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의 가람과 전각
선오스님(통도사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
1. 불보종찰 통도사
(1) 불보사찰로서의 통도사
한국의 사찰은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성격과 특징 및 가람배치를 통하여 이 땅에 불법을 전파하고 있다. 특히 삼보사찰의 경우 이러한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통조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佛寶)사찰로,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法)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법보(法寶)사찰로,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래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했기 때문에 승보(僧寶)사찰로 이름나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불교의 요체인 불, 법, 승 삼보가 각 사찰에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의 특별히 강조되어 표현된 것이다.
통도사는 삼보 가운데 가장 으뜸인 불보(즉 부처님 진신사리)를 간직하고 있어 진정 불지종찰(불지종찰)이요, 국지대찰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금강계단(金剛戒壇)에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통도사는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사찰로 유명하다. 부처임의 진신인 사리가 대웅전 뒤쪽에 있는 금강계단에서 살아 숨쉬고 있어서 구태여 부처님의 형상[佛像]이 필요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자형(丁字形)법당 외부 사면에는 각각 다른 이름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즉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 남쪽은 금강계단,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씌여 있다.
(2) 통도사의 어원
해동의 이름난 명승지, 영축산 통도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5년(646)에 고승 자장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국내 제일 대가람(大伽藍)이다. 영축산이란 본래 부처님 재세시(在世時) 마가다국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그리드라(Gr_dhra : 鷲, 독수리)라는 산(봉우리)이었다. 본래 이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한 곳으로 유명하며 신선과 독수리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영축산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영축산에 통도사를 창건하게 된 것은 자장스님의 ‘부처님나라 만들기’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즉, 자장스님이 활동하였던 신라시대에, 이땅 신라는 과거부터 특별한 인연이 있어 이미 부처님과 인여을 맺어오던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자장스님의 원력으로 황룡사 구층탑이 건립되었고, 대국통에 오른 뒤 신라의 불국토설을 가시화하기 위하여 인도 영축산과 닮은 이곳에 통도사를 창건하기에 이르렀다.
신라에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일곱군데의 가람터가 있었다고 『삼국유사』흥법편 아도기라조(아도기라조)에 전해진다. 오대산과 금강산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법기보살(法起菩薩)이 거주하는 곳이라 하여 우리나라가 불법과 매우 인연이 깊은 땅임을 보여준다.
영축산 통도사에 있는 전각들과, 탑, 석등, 이것들과 어우러져 있는 자연, 그 속에서 불법을 꽃피운 위대한 고승들, 어느 하나 불연(佛緣)과 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산의 모양이 불법을 직접 설하신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 해서 통도사라 이름했다고 일컬어진다.
또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 는 의미에서 통도사라 했다한다. 이는 사찰의 근본 정신을 잘 말해주는 것으로 통도사는 계율(戒律)의 중심지로서 모든 승려들은 이곳에서 계(戒)를 받아야 산문(山門)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모든 진리를 회통하며 중생을 제도한다(萬通法度衆生)”의 의미를 통도(通度)라는 이상(理想)으로 표현한 탁월한 발상이었다. 보살은 자기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데 있지 않다. 깨달음을 향하여 진리의 세계로 나가는 동시에 고통받는 중생들과 함께하는 대비(大悲)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3) 통도사의 역사와 자장율사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15년(646)에 자장율사(590-658, 608-677?)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선덕여왕시대의 불교는 삼국통일의 정신적인 기틀을 마련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642년(선덕여왕 11), 신라는 백제로부터 공격을 받아 낙동강 유역까지 후퇴하여 나라의 존망에 까지 직면하였다. 이에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는 자장스님에게 소환을 명하여 이듬해, 자장스님은 당태종이 선사한 『대장경』일부를 가지고 신라에 돌아온다(643). 자장스님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의식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선덕여왕에게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정치를 제시한다. 대국통에 취임하여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운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중국유학 때 만난 오대산의 선인은 자장스님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그때의 감화를 귀국 후 그가 대국통에 취임하여 불교치국정책의 일환으로 시작하는, 신라의 ‘부처님나라 만들기’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탑을 조성하여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등, 곳곳에 신라의 땅이 과거에 부처님과 인연이 있었던 나라임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하였으며, 이곳 통도사도 창건하게 되었고 불국토인 신라를 중심으로 해서 삼국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과 신념에 찬 결단이었다. 이처럼 황룡사를 중심으로 한 신라불국토설과 오대산 문수신앙의 설정은 불교가 신라사회 곳곳에 정착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자장스님의 ‘신라과거 불국토사상’과 ‘가섭신앙’은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고 그의 한결같은 믿음으로 신라땅을 중심으로 삼국이 통일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들이 구도의 길로 접어들게 당나라에로의 유학이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이를 통하여 자장은 선덕여왕의 후원아래 구법의 길을 떠나 입당하여 귀국한 후, 통도사를 창건하였으며 당시 승려들이 기강을 바로잡은 율사(律師)로 이름나 있다. 자장의 탄생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원효(元曉)와 의상(義相)보다는 연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낭지화상은 자장보다 먼저 영축산의 반고사(磻高寺)에 머물면서 주로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했으며 『화엄경(華嚴經)』에도 밝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낭지승운조(朗智乘雲條)에 의하면 그는 중국의 화엄도량인 청량산(淸凉山 : 五臺山)에 구름을 타고 가서 강의를 들었다 한다. 그는 사미시절의 원효를 지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자장도 또한 낭지와 같은 동년배로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낭지와 교류하였으리라 본다. 원효스님이 낭지를 자주 찾아 불학의 의문점을 묻고 토론하였다고 한다.
자장은 태생은 진골(眞骨)출신인 소판(蘇判) 김무림(金茂林)의 늦게 둔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국가의 중요한 관직을 지냈으나 자녀가 없으므로 삼보에 귀의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에게 자식을 두게 해달라며 “만일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불교의 지도자로 만들겠습니다.” 하는 축원 끝에, 그의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품안에 들어오더니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었다. 이후 석존과 같은 날에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심지(心志)가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장과 생각이 날로 풍부하여져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인세(人世)의 무상함을 실감한 나머지 논밭과 집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란 절을 짓고 홀로 깊은 산속에서 숨어 살면서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고골관이란 백골관(白骨觀)이라 부르는데 시체가 썩어서 백골로 화하는 모습을 관(觀)하는 것이다 그의 피나는 고행 수행은 계속되었으나 당시이 정계는 왕족인 진골출신의 외아들이며 재간과 지혜를 겸비한 자장을 산속에서 수도하게끔 내버려 두지 않았다. 왕은 드디어 조정 대신(大臣)의 자리가 비어 관례대로 율사(律師)가 문벌(門閥)로서 결정되어 여러 번 불리게 되었으나 나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왕은 칙령을 내려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다. 그때 칙사에게 준 자장의 답변은 단호하였다.
“나는 차라리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파계(破戒)를 하고 백년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指戒而死, 不願白年破戒而生).”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왕은 자장의 결심에 감동하여 다시는 그의 수도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항상 한가닥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의 신라에서는 불법을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음이다. 드디어 그는 선덕여왕 5년(636)에 칙명을 받아 문인(門人) 실(實)등 10여 명과 함께 입당(入唐)하여 청량(淸凉山 : 一名 五臺山)으로 갔다. 스님이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 명상하다 꿈에 문수보살이 범어(梵語)로 된 게송을 주었는데 해득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이상한 스님이 와서 해석하되 “일체법(一切法)을 다 알면, 자성(自性)이 있는바 없으니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알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하고, 또 말하기를 “비록 만교(萬敎)를 배운다 할지라도 아직 이보다 나은 글이 없다” 하며 가사(袈裟)와 사리(舍利) 등을 주고 살아졌다.
이후 자장은 더욱 수행을 깊이하여 유학한 지 7년 만인 643년에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그를 궁중으로 초청하여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강의하도록 했으며 또 황룡사(皇龍寺)에서 7일 주야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해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안개가 자욱이 끼어 강당을 덮었다 한다.
율사는 신라 최고 승직(僧職)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어 유신들의 국법을 통제하고 반월(半月)마다 계를 설하였다. 그리하여 비단 승려들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이면 여덟, 아홉집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僧)이 되고자 하는 이가 해마다 늘어났다.
그래서 자장은 646년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계를 주었다. 이렇듯 통도사 창건은 자장은 피나는 구법(求法)노력의 결과이며, 거기에는 철저한 자장의 계율정신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자장은 경(經)과 논(論)에 능한 논사(論師)로 불리기 보다는 율(律)에 능한 율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며, 신라의 불교계를 새롭게 정비하였던 것이다.
통도사의 사격(寺格)은 신라시대에는 계율 근본도량이 되어 수사찰(首寺刹)의 위치에 있었으며, 또 고려을 지나 조선초기에는 나라에서 각 사찰을 기도장소로 지정할 때 수위사찰(首位寺刹)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당시 정부에서 관리서(管理署)를 두어 전국 16개 수사찰(首寺刹)을 정할 당시 경상남도의 수사찰(首寺刹)로 되었고, 또 전국에 본산을 정할 때에도 선교양종(禪敎兩宗) 대 본산(本山)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이 모두가 자장율사의 불사리 봉안에 따른 불보사찰(佛寶寺刹)에 연유함이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로 경남불교를 이끌고 있으며 자장율사의 창사(創寺)정신을 계승하는 ‘영축총림’으로서 한국불교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다.
(4) 금강계단의 역사와 사리신앙
통도사 창건의 기본정신은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있다. 이 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며 창사후 가장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통도사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통도사의 변화에 대해 기술하기보다는 바로 금강계단의 변천과 그 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통도사 창건은 금강계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에 의하면 “선덕왕때인 정관(貞觀) 12년 계묘년(癸卯, 643)에 자장법사가 당에서 모시고 온 불두골(佛頭骨), 불치(佛齒), 불사리(佛舍利) 100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를 3분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며”라고 하였으며 기타는 소재가 자세치 않다. 계단은 2층으로 상층(上層) 가운데에는 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석개(石蓋)를 안치하였다.
이는 곧 통도사의 불사리 금강계단과 함께 부처님의 친착가사(親着袈裟) 봉안 사실을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의 고지(故地)는 축서산이라는 산명을 지닌 태산(太山) 아래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던 못이었다. 창건주 자장율사는 이들 용을 교화하여 여덟 마리를 승천(昇天)케 하고 그 신지(神池)를 메워 금강계단을 쌓아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자장이 당나라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除寺)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은 승려로 화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 알, 불두골(佛頭骨)과 손가락뼈(指節),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말했다.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 될 것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취서산(鷲栖山 : 영축산의 옛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을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느니라.”
자장은 귀국하여 선덕여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서 독룡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였다. 그런 뒤 자장은 못을 메우고 그위에 계단을 쌓았다.
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통도사가 창건되기 이전의 그 땅은 매우 큰 연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경내 바닥에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는데 이것을 열어보면 1m 아래에 물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속전(俗傳)에는 자장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자장은 그 용이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용을 머물도록 했다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너댓 평의 넓이데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가) 금강계단의 의미
연못을 메우고 선 금강계단은 대웅전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성지(聖地)이며 가람배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실로 통도사는 이 금강계단이 있음으로 해서 삼보 사찰 가운데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불보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금강계단의 금강이라는 말은 금강석(金剛石), 곧 다이아몬드를 의미한다. 어떤 물건이라도 금강석을 깨뜨릴 수 없지만 금강석은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다. 그래서 불경(佛經)에서는 이러한 금강석의 강인한 특징을 반야(般若)의 지혜를 표시하는 은유로 써왔다. 곧 반야의 지혜로 모든 번뇌, 망상과 미혹의 뿌리를 끊어 버리므로 그 반야의 지혜가 금강석과 같다는 말이다. 반야의 지혜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완성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이 삼학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은 계율의 실천에 있다. 계율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지 않고서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계율이란 그릇과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깨질 우려가 항상있다. 그래서 계의 그릇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삼학의 결정체이며 반야의 물전 화현(化現)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며 그 사리를 모신 계단은 금강계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앞서도 말했듯이 자장은 당나라에 유학하기 이전에 철저한 계율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를 하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는 그의 철저한 계율의 정신은 문수보살로부터 사리와 가사를 받은 사실로 나타났고 이 불신(佛身)이 통도사 계단에 안치됨으로써 통도사는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일은 부처님에게서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므로 통도사는 계율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오늘에 와서도 그 금강계단은 승려들의 유일한 정통을 잇는 수계(受戒)의 장소로 되어왔다.
불법에 귀의함에 있어서 첫째 요건은 계율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래서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불문(佛門)에 들어서기 위해서 비구는 250까지 계율인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하고 재가신도는 오계(五戒)를 받으므로써 참다운 불자(佛子)로서의 일보를 걷게 되는 것이다. 비단 출가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일상 생활에는 항상 계율을 지키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그래서 승려는 승려대로 청정한 모습으로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하며 재가신도는 그 나름대로 철저한 윤리의식 속에 이 사회를 정토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계율이 단순한 금계(禁戒)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겠다 하는 보살계(菩薩戒)로 확산될 때 대승불교의 참된 이상(理想)이 이땅에 펼쳐지리라고 본다. 이것이 바로 자장율사가 이땅에 금강계단을 설치한 참된 의미이다.
이제 금강계단의 초창과 중건사실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
년 대 |
화 주 |
비 고 |
초 창 |
신라 선덕왕 15년(646) |
자장율사(慈裝律師) |
삼국유사(三國遺事) |
제 1 중수 |
고려 우왕 5년(1379) |
월송대사(月松大師) |
목은이새기(牧隱李塞記) |
제 2 중수 |
조선 선조 30년(1603) |
의영대사(儀靈大師) |
송운사명기(松雲四溟記) |
제 3 중수 |
조선 효종 3년 (1652) |
정인대사(淨仁大師) |
우운진희기(友雲眞凞記) |
제 4 중수 |
조선 숙종 31년(1705) |
규파대사(袿坡大師) |
민오기(敏悟記) |
제 5 중수 |
조선 영조 19년(1743) |
산중대덕(山中大德) |
서석인기(徐錫麟記) |
제 6 중수 |
조선 순조 23년(1823) |
홍명대사(鴻溟大師) |
계오기(戒悟記) |
제 7 중수 |
서기 1911 |
구하선사(九河禪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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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고려시대의 금강계단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초에 사리와 가사를 덮은 석종이 개봉된 사실이 있었다. 곧 민간에 유포된 당시의 이야기로는 고려초의 관직을 뜻하는 안렴사(按濂寺)가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에 예를 표한 뒤 돌뚜껑을 들어내고 사리를 들여다 보니 처음으로 긴 구렁이가 사리를 보관한 석함(石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뒤로는 감히 돌뚜껑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때인 광종 22년(1235)에 상장군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내고 예를 표했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공(庾公)이 마침 갖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이 기록은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된 최초의 예가 된다.
1264년 원나라 사신들과 여러 사람들이 와서 그 돌함에 예배드리고 사방의 운수승(雲水僧)들이 몰려와서 예참했다 한다.
또한 원나라에 머물던 인도의 지공(指空) 스님은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참배하는 것과 금강계단의 사리와 가사에 참배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는 1326년 고려에 와서 금강산에 머물면서 계를 설하고,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을 참배하여 가사와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공덕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지공은 고려에 들어올 때 『문수사리무생계경(文殊師利無生戒經)』을 가져왔다. 하는데 이와 동일한 경전으로 생각되는 『문수사리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最上乘無生經)』목판본이 통도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무생계경』이란 “모든 중생이 유무(有無)와 성상(性相)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하면 일체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법리(法理)를 증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지공은 나옹 혜근(懶翁惠勤)에게 영향을 주어 침체되어 가는 고려불교에 활력을 주었다. 그들 사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최상승무생계법(最上乘無生戒法)’은 공(空)의 입장에서 계를 바라보는 것으로 반야의 이치에 따라 공의 도리를 체득하여 걸림이 없는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다.
1377년과 1378년에 와서 계단은 큰 수난을 받게 되었다.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틈을 타 동해변에 왜적이 침탈이 빈번해질 때였다. 당시의 통도사 주지였던 월송(月松) 대사는 우왕 3년(1377)에 왜적이 내침하여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다가 다시 1379년 왜적이 사리를 침탈하려고 했을 때 사리를 가지고 통도사를 빠져나와 서울까지 올라와야 했다.
다) 조선시대의 금강계단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금강계단은 또다시 왜적에 의해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왜적은 계단을 파괴하고 사리와 영골(靈骨)을 탈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히도 부산 동래에 사는 백옥(白玉)거사가 왜인의 포로로 잡혔다가 그 사리와 영골을 가지고 도망쳐 나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선조 36년(1603)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은 왜적의 침탈을 염려하여 사리를 크고 작은 두 개의 함에 넣어 은사이신 금강산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에게 보냈다. 그러나 휴정스님은 “영남이 침해 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동해변에 있는 이곳 금강산도 안전하지 못하다. 영축산은 문수보살께서 친히 계단을 설치하라고 부촉한 장소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믿음의 보배인 사리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터를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라”고 하면서 한 함은 돌려 보내고 나머지함은 태백산(太白山) 갈반사(葛盤寺)에 봉안하게 했다. 이 갈반사는 오늘날의 정암사(淨岩寺)로 추정되는데, 이도 역시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사명대사는 휴정대사의 명을 받고 계단을 수리하여 사리를 안치하였다. 그 뒤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으로 전해오기까지 금강계단은 계율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해 왔다. 그 가운데 경봉스님은 아직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대선사이다. 그는 1927년 통도사의 13개 암자 가운데 선원(禪院)으로 유명한 극락암(極樂庵)에서 대오(大悟)하였다. 그 뒤로 스님은 그의 문하(門下)로 찾아오는 수많은 선승들을 지도하여 극락선원을 명실공히 한국에서 제일가는 선실(禪室)로 만들었다. 스님은 수행승이나 불교학자들에게는 엄격했지만 모든 자에게는 자상하여 공경을 받는 통도사가 낳은 위대한 선사였다.
라) 사리신앙
사리는 불자가 존중하는 신앙(信仰)의 대상이다. 이 사리는 옛적부터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성취(成就)했을 때 나타나는 결정체라고 한다.
「통도사 사적기(通度寺 事蹟記)」사리영이편(舍利靈異篇)에 보면 사리의 영이함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첫째는 사부대중(四部大衆) 가운데 어느 누구든지 사리(舍利)를 첨례(瞻禮)하고 공양할 때에는 먼저 다섯 가지 법신(法身)의 향기가 산내에 드높아 내원(內院)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향기를 맡고 감탄하는 일이다.
둘째는 인연의 유무를 따라서 사리가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 빛나면서 수정통(水晶筒) 가운데 붙어서 나오지 아니하며 혹은 절반만 있고 절반은 없으며 혹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때로는 순금색(純金色)이거나 또 순옥색(純玉色)이며 절반은 금이며 절반은 옥이며 또 크고 작음과 숨고 나타남이 같지 아니한 것이다.
셋째는 사람들이 첨례할 때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도 하며 우천(雨天)이 홀연히 개기도 하며 검은 구름이 깔리고 우레 소리를 내며 폭풍이 갑자기 비를 내려 수목(樹木)을 쓰러뜨리기도 하여 그 길흉(吉凶)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넷째는 사람들이 첨례하기 위하여 동구(洞口)로 들어올 때면 계단 석종(石鍾)위에서 먼저 오색광명(五色光明)이 크게 천지(天地)를 비춰 훤히 산과 골짜기를 밝히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람들이 첨례(瞻禮)하여 향과 초를 태워 여러 가지로 공양하고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면 계단(戒壇)의 반상에 변신사리(變身舍利)가 모래알처럼 무수히 나타나는 것이다.
여섯째는 사리를 첨례하려는 사람이 몸과 마음이 부정(不淨)하여 하심(下心)하지 못하고 원문(院門)을 소란스럽게 하면 일원중(一院中)에 먼저 비우를 상하는 고약한 냄새가 나서 그 사람이 곧 광란(狂亂)하여 땅에 쓰러져 귀신의 말을 지껄이다가 결국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는 금강계단 석종 부도의 여의주석 반석 아래 움푹 파인 곳에 항상 물이 가득 차 있고 그 가운데 한 쌍의 푸른 달팽이가 매양 붙어 있는데 석종을 들 때 사람이 보면 사방으로 흩어져 간 곳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잠깐 사이에 들어와서 전과 같이 있는 것이 사시(四時)에 끊어지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여 항상 붙어 있으면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금강계단 위로는 모든 날 짐승이 그 가운데를 날아가지 아니하고 또 그 위에 오줌과 똥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덟가지로 사리에 대한 신령(神靈)스러움과 길흉변동(吉凶變動)을 사적기(事蹟記) 사리영이편(舍利靈異篇)에 기록(記錄)하고 있다.
통도사에서는 이런 사적기(事蹟記) 기록 못지않게 지금도 간혹 사리탑 계단에서는 밤중에 광명이 뻗어 올라 대낮처럼 밝아 대중이 깨어나서 첨례하는 일이 있으며 그럴때면 멀리 양산(梁山)에서는 통도사에 화재가 생겼다고 야단들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상노전(上爐殿)의 스님들이 혹시 예불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면 종소리와 목탁소리가 들리게 되니 이는 불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寂滅寶宮)만이 갖는 특별한 영이(靈異)로움이라 하겠다.
2. 상로전(上爐殿)의 전각(殿閣)
(1) 대웅전(大雄殿)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소재. 통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건물이다. 현재 국가 지정 국보 제290호로 보호받고 있다. 이 법당은 통도사의 중심건물로서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인데 특히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행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전면 쪽에는 동향한 3칸 방향 평면의 건물이 있고 뒤쪽에는 남향의 3칸, 2칸 정방형 평면의 건물이 전면 쪽 건물에 붙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기둥의 배치에서 곧바로 알 수 있으며 지붕모양을 보고서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형식을 보면 지대석(地代石), 면석(面石), 갑석(甲石) 등을 조립한 가구식(架構式) 기단이며 석계(石階)의 배치는 원래부터 현존의 건물과 같은 평면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단의 위치를 보아도 평면이 합성(合成)형식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불당은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 불당은 배전(拜殿)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당 앞에 진신사리를 모셨다. 불당 내부에는 불쪽에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건물 구조형식을 보면 공포(栱包)는 다포식으로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칠포작(七包作)이다. 외부는 모두 쇠서 모양으로 되고 내부는 교두(翹頭)모양으로 되었다.
가구는 일고주(一高柱) 구량가(九樑架) 형식으로 하여 대량, 중종량, 종량이 지붕구조를 받도록 되었다. 천정(天井)은 우물천정인데 층급(層級)을 두어 중심부를 가장 높게 차지하였고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지붕은 팔작지붕의 복합형인 정(丁)자 형인데 정면과 양측면에 박공(朴工) 부분이 보이게 하여 특이하며 기와 가운데에는 철제(철제)기와도 올려져 있어 보통 건물이 아니었음을 짐작게 한다. 지붕 정상에는 청동제(靑銅製) 보주(寶珠)가 있는데 직경 약 70㎝에 달하는 이 보주의 윗부분에는 다시 높이 50㎝ 가량의 길다란 철주(鐵柱)를 설치해 놓았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수 없으나 대웅전 중건 당시의 유물로 짐작된다.
이를 가리켜 통칭 찰간대(刹竿臺)라 하며 이는 대찰 또는 부처님의 연궁(蓮宮)을 뜻하는 상징물이다. 즉 불탐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천(佛天)의 하강(下降)을 나타내는 조형물(造形物)이라 하겠다. 그리고 지붕의 막새기와 상부에는 자기(磁器) 연봉장식이 있어 불사리 계단의 보궁 장엄에 온갖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대웅전에는 건물의 4면에 편액을 걸었는데 동쪽이 적멸보궁(寂滅寶宮), 서쪽이 대웅전(大雄殿), 남쪽이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 했다. 이 불당은 조선 중기 불당 건축의 특수형으로 불당연구 및 목조건축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대웅전의 내부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이룩되었으며 이들은 목단, 국화문 등을 조각한 위에 단청(丹靑)하여 매우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같은 목조조각은 전면 불단의 초자(草子)에도 매우 화려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곧 조선시대 목조 공예의 진수를 나타내고 있다.
건물의 크기는 남북이 15.8m, 동서가 10.1m이며 동쪽 대웅전 현판 아래 두 장의 꽃살문 역시 조각이 우아하다. 연화문, 옥단문, 국화문 등을 새겨 문살을 장식하였다.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버팀기둥, 즉 우주를 놓아 추녀의 하중을 지탱하도록 하였으며 외양(外樣) 역시 조화를 잘 이룬 뛰어난 목조물이다.
(2) 응진전(應眞殿)
대웅전 바로 앞에 있는 불전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
응진전은 대웅전 서남쪽 동향한 불전으로 1677년(숙종 3)에 지섬대사(지섬대사)가 창건하였다 전한다. 현존의 건물은 원래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형식은 정면 3칸, 특면 3칸의 주심포식(柱心包式) 맞배집으로 비교적 간결하지만 지대석(地帶石), 면석(面石), 갑석(甲石)을 갖춘 고식의 기단 위에 동향(東向)하여 있다. 공포(栱包)는 기둥 위에만 짜여져 주심포식을 취하고 있고, 제공(諸貢)은 쇠서를 갖춘 다포식(多包式)의 모양을 하여 절충식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주심포 형식으로 된 공포는 다포식을 많이 수용한 절충식이다.
불당 내부에는 중앙에 석가여래와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提華褐羅)가 동쪽으로 향하여 봉안되었고 그 주변에는 16나한상과 범천 및 제석천왕상을 좌우에 모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과 함께 16제자상을 봉안한 셈이다. 곧 미륵보살은 석가여래의 일생보처(一生補處 : 다음생에 성불하여 부처님이 될 보살)이고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이기 때문이다.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나한이 범어(梵語)의 아라하트(Arahat)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으로서 그 뜻은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수행이 있다는 뜻인 ‘응공(應供)’ 또는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친다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항상 추종하던 상수제자(上首弟子)는 1,250인으로 불경(佛經)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제자가 16나한이다. 그러므로 16나한을 봉안한 법당을 나한전(羅漢殿), 응진전(應眞殿), 또는 십육성전(十六聖殿)이라고도 하나 모두 같은 의미이다. 물론 부처님의 가장 대표적인 제자를 더 줄여서 말할 때는 십대제자를 들기도 하지만 나한전에 봉안되는 제자상은 십육나한(十六羅漢)이 보편적이다. 대체로 나한은 삼승(三乘), 즉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가운데서 부처님으로부터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사제의 법문(法門)을 듣고 진리를 깨친 분이다. 연각이 12인연의 도리를 스스로 깨쳐 독각이란 칭호를 듣는 데 비하여, 부처님의 진리의 법문을 듣고서 깨친 것이 다르다. 다시 말하면 보살승(菩薩乘)이 중생구제의 서원을 지닌 이타행을 본업(本業)으로 하는 대승임에 비하여,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은 자기(自己)의 수행이나 구원이 위주되는 자리(自利)를 근본으로 하므로 이를 소승(小乘)이라 말하게 된다.
그러나 아라한(阿羅漢) 역시 부처님의 사제법문(四諦法門)을 듣고 정신수행(精進修行)하여 아집(我執)과 번뇌를 끊어 생사(生死)를 초탈(超脫)한 성자(聖者)이다. 이들 16나한(羅漢)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의 유촉을 받고 영원히 이 세사에 계시면서 중생의 복전(福田)이 되어 불법(佛法)을 옹호하는 불제자(佛弟子)로 신앙된다.
(3) 명부전(冥府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명부전은 대웅전의 동남쪽에 서향(西向)하고 있다. 창건연대는 1369년(공민황 18)이라 전해내려오고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통도사사적비(通度寺事蹟碑)」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 춘파대사(春坡大師)에 의해 개건(改建)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87년(고종 24) 화재가 발생하여 다음해인 1888년 (고종 25) 호성대사(虎星大師)가 중건한 것으로 범종루상(梵鍾樓上)의 「명부전중수기(冥府殿重修記)」에 의하면 “1887년(고종 24)봄에 감로당에서 실화로 원통방(圓通房), 화엄전(華嚴殿)과 더불어 명부전이 회록(回祿)되매, 다음날 보집원(普集院)에 대중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방료(房寮)의 회복이 하루라도 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저승에서 제도받을 중생들이 노좌(露坐)하여 있는 것을 어찌하겠는가’하였다. 이때에 장로(長老) 호성화상(虎性和尙)들이 주관하여 산내(山內)의 18개의 방사 및 암자에서 시주받고 표충사 등 9개처의 타사(他寺)와 전 승통(僧統) 문우대사(文佑大師), 정일화상(定日和尙) 등 수많은 도속(道俗)의 희사(喜捨)로써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모두 마쳤다. 그로부터 애석하게도 호성화상이 입적하였다”라 하고 있다. 이 기문(記文)은 광서(光緖) 16년경인 8월 화주(化主) 영해대사(永海大師)의 기록인데 전당(殿堂)이 소실된 지 3년 후의 기록이다.
현재의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평면(長方形平面)으로 양측칸 2칸씩 별동공간(別途空間)으로 되어 있는 건축양식상 다포식 팔작(多包式八作)지붕으로서 특별한 특징은 없으나 19세기말의 명부전 양식을 나타내주는 한 예로서 문화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 법당 내부의 중앙에는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을 비롯하여 십대왕(十大王)을 봉안(奉安)하였고 시왕(十王)의 탱화(幀畵)를 모셨으나 탱화는 경내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 명부전의 ‘명부(冥府)’라는 말은 저승, 곧 지옥세계를 의미한다. 즉 세상에서 무자비한 살생을 하거나, 도적질, 사음(邪淫), 망어(妄語) 등 온갖 나쁜짓을 하면 사후 명부의 십대왕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삼악도(三惡途 : 지옥, 아귀, 축생)로 보내고 또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천상이나 인간세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지장보살은 지옥의 문전에서 언제나 눈물을 흘리면서 지옥으로 오는 중생들을 교화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일명 명부전을 지장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명부의 주인이 지장보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명부전의 경우 시왕탱화가 이 전각(殿閣)의 성격을 잘 나타내 준다. 즉 각 대왕의 주변에는 죄인의 죄목을 살피고 있는 여러 대신(大臣)들의 모습이 있고, 그 아래에는 죄인들이 고통받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4)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대웅전 서편 구룡지(九龍池) 옆에 위치한 규모가 작은 법당이다. 삼성각의 초창은 고종 7년(1870) 영인대사(靈印大師)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나 현 건물은 1935년 본사 경봉노사(鏡峰老師)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이 건물 형식은 정면 3칸, 측면 단칸의 작은 건물로 주심포계 익공식(翼工式) 맞배집이다. 전면 3칸은 모두 4분합문을 설치하고 전칸을 개방하였다. 건물내부에는 중앙에 삼성탱을 안치하고 그 오른쪽에는 칠성탱(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이는 주군으로 인간의 복과 명을 맡고 있다), 왼쪽에는 독성탱(독성은 나반존자라고도 하는데 12인연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 성인의 지휘에 올라 독성이라 한다)을 안치시켜 복합적 기능의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에는 삼성의 추앙 말고도 인간의 수복(壽福)과 이치를 깨달을 기원하는 법당의 구실도 한다.
삼성(三聖)은 고려말(高麗末)의 고승(高僧)이었던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삼화상(三和尙)을 지칭하는데 지공은 인도로부터 우리나라에 온 범승(梵僧)으로서 당시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지공스님과 통도사와의 연관은 밀접하다. 즉 지공스님은 고려말 충선왕대(忠宣王代)에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와서 불교를 전파하였는데 그둥에서도 통도사에 와서 부처님의 가사(袈裟)를 친견(親見)하고 사리계단(舍利戒壇)을 참배한 후 등단설법(登壇說法)하는 등 통도사에서 성대한 법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나옹스님은 고려말의 이름높은 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무학 역시 고려 말기 태조(太祖)의 왕사(王師)로서 조선(朝鮮) 건국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고승이다. 이 아담한 법당에 세분의 고승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고려 이래 존중받는 고승으로서 추앙되고 있다.
(5) 산령각(山靈閣)
산령각(산신각)은 삼성각의 동북쪽에 거의 붙어 있다. 정면과 측면이 단칸으로 남향하고 있는 아주 작은 건물로 맞배집이다. 처음의 건립은 영조 37년(1761)이며 哲宗代 : 1850 - 1863)에 중수(重修)를 거쳣으나 현 건물은 1986년에 소실되었다가 당시 주지 원명(圓明)화상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그래서 최근의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특징은 없다. 건물 내부에는 일반적으로 산신탱을 안치하였다. 산신은 옆에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어 산신(山神)과 호랑이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1600여 년이 흐르면서 불교는 토속신앙(土俗信仰)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예가 바로 사찰(寺刹)안의 산신각이나 칠성각(七星閣) 등이다. 산신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산악신앙(산악신앙)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서 산속에 위치하는 사찰의 일각에서는 별도로 산신각을 지어 신앙하게 된다. 통도사에는 일종의 호랑이 혈맥(血脈)이라 할 수 있는 호혈(虎血)이 있다 하여 사내(寺內) 두 곳에 이를 진합할 호혈석(虎血石)을 배치하고 있는 것도 산악신앙과 함께 흥미로운 일이다. 이 호혈석은 현재도 응진전 바로 옆 남쪽과 하로전(下爐殿)의 극락전(極樂殿) 옆에 위치한다. 이처럼 산신은 산악숭배사상(山岳崇拜思想)에서 나왔고 칠성(七星)은 도교신앙과 관련이 깊은데 이러한 것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조선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殿)이란 명칭을 쓰지 않고 대개 각(閣)이란 명칭을 쓰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와 토속신앙이 융합되어 있는 좋은 예(例)라 할 수 있다.
(6) 일로향각(一爐香閣)
이 건물은 상로전(上爐殿)을 관리하는 노전(爐殿) 건물로 대웅전(大雄殿)과 응진전(應眞殿)의 남쪽에 위치한다. 원래는 1757년(영조 33)에 범음대사(범음대사)가 창건(創建)하였다고 전하며 현재의 건물은 1968년 청하화상(淸霞和尙)이 그 자리에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정면(正面) 8칸, 측면(側面) 3칸으로 남향(南向)한 팔작(八作)집이며 전면(全面)에 툇마루를 두고 서쪽 끝 2칸은 마루, 동쪽 끝 3칸은 부엌, 나머지 공간(空間)은 단칸(單間), 2칸,4칸의 크고 작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초창시기(初創時期)의 건물은 어떠하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고방(庫房)이 있었다고 하며 이 고방(庫房)에는 향목(香木)을 쌓아 두고 불전(佛前) 공양(供養)을 지을 때 이 나무를 사용하였다고 전하므로 부처님 공양은 향나무로 쌓았던 노전(爐殿)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설법전 자리에 있던 것을 설법전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주지실채로 쓰이고 있으며, 예전의 주지실채를 옮겨 응진전과 나란히 하여 일로향각으로 쓰이고 있다.
3. 중로전(中爐殿)의 전각(殿閣)
(1) 대광명전(大光明殿)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94호
이 불전(佛殿)은 중로전(中爐殿)의 중심건물로 대웅전(大雄殿) 서북쪽에 위치(位置)하며 건물의 규모나 목재 또는 가구수법(架構手法)이 대웅전 다음가는 우수한 건물이라 하겠다. 대광명전 앞에는 전향각(篆香閣), 장경각(藏經閣), 개산조당(開山祖堂), 세존비각(世尊碑閣) 등이 있고 이들 건물 앞에 5층석탑이 있다.
대광명전(大光明殿) 사전(寺傳)에 의하면 1725년 영조 원년에 축환대사(竺環大師)가 중수하였다고 하나 실제 건립연대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특면 3칸의 다포식(多包式) 팔작(八作)집으로 내부에는 뒤쪽에 고주(高柱)가 세워져 있으며 비로자나불을 안치하고 있다. 비로자나(vairocana)는 광명변조(光明變造)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불전을 대광명전이라 했다. 즉 법계의 진리와 일치하는 이불(理佛)로서 우주의 본체를 상징하는 법신불(法身佛)이다. 비로자나불상의 뒷편에는 삼신후불탱화 3폭이 있었으나 좌우의 탱화는 박물관으로 이전되었고 중앙의 법신탱만 걸려 있다. 탱화는 화기(畵記)에 의하면 “건융이십기묘 칠월일 양산북취서산 통도사 대광명전법신탱(乾隆二十己卯 七月日 梁山鷲栖山 通度寺 大光明殿法身幀).....”이라 하였으므로 그 조성이 영조(英祖) 35(1759)임을 알 수 있다. 흔히 비로자나불을 모셨을 때 비로전(毘盧殿)이라 편액하기도 한다.
건물은 비교적 견실(堅實)하며 조선 중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막돌을 바른 층쌓기 하고 상부에 장대석으로 갑석(甲石)을 만든 기단(基壇)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약한 내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웃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고 이 위에 기둥사이에도 놓은 다포식(多包式)을 이루고 있다. 다포식 공포의 짜임은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제공(諸貢)위에 놓이는 살미첨자의 끝은 강직한 앙서로 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판형(板形)으로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정면(正面) 어간(御間) 양측의 기둥머리에 용머리(龍頭)를 조각하여 꽂아놓은 것은 내공포(內栱包)의 판형(板形)이나, 연꽃봉오리 조각의 장식성 등이 조선 중기 이후의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수법이다. 가구(架構)는 후면 내진(內陣)에 세운 고주(高柱)와 전면 평주(平柱)에 대들보[大樑]를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梁]를 걸었으며 우물 천정을 가설하여 천정 속을 가리고 있다. 정면의 각 주간(柱間)에는 아름다운 빗살창호를 달고 측면에는 정자살창호를 두 짝 달았다.
대광명전 내부에는 외부와 달리 단청(丹靑)과 벽화가 잘 보존되어 산수화풍(山水畵風)으로 전개된 그림을 위시하여 건물의 불벽(佛壁)사이에도 승상(僧像)과 동자상(童子像) 등 인물상을 등장시켜 불경과 관계되는 도화적(道話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법당 내부의 굴도리 상부도서(上部東西) 2개소에는 다음과 같은 묵화가 있어 주목된다.
오가유일객(吾家有一客) 정시해중인(定是海中人)
구타천장수(口呑天장水) 능살화정신(能殺火精神)
이는 건물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방화부적(防火符籍)으로 생각된다. 법당 내외에 조각된 목조비룡(木造飛龍)의 모습이 사실적인데 이는 조선시대에 발달된 목조공예의 수법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것이다.
(2) 용화전(龍華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용화전은 대광명전과 관음전 사이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1369년(공민왕 18)에 초창되었으나 당시 창건주는 알 수 없으며 현재의 건물은 1725년(영조 元年)에 청성대사(淸性大師)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건물 안에는 약 2미터 정도의 미륵불좌상을 봉안하였다. 이 미륵불은 석가모니 다음에 출현하실 미래불(未來佛)이다. 그 부처님의 탄생하실 곳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이고 또 설법회상(說法會上)을 용화회상(龍華會上)이라 하므로 법당의 명칭을 용화전이라 하였다. 석가모니의 설법회상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함에 비하여 이는 미래불의 용화회상을 뜻하는 법당임을 알게 한다. 즉 미륵불로서 출현하기 전까지는 미륵보살이란 칭호를 받는 석가모니의 일생보처(一生補處)로서 석가모니의 출현으로부터 56억 7천만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흐르고 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실 부처님이다.
이 용화전 앞에는 약 2미터 높이의 발우(鉢盂)모양의 석조봉발(石造奉鉢)이 있다. 이를 봉발탑(보물 제471호)이라고 하며 이는 탑이 아니고 발우이다. 이 석조물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하대석(下臺石)을 놓고 그 위에 부등형(不等形) 8각 간석(竿石)을 세우고 간석 위에 상대석(上臺石)을 놓았으며 그 위에 뚜껑을 갖춘 발(鉢)을 올려 놓았다. 얼핏 보기에는 석등(石燈)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석등의 화사석(火舍石) 위치에 발이 놓여 있어 특이하다. 이 석조 봉발은 “석가모니의 발우(鉢盂)를 미래세(未來世)에 출현하실 미륵불에게 드리기 위해 부처님의 상수제자(上首弟子)인 가섭존자(伽葉尊者)가 발우와 함께 가사(袈裟)를 가지고 인도의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기다리고 있다”는 불경의 내용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석조 발우는 꼭 같지는 않지만 보은(報恩)의 법주사(法主寺)경내의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이 머리에 이고 있는 석조발과 같은 형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법주사의 봉발도 원래는 용화전 앞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개산조당(開山祖堂)과 해장보각(海藏寶閣)
개산조당은 용화전 옆 서쪽에 위치한다.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아담한 전각이다. 전각 정면에 개산조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솟을문은 해장보각의 조사문으로서 ‘솟을삼문’형식이며 해장보궁(海藏寶宮)으로 통하는 문의 3칸 건물인데 중앙칸이 양 측면칸보다 높게 솟아 ‘솟을삼문’이라고도 한다. 3칸 모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건물형식은 조선시대 말기의 수법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당(祠堂)의 솟을삼문과 같다.
이 건물의 창건은 영조 3년(1727)이고 그후 고종 4년(1900)에 고산대사(古山大師)가 중수하였다.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해장보각은 정면 3칸, 특면 2칸의 맞배집으로 앞쪽에 툇간을 달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내부 앞쪽에 내진(內陣 : 안두리)기둥이 배치되어 있다.
이 집을 해장보각이라고 한 것은 불경의 보관처를 용궁(龍宮)에 두기도 하고 또 대장경(大藏經)진리의 내용이 바다 속의 수많은 보배에 비유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용궁보각(龍宮寶閣)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자장스님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을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고 한 것은 『삼국유사』에 이미 기록된 바와 같이 자장스님이 중국으로부터 가지고 온 대장경을 통도사에 봉안하였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으로보인다. 즉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율사가 삼장(三藏 : 經藏, 律藏, 論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가 국내 최초의 대장경 봉안하였다.”(삼국유사(『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조)고 한 내용은 이미 삼국시대에 통도사가 국내 최초의 대장경 봉안(奉安) 사찰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 대장경이 다른 사람 아닌 창건주(創建主) 자장율사에 의하여 봉안되었던 사실을 감안하여 그 영각(影閣)에 들어오는 문을 개산조당이라 하였고, 영각 자체를 해장보각이라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해장보각 내부에는 자장율사 진영 주변에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1,234권을 봉안해 놓았다.
자장율사의 영정은 길이 170㎝에 폭100㎝로서 그 제작은 순조(純祖) 4년(1804)이다. 전체적인 배경은 청록색(靑綠色)에 홍색(紅色) 등받이를 한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나타냈다. 의자의 형태는 단조롭고 통견(通肩)의 법의(法衣) 속에 가부좌한 것으로 보인다. 의좌에 정좌(正坐)하여 전방을 주시하는 모습이 매우 자애로우면서도 수행자의 독특한 의지를 여실히 나타내는 모습이다. 그림의 상부에는 별도로 목조운각(木造雲閣)을 단조롭게 처리하여 좌우에 청룡(靑龍), 황룡(黃龍)을 조각하였다.
(4) 관음전(觀音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
관음전은 용화전 앞에 위치한다. 곧 중로전의 중심법당인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의 세 법당이 남북으로 나란히 놓인 가운데 제일 남쪽에 위치하는 법당이다. 관음전은 영조 원년(1725)에 용암대사(龍岩大師)에 의하여 초창되었고, 그 이후의 중수 사실은 알지 못하며 근래에 기와를 개수(改修)한 법당이다. 이렇게 창건이 늦은 법당이지만 그 전방에는 연대를 법당보다 올려야 할 석등(石燈) 1기(基)가 있다. 석등의 총고는 약 300㎝로서 그 조성수법은 용화전 앞의 석조봉발(石造奉鉢)과 비슷하다. 한 장의 넓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인 하대석(下臺石)의 시문(施紋)이 닮아 있고 무엇보다도 중간의 간석(竿石)은 부등변(不等邊) 8각으로 중간에 마디를 설치한 수법은 동일한 형식이다. 상대석 위에 놓인 화사(火舍)는 장방형(長方形) 4면에 화창(火窓)을 커다랗게 내었는데 그 형식이 신라 이래의 8각과는 다르다. 다만 상부의 옥개(屋蓋)와 보주(寶珠)는 착실하게 고식(古式)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 석등의 조성연대는 석조봉발의 형식을 추종한 조각수법이 나타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관음전보다는 앞선 조각양식으로 보아야겠다. 그러므로 이 석등은 어쩌면 용화전 앞에 본래부터 건립돼 있었으나 이후 관음전의 신축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 왔을 가능성이 짙은 중요한 유물이라 하겠다. 관음전 내에는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봉안하였으며, 본래는 사찰의 중요한 유물이 이곳에 보관 전시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관음보살상은 화려한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두 손으로는 길다란 연꽃과 같이 처염상정(處染常淨)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나아가 중생의 모든 번뇌를 감로(甘露)의 법수(法水)로써 씻어주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상징으로 나아가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을 말하는 것은 중생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구원하기 위하여 시방 모든 국토에 몸을 나투시는 대비보살(大悲菩薩)의 기능적인 면을 나타낸 것이다. 관음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八作)지붕 형태로서 내벽(內壁)에는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에 계신 관음의 모습과 남순동자(南巡童子)의 형상을 나타내기도 하였고 32응신(應身)을 상징하는 여러 형태의 관음상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내벽 대들보의 사자문 단청이라든지 하늘을 나르는 비천상(飛天像)의 불화(佛畵)등은 특색있는 작품이다.
(5) 전향각(篆香閣)
전향각은 대광명전 서쪽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중로전의 네 법당을 관리하는 노전으로 불전에 분수(焚修 : 향불을 피우고 도를 닦음)하는 스님들의 거어(居處)공간이다. 따라서 스님들이 거처하는 주거공간이면서도 일반 요사(寮舍)와는 다른 성격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의 명칭이 전향각(篆香閣)이라 한 것 역시 꾸불꾸불한 향연기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겠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낮은 건물로 방과 부엌으로 구성된 팔작(八作)집이다. 이 건물은 1757년(영조 33년) 범음대사(梵音大師)가 처음으로 지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30년 설암화상(雪岩和尙)이 중수한 것이다.
(6) 장경각(藏經閣)
장격각은 해장보각 바로 뒤쪽에 동향(東向)하고 있다. 이 건물 안에는 목판(木版)장경을 통안하고 있는데 이들 목판 대장경 강원(講院)의 현행 교과과정에 들어 있는 중요 경전들로 『능엄경』, 『기신론현수소(起信論賢首疏)』,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법수(法數)』,『사집(四集)』등 15종의 경판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통도사에서 약 10㎞ 떨어진 운흥사(雲興寺)가 한말(韓末) 폐사(廢寺)될 때 이곳으로 옮겨온 중요 경판(經板)들이다.
(7) 세존비각(世尊碑閣)
이 비각(碑閣)은 1706(숙종 32) 계파대사(桂坡大師)가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중수(重修)하고 석가여래의 영골사리비(靈骨舍利碑)를 세우면서 건립(建立)한 것으로 비석(碑石)에는 불사리의 행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곧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셔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泗溟大師)가 불사리(佛舍利)를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크고 작은 2개의 함에 문수대성(文殊大聖)께서 자장스님께 부촉하신 승지(勝地)이므로 이곳에 다시 봉안토록 하셨고 한 개의 함은 태백산(太白山 : 영변 묘향산)으로, 다른 한 개는 현재의 계단에 봉안토록 하였던 사실들을 석비(石碑) 전면(前面)에 기록(記錄)하고 있다.
비문은 수사간(守司諫) 채팽윤(蔡彭胤 : 1669-1731)이 짓고 글씨는 승정원(承政院) , 도승지(都承旨),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석비 뒷면의 비음(碑陰)은 성능대사(性能大師)가 짓고 보윤대사(普允大師)가 썼는데 이곳에서는 석가모니의 행적(行蹟)과 함께 각지(各地)의 시주(施主)내용을 적고 있어 참고된다. 석비의 건립은 숙종(肅宗) 32년(1706)이며 높이는 2.5m, 폭 1m이다.
(8) 황화(皇華閣)
황화각은 전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큰방이다. 이곳은 강원과 학승(學僧)들이 거처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의 초창(初創)이 1317년 (충숙왕 4) 1647년 (인조 27) 탄변화상(坦卞和尙)이 중건하고 광무(光武)3년 (1899) 성해화상(聖海和尙)에 의해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ㄴ자 평면으로 2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형식이다. 동서로 자리잡은 평면은 강당과 부엌, 툇마루로 구성되었고 남북 방향의 평면에는 학승이 거처실로 되고 서쪽에 쪽마루를 달았다. 그리고 이들 건물은 일반 신도와 격리되도록 북쪽의 서쪽에서 출입하도록 되어 있어 경학을 공부하는 공간답게 처리하였다.
(9) 영각(影閣)
이 건물은 역대(歷代) 주지(住持) 및 큰스님들의 영정을 85폭 봉안한 건물로 정면 8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長方形) 평면(平面)으로 된 팔작집이다. 초창연대는 분명치 않으며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지었다고 전한다. 그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 불이문(不二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이 문은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경내의 마지막 문으로 일명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즉 동구(洞口)밖의 산문(山門)과 일주문, 천왕문(天王門)을 거쳐 들어온 마지막 문이다. 이 문은 1305년(충렬왕 31) 처음 지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언제 중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세부수법으로 보아 조선 주익 이후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문은 동쪽 하로전(下爐殿)의 지반보다 약 1.5m가 높아지면서 축대를 내었고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다포식 팔작집으로 동향한 전면(前面) 3칸에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으며 대들보 위에 얹은 가구재가 다른 건물에 비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내부는 매우 단조롭게 처리되어 종래 수법(手法)과는 달리 중앙의 대들보를 코끼리와 호랑이가 이마로써 받쳐 이고 있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 역시 코끼리와 호랑이가 건물의 하중(荷重)이마에 서로 의지해 있는 것이 바로 불이(不二)의 도리(道理)를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대들보위에 두터운 솟을 합장태를 삼각형으로 짜 그 부재 위에 장혀[長舌]를 걸쳐 중도리(中道理), 하중도리(下重道理), 종도리(宗道理)를 얹어 서까래를 받도록 하였다. 이는 고식(古式)의 가구법(架構法)으로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불이문의 현판 글씨는 송(宋)나라 미불(米芾 : 號는 元章)의 필이다.
불이(不二)의 뜻은 법계의 실상(實相)이 여여평등(如如平等)하여 피차(彼此)의 차별이 없는 것을 ‘불이(不二)’라 하며 이 법계불이(法界不二)의 진리가 불법의 궤범(軌範)이므로 ‘불이법(不二法)’이라 하고 일체 성인이 모두 이 불이(不二)의 법위 의하여 진리에 취입(趣入)하므로 불이법문이라 한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청정한 불법도량의 중심부가 되며 불이(不二)의 진리로써 세속의 모든 번뇌를 벗어난다는 뜻에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11) 그 밖의 요사
감로당의 초창(初創)은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원년(元年 : 1340)이지만 화재로 인하여 여러 차례 중건, 중수를 거듭했다. 「통도사사적비」에 따르면 고종 19년(1882) 화엄전에서 실화하여 원통방과 감로당이 소실(燒失)되었으나 다음 해에 중건했음을 알 수 잇따. 그러나 불과 4년 만에 다시 감로당에서 실화하여 명부전과 함께 원통방, 화엄전까지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인 1887년 덕명대사(德溟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2칸 건물로 강원의 학인 대중방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 건물과 동, 서 그리고 남쪽에 객실 3채가 있어 口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중앙에 중정(中庭)이 생겨 주택의 평면형과 같은 구조이다. 감로당을 비롯한 口자형 건물들은 약 86칸으로 거실, 마루, 부엌, 창고, 식당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원통방은 감로당 동쪽 측면에 위치한다. 초창은 1341년(충혜왕 복위 2)이지만 영조 때에 탄해대사(坦亥大師)가 중건하였고 1886년 감로당과 함께 소실되고 다음해에 매예대사(每藝大師)에 의해 중건되었다. 건물은 남향한 정면 7칸, 측면 2칸의 곡루(穀樓)가 자리잡고 있다. 원통방의 ‘원통’ 의미는 ‘관음보살 이근원통(耳根圓通)’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화엄전은 원통방의 동쪽에 남향하여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터에는 원래 1368년(공민왕 17) 초창된 건물이 있었고 1762년(영조 38)과 1883년(고종 20)에 소실되었다가 다시 1887년에 구련대사(九蓮大師)에 의하여 중건된 건물들이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70년 새로 건립된 콘크리트로 된 건물이다. 이곳은 강원(講院)의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법회(法會)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3. 하로전(下爐殿)의 전각(殿閣)
(1) 영산전(靈山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
영산전은 하로전(下爐殿)의 중심 건물이다. 남향한 영산전의 전방 좌우에는 극락전과 약사전이 동서에 놓여 있고, 그 중앙 지점에는 신라 말기의 3층석탑 1기가 있다. 이 탑은 현 위치에서 동북쪽 약 1.5m 지점에 경사진 채 있었으나 최근에 현 장소로 이동하여 복원되었다. 영산전의 초창 연대는 미상이나 현 건물은 숙종 30년(1704) 송곡대사(松谷大師)에 의하여 중건 된 것으로 짐작된다. 건물의 구조는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양식의 맞배지붕 양식이며 내외 벽화는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외벽의 그림은 풍화(風化)를 받아 많이 훼손되었으나 내벽의 그림은 그런대로 잘 남아있다. 특히 내부 벽화의 다보탑을 비롯하여 양류관음(楊柳觀音), 나한상, 여러 가지 경설(經說)의 내용들이 품격 높은 수작(秀作)으로 국내에서 보기드문 희귀한 작품이다. 서쪽 벽면을 거의 다 차지하였으며 탑신에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분반좌(分半座)하는 『법화경』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탑의 주변에는 보살상과 제자상이 시립(侍立)해 있고 탑문(塔門)이 열린 내부로 2여래(二如來)가 병좌(竝坐)한 모습이며 탑 둘레는 온통 영락과 풍경장엄 속에서 하늘에는 오색(五色) 구름이 휘날리고 있다. 그림은 애석하게도 아랫부분이 손상되었지만 상태는 좋은 편이다.
그외에도 내부 불벽(佛壁)에는 양류관음(楊柳觀音)이라든지 나한상과 함께 산수화풍의 그림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벽면의 요소 요소에 적당한 구도를 잡아 여러 가지 경설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건물의 외부 벽면에 남아 있는 노승(老僧) 공양도(供養圖)의 경우 많이 훼손되었으나 그림은 품격이 높은 수작이다.
건물의 내부 천전에는 우물천정을 조성하여 고식(古式)의 연화문(蓮花紋) 또는 보상화문(寶相華紋)으로 단청하였다. 대들보에 그린 황룡, 청룡의 그림이 매우 화려하게 전개되고 있다. 영산전의 본존불로는 석가모니불상을 봉안하였고, 그 옆으로 돌아가면 거대한 팔상영화를 안치하였다. 팔상도라고도 하는 이 그림은 석가여래의 일생을 여덟 가지 중요 사실들로 정리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팔상도의 조성은 영조 51년(1775)으로 연대뿐만 아니라 당시 불화(佛畵)의 화풍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대형그림이다. 그림이 배치된 우측에서부터 그림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세존께서 도솔천의 호명보살(護名菩薩)로서 백상(白象)을 타고 마야부인 태중(胎中)으로 드는 내용을 묘사하였다.
나)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석존께서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여 사방으로 칠보(七步)를 걸으시면서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외치던 장면과 함께 궁중(宮中)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다)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동문에 나가서 늙은 사람을 보고, 남문에 나가서 병든 사람을 보고 서문에서 죽은 사람의 행상(行喪)을 보고, 북문에서는 출가 사문을 만나서 인생의 무상(無常)과 출가한 사문의 수도생활의 고귀함을 깨달으시는 장면을 나타내었다.
라)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29세 되던 해 2월 8일, 야반에 왕위를 버리고 성을 넘어 설산으로 향하시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마)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설산에 들어가서 6년 동안 수도하시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보리수 아래에서 48일을 정진하시여 지금까지 그를 유혹하던 온갖 마중(魔衆)을 항복받고 새벽별을 보시고 오도(悟道)하시는 모습을 나타냈다.
사)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녹야원(sarnath)에서 처음으로 사제(四諦)의 설법을 하시면서 최초의 다섯 제자가 탄생되는 모습과 함께 그 후 45년 동안 설법하여 중생을 제도하시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아)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최후의 설법을 하시고 입멸하시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본존 석가여래상 뒷편에는 영조 10년 (1734) 조성의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후불탱(後佛幀)이 있다.
(2) 극락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
극락전의 초창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18년(1369) 성곡대사(성곡대사)에 의하였고, 그후의 중건, 중수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법당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의 교주이신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로 관음(觀音), 세지(勢至) 보살상을 봉안하였다.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양식이며 외벽(外壁)에는 험한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향하는 소위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표현하였다. 배의 모습은 용두(龍頭)와 용미(龍尾)를 나타내었고 그 전후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과 지장보살로 보이는 양대(兩大) 보살이 서서 배를 인도하며, 배에는 합장한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이 그리은 근세의 제작이나 그 구도나 내용이 보기 드문 우수한 작품으로 주목되고 있다.
극락세계란 이 세계로부터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가면, 이 우주(宇宙)공간에서 가장 즐거운 세계가 있으며 이곳에서는 아무런 고통이 없으며, 편안하고 즐거운 안양국(安養國)또는 극락세계라고 불려지는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 세계에는 현재 아미타부처님이 설법하시는데 그 세계에서 왕생하는 사람은 연화(蓮花)위에 화생(化生)한다고 말하여 진다. 즉 연화(蓮花)생이다. 모든 것은 생각만 하면 저절로 이룩되고 땅은 유리로 이룩되었으며 . 온갖나무와 꽃과 궁건이 모두 법(法)을 설하여 이곳에 왕생하는 중생은 필경 성불한다고 하였다.
아미타불은 과거 인행시(因行時) 법장비구(法藏比丘)로서 48원(願)을 성취하여 성불하였으며 극락세계를 장엄하여 누구든지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케 한다는 일념왕생원(一念往生願)의 믿음을 지니는 부처님이다.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은 한량없는 빛으로서 ‘무량광(無量光 : Amitabha)' 또는 한량없는 생명(生命)으로서의 ’무량수(無量壽, Amitayus)' 등으로 번역되므로, 토함산 석굴암의 경우 ‘수광전(壽光殿)’이란 현판을 갖게도 되었다. 아무튼 불교신앙의 종교적 이상국토를 상징하는 부처님과 전각(殿閣)이 곧 극락전(極樂殿)이며, 이를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할 때도 있다.
(3) 약사전(藥師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
약사전은 극락전과 함께 공민왕 18년(1369) 성곡대사(星谷大師)가 초창하였으며 이후의 중건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건물양식으로 보아 18세기초 극락전과 함께 중건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1칸으로 하여 주칸에공포를 배치하지 않고 다포식이면서도 앞뒷면에만 공간포를 배치한 점이 특색이다. 따라서 측면에는 평방(平方)을 생략하고 있는데 그 기법도 다른 건물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처리라 할 수 있다. 법당에는 본존불로서 약사여래상을 봉안하였으며, 후불탱화(後佛幀畵)는 약사여래와 함께 일광(日光), 월광(月光)보살을 위시하여 제대보살(諸大菩薩) 및 신장상(神將像) 등을 나타낸 1775년(영조 51)의 작품이다. 액사여래는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留璃世界)의 교주로서 과거 인행시(因行時)에 십이대원(十二大願)을 발(發)하여 이 세계 중생의 질병을 고치고 목숨을 연장케 하며, 일체의 재화를 소멸하고 의식(衣食)을 구족하게 하여 부처님의 원만행(圓滿行)을 닦아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게 하는 부처님이다. 과거에 약왕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는 열두 가지 대원을 성취하였다. 즉 ‘약사십이대원’의 공덕으로 성불하여 중생의 병고를 치료하므로 ‘대의왕불’이라고도 한다.
(4) 만세루(萬歲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만세루는 영산전의 정면 남쪽에 위치하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현재의 건물은 1746년(영조 22) 영숙대사(靈淑大師)가 중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이 건물은 본래 법회나 법요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던 누각으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규모는 비교적 큰 편이며(162㎡)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있으며, 어간의 좌우 기둥 상부에는 밖으로 용두(龍頭)가 새겨져 있고 안으로는 물고기 꼬리모양의 용미(龍尾)가 새겨져 있다. 이는 출입구가 되는 정간(正間)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공포의 쇠서는 아래 윗몸에 연꽃과 연봉이 새겨져 있고 내부는 연등천장으로 되어 가구(架構)가 드러나 있다.
현재의 건물이 누각이 아니면서 누(樓)라고 한 것을 보면 초창 때는 누각 형식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건물 내부에 우물마루가 깔려 있고 주로 의식 때 사용되고 있으니 성보박물관이 새워지기 전에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5)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천왕문(天王門)을 들어서서 바로 남쪽에 위치한다. 이 건물은 2층 누각형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초창은 숙종 12년(1686) 수오대사(守梧大師)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건물이 아닌 중수된 건물이다.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기둥을 층단주(層斷柱)로 구성하여 하층은 사방을 터서 계단을 마련하여 상층으로 오를 수 있게 하였으며, 상층 주변에는 계자난간을 둘러 장식하고 활주(活柱)는 상층 마루에 얹도록 하였다. 지붕은 팔작누각형(八作樓閣形)이며 내부 상하층에는 범종(梵鐘), 홍고(弘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등 사물(四物)을 비치하고 있다.
불가의 종을 범종이라고 하는데 ‘범(梵)은 범어(梵語) ’브라흐마(Brahma)'를 음역(音譯)하여 범(梵)이라 한 것이다. 즉 ‘청정하다’ 또는 숙정(淑淨)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범종이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란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불전사물은 조석 예불(禮佛)의식에 사용되는 불구인데 이들은 모두 소리를 내는 도구(道具)이다. 범종을 치는 것은 지옥중생을 위하여, 홍고(弘鼓)는 축생의 무리를 위하여, 목어는 수중(水中)중생을 위하여, 그리고 운판은 허공의 날짐승을 위하여 사용된다. 물론 목어의 유래는 고기는 잠잘 때도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경책하게 하는 뜻도 지니고 있으나 이들 사물(四物)은 태(胎), 난(卵), 습(濕), 화(化), 4생(四生)의 중생들을 위하여 치는 것으로 돼 있다.
범종각의 대종(大鍾)은 본래 이 건물 초창 당시 함께 조성되었으나 근래의 신종(新鍾)을 주조(鑄造)하여 함께 두었고 홍고(弘鼓) 역시 최근 신조(新造)되어 같이 있다.
(6) 천왕문(天王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0호
천왕문은 하로전으로 들어오는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계 익공식 맞배집으로 고려 충숙왕 6년(1337) 취암대사에 의해 초창하였으나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이후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비교적 간결하며 5량 구조로 되었다. 건물 내부는 중앙칸을 통로로 하고 좌우 측간에는 목조의 거대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배치하고 있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사천왕(四天王)은 욕계 6천(욕계육천 : 四王天, 忉利天, 夜摩天, 兜率天, 化樂天, 他化自在天) 가운데 제2천(第二天)인 도리천(忉利天 : 중앙의 제석천과 사방에 각 8천을 합하여 모두 33천이다)의 천왕(天王)인 제석천왕의 외장(外將)으로서 사주세계(四洲世界)를 순행하면서 착한 자를 상주며 악한 자를 벌하면서 동시에 정법을 보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보통 천왕문에는 사천왕의 모습을 불화 또는 조각상으로 배치하나 이곳에서는 목조상(木造像)의 거대한 사천왕을 좌우에 배치하였다. 즉 동방의 지국천(持國天)은 비파(琵琶)를 들었고, 북방 다문천(多聞天)은 보탑(寶塔)을, 남방 증장천(增長天)은 칼을 들고 있으며 서방 광목천(廣目天)은 용(龍)을 잡고 있다. 사천왕의 지물(持物)은 경전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며 신라 이래의 조각이나 불화에서도 여러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만 이곳 사천왕의 조각수법은 다소 강직한 편이나 사천왕의 특징은 잘 나타나고 있다.
(7)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절에 들어오는 첫 번때 문으로 기둥의 배열이 한 줄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주문의 초창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이며 중창은 자세치 않다.
일주문의 ‘일주(一柱)’란 이러한 기둥 배열의 뜻도 있겠지만 본래의 의미는 『법화경(法華經)』신앙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즉 『법화경』의 대의가 ‘회삼귀일(會三歸一)’, 다시 말하면 삼승(三乘)을 모아 최상승인 일승(一乘)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반드시 일주문은 ‘일주삼칸(一柱三間)’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통도사의 일주문(一柱門) 역시 전면 3칸뿐이며 측면은 없다.
현 건물은 영조 46년(1770) 두섬대사(斗暹大師)가 중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란 편액은 대원군의 필적으로 유명하다. 주련(柱聯)에는 ‘국지대찰(國之大刹), 불지종가(佛之宗家)’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가 있다.
(8) 가람각(伽藍閣)
가람각은 천왕문의 남동쪽에 근접해 있는 가장 작은 4면(四面) 단칸의 법당으로 도량의 수호를 위해 가람신(伽藍神)을 안치하고 있다. 초창은 1706년(숙종 32)이며 외벽에는 적마(赤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원명((圓明)스님에 의해 신축되었다.
(9)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박물관은 일주문을 들어서서 곧바로 오른쪽 대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종무소 건물을 철거하고 정면 7칸, 측면 3칸의 전통 건축양식을 본뜬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1987년 10월 주지 원명스님에 의하여 완공된 80평 규모의 전시기능 건물이다. 현재 성보박물관의 전신인 셈이다. 신축중인 신(新) 박물관이 완공되면 이곳은 제 5 전시공간으로 쓰일 예정이다.
(10) 보광선원(寶光禪院)
통도사에는 선원 건물로 사역(寺域) 서쪽에 보광전이 있고 주위에 부속건물 판도방(判道房), 요사, 목욕실 등이 있다. 보광전은 1970년 당시의 주지 청하화상(淸霞和尙)에 의해 건립된 선방이다. 이 건물은 남향하여 정면 9칸, 측면 4칸의 건물로 부방장실, 선원장실이 있고 평면 앞 뒷면에 툇마루를 깔고 서쪽에는 부엌칸을 두었다.
이곳 선원에는 일반인이 출입이 금지되고 매년 하안거, 동안거를 실시하고 있다.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서 7월 15일까지이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서 1월 15일까지 각 3개월로 되어 있다. 안거일은 전국 선원이 모두 동일하며 이 기간을 결제기간이라 한다.
(11) 기타건물
현재 하로전(下爐殿)지역에는 사찰종무를 관장하는 건물들이 집중되어 있다. 즉 현재 종무소로 사용되는 건물은 명월료(明月寮)이다. 이 건물의 초창은 고려 충숙왕 3년(1316)이며, 경종 3년(1723) 취암대사(翠岩大師)가 중건하였고 최근 다시 신건(新建)하였다.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八作)지붕 양식이다. 현재 이곳은 통도사의 본사 및 말사의 종무행정 일체를 관장하는 사무기능을 지닌 종무소로 되어 있다.
또 종무소에 소속된 스님들의 거처로 쓰이는 금당은 명월료와 동대(同代)이며 중건 또 종무소에 소속된 스님들의 거처로 쓰이는 금당은 명월료와 동대(同代)이며 중건(重建)은 영조 5년(1729) 수인대사(守寅大師)에 의하였다. 전면 8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종무소의 삼직 및 직원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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