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풍수

[스크랩] 세종대왕과 비 소헌왕후의 능 천장(이장) 내력

청원1 2006. 1. 2. 10:29
세종대왕의 아들들 가운데서 장자인 문종대왕은 즉위한지 겨우 2년만에 승하하고, 그 아들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영월땅에 유배되어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등 나라에 크고 작은 변고가 많아 헌릉 아래 있는 영릉이 길지가 아니니 다른 곳으로 천장(이장)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 되었다.

이에 세조대왕께서 신숙주, 한명회, 서거정 등에게 명하여 영릉의 개장을 논의케 하였다. 그러나 서거정은 "천장을 하는것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라며 이장을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였다.

세조가 승하한 뒤 예종이 즉위 하면서 다시 영릉의 천장 문제가 거론되었고, 예종은 1468년 노사신, 임원준, 서거정 등을 여러곳에 파견하여 천장할 땅을 물색토록 하였다.

이중 한패는 광주, 이천땅을 거쳐 여주 땅을 답사하게 되었다. 산천이 수려하고 강물이 맑은 여주 북성산에 대신들과 지관이 올라 사면을 바라 보았다. 마침 산기슭에 정기가 어리어 있는 곳이 있어 찾아 올라가 주위의 지세를 살펴보니 이곳이 풍수적으로 매우 뛰어난 지세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곳에는 세조때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과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가 있었다.

일행은 서울로 돌아와 예종에게 살펴본 내용을 복명 하였다. " 몇군데 산릉 자리를 살펴 보았지만, 이계전의 무덤이 있는곳이 자손이 번창하고 만세에 승업을 계승할 땅이라며 왕릉을 모실 장소로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사옵니다" 라고 아뢰었다.

예종은 이계전의 무덤 자리로 영릉을 천장하기로 결정하고 정인지, 강희맹, 서거정 등을 천릉도감으로 삼고 산릉의 일을 나누어 담당 하도록 당부 하였다.

예종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를 불러 그자리를 비워 달라는 말은 못하고 은근히 당신의 뜻을 비추셨다. 이에 이극배는 아우들과 상의 한 끝에 자리를 내 놓았고 예종 또한 기쁜 마음으로 천장 할 수 있었으며 예종은 부모의 묘를 이장하는것은 매우 애절한 일이라며 이극배를 불러 의정부 우참찬(정2품)으로 승진 시키었다.

([예종실록]권 3)

이극배의 집안에서도 이장을 하기위하여 산소를 파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비기를 새겨 넣은 글 한귀가 나왔다. "이자리에서 연을 날리어 하늘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바람에 날리어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 묘를 옮기어 모셔라."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연은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약 10리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자리에 이장한 후에도 자손이 번창 하였다. 그리고 연이 떨어진 마을이라 하여 연주리라 하였다고 한다.

영릉을 이 자리로 이장하였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100년더 연장 되었다는 설이있다 이를 "영릉가백년" 이라 한다.

영릉의 형국은 북성산이 영릉을 향하여 신하가 부복한 형상으로 산세가 북으로 달리다가 다시 한줄기 봉우리로 솟으면서 남으로 머리를 돌려 주산인 칭성산을 감싸고 끊어진 형세를 이루어 마치 꽃봉우리를 에워 싼듯한 "모란반계형"의 명당이라 한다.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인간문화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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