.

칠장사오불회괘불탱(七長寺五佛會掛佛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불화. 1628년(인조 6) 작.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6.56m, 가로 4.04m. 국보 제296호. 화원(怜員) 법형 비구(法炯比丘)가 그린 이 괘불탱은 상․중․하단으로 구분된다.

상단은 비로자나삼신불좌상, 중단은 약사불좌상․아미타불좌상․미륵보살입상, 하단은 도솔천궁(兜率天宮)의 좌․우로 정면 관음보살좌상과 측면 지장보살좌상이 배치되었다. 최하단부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궁에서 빨리 지상에 강림하기를 염원하는 듯한 청문대중(聽聞大衆)이 있다. 즉,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불의 삼신불과 앞서의 석가불․약사불․아미타불의 삼세불, 관음보살과 지장보살, 도솔천궁으로 요약되는 존상의 배치 구도는 불(佛)의 진리의 영원성과 이를 통한 구원을 상징한다.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불․약사불․아미타불의 오불(五佛)이 강조된 오불회괘불탱은 지권인(智拳印 : 왼손 집게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쥔 손 모양)의 비로자나불 주위로 10대제자(十大弟子), 4구의 타방불(他方佛)이 묘사되어 있다. 약사불의 좌우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약사12신장이 배열되고 아미타불의 좌우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사이의 보살입상은 미륵보살로 추정된다. 이들을 사천왕과 신장상이 수호하고 있다.

바다 위에 솟은 기암괴석에 앉은 정면 관음보살의 좌측에는 쌍죽(雙竹)이, 우측에는 정병(詞甁)에 꽂힌 버들가지에 파랑새가 앉아 있다. 이 아래, 법을 청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 : 求道의 보살 이름)가 관음보살을 우러러보고 있는 자세로 조그맣게 묘사되어 있다. 석장(錫杖 : 중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을 짚은 지장보살은 반가좌를 한 자세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지옥의 판관 및 선악동자(善惡童子) 등이 둘러 서 있다.

용(龍)이 등장한 바다에 솟은 수미산 정상의 도솔천궁은 최하단부의 청문대중과 연결된다. 전륜성왕(轉輪聖王)과 왕비, 대신과 그 부인, 동자 등의 청중(聽衆)은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 교화하는 용화회(龍華會)에 참여하기를 고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 가운데 연꽃을 엎어 놓은 듯한 천개(天蓋) 주위로 아사세(阿斤世)태자 및 위제희(韋提希)왕비, 천중, 타방불 등이 묘사되어 있다.

불상은 상투 모양 육계(肉鉅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 팽창된 둥근 얼굴에 가늘게 뜬 눈과 작은 입, 안정감 있는 신체 등에서 16세기 불화의 영향이 남아있다. 짙은 감색의 머리, 불신(佛身)의 금채(金彩), 금니(金泥)를 대용한 유려한 황색 필선(筆線), 붉은색과 녹색 및 금채의 조화, 광배의 연덩굴 문양은 화려하다. 특히 당시 유행된 불교신앙을 집약적으로 표출한 구성, 안정된 형태, 채색 등에서 걸작품에 속한다.

 

󰡐���미래의 용화회에서 따라 기뻐하는 자들은 모두 성불할 것이다󰡑���라는 발원문은 ≪법화경 法華經≫ 제16 〈수희공덕품 隨喜功德品〉의 글귀를 참고한 것이다. 이 괘불탱은 일본 십륜사(十輪寺)에 있는 오불회탱(五佛會幀 : 16세기 작)과 같이 삼신불을 중심으로하여 삼세불을 융합한 도상이다. 즉, 1628년 작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1710년 작 칠장사 삼불회괘불탱. 1684년 작 부석사 괘불탱(국립중앙박물관소장), 1745년 작 부석사 괘불탱은 3여래 이상의 존상이 도상화된 것으로, 한 사찰에서 괘불탱을 새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형된 형식이라고 하겠다. 괘불탱 등 거대한 크기의 조선후기불화는 공동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법형비구 1인이 그리는 경우는 흔하지않다. 법형비구는 1627년 충청남도 무량사 미륵불괘불탱에 수화사로 참여한 저명한 화승(畵僧)으로 추정된다.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에 있는 고려시대 탑비. 비신높이 227㎝, 너비 127㎝. 보물 제488호. 1060년(문종 14) 건립. 현재 비신과 귀부(龜趺)․이수(賂首)를 해체시켜놓았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에 양측면으로 상하로 길게 쌍룡을 새겨놓았는데, 중단에서 부러져 쓰러져 있으며 좌상부가 결실되었다.

그 밖에 심한 파손은 없고, 글자는 선명한 편이다. 김현(金顯)이 짓고 민상제(閔賞濟)가 쓰고 전액도 하였으며 각자는 배가성(裵可成)․이맹(李孟) 등이 하였다. 자경 2㎝의 해서이며 전액의 자경은 9㎝이다.

비문에는 국사의 이름은 정현(鼎賢), 속성은 이씨임과 10세에 광교사(光敎寺)에서 충회(忠會)에게 구법하고 17세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8세에 칙명에 의하여 대사가 되었으며 41세에 중대사(重大師), 60세가 넘어서는 승통(僧統)이 되었다. 1046년에 자수승가리일령(紫繡僧伽梨一領)과 금첩법의일령(錦貼法衣一領)이 하사되었고, 1054년 세수 83세, 승랍 74로 입멸하였다는 등 그의 행적을 적었고, 후미에는 대사를 기리는 명문이 있다.

 

 

 

칠장사 혜소국사비

 

자료와 안내는 역사학 연구소 금창영 강사님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출처 : 산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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