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근본불교에서

청원1 2006. 5. 3. 06:52

제 5교시 : 좌선(坐禪)하는 법


안녕하십니까? 

행복하십시오. 

붇ㄷ하빠라입니다. 


옛날 어른 스님들 말씀에,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지옥가는 것은 면한다고 그랬습니다. 


사이버수행교실에 오신 여러분들은

극락가는 것은 제가 보장하지 못하지만,

지옥 안 가도록 하는 것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수행하시고 - 한번 클릭할 때마다 -

여하튼 선방 문고리를 한번씩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점점 지옥가는 것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다룰 주제는 불교수행의 기본이 되는 좌선하는 법입니다. 

좌선은 앉아서 수행을 한다고 해서

이것을 한문으로 ‘좌선’이라고 표현합니다. 


좌선은 모든 불교수행의 기본이 됩니다. 

이 기본을 탄탄하게 익혀 놓으시면

앞으로 여러분들이 걸어 다니면서 수행을 하는 행선,

또는 생활현장, 노동현장에서 하는 생활선이나 노동선을 할 때

매우 유익하게 될 겁니다.


마음이 좀 급한 성격이라면서 기본기를 익혀놓지 않고,

응용하는 쪽으로만 눈을 돌리게 되면,

처음은 잘 되는 것 같지만,

하면 할수록 수행의 유효성은 떨어지게 될 겁니다. 


결국 사이버 수행교실에 오셔서 함께 수행하시는 여러분들은

기본기를 몸과 마음으로 충실하게 익혀놓으셔야 됩니다. 


좌선을 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수행을 할 것인가 - 올바른 수행법을 먼저 선택해야 합니다. 


앉아서 수행하는 좌선을 할 것인지,

절을 하면서 하는 수행을 할 것인지,

아니면 기도나 염불을 하는 수행을 할 것인지,


만약 좌선을 한다면,

중국 송대의 대혜종고(大慧宗?)스님이 확립해 놓은

간화선(看話禪)의 방법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부처님의 방식대로 할 건지,

아니면 내 방식대로 할 건지,


먼저 수행법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이버수행교실에서는 부처님이 하시던 방법에 기초하여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드리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스승이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스승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스승이 없으면 - 스승이 지도를 받지 않고 수행을 하게 되면 -

안 될 것은 없지만 비용이 좀 많이 들게 될 것입니다. 

또 시간도 아주 많이 들 것입니다. 

간혹 10년, 20년, 30년에 걸쳐 열심히 수행했지만

수행의 진도는 제자리걸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뛰어난 스승의 수행지도를 충분하게 받고,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수행의 노하우를 제대로 이전받게 되면,

적은 노력을 들여도 아주 효과적인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이버수행교실에서는 제가 여러분들의 수행을 지도하기로 하였습니다. 

수행하는 장소는 전문가들에게는 어디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초보자일 경우에는 주변여건이 좀더 양호하면 더욱 좋습니다. 

한참 배고픈데 음식점 위층에서 수행하게 되면 좀 불편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여건이 좋으면 더욱 좋다는 것입니다.


또 기후는 너무 크게 신경안써도 좋습니다. 

약간 더운 듯한, 이런 정도가 오히려 좋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할 적에 혼자서 해도 좋고,

여러 사람들하고 같이 해도 좋습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눈감고 하게 되므로 결국 혼자하게 됩니다.

수천명이 함께 앉아서 같이 수행을 해도,

눈을 감아버리면 어차피 자기혼자인 것입니다. 

처음할 때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서 같이하기도 하지만,

조금씩 수행에 익숙해지다 보면 혼자하는 경우가 많게 될 것입니다. 


함께 수행하는 분이 수행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수행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이를 테면, 모처럼 수행 좀 해보려고 하면,

영화보러 가자거나, 술먹으러 가자, 또는 이야기 좀 하자는 둥 -

거기에 휩쓸리다 보면 결국은 수행 안한 것만 남게 됩니다. 


부처님은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은 도반이라면,

- “혼자 수행하는 게 더 좋다” -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결국 수행에 마음이 맞고, 수행에 도움이 되면, 함께 수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가능한 한 옷은 느슨하게 입는 게 좋습니다. 

몸에 꽉 조이는 옷은 남보이기는 좋겠지만 수행에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넥타이나 양말은 벗어버리고, 속옷도 좀 느슨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가능하다면 수행복을 입고 편안한 자세로 하면 더욱 효과적입니다. 


좌선수행은 맨바닥보다는

약간얇은 방석위에 앉아서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수행을 처음하는 사람들은 두꺼운 방석을 준비하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군용 담요처럼

아주 얇은 담요를 반장정도 준비해서 반으로 접으면 적당합니다. 


제가 지금 깔고 앉는 크기처럼,

담요를 한 겹 정도 접어서 무릎을 가릴 정도로 깔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어느 선방에 가서 수행할 경우에,

- “수행을 잘하는 사람옆에 앉아, 그 사람 덕 좀 봐가면서 수행하자” -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수행을 잘하는지를 모릅니다. 


이때 여러분들이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으로는,

방석이 좀 두꺼운 사람은 초보자일 확률이 큽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방석이 얇으면 얇을수록 수행이 좀더 깊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 사람 옆에 가서 앉아서, 그 사람의 수행 향기를 맡으면서

수행을 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현미경을 들고 연구소에 가서

물질을 분석하고 물질에 내재되어있는 기본법칙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방석을 들고 선실로 가서

마음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지요. 


마음이 갖고 있는 기본법칙을 이해하고, 그 법칙을 역이용해서,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정신적 노폐물과 정신적 오염원을 제거해서,

보다 행복하게 살자하는 이 수행교실에 온 것입니다. 

이렇게 방석 한 장을 준비해서 마음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좌선은 앉아 있는 것이 기본입니다. 

좌선을 시작할 때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행선을 먼저하고 그다음에 좌선을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때에는 상관없습니다. 

행선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시간에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방석을 바닥에 놓습니다.

불교도의 경우에는, 부처님을 향해서 앉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입니다. 

간혹 우리나라 선방에 가보면,

부처님을 등지거나, 벽을 보고 앉아서 좌선을 하는데,

부처님의 정통적인 수행방법에는 항상 부처님을 향해서 앉게 됩니다. 


그런 다음, 불교도의 경우에는,

부처님을 향해서 천천히 알아차림을 하고, 절을 세 번하고,

그런 다음, 이번 좌선시간에 부처님의 거룩한 법을 만날 수 있기를 -

이렇게 강력한 서원을 세우고,

내 마음에 존재하는 모든 번뇌들을 다 제거할 수 있기를,

이렇게 거룩하고 강력하게 서원을 세우고 조용히 앉아서 좌선을 시작합니다. 


앉을 때에는 발을 어떻게 하는가?


발을 지금 제가 이렇게 해있는 것처럼,

발을 서로 포개지 않고, 바닥에 앞과 뒤로 편안하게 놓으십시오. 

이런 모습을 일반적으로 평좌라고 합니다. 

부처님 정통수행법에서는 발을 이렇게 편안하게 놓습니다. 


그런데, 

시중에 나와있는 참선소개 책들에서 발을 어떻게 놓을 건가 하는 것인데 ...

- 아마 결가부좌(結跏趺坐)의 방식으로 앉아야 된다고 해놨을 것입니다 - 


결가부좌란 것은 이렇게 앉는 걸 말합니다. 

이렇게 발을 꽈서 앉는 것을 일반적으로 결가부좌라고 합니다. 


이것은 불교 참선하는 방법이 아니라 요가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정통적으로는 이런 방법을 선호하지도 않고,

이렇게 앉도록 권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앉는 것이 언제부터 인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대개 우리나라 스님들이 이렇게 앉는 것을 선호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해인사, 보광사, 또는 인근에 있는 선방을

한번쯤 찾아서 선방 문을 열어 보십시오.


이렇게 앉아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몇 분이나 계시는가?

- 모르기는 해도  선방마다

10%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많은 책에서,

- 이렇게 앉는 게 좋다, 이것이 정통적인 방법이다 - 이렇게 해놨지만,

어떤 불교문헌에서도 어느 것이 정통적인 방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경전에 보면,

“발을 엇갈리게 두고 앉는다.” - 이렇게 되어 있는데,

중국에서 한문으로 - 결가부좌 - 라고 번역하고서, 이렇게 앉는 것이다.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불교 경전이나 문헌에서는 이런 방법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또, 발을 반쯤 포개어 이렇게 앉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과부좌의 변형으로써 - 반가부좌(半跏趺坐) -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이것도 자세가 좀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의 삼매가 깊어지고, 수행의 진도가 나가게 되면,

이런 자세가 얼마나 불편한 자세인지 알게 될 테고,


알아차림과 삼매를 키우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는 폼은 좀 나는 것 같지만 -

수행에는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행을 할 때는,

이렇게 부처님의 방식대로 평좌를 취하는 게 좋습니다.

- 이렇게 편안하게 앉으세요. -


한번은 이렇게 앉았으면,

다음번에는 이렇게 발을 바꿔서 앉으면 됩니다. 

그리고 좌선하는 동안에는 가능한 한 발을 바꾸지 않는 게 효과적입니다.


이렇게 편안하게 앉으시고,

허리띠를 느슨하게 하시고,

다음으로는 손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데 - 손은 이렇게 하면 좋습니다. 


가령 바깥에 있는 발이 이쪽으로 향했을 경우에는,

그 향하는 방향으로 손을 이렇게 두고,

그 위에다 손을 편안하게 갖다 놓는 게 효과적입니다. 


손을 앞쪽으로 많이 내놓지 말고,

배꼽 쪽으로 바짝 당겨서 허벅지있는 쪽으로 편안하게 두시는 게 좋습니다. 


간혹 손가락을 동그랗게 해서 엄지손가락이 마주치도록 하는데

- 이것은 나중에 수행이 진척되어 삼매가 커지게 되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며 도리어 수행을 방해하는 결과로 됩니다. 


지금, 손을 이렇게 하고, 이렇게 힘을 한 번 줘 보세요. 

이렇게 힘을 주게 되면, 어깨 또는 척추 쪽에 힘이 들어가게 됩니다.

근육에 힘이 들어가면, 알아차림하는 마음이 기능이 중지를 해버립니다.

삼매도 깨지고 알아차림도 효과적이지 못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수행을 할 때,

수행의 진도가 정상적으로 나가고,

삼매가 커져서 몸에 힘이 들어갈 경우에도

엄지손가락이 맞부딪쳐서 힘을 받도록 하지 말도록

엇갈리게 두게 되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편안하게 두시면 수행하는데 효과적입니다. 


스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나는 손을 이렇게 갖다 놔야 편합니다라고 하면

그리 갖다 놓고 하세요.

또는 나는 이렇게 손을 놔야 됩니다라고 하면

그리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한번 취한 자세는 그 시간동안 가능한 한 변경시키지 말 것,

이것이 기본원칙입니다.


손을 이렇게 두거나, 저렇게 두는 것보다도 편안하게 두시고,

허리를 똑바로 펴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목도 똑바로 펴세요.

이 상태에서 턱을 조금만 당겨주세요,  병아리 눈물만큼만 당겨야 됩니다. 


어떤 분들은 턱을 이렇게 많이 숙이는 경우가 있는데,

턱을 많이 숙이면, 목을 숙이는 결과로 되어

목뼈에 많은 무리가 가서 도리어 수행에 방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척추를 똑바로 세우시고,

머리도 똑바로 세우시고,

이 상태에서 턱만 조금 당겨주세요,

그리고 눈을 딱 감으시면 됩니다.


간혹 참선을 소개하는 대부분의 책에서 눈은 반쯤 떠야된다라고 했는데,

불교경전에서는 눈은 반드시 감아라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부처님의 정통수행법에서는

눈은 반드시 감도록 되어있습니다. 


눈을 이렇게 반쯤 감으라고 하는 것은,

간화선 수행에서 화두를 잡고 수행을 할 때에 이 방법을 많이 권했습니다. 왜냐하면, 눈을 감게 되면,

졸음에 쉽게 떨어지고, 따라서 망상에 휘말리기 때문에,

눈을 반쯤 떠서 졸음을 쫓고 망상을 쫓아야 된다고 하여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망상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그 망상을 알아차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몸을 갖고 있는 한 망상이 없을 수는 없고,

졸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졸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망상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찾아오는 망상과 졸음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놓고

알아차림을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나 졸음을 알아차리면 수행의 대상이 되지만,

그것에 휘둘려버리면 망상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글 수는 없습니다. 

결국 부처님은 눈을 감고,

졸음이 오면 졸음을 알아차리고,

망상이 오면 망상을 알아차림해야 된다 - 이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수행을 통해서,

삼매를 키우고,

알아차림을 키우고 - 수행의 진도를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발을 이렇게 충분하게 벌리세요. 

손을 편안하게 두시고,

허리를 똑바로 하시고, 목도 똑바로 하시고,

턱만 조금 당겨 주세요,

그리고 눈을 딱 감으면 -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완성된 것입니다.


자, 대강 이렇게 차림새를 갖추어,

어디 공원의 나무밑이나, 등산로 옆 바위위에, 한 폼잡고 척 앉아 있으면,

남이 얼른 보면 영락없이 도인같습니다. 


말을 해버리면 밑천이 드러나니까,

말은 하지 말고, 입을꾹 다물고, 그냥 거룩하게 앉아 있으면,

어디서 지리산 도인이 내려왔나? - 이런 모습이 될 겁니다. 


이렇게 수행의 기본자세를 취하고, 이제 수행을 시작합니다.


눈을 딱 감은 이 상태에서,

눈앞에 비추어지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 - 이제 수행이 시작되는 겁니다. 

뭐 수행이 별겁니까?

이렇게 하는 겁니다. 


수행을 하는데 ----

가령, 소리가 들리면 - ‘들림, 들림, 들림’

또는,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 ‘생각, 생각, 생각’

그리고 어떤 모습이 보이면 - ‘보임, 보임, 보임’,

- 내 마음에 반영되는 대로 이름을 붙이고 알아차림을 해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제대로 될 것 같은데 실제는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부터 시작해서,

역대 훌륭한 어른스님들은,

내 마음의 반영되는 현상을 알아차림하고 따라다니기보다는,

기준점을 하나 이렇게 딱 정해놓죠,

그리고 마음을 항상 기준점에 갖다 놓습니다.


기준점을 계속 알아차림하는데,

이때 내가 기준점을 알아차림하는 것을 방해하는 현상이 나타나면,

방해하는 현상을 한번 알아차림하고 다시 기준점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수행하는 노하우입니다. 


부처님같은 경우는 기준점을 어디다 정했느냐 하면

코끝에다 정했습니다.  코끝에다 마음을 딱 갖다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공기가 들어가면 이름을 붙였습니다. - ‘하나’ - 

공기가 나오면  - ‘둘’ - 이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코끝의 지나가는 공기에 기준점을 둔다고 ‘호흡관’이라 했습니다.

또는, 공기의 흐름에 숫자를 붙이며 알아차림한다고 ‘수식관’ 이라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소리에다가 기준점을 정해놓고,

그 소리를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서 수행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령, 염불선에서는 ‘나무아미타불’ 또는 ‘관세음보살’ -

이것을 기준점으로 정해놓고 마음을 거기에 보냈습니다. 


또, 大慧宗?선사같은 분들은 화두(話頭)를 기준점으로 정해놓고,

마음을 여기에 보냈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기준점을 정한다는 것,

그리고 알아차림하는 마음을 기준점에다 보낸다는 것,

그러다가 방해하는 현상이 나타나면, 방해하는 현상을 알아차림하고,

다시 기준점으로 돌아오는 것,

- 이것이 불교정통수행법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또, 부처님같은 경우에는

몸의 32군데 지점을 정해놓고 마음을 보냈습니다. 

예를 들면, 정수리, 귀, 어깨, 팔목, 손목, 이런 식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방해하는 현상이 나타나면 -

가령 어디서 소리가 들리면 ‘들림, 들림, 들림’

- 그리고는 다음 지점으로, 다음 지점으로 이렇게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니까 좀 복잡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900년전(서기 1200년대초),

중국의 대혜종고선사는,

그렇게 32군데로 쫓아갈 거 뭐있노,

“화두라고 하는 하나의 지점에 마음을 두자” - 이렇게 보았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간화선(看話禪),

또는 화두선(話頭禪)입니다. 

이것은 4주차나 5주차쯤 2시간에 걸쳐 아주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80 - 90년전,

미얀마의 마하시선사같은 분은 몸의 32군데를 쫓아가려고 하니까,

일반인들이나 초보자들에게는 너무 힘이 든다 하여,

그 32군데를 두 군데로 단순화시켰습니다. 


이 몸의 32군데를 좇아 가거나, 호흡을 쫓아가기보다는,

몸의 두 군데로 단순화시키는 -

그런 방법을 채택하셨습니다. 


이 방법을 지금 여러분에게 가르쳐드리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가 앉아서 좌선을 할 때는

배의 움직임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수행하게 될 겁니다. 


딱, 이렇게 폼을 잡으시고,

눈을 딱 감으십시오,

그리고는 편안하게 앉아서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한번 관찰해 보세요,

- ‘앉음’ - 이때 반드시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엉덩이가 땅을 닿은 데다 마음을 보내면서 - ‘닿음’ - 이렇게 하면 됩니다.


자~ 눈을 감고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앉음 - 닿음,  앉음 - 닿음’,


의자에 앉아서 계시는 분들은 등을 의자의 등받이에 붙이지 말고,

편안하게 이렇게 앉으면 됩니다.  엉덩이만 의자에 걸치고 앉고요,

또, 침대나 소파에 있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에서 시청을 하시는 분들은

저처럼 방석을 하나 깔고 편안하게 앉아서 따라서 하시면 될 겁니다. 


눈을 감고 앉아있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 ‘앉음’,

다시, 엉덩이가 땅에 닿은 데다 마음을 보내면서 - ‘닿음’ -

이렇게 이름을 붙이면서 ‘앉음 - 닿음 - 앉음 - 닿음’

한두번 하다가 알아차림하는 마음을 배에다가 툭 던져 보십시오,

배꼽있는 부근에다 마음을 한번 툭 던져 보십시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게 뭐냐면 -

코를 통해 배로 들어가는 공기의 흐름과

배의 움직임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폐로 들어가는 공기의 움직임에 따라 횡경막이 움직이고,

그래서 배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연동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수행을 해보시면

폐로 들어가는 공기의 움직임과 배의 움직임은

서로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이버수행교실에서는

폐로 들어가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이 주가 아니라,

배의 움직임이 주된 것입니다. 


그래서 단어를 분리해서 사용합니다.

호흡은 폐로 들어가서 움직이는 공기에 대하여 사용하는 용어이고,

배의 움직임은 순수하게 움직임만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폐에 들어가 움직이는 공기에 흐름을 주목하지 말고,

이것을 감지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고,

배의 움직임에다 초점을 두시면 됩니다.


이때 배의 움직임을 단전호흡이나, 복식호흡하듯이

인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교수행의 기본을 벗어나는 겁니다. 


시중에 나와있는 불교수행을 권장하는 많은 책을 보면,

배의 움직임은,

인위적으로 천천히 들이쉬고 - 내쉬고 - 이렇게 조절해야 된다고 합니다.


배 근육을 인위적으로 조절하게 되면,

알아차림을 하는 기능은 그 순간부터 중지해버립니다.

 지금 우리는 근육운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하는 기능을 단련하는 것이 불교수행의 핵입니다. 


근육을 움직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알아차림하는 이러한 기능을 움직이는 것은 수행이라고 규정을 합니다.

배를 볼 때, 배를 인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교수행에서는 금물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배를 인위적으로 움직이지 말고,

배를 생체리듬에 맡겨 버리십시오. 

생체리듬에 따라서, 배가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림하고 따라가시면 됩니다.


한 번 따라해 보세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턱을 조금 당기고, 눈은 딱 감으십시오,

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 ‘앉음’ -

엉덩이가 땅에 닿은 곳에다 마음을 보내면서  - ‘닿음 -

- 앉음 - 닿음’ - 한두번 하다가 배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그곳으로 마음을 툭 보내십시오,


배가 생체리듬을 따라서 불룩하게 불러오면,

- ‘일어남’ - 하고 명칭을 붙이고 따라가십시오,

배가 쑥 꺼지면 - ‘사라짐’ - 하고 명칭을 붙이면서 따라가십시오,


이때 어떠한 경우에도 배를 인위적으로 움직이지 마시고,

생체리듬에 따라서 움직이도록,

그냥 두고 보셔야합니다. 


배가 일어나면 - ‘일어남’ -

배가 꺼지면 - ‘사라짐’ -

다시 배가 불룩하게 일어나면 - ‘일어남’ -

다시 배가 꺼지면 - ‘사라짐’ -


이렇게 이름을 붙이면서 배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불교수행,

특히 앉아서 수행하는 경우에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입니다. 


그러다가 방해하는 현상이 나타나면,

그 방해하는 현상에 마음을 보내서 알아차림하면 됩니다.


가령 전화소리가 들리면 - ‘들림 - 들림 - 들림’

망상이 일어나면  - ‘생각 - 생각 - 생각’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르면 - ‘보임 - 보임 - 보임’

앉아 있는 무릎이 아프면 아픈데다 마음을 보내서 - ‘아픔 - 아픔 -아픔’ -

그리고는 즉각 기준점인 배의 움직임으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이것이 수행을 하는 가장 기본자세입니다. 


이렇게 수행을 할 때,

그 수행의 길이를 어느 정도로 할 건가 하는 겁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경우에는 5분도 좋고, 10분도 좋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시간 여유를 갖고 수행을 할 때는

60분을 기본으로 정해놓는 게 효과적입니다. 

수행의 진도가 더 나가면 2시간 정도로  늘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늘리는 것은

수행을 지도해주는 분과 먼저 상의를 하는 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자가 자기 임의대로 시간을 늘려가다 보면,

자칫 잘못할 경우 옆길로 샐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 수행을 할 때, 60분정도 앉아서 하다 보면,

1시간 내내 앉아 있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허리도 아프고 발도 아프고 -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면 수행자들이 자꾸 발을 바꾸는 경향이 있는데 -

가능하면 60분 동안 발을 안바꾸는 게 좋습니다. 

바꾸지 않고 계속 버티다 보면

통증이 너무 강해져서 눈물이 날정도로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꾸지 않고

최대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는 것이 다음 시간을 위해서 좋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는 앞으로 차차 설명을 하게 될 겁니다. 


도저히 견딜 수없어 발을 바꿔야 되겠다 싶으면 -

그 바꾸는 모든 과정을 알아차림하면서

한번 정도 또는 두 번 정도 바꿔주시면 됩니다. 


당초 정해진 시간만큼 수행을 하고,

이제 마쳐야 되겠다하는 생각이 들거든

- 마치려고 함 - 하고 의도를 관찰하고, 호흡을 한 번 -후 - 토해냅니다.


 그리고 인연있는 분들한테 자비관을 보내고 마치면 됩니다. 

인연있는 분들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리고,

지난 시간에 배운 것처럼 자비관을 보내고 마치면 됩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다가 - 20분이나 30분정도 좌선을 하는데 -

갑자기 전화가 왔거나, 누가 찾아와서, 누가 부르거나 해서,

수행을 중단 하고 일어나야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행동으로 바로 옮겨가는 경우가 있는데,

행동으로 곧바로 옮겨가게 되면 몸에 무리가 많이 올 수 있습니다. 


대개 20분, 30분정도 좌선을 하게 되면 생체리듬이 지극히 안정됩니다. 

이때 갑자기 움직이게 되면 몸에 많은 무리가 야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대답하시고,

그리고나서 조금 천천히 움직여 주는 게 좋습니다. 

몸을 이렇게 움직이거나, 몸을 앞뒤로 좀 흔들다가 일어나면 효과적입니다. 

특히 연세드신 분들은 이점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불교수행은 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므로 통증이 있거나, 망상이 있거나,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몸으로 대응을 해버리면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몸은 이 기본자세에서 움직이지 말고,

마음만 대상을 쫓아서 움직이고,

그 대상을 알아차림한 즉시 기준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수행의 기본입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에 정진하게 되면 머지않아 부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행복의 바다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십시오.

 

부처님 가르침의 중요한 개념들



1. 철학에 관한 몇 가지 개념정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는

물질적 요소( 物質 )와

비물질적 요소( 정신적 요소 : 意識 )로 구분할 수 있는데,


물질적 요소가 홀로 존재하거나,

물질적 요소가 발전되고 물질적 요소가 특수결합하여

정신적 요소까지도 포함하는 형식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인간은 말이나 글로써 서로의 의사를 나눈다.

이때 서로간에 나누는 의사가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용하는 기호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해야 한다.


상호 사용하는 기호가 일치하지 못할 때

서로의 의사를 나눌 수가 없게 된다.

불교철학의 범주를 논하기에 앞서

몇 가지 인간사유에 관련된 개념에 대해서

그 정의를 하는 것이 불교철학을 이해하는데 보다 용이할 것으로 사료된다. 



意識 

: 意識的 요소는 사물을 인식하고 思考하며,

저장하고, 유추하며, 판단하고 결정하고 의도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의식은 뇌활동의 기능을 말하며,

뇌는 단지 의식활동이 이루어지는 기관일 뿐이다.

의식은 물질이 최고로 발전한 단계의 산물이다.


의식이 물질발전의 산물이고 물질적 기초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지만

의식이 물질 그 자체는 아니다.

단지 물질에 의존해 있을 뿐이다.


의식은 객관세계를 관념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의식은 인간이 물질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고

각 존재의 고유한 특성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편적인 도구이다.


의식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와 실천적 활동을 계획하고

그 결과를 예견할 수 있게 해준다.

의식은 인간에게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의 상호관계를

통제하고 계획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해준다.


의식이 없다면

인간적인 삶이란 불가능할 것이다.

의식은 심리적 활동의 최고 발전단계로써

언어와 함께 사회적 노동활동이 시작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의식은 일정한 구조를 갖고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모습을 갖추어 나간다.

물질세계의 반영인 의식의 구체적 내용은

의식 속에서 항상 일정한 형태를 띠고 등장한다.


감각, 지각, 개념 등은

의식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반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知覺

: 객관세계를 감각기관을 통하여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감각기관( 眼.耳.鼻.舌.身.意 )을 통하여

객관적 대상을 지각한다.


지각은 객관대상에 대한 감각적, 전체적 모양이며

감각기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대상의 속성이나 관계들을

전체적으로 묘사한다.


발생론적으로 보면

지각은 감각을 바탕으로 성립하지만

각각의 감각들이 단순하게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감각의 반영이다.


의식과 객관적 대상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것은 감각이지만

지각은 전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감각보다 더 의식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과정에서

감각적 반영의 근본적인 형색을 이루는 것은 지각이다.


지각은 그 총체성을 통해서

객관적 대상에 대한 전체적( 直觀的 ) 모양을 중개한다.


이때 외적인 현상 내지 피상적인 관계,

즉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뿐만 아니라

본질적이고 내적인 것, 즉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연관까지도 파악된다.


그러나 지각 속에는

이 모든 관계들이 아직 서로 구별되어 있지 않다.

지각은 단지 현상과 본질이 통일되어 있는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지각은 사유를 위해 필요한 재료를 포함하고 있다.

추상화 보편화를 수행하는 사유는

이 재료로부터 본질적이고 내적인,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관계들을

골라내어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思惟 = 思考

: 思惟 또는 思考란 인간의 의식에 반영된 자료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자료들을 조직화하는 과정이다.


사유는 인간 정신활동의 최고형태이며

思惟는 실재하는 대상 및 그 변화과정에 들어 있는

보편적인 것이나 본질적인 것, 합법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사유는 인간의 사회적인 노동과정에서 싹텄다.

사유란 본래 외적이고 대상에 대한 인식활동,

즉 물질적인 대상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활동이

오랜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

즉 개념이라든가 언어적인 기호 등을 다루는 활동으로 이행된다.


사유의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언어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데 있다.


인간의 의식 활동 및 인간의 사유과정은 言語라는 매개를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


 인간의 사유는

잡다한 감각자료들로부터 일반적인 본성, 고유한 특성, 합법적인 것들을

추출해 낼 수 있으므로

사유는 결정적인 인식구조이다.


사유를 통하여 인간은 자연력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게 되고

사회발전을 의식적 체계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된다.


불교수행 가운데 하나인 명상( 參禪 )은

인간사유과정의 가장 치밀한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사유는 객관적 실재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유는 항상 인간이 자연적, 사회환경과

능동적으로 대결하는 과정 속에서 생성되고 실현된다.


사유는 능동적 성격을 뛰고 있으며 상대적인 자립성을 갖는다.

그러나 사유의 자립성은 단지 상대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유는 반드시 감각적 경험을 토대로 성립하며

그 옳고 그름이 궁극적 기준이기도 한 사회적 실천과정 속에서

발전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유는 여러 면에서 사회적인 제약을 받고 있고,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적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특성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思想

 : 사상이란 사유의 결과물로써

   사유보다 사상이 보다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형태이다.


의식은 홀로 고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투영되는 객관세계를 사유하는 것이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하여 작용하고 있으며

그 대상은 사유의 작용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사유작용은 특정한 사유의 결과물을 낳는다.


사유의 결과물이 체계성과 통일성 그리고 논리성이 주어질 때

그 사유의 결과물은 특정한 견해, 관념, 개념 등의 형태를 취한다.

이것을 思想이라고 부른다.


사상이란 인간이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 진행시킨 일반적인 사유가

보다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형태를 뛰는 것을 가리킨다.

사상은 사회적 시대적 현실 속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가 속해 있는 현실에 정당하게 대처하며

의미 있는 행동을 하는데 실천규범이 되기도 한다.



哲學

: 철학이란 변혁의 도구이며

   존재와 사유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의식은 객관세계의 대상을 감각기관을 통하여

지각하여 알게 되며,

그렇게 지각된 대상은 사유의 단계를 거쳐서

체계화되어 하나의 사상이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사상은

그 사상을 형성시키는데 일차적 요소인 자연과 사회에 대한

보편적인 변동과 발전의 법칙 및 그 관계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곧 철학이다.


대개 철학이라고 하면

세계전체 및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견해 가운데서

이론적으로 정리된 견해를 말하며,

자연, 사회, 사유의 보편적인 변동과 발전에 관한 과학을 말한다.


철학의 근본문제는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에 관한 문제라고 규정한다.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면서 세계의 변화에 따라서 그 내용을 바꿔 나간다.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가 문제되는 것은

그 관계가 일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필요성은

인간이 삶의 과정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그 장애물을 통과하여 도약하든지

아니면 좌절하여 체념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든지

그 장애물을 통과하여 도약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도약의 과정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오랜 시간 형성해 온 사유의 틀이

그렇게 간단하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전진하려면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 도구가 바로 논리적인 사유인 철학이다.


철학은 실천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이론과 실천은 불가분의 통일성을 이룬다.

철학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변혁시키는 수단이자 행위의 지침인 것이다.


인간은 확고한 철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과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


불교도들은 

부처님께서 체계화시켜 놓은 불교철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우리 자신의 삶을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혁시켜야 한다.


철학의 과제는

모든 영역에 걸쳐서 작용하는 보편적인 법칙을 탐구하는데 있다.


철학의 대상은

자연, 사회, 사유의 보편적인 변동과 발전의 법칙을 설명하는 것이다.


철학의 유형은

크게 두 종류의 유파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意識에 대해서 物質이 先行( 일차적인 요소 )한다는 唯物論과

物質에 대해서 意識이 先行한다는 觀念論으로 대별된다.


觀念論은 다시

객관적인 절대의식(크리스트교의 야훼신이나 불교의 비로자나, 대일여래 등의 法身)이

물질에 선행한다고 주장하는 客觀的 觀念論과


 모든 존재에 선행하여 오직 마음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主觀的 觀念論으로 나누어진다.


宗敎 

: 종교는 원시인이 고대사회에서

그 당시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가공할 자연현상 앞에

무기력했던 사실의 반영으로 발생했다.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이 인간의 의지력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초자연적인 절대자가 존재하면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한다고 믿었다.


원시인들은 자연물을 인격화하고

그것에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한 후,

呪文이나 秘術, 儀式 등을 통하여 초자연적인 존재에 영향력을 작용하려고 했다.


모든 종교의 기본적 특징은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절대적인 힘을 부여한 후,

그런 초자연적인 대상에 대한 믿음( 信仰 )과

그런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아부( 禮拜 )이다.


종교는 인간의 想像力이 自然力을 人格化, 神靈化한다.


종교적 형식 및 그것에 상응하는 儀式이나 제도는

일정 정도 역사적 제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인류사에 있어서 매우 오랜 기간

인간은 어떠한 종교적 형태도 알지 못했다.


그 후 思惟와 言語가 발달함으로써

비로소 원시사회에 들어와서 종교적 신앙이 출현할 수 있었다.

500만여 년의 인류사에 종교의 등장은

불과 5 - 7천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크다.


현대 종교학은

기독교의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하여

약 110여년전에 네덜란드의 리벵겔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계급사회에서 종교적 신앙은 계급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사회적 상층부는 그들의 이익을 지속시키는 방향에서,

사회적 소외그룹은 현실의 탈출 또는 현실에 대한 체념의 방향으로,

사회적 중류층은 보다 상층부로의 도약을 위해서

종교를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2. 논의의 틀


현대사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불교철학의 본질을 살펴보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불교도들에게 우선되어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다.


세계철학 일반에서

삶의 문제, 진리의 문제, 변혁의 문제와

불교철학이 만나는 지점을 알아보기 위하여

세계철학 일반의 공통된 진리관에 대해 먼저 알아보는 것은

불교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고 실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삶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현재의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존재들은

자기 자신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자연을 개조시켜 삶에 필요한 물질을 획득하고 있다.


인간도 이러한 생명체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에서

예외일 수 없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계의 먹이 사슬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도 자기 자신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연을 개조시켜 그 산물을 획득하여 살아간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어떻게 하면 생산력을 극대화하여

우리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인가는 하는 문제는

기나긴 인류역사를 관통하는 중심문제였다.


오랜 인류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존과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왔다.


생산도구를 개량시키고,

생산수단과 인간의 결합을 연구하고

더 나아가서 인간관계를 연구하고 발전시켜 왔다.


대부분의 이론가들이나 실천가들은

한결 같이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정리한 이론과 실천의 덕목이야말로

자연을 개조시켜 삶에 필요한 물질을 획득하고

우리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데 적합한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인류의 역사는

삶의 물질적 조건을 발전시키는 것 못지않게

삶의 또 다른 측면인 인간의 의식분야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해 왔다.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

다각도로 연구하고 분석하며 해석하고 재결합시키며

인간의 정신문화를 발전시켰다.


대부분의 이론가들이나 실천가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이 사유하고 정리한 이론과 실천의 덕목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을 맑히고 고요히 하며 행복한 느낌을 극대화하는데

가장 적합한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인류는 긴 역사를 거쳐 오면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그 유효성이 검정된 이론에 순응하고 그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

삶의 문제가 훨씬 수월하게 해결되며 


주관적 확신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것보다는

객관적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인류의 문제, 개인의 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자연을 개조시켜

삶에 필요한 물질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룩해 왔으며,

정신적 요소로 일컬어지는 철학, 문화 등의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물질적 요소뿐만 아니라

정신적 요소는 사회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축적되어 왔으며,

이전 세대에 의해서 축적된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는

사회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물질적 요소뿐만 아니라 정신적 요소가 이전되고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

자연의 질서이며 삶의 현실이다. 



진리의 유효성


진리는 반드시 그 유효성이 검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효성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진리가 보다 더 큰 유효성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절성이 포함되어야 한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그 자신의 생존본능(음식본능, 수면본능, 번식본능)과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즉 모든 존재는

현재의 삶을 지속시키는 과정에서

그 자신에게 최대의 이익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삶을 지속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은

어떻게 하면 생산력을 발전시켜 이윤을 극대화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으로

잉여생산물이 점차 늘어나고 인간의 지혜가 축적되어 나가자

신비적인 절대자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물질세계의 객관적인 법칙에 따라서 행동할 때

생산력의 발전이 극대화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법칙, 진리에 따라서 행동하면

그 유효성이 극대화된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특정한 가설은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그 유효성이 검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떤 사람이라도 특정한 가설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주장이 객관적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그 유효성을 검증 받아야 한다.


인류가 그 자신의 이익을 극대 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행위도 그것이 유효성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연계에 존재하는 객관적 법칙,

즉 객관적 진리에 따라서 행동할 때이며 객관적 실천을 통하여

그 유효성이 검증된 이론만이 진리로 인정할 수 있다.


특정한 가설이나 주장이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그 유효성을 검증 받음으로써

우리들의 삶의 한 복판으로 등장하게 된다.


특정한 가설이

사회적 실천을 통해 그 유효성이 검증되지 않는 다면

그런 가설은 오로지 가설에 지나지 않거나 단순한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검증되지 않는 가설은

그것이 검증될 때까지는 일종의 迷信이다.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마치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검증된 진리인 양 다른 사람에게 선전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진리와 유효성의 문제는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 영역에서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철학이나 종교이론 역시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검증 받아야 한다.


그러나 철학자나 수행자를 비롯하여

형이상학적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사회구조의 생산 현장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설정한 가설을 사회적 실천을 통해

그 유효성을 검정하려고 하는 노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과학자라면

누구든지 당연히 문제삼는 가설의 유효성을 문제삼지 않는

어리석음으로 일관해 왔다.


실천을 중요시하고 있는 변증법적 세계관의 철학자나

객관적 진리를 중시하는 불교수행자마저도

그들이 지금까지 안주해 온

비실천적이고 몰세속적인 사유의 습성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여러 형태의 불교이론과 불교수행형식들도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반드시 그 유효성을 검증받아야한다.


여러 가지 제시된 불교적 가설이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검정될 때만이

여러 형태의 불교이론이나 불교의 수행형식 등이 객관적 진리로서

당당히 역사무대에서 그 역할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특정한 정치 이데올로기나, 사회사상, 경제사상,

특히 불교에서 주장하는 불교이론이나 불교수행 형식 등이

대중성을 획득한 것과

그러한 사유형태가 객관적인 진리인가 하는 문제는

반드시 구별하여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의식구조는

물질조건으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

이러한 구별은 더욱 세심한 주의력이 필요하다.



문제해결( 변혁 )을 위한 사고방식


우리들은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정한 형태의 사유형식을 필요로 한다.


현재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사유형식으로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지금까지의 사유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사유형식을 취하거나 창출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의 사유형식은

사회의 물적 토대의 존재양식과 변화에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류는 알게 되었다.


물적 토대의 존재형식의 변화에 의해

이제까지의 사유형식이 그 유효성을 상실할 때,

이제까지 판단의 지침으로 삼고 문제를 처리해 온 사유형식이

새로이 야기된 사태와 모순될 때,

이제까지의 사유형식의 토대가 동요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의 사유형식을 믿을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당연히 현실사회나 기존의 사유형식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


이 경우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대개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현상을 적극적으로 변혁하려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현상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 소극적인 방향이다.



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ꠏꠏꠏ 균형기의 철학

ꠐ 철학의 ꠐ  ꠐ

ꠐ 제유파 ꠐꠏꠏꠋ                   ꠆ꠏꠏ 현상긍정적 입장의 철학

ꠌꠏꠏꠏꠏꠏꠏꠏꠏꠎ  ꠌꠏꠏꠏ 전환기의 철학ꠏꠏꠋ  

                                ꠌꠏ  현상부정적     ꠆ꠏꠏꠏ 체념적 방향을 취하는 철학

                                    입장의 철학  ꠏꠏꠋ    

                                                   ꠌꠏꠏ  논리적 방향을 취하는 철학 





사회철학이나 종교사상이

현재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여

기존사회를 변혁하려고 할 때,

대체로 두 가지 방향의 행동유형을 보인다.


하나는 객관세계를 변혁시켜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논리적인 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주관적인 생각, 즉 개인의 마음을 달래는 방식이다.


우리들이 어떤 사상이나 철학, 종교 등을 다룰 때

그것이 객관적인 현실에 대해서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며 체념시키는 체념의 이론인가 아니면


객관적인 현실의 장애물을

논리적으로 접근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하는 변혁의 이론인가를

분명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철학이나, 종교이론이

우리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극대화하는데 기여하는가를

명확하게 판단해야만 할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냉철한 지성과 이성에 호소하고 있다.


간접경험에 의해 획득된 지식보다는

직접체험을 통해서 획득한 지혜를 기초해서

삶의 문제를 논리적이며 지성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실과 진실


사실과 진실은 일치할 수도 있지만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이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진실은 그러한 사실을 도출시킨 원인이나 조건에 비중을 두고

특정한 현상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특정한 현상이 대중성을 획득하였다고 해서

그 현상이 반드시 객관적인 진리와 부합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떤 특정한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식주체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그


것은 각 주체가 처해 있는 구체적인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현상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현상을 이끌어 낸 모든 조건을 면밀히 검토하고 난 뒤,

드러난 현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개 사회적 의식이

사회적 존재와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간에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일 뿐이지만,


모든 사유형식 속에는

반드시 일정한 사회적 존재가 스며들어 있어 여러

유형의 사유형식을 창출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느 특정한 시기의 사회적 사유형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러한 사유형식을 형성시킨 물적 토대를 세밀히 파악해야 한다.


사실과 진실이 일치할 수도 있지만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현상을 파악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특히 역사적 사실을 다룸에 있어서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면

사회적 존재가 일차적이고 사회적 의식은 이차적인 것이 된다.


사회적 존재의 존재양식에 따라서

사회적 의식형태는 다양하게 표출된다.

동시에 사회적 의식은 다음에 형성될 사회적 존재에 대해서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럼으로 존재와 의식은 상호 의존해 있으며 그 영향을 공유한다.



열린이론과 닫힌이론


열린이론에 따라서 현상을 분석하고 판단할 때는

그 현상의 형식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다.


닫힌이론에 따라서 현상을 분석하고 판단할 때는

현상을 파생시킨 모든 조건을 면밀히 검토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에 의하여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에는

열린이론으로 접근하는 방식과 닫힌이론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다.

우리들이 어떤 특정한 현상을 파악하고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의 행동유형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객관적인 조건을 무시하고

자기가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 범위에 집착하여

극단으로 몰고 가는 흑백논리에 젖는 행동이다.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여

문제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해결의 관점을 제시하려고 하는 정당한 논리를 들 수 있다.


전자를 닫힌 이론에 의한 행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열린 이론에 입각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이론에서

어떤 이론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효성이 있는가는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그 유효성을 검증할 수 있을 때

해당 이론의 진리성을 객관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인류가 도달한 경험과 지식에 의하면

현 단계에서는 이 두 이론 가운데

후자가 전자에 비해서 그 유효성과 진리성이 탁월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의미있는 작은 게송들


최근의 의학적인 연구들은,

정신분석학적인 실험과 초심리학이라 불리는 것들에 의해서

마음의 본성과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몇몇의 불빛을 제공해주고 있다.


지난 40년 동안 확신은

사람에 대한 의학적인 지식들 가운데서

사람의 기초뿐만 아니라 죽음의 원인, 인체의 조직 등에 관해서,

특히 정신적인 상태에 관해서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강한 확신들이 성장해왔다.


인간의 몸은 병들고

그 원인은 사람의 마음이 몸을 통제하든지 아니든지 간에,

병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없는 흔들리는 상태로부터.

물리적인 원인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죽음을 막는 것으로부터

환자의 심리적인 상태가 관련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음은 특정한 병을 만들 뿐만 아니라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낙천적인 환자들은 환자들이 더 나빠지거나 더 불행해지는 것 보다

더 좋아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최근의 보고들은

심지어 조직에 병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에도

그것을 고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인해서 즉각적으로 고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계로 인해서

복과 보다 좋은 상태로 태어나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악으로부터 보호와 해방을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하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교도들의 안에서 일반적으로 유행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암송하는 것과 연관되는 것은

빨리어로 된 짧은 게송들이다.


모든 것들은 보호를 의미한다.

그것들은 어떤 경전을 묘사하거나 또는 보호를 제공하는 부처님의 대화나

거친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짧은 게송을 암송하거나 듣는 것은

초기불교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다.

확실한 것은 그들의 암송이 그것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이고 확신있는 부처님의 말씀들로 인하여

정신적인 좋은 상태로 만들어 주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좋은 상태는

사람들로 하여금

병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정신적 상태를 제공해 준다.


정신적인 상태는

마음의 부정적인 상태를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고대인도에서는 

사람들이 짧은 게송을 듣고서 아솜의 내용을 이해했다.

그들에 대한 이러한 효과는 더 좋게 교정했을 것이다.


부처님 자신도 그 자신을 위하여

이러한 짧은 게송을 암송하는 것을 듣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병이 들었을 때

이러한 짧은 게송을 듣기를 원했다.

이러한 수행은 불교국가들에서는 일반적인 전통이 되어 유행하고 있다. 


부처님과 아라핫뜨는

다른 사람이 암송하는 도움이 없이도

짧은 게송에 마음집중을 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들 스스로가 병이 들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암송하는 것을 통하여

보다 쉽게 마음집중을 할 수가 있다.


따라서 경전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출 수가 있는 것이다.

병의 경우와 같이 마음이 약해졌을 때,

다른 사람의 암시가 자기암시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될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은 육체적인 건강과 좋은 상태가의 영향력이

정신적인 상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의사들은 순수한 육체적인 병은 없다고 말한다.

나쁜 정신적 상태는 성급한 악한 행동의 원인이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적인 건강과 육체적인 좋은 상태를 잘 유지하는 것은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짧은 게송의 암송의 떨리는 소리는

신경을 부드럽게 한다. 즉 마음의 평화와 조화를 가져온다.


 짧은 게송의 암송을 들으면서

악한 마음이 중화됨으로 나쁜 영향력을 어떻게 뽑아낼 수 있을까.

글쎄, 그것들은 악한 생각의 결과이다.


그것들은 따라서 좋은 마음의 상태를 파괴한다.

 - 짧은 게송에 대한 지적이고 분명한 - 


마음집중의 힘은 소리에 집중함을 통하여

그리고 악한 상태가 일어나는 나쁜 영향력을 몰아내는 진리에 대해서

전심전력으로 마음집중하는 것을 통하여 가능하다.



짧은 게송들


이러한 짧은 게송을 통하여

부처님에게 존경과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교도들이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하는 모든 불교도의 의무이다.


빠리어 문장에 따라서 세 번 암송해야하며

뒤이어서 삼보에 귀의해야 한다.

이러한 의식은 단지 위대한 부처님과 그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하시는 수행자들을 존경하는 의미일 뿐이다.


   

     般若心經 특강







                  일시  1999년 3월 11 - 12일

                 장소  근본불교 Sangha

                        [다보선원]

                 법사  빅쿠 붇다빠라

                 주관  지혜수행모임









1. 반야심경의 성립배경


1)  반야심경은 초기대승경전에 속한다.


2)  대승경전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B.C.E. 486년부터 약 3 - 4 백년 뒤인 B.C.E. 1- AD 1C 사이에 인도남부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은 아니고 부처님과 그 직계제자들 그리고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거기에 가공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만들어진 일종의 불교역사소설이다. 이러한 불교역사소설, 즉 대승경전들은 그것들이 처음 역사무대에 나타난 이래 AD 6세기까지 약 7백년동안 방대한 양이 창작되었다. 맨 처음에 창작된 것이 반야부이고 이어서 화엄경, 법화경, 아미타경 등이 만들어졌다.


3)  반야부는 소품반야 10권, 대품반야 30권, 대반야 600권, 등 여러 종류가 있다.


4)  반야심경은 대반야경에는 속하지 않으나 大本과 小本 두 종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들이 주로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현장스님이 번역한 小本이다. 반야심경은 본래 대반야경을 요약하여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반야심경의 心자는 梵本에는 hridaya, 즉 心臟을 가리키는 용어로써 이는 방대한 반야계통 경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만을 발췌한 것을 뜻한다. 이것은 소품반야에서 대반야로 확장될 때 대반야경을 요약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해서 반야심경이 단순히 대반야를 요약만 한 것은 아니다.


반야심경은 그 나름대로 전 반야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을 시도한 놀라운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다. 般若, 五蘊, 諸法, 空, 6根, 6境, 6識, 12因緣, 4聖諦, 아뇩다라삼박 삼보리( 等正覺 ), 呪 등의 교리체계를 모두다 나타내고 있다.  대승불교가 행해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반야심경처럼 널리 읽히는 경전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5) 반야심경 사상 성립에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요인


  ① attam(我 : atman), 윤회설

  최초 인도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사유구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AC 10기경 인도 대륙에 침입한 아리아인들은 모든 존재에는 변하지 않는 본질, 즉 attam(我)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attam(我)을 중심으로 해서 창조신과 윤회설이 결합하여 인도신분제도인 카스트제도를 만들었다. 이것이 고대인도사회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BC 6세기경에 태어난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에 변하지 않는 본질은 없으며 존재는 조건지어진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고정불변 하는 실체를 부정했다. 그것이 anicca(無常) - dukkha(苦) - anattam(無我)의 三法印이다. 부처님은 창조신과 윤회설을 부정하였고 신분제의 이념토대인 카스트제도를 전면부정하고 개인의 능력에 상응하는 대가가 지급되는 능력제를 주장했다. 이 능력제에 대한 불교적 슬로건이 因果였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 불교도들은 처음 100년 동안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집하고 보관하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다음 200 -300 년 동안은 수집되고 보관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친불교적인 마우리와왕조의 아쇼카왕이 인도대륙을 통일하자 그것은  불교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불교도들은 존재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가설 하에 모든 불교사상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antica(無常) - dukkha(苦) - anagram(無我)의 三法印을 믿으면서 동시에 영원불변하는 실체인 atta(我)을 인정하고 믿는 사림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② 슝가왕조의 불교탄압(봉건제 왕조의 등장)


   BC 3세기 친불교적이던 마우리아왕조가 몰락하고 친힌두교적인 슝가왕조가 등장하였다. 슝가왕조는 불교에 대하여 가혹한 탄압을 가하였고 불교는 처음으로 가장 가혹한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 슝가왕조는 불교수행자 200만명 정도를 죽이고 수만개의 사찰을 파괴했다고 한다. 특히 슝가왕조의 등장은 인도대륙에 본격적으로 봉건왕조와 신분제 사회의 등장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봉건왕조는 신분제 질서와 절대자 개념을 통하여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이념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신분제와 절대자 개념 이외의 사람의 능력이나 가능성을 강조하던 불교는 사회적으로 점차 세력을 상실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존립의 선택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여기서 불교는 불평등한 사회제도를 변혁시키고자 투쟁한 것이 아니라 해당 사회제도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반영하여 BC 1 - AD 1 사이 신불교 운동이 대두하게 되었다. 그것을 대승불교운동이라고 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불교사상에 절대자 개념을 도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attam(我)을 부정하는 철학적 입장을 견지했다. 특히 존재론에서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 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조건이 변하면 존재도 변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념을 부처님께서는 緣起라고 표현했고 대승불교도들은 空이라고 표현했고 여기서는 『조건지어진 존재』라고 정의한다.



6) 반야심경에 관한 몇 가지 개념정리


   반야심경 사상의 핵심은 智慧와 空 사상이다. 지혜란 대상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이해수준을 나타내는 불교적 용어이며 공이란 불교의 존재론을 말한다.


 ① 지혜

  지혜란 현상에 내재해 있는 실재나 본성 또는 법칙성을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지혜는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을 먹고 자란다.


 ② 현상과 실재

  현상의 실재는 관찰자의 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현상은 관찰자의 수준에 따라서 다차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③ 바라밀

  바라밀이란 수행의 도구, 행복으로 가는 도구이다. 이러한 바라밀은 대개 6바라밀 또는 10바라밀이 정형화되어 있다.


   ❶ 6바라밀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 

   ❷ 10바라밀

     6바라밀에 더하여, 方便, 願, 力, 智






2. 般若心經 해석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법수행을 자유자재(自在)로 하는 보살(觀自在菩薩)이 심오한 반야바라밀 = 지혜수행을 할 때 五蘊의 본성(실재, 법칙성)이 조건지어진 존재(緣起 또는 空)라는 것을 이해하시고는 비로소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 

   觀 = 알아차림, sati 수행 = 위빠사나 수행

   보살=대승불교 수행자

   반야바라밀 = 지혜수행(알아차림, 실재보기, 위빠사나)


(오온 자체가 공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현상적으로 존재한다. 그 본성이 공이다. 이는 大本에 ... 照見五蘊自性皆空..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뿟다여. 인식대상(色 :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을 모두 포괄함)은 조건지어진 현상과 다르지 않으며, 조건지어진 현상이 인식대상과 다르지 않다. 인식대상이 바로 조건지어진 현상이며 조건지어진 현상 그것이 바로 인식대상이다. 감각적 느낌(受, vedana), 과거생각(想, sanna), 미래의지(行, sankara), 관념(識 : vinna, 식별작용, 개념) 등도 이와 같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뿟다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諸法)는 조건지어져(空相) 있기 때문에  관찰자의 수준에 따라서 달리 인식되고 다양하게 평가될 수 있다. 진리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상대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조건지어진 현상 그 자체는 있다 없다, 길다 짧다, 살았다 죽었다, 더럽다 깨끗한 것이 아니다. 뭔가 생겨난다거나 소멸한다거나 아니면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것 등은 관념판단이지, 사실판단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관념을 투사하여 관찰하기 때문에 인식대상을 관찰자의 관념대로 왜곡시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 결과 고통은 증가하고 행복은 멀어지게 된다.



是故空中 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그러므로 이 조건지어진 현상(空)에는 고정된 인식대상(色)이나 감각적 느낌(受), 과거생각(想), 미래의지(行), 관념(識)도 없으며,

감각기관(眼耳鼻舌身意 = 6根)과

인식대상(色聲香味觸法 = 6境),

그리고 지각작용(眼界, 耳界, 鼻界, 舌界, 身界, 意識界 = 6識)도 없다.

無明에서 늙어 죽음에 이르는 12因緣1)도 없으며,

거룩한 四聖諦2)도 없으며,

현상에 내재해 있는 실재나 본성 또는 법칙성을 이해하는 지혜도 없으며

지혜로써 얻게되는 수행의 공덕도 없는 것이다.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眭碍 無眭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이처럼 얻을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자(菩薩은 菩提薩埵의 준말)는 지혜수행을 통하여 마음을 짓누르고 구속하는 장애를 제거하고(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존재하던 장애를 제거하여 마음이 한없이 상쾌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삶에 두려움이 없다.


그 결과 인식대상을 바라볼 때, 관념의 굴레를 벗어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마침내 道果에 들어 최상의 행복인 닙바나를 체험하게 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바로 이 지혜수행에 의지해서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셨던 것이다.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그러므로 지혜수행은 매우 신통스런 주문이며, 혼돈스런 마음을 크게 맑히고 밝히는 주문이며, 최상의 주문이며, 비교할 수 없는 주문이며, 모든 고통을 제거해주며, 가장진실 되며 헛된 것이 아님을 알아라.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지혜수행의 주문은 다음과 같이 설해졌다.



揭帝  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堤  僧莎訶

가데  가데  바라가데  바라승가데  보디  사바하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저 깨달음의 세계로 




1)  12因緣 또는 12緣起로 알려져 있는 불교교리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개념이다. 12인연이란 인간의 삶을 12단계로 나누어서 각 단계의 형성원인과 다음 단계로의 영향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이러한 사고는 인도인들의 분석적인 사유개념으로써 불필요하게 지나치게 세분한 느낌이다.


    12인연은 처음부터 정형화되어 설해진 것은 아니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정형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후세 불교도들은 12인연을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의 삶과 죽은 이후의 삶까지로 확대해석 하여 전생과 금생 그리고 내생으로 연장시켜 해석하고 있는데 근본경전 어디에도 그렇게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는 곳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법은 후세불교도들의 관점에 불고하다. 12인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無明( avijjā : 無知 ) →  │② 行(saṅkhāra : 조건지어진 존재) 

                           │③ 識(viññāṇa : 식별작용, 관념)  

                           │④ 名色(nāma-rūpa : 마음과 물질) 

                           │⑤ 六處(saḷāyatana : 감각기관 )   

                           │⑥ 觸(phassa : 인식대상과의 접촉) 

                           │⑦ 受(vedanā : 감각적 느낌)      

                           │⑧ 愛(taṇha : 바램, 욕망, 이기심)

                           │⑨ 取(upādāna : 집착)            

                           │ꊉ 有(bhava : 현상의 씨앗)       

                           │ꊉ 生(jāti : 현상의 발생)        

                           │ꊉ 老死(jarāmaraṇa:지속과 소멸)    

   

                          → 苦(dukkha : 불만족함)이 생김 : 고통스러움)


    이러한 연기의 12가지 과정은 12가지 개념이 연결되어 설명되기도 하고, 중간의 몇가지 항목이 빠지기도 하고, 또는 無明에서 바로 하나하나 항목으로 설명되고 곧바로 불만족스러움, 고통스런 느낌으로 전개되기도 하는데,  초기 경전에서는 대개의 경우 무명에서 각항목으로 연결되고 불만족스러움, 고통스러움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이 연기설의 핵심은 無明, 즉 모든 현상에 내재하는 내용이나 본질 또는 실재를 이해하며, 현상을 관통하는 법칙성, 즉 일반적인 본성(진리)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어떤 특정한 행위가 행해지며 그 결과 불만족(괴로움)한 느낌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12연기를 이해함에 있어서 인도인의 사유구조와 중국인의 사유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인도인들의 사유구조는 사물이나 현상을 분석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따라서 그들은 가능한 모든 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데까지 분석하여 이해하는 특성이 있는데 반하여 중국인들은 사물을 이해함에 있어서 응축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따라서 그들은 가능한모든 현상을 응축할 수 있는 데까지 응축하여 이해하는 특성이 있다.


    인도인들의 사유구조를 分析美라면 중국인들의 사유구조는 凝縮美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기법을 12 항목으로 그렇게 세분한 필요가 없었는데 인도인들의 사유양식이 그렇게 세분화시킨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2) 부처님께서 사르나트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 가장 방해요소가 바로 불만족스런 느낌, 고통스런 느낌(苦)

   -고통스런 느낌, 불만족스러운 느낌의 근본원인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나     이기심에 집착하는 마음(集起),

   - 집착하는 마음을 소멸시키고, 불만족스러운 느낌이나 고통스런 느낌을 소멸시     키고 행복으로 가는 것(滅).

   - 그 방법이 바로 八正道라는 것(道)이다.


 ① 올바르게 봄 : 正見( sammā - diṭṭhi )

 ② 올바르게 사유함 : 正思惟( sammā - saṅkappo)

 ③ 올바르게 말함 : 正語( sammā - vācā )

 ④ 올바르게 행동함 : 正業( sammā - kammanto )

 ⑤ 올바른 생존수단을 가짐 : 正命( sammā - ājīvo )

 ⑥ 올바르게 노력함 : 正精進( sammā - vāyāmo )

 ⑦ 올바르게 알아차림 : 正念( sammā - sati )

 ⑧ 올바르게 마음집중함 : 正定( sammā - sammādhi )


    바로 이 苦集滅道의 네가지 개념은 불교에서는 四聖諦라고 한다. 사성제와 中道의 개념은 부처님께서 사르나트에서 5명의 빅쿠에게 최초로 설법한 이래 불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중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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