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慈大悲愍衆生 대자와 대비로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大喜大捨濟含識 대희와 대사로 함식(중생)들을 제도하시며
相好光明以自嚴 상호(相好)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의해 저절로 장엄되어진 분에게
衆等至心歸命禮 저희 대중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해 귀의하고 예배합니다.
▶ <왜 '자비(慈悲)'로써 중생들을 제도하시고>라고 하지 않고,
<자비로서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희사(喜捨)로 제도하시고>라 했는가?
'자(慈)'와 '비(悲)'는 중생을 향하여 갖게 된 내면적(內面的)인 마음이다.
'희(喜)'와 '사(捨)'는 중생을 향하여 갖게 된 내면적인 마음인 '자'와 '비'를 중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외향적(外向的)인 마음(적극적, 실천적인 마음)이자,
전개 과정에서도 일체의 것으로부터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마음상태이다.
부처님은 뭇 중생을 제도하시되 이러한 마음상태로써 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부처님을 배우고 닮아가려는 보살(수행자)들이 궁극적으로 지녀야할
4가지 한량없는 마음이라고 하여 사무량심이라고 한다.
*사무량심(四無量心) : 불교에서 보살이 지녀야 할 4가지 마음가짐.
① 자무량심(慈無量心): 상대를 그윽하게 보는 마음이다.
그윽하게 본다는 것은 ‘자신에게 무한한 가치가 있듯 상대 또한 그러한 줄 알고 대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는 대상을 대할 때 어떠한 선입견이나 편견이 있지 않은 그저 있는 그대로 원래 모습으로 보아주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② 비무량심(悲無量心):대상을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일어나는 대상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는 식(識)을 가진 생명체가 그릇된 견해로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역시도 대상에 대해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마음이 아니다.
③ 희무량심(喜無量心):대상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인해 대상을 올바르게 인도해 주려는 적극적인 마음이
전개되는데, 그 과정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여여(如如)함을 유지 하는 마음이다.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기꺼워하는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일체의 것으로부터 동요하지 않는 마음상태라는 것이다.
④ 사무량심(捨無量心):자심(慈心)과 비심(非心)을 희심(喜心)으로써 펼쳐내어도 자신은 일체 그것으로부터
착(着)하지 않는 마음이다.
*상호(相好) : 부처님의 육신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 형상(形相).
그 중에서 현저하게 보기 쉬운 것을 32相(또는 32大人相)으로 나누고, 미세하여 보기 어려운
것을 80種好(또는 80隨形好)로 나누어 양자를 합하여 상호(相好)라 한다.
‘相’은 위인으로서 석가모니가 구비한 32가지 커다란 신체적 특징을 가리키며,
‘好’는 80가지 미세한 특징을 가리킨다.
'32상'에는 ① 흔히 육계(肉)라 하는 정수리의 혹(最勝頂相), ②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간
짧은 곱슬머리, ③ 두 눈썹 사이에 난 터럭(眉間毛相), ④ 40개의 완전한 모양을 갖추고
크기가 같으며 눈이 부시도록 하얀 치아, ⑤ 넓고 긴 혀, ⑥ 황금빛이 도는 피부, ⑦ 똑바로
섰을 때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팔, ⑧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의 물갈퀴, ⑨ 발바닥에 있는
1,000개의 바퀴살이 달린 바퀴 무늬 등이 포함된다.
32相은 전륜성왕(轉輪聖王)도 이것을 갖추고, 80種好는 보살에도 있다.
부처님은 과거세에 있어서 백대겁(百大劫)의 사이에 특히 상호업(相好業)을 닦았기 때문에,
금생에 있어서 이 상호를 성취하였다고 한다.
단,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상호는 무량(無量)하다고 설(說)하는 이도 있다.
*상호광명(相好光明) : 부처님의 상호에서 밝은 광명을 비추는 것.
* 귀명(歸命) : 범어(梵語) namas의 번역.
나무(南無)로 음역(音譯)하며 ‘찬미하나이다’, ‘귀의하나이다’ 등의 뜻을 가진다.
그러면 흔히 ‘귀의(歸依)’라고 번역하거나 또는 ‘나무’라고 음역하는 그 말을
왜‘귀명’이라고 했을까?
‘명(命)’은 목숨의 근원으로서 인간의 모든 기관과 그 기능을 통어(統御)하는 것이며,
인간이 가장 중시(重視)하는 것이다.
이 비(比)할 바 없이 귀중한 목숨의 근원을 들어 더할 바 없이 높은 삼보(三寶)께 대한
신심(信心)의 극(極)을 표시하는 것이다.
‘귀(歸)한다’ 함은 ‘원천(源泉)으로 돌아간다’ 즉 ‘환원(還源)’이란 의미이다.
‘이제 목숨을 다해 탐(貪), 진(瞋), 치(癡)로 가득한 번뇌의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集中)시켜서 그 본래의 원천(源泉) 즉 하나인 마음(一心;본래의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가겠다’는 가장 적극적인 서원의 표현이다.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소에서 참조)
至心歸命禮 金剛上師 마치 금강(金剛)과도 같은 뛰어난 스승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해 예배하고 귀의합니다.
▶ 보통 부처님에게 발원(發願)을 하거나, 예경(禮敬)을 올릴 때는 그 시작을 삼귀의례(三歸儀禮)로 한다.
예참문(禮懺文)도 그 시작은 부처님의 내외적(內外的)인 마음과 장엄(莊嚴)스러운 모습을
찬탄하며 예경(禮敬)을 드리는 것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뒤이어 삼귀의례를 하기 전에 '금강상사(金剛上師)'로 표현되는 스승님께 먼저 예경을 올리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금강(金剛)’은 아주 단단하여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 물질이다.
그래서 어떠한 내적(內的) 외적(外的)인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물들거나 흔들리거나 변치 않는
단단하고 견고한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성으로 많이 비유(譬喩)된다.
따라서 '금강상사(金剛上師)'는 마음의 상태가 금강과 같이 되신 분,
즉 마음의 눈을 떠서 늘 변치 않고 여여(如如)하게 마음의 평온(平穩)을 유지하며,
그 변치 않는 견고함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집착과 번뇌를 끊게 해 주어 마침내는
해탈(解脫)로 나아가게 인도해 주시는 분을 말한다.
이 분들은 우리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해 주시며, 그 바른 뜻을 제대로 알아서
갈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는 큰 스승들이시다.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에 예경(禮敬)하기 전에 먼저 나로 하여금 이 삼보를
만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인도해 주신 고마운 스승님들께 감사의 예경을 올리는 것이다.
歸依佛 부처님[佛寶]께 귀의합니다.
歸依法 부처님의 가르침[法寶]에 귀의합니다.
歸依僧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僧寶]에게 귀의합니다.
我今發心 不爲自求 人天福報 聲聞緣覺 乃至權乘 諸位菩薩
제가 이제 (부처님에게 예배하고 참회하려는) 마음을 일으킴은 인간계나 천상계에 태어나는 복이나,
성문이나 연각 그리고 방편적인 가르침[權乘]을 베푸는 모든 지위에 있는 보살을 구하고자[되고자]
함이 아니요,
唯依最上乘 發菩提心
오직 가장 뛰어난 가르침[最上乘]에 의지하여 보리심[진리를 향한 마음]을 일으켜서
願與法界衆生一時同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온 세계의 중생들과 더불어 일시에 모두 최고의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菩提]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삼귀의례(三歸儀禮)를 한 뒤에,
내가 왜 부처님을 비롯하여 큰 스승님들에게 예배(禮拜)하고 참회(懺悔)하려는 지에 대한 이유를
고(告)하며 서원(誓願)한다.
그 서원(誓願)은 단지 좋은 환경의 세계에 태어나는 복락(福樂)을 얻거나, 또는
단지 훌륭한 수행자-보살과 같은-가 되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부처님의 핵심적 가르침에 의지하여 그 가르침대로 자신도 최고의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과 같은 대 자유인(自由人)이 되겠다는 것이다.
*성문(聲聞) : 부처님이 가르치는 음성을 듣고서 수행하는 사람.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을 구하는 불제자들의 태도에 가치를 개입시켜 자기의 깨달음만을
얻는 데 전념하여 이타행(利他行)이 결여된 출가 수행승을 성문이라고 하여 소승(小乘)의
무리에 속하는 것으로 폄하한다.
즉 자기의 깨달음밖에 생각하지 않는 성자, 자기의 완성만을 구하여 노력하는 출가승을 가리킨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가르침의 음성을 듣고서야 비로서 수행할 수 있는 제자를 가리킨다.
이런 성문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무한히 오랜 시간에 걸쳐 수행한 결과로서 아라한의 지위에
도달한다.
대승에서는 성문·독각(獨覺 : 스승 없이 깨달음에 이르는 자로서 연각(緣覺)이라고도
불림)·보살(菩薩)을 3승(三乘)이라고 칭하며, 이중 성문과 독각을 소승 또는 2승(二乘)이라 하여
낮게 평가한다.
*연각(緣覺) : 불교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성문(聲聞 sravaka)과는
달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 독각(獨覺)·벽지불(支佛)이라고도 함.
*보살(菩薩) : bodhisattva(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확정된 이’라는 뜻)의 음역(音譯)인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
자미도 선도타(自未度 先度他: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제도한다)라는 말을 낳았으며,
불교적인 활동의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다.
*권승(權乘) : 중생의 근기(根機)가 약하여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진실한 가르침으로 끌어들이려는 방편·수단으로 ‘실(實)’이 아닌 ‘권(權)’으로
아직 진실한 뜻을 나타내지 않은 가르침.
*보리(菩提) : bodhi(산스크리트·팔리어로 ‘깨달음’ 또는 ‘자각’이라는 뜻).
불교에서의 '궁극적인 깨달음'. 이로 인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열반(涅槃)에 이르게 된다.
궁극적인 깨달음은 모든 불교도의 궁극적인 이상이며, 자신의 잘못된 믿음을 없애고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소승불교의 깨달음을 궁극적이지 않은 낮은 경지로 규정한 대승불교는 이러한 깨달음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열반에 들기를 미루는 보살(菩薩)의 자비에도
큰 가치를 부여한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위없이 높고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으로 번역.
至心歸命禮 十方盡虛空界 一切諸佛
어느 곳에나 항상 계신 모든 부처님들께 허공의 세계가 다할 때까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해 예배하고 귀의합니다.
至心歸命禮 十方盡虛空界 一切尊法
어느 곳에나 항상 존재하는 모든 존귀하신 가르침에게 허공의 세계가 다할 때까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해 예배하고 귀의합니다.
至心歸命禮 十方盡虛空界 一切賢聖僧
어느 곳에나 항상 계신 어질고 성스러운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허공의 세계가 다할 때까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해 예배하고 귀의합니다.
▶ 부처님 앞에서 예경하고 참회하려는 이유와 서원을 밝힌 뒤에 다시 한번 삼보(三寶)에 대한
지극한 마음을 표(表)한다.
至心歸命禮 如來 應供 正徧知 明行足 善逝 世間解 無上士 調御丈夫 天人師
佛 世尊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해 예배하고 귀의합니다.
▶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 진리에 따라 오신 분을 ‘여래(如來)’라고 한다.
이 여래라는 분은 특징이나 자격, 역할 등에 의해 그 호칭(呼稱)이 달리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본문에 열거된 10가지이다. 이를 여래십호(如來十號)라 한다.
어떤 역할과 신분을 갖든, 어떻게 불리워지든 나의 큰 스승이신 부처님께 지극한 예경을
표(表)한다는 것이다.
* 여래십호(如來十號) : '여래'를 일컫는 10가지 다른 칭호(稱號).
(1) 응공(應供) : 응당히 남의 공양을 받아 공덕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도를 이루신 자격이
있는 분. 아라한(阿羅漢)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2) 정변지(正遍知) : 바르고 완전하게 진리를 남김없이 깨달으신 분. 정등각(正等覺),
등정각(等正覺)이라고도 번역한다.
(3) 명행족(明行足) : 천안(天眼), 숙명(宿命), 누진(漏盡)의 삼명(三明)의 지혜와 신체,
언어의 행동 등이 다 함께 완전하신 분.
(4) 선서(善逝) : ‘잘 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미혹의 세계를 잘 뛰어넘어서 다시는 미혹의
세계에 돌아오지 않는 분.
(5) 세간해(世間解) : 세간, 출세간의 일을 다 아시는 분.
(6) 무상사(無上士) : 모든 이 가운데 더 위없이 가장 높으신 분.
(7)조어장부(調御丈夫) :온갖 가르침으로 중생을 잘 조복(調伏), 제어(制御)하여 열반으로
인도하시는 분.
(8) 천인사(天人師) :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신 분. 지옥, 아귀, 축생 등을 포함한
미혹의 세계에 있는 중생을 다 가르쳐서 인도하지만 하늘과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중심이 되므로 ‘천인사’라 한다.
(9) 불(佛) : 불타(佛陀)의 약칭으로, 깨달은 분.
(10) 세존(世尊) :온갖 공덕을 갖추어 세간을 이익 되게 하므로 세간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
<<부처님 명호 생략>>
如是等 一切世界 諸佛世尊 常住在世
이와 같은 등등의 일체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은
항상 세상[중생들이 있는 세계]에 머무르고 계시오니
是諸世尊 모든 부처님들이시여!
當慈念我 마땅히 자비로서 저희들을 생각하여 주시옵소서.
若我此生 若我前生 從無始生死以來 所作衆罪
저희들이 이번 생[今生]이나 전생(前生)처럼 시작 없는 옛날부터 생사(生死)를 거듭한 이래로
지은바 많은 죄[衆罪]를,
若自作 若敎他作 見作隨喜
스스로 짓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짓도록 가르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짓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기도 하였으며,
若塔若僧 탑이 있는 곳이나[塔], 스님들이 계시는 곳[僧-절]에서
若四方僧物 若自取 若敎他取 見取隨喜
사방(四方)에 있는 승가(僧家)의 물건[僧物]들을 스스로[임의로] 갖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갖도록
가르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갖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기도 하였으며,
五無間罪 若自作 若敎他作 見作隨喜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죄[오역죄(五逆罪)]도 스스로 짓기도 하였고,
다른 사람이 짓도록 가르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짓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기도 하였으며,
十不善道 若自作 若敎他作 見作隨喜
좋지 못한 열 가지 행위[십불선도(十不善道)]도 스스로 짓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짓도록
가르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짓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기도 하였으니,
所作罪障 지은바 죄의 업장(業障)이
或有覆藏 혹 덮여지고[覆] 감추어져[藏] 있기도 하고,
或不覆藏 혹 덮여지고 감추어져 있지 못하기도 하니(혹 드러나 있기도 하니),
應墮地獄 餓鬼畜生 諸餘惡趣 邊地下賤 及蔑戾車
응당 지옥이나 아귀·축생 그 외 나머지 나쁜 곳[악취(惡趣)]이나,
'외진 변두리여서 제도받기도 어려운 곳의 미개한 중생[邊地下賤 及蔑戾車]'으로 떨어지리니
如是等處 所作罪障 今皆懺悔
이와 같은 등등의 곳에서 지은 바 죄의 업장을 이제 모두 참회합니다.
▶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부르며 예경(禮敬)을 드림은 단지 복(福)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다.
앞에서 ‘지금 내가 발심하여 예배하는 것은 단순히 인천(人天)에 나는 복(福)을 구하거나
삼승(성문, 연각, 보살)이 되기 위함이 아니고, 오직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에 의거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라고 예경을 올리는 이유를 밝혔었다.
이렇듯 부처님 앞에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내 자신을 낮추고 숙이는 것은, 나를 진리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스승이기 때문이며, 내가 본받아야 할 모범적 표상(表象)이기 때문이다.
내가 저 분들처럼 되고자(본받고자) 할진댄 그 첫걸음은 ‘참회(懺悔)’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시작은 참회로부터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생(生)을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잘못(허물)을 모두 다 참회하는 것이다.
*覆: 덮을 부/藏 : 감출 장/墮 : 떨어질 타/餓 : 주릴 아/隨 : 따라서 수, 따를 수
*수희(隨喜) : 다른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따라서 함께 기뻐함.
*오역(五逆) : 다섯 가지의 극악무도한 중죄(重罪)를 말함.
소승의 오역[單五逆]과 대승의 오역[復五逆]이 있다.
1. 소승의 오역 : ①어머니를 살해하는 것[殺母] ②아버지를 살해하는 것[殺父]
③아라한을 살해하는 것[殺阿羅漢]
④부처님의 몸에서 피를 나오게 하는 것[出佛身血]
⑤승가의 화합을 깨는 것[破和合僧]
앞의 두가지는 은전(恩田)에 배반하고, 뒤의 세가지는 복전(福田)에 배반하기 때문에 오역
죄라 하고, 그 행위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오무간죄(五無間罪)라고 한다.
2. 대승의 오역 : ‘大薩遮尼乾子所說經’ 卷四에 설하는 다섯가지 근본중죄(根本重罪).
①탑과 사원을 파괴하여 경전과 불상을 불태우고, 삼보(三寶)의 물건을 빼앗고, 혹은
그와 같은 짓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거나 또는 그 행위를 보고 기뻐하는 것.
②성문(聲聞), 연각(緣覺), 대승(大乘)의 법(法)을 비방하는 것.
③출가자(出家者)가 불법(佛法)을 닦는 것을 방해하고 혹은 그를 죽이는 것.
④부모(父母)를 살해하는 것.
⑤모든 업보(業報)는 없다고 생각하여 십불선업(十不善業)을 행하면서 후세(後世)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치는 것.
※혜소(慧沼)의 ‘金光明最勝王經疏’ 권5에는, 소승오역의 ‘살부모(殺父母)’를 하나로
묶고, ‘불법을 비방하는 것[誹謗正法]’을 삼승통설(三乘通說)의 오역으로 하고 있다.
*십불선도(十不善道) : 몸[身], 입[口], 뜻[意] 3업(三業)으로 짓는 10악(惡)을 말한다.
―몸으로 짓는 죄업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입으로 짓는 죄업 :망어(妄語:거짓말), 양설(兩舌:이간질하는 말), 악구(惡口:거칠고
험악한 말), 기어(綺語:도리에 어긋나며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
―뜻으로 짓는 죄업 :탐욕(貪欲), 진에(瞋恚), 사견(邪見)
* 변지(邊地) : ‘변두리의 미개한 곳’이란 뜻.
불지(佛智)를 의심한 행자(行者)가 태어나는 곳. 부모의 태내(胎內)에서는 해(日)와 달(月)을
볼 수 없듯이 비록 왕생(往生)은 했지만 5백세 동안 삼보(三寶)를 볼 수 없으므로
태궁(胎宮), 해만계(懈慢界)라고도 한다.
* 멸려차(蔑戾車) : 범어 mleccha의 음역. 번역하여 ‘변지(邊地)’라 한다.
비천한 직업을 좋아하고, 예의를 차리지 못하며,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하천(下賤)한 사람.
즉 미개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 육취(六趣) : 중생이 업(業)에 의해 윤회하는 6개의 세계.
①지옥취(地獄趣) : 8개의 추위[八寒]와 8개의 뜨거움[八熱] 등의 무서운 고통을 받는
곳으로 땅속 깊은 곳에 있다.
②아귀취(餓鬼趣) : 항상 배가 고파 밥을 구하는 귀신이 사는 곳.
③축생취(畜生趣) : 금수(禽獸)가 사는 곳으로 인간세계와 있는 곳을 같이 한다.
④아수라취(阿修羅趣) : 항상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 싸움을 좋아한다는 대력신(大力神)이
사는 곳으로 깊은 산, 깊은 계곡을 의지처로 삼는다.
⑤인간취(人間趣) : 인류가 사는 곳.
⑥천상취(天上趣) : 몸에 광명을 갖추고 즐거움을 누리는 중생들이 사는 곳으로
육욕천(六欲天), 색계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으로 구분된다.
今諸佛世尊 當證知我 當憶念我
이제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응당 저희들을 알고 계시고, 저희들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계심을
증명하여 주옵소서.
我復於諸佛世尊前 作如是言
제가 다시[復] 모든 부처님 전[前]에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若我此生 若我餘生
저희들이 이번 생[此生]이나 다른 생[餘生;‘이번 생’ 이외의 모든 전생들]에서
曾行布施 或守淨戒 乃至施與畜生一摶之食 或修淨行 所有善根
일찍이 보시를 행하면서 혹 청정한 계를 지킨 일로부터 축생(畜生)에게 먹이 한 입 베풀면서
혹 청정한 행(行)을 닦은 일에 이르기까지 있는바 선근(善根)과,
成就衆生 所有善根
중생들을 성취시킴으로써 있는바 선근과,
修行菩提 所有善根
진리에 눈뜨기 위해 수행함으로써 있는바 선근과,
及無上智 所有善根
위없는 지혜[無上;최고의 지혜]에 도달함[及]으로써 있는바 선근을
一切合集 校計籌量 皆悉廻向 阿耨多羅三藐三菩提
모두 모으고 합하여[合集] 그 양을 헤아리고 정리해서[校計籌量]
모두 다[皆悉] 최고의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菩提]을 성취하는 곳으로 회향합니다.
如過去未來 現在諸佛 所作廻向 我亦如是廻向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지으셔서 회향하신 바처럼
저도 또한 이와 같이 회향합니다.
▶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예경을 드렸고, 그리고 나서 참회를 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참회뿐 아니라,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생(生)을 살아오면서
혹시나 지었던 좋은 일이 있으면 그 선업(善業)의 공덕을 다 회향(廻向)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하나 다 헤아리고 세어서 하나의 남김도 없이[校計籌量] 모조리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역대(歷代)의 부처님들이 부처가 되기 이전에, 즉 최고의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공부하던
시절에 그렇게 회향하셨으며, 지금의 나도 부처님들이 그렇게 하셨듯이 이를 본받아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참회(懺悔)'는 허물은 내게 돌려 반성(反省)하고 앞으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뉘우침이며,
'회향(廻向)'은 내가 지은 공덕(功德)이 혹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공덕은 내가 갖지 않고
주변의 뭇 대상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것이다.
혹 회향이라는 선업(善業)을 지음으로써 있게 되는 복(福)이라는 과보(果報)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 하는 것이라면 이는 참다운 회향이라 할 수 없으며,
무엇 때문에 회향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 취지를 망각(忘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회향의 근본취지는 내 마음의 정화(淨化)에 있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이기적(利己的)인 속성(屬性), 즉 에고(ego)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이는 참회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쁜 것은 다 내 탓으로 돌리고, 좋은 것은 다 다른 대상에게 돌려서 남을 폄하하고
남에게 인색하고자 하는 그 욕심을 버리고자 함이다.
결국 참회와 회향은 공부하는 사람이 자기 공부의 완성을 위하여-자신의 내적인 성숙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며 자세인 것이다.
*수희(隨喜) : 여기서의 ‘수희’는 부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저도 또한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풀어야 자연스럽겠다.
※위의 “見作隨喜”의 ‘수희’는 ‘다른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따라서 함께 기뻐
한다’는 의미이다.
衆罪皆懺悔 諸福盡隨喜
모든 죄(罪)가 다 참회되고, 모든 복(福)이 다할 때까지[남김없이 회향될 때까지] 기쁨으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 ‘중죄개참회’의 ‘중죄(衆罪)’는 앞 문장에서 언급한 부분(‘약아차생 약아전생~
약교타작 견작수희’)을 말하고, ‘제복진수희’의 ‘제복(諸福)’은 ‘약아차생 약아여생
증행보시~급무상지 소유선근’을 말한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잘못한 모든 죄업은 다 참회하고,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선업은
이것이 다 없어질 때까지 예전의 부처님들이 늘 그렇게 하셨듯이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것’으로 기꺼이 다 집중시켜 가겠다는[회향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최고의 목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일’이며[이것이 불교의 목표이다],
이것을 위해 죄업은 모두 참회하고 선업은 목표를 달성하는 일에 다 돌리겠다는 것이다.
及請佛功德 願成無上智
아울러[及;또한] 부처님의 공덕을 청하오니 원하건대 위없는[無上] 지혜를 이루게 하소서.
去來現在佛 於衆生最勝 無量功德海
과거, 미래, 현재의 부처님들은 중생들에게 가장 수승하고[最勝] 한량없는[無量] 공덕의
바다이시니
我今歸命禮
제가 이제 목숨을 다해 귀의하고 예배합니다.
▶ 부처님의 공덕이 마치 바다와 같이 넓고 깊어 헤아릴 수 없다.
이러한 공덕이 늘 우리 중생들 곁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 공덕을 언제나 받아들여[청하여]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데
도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청하고 받아들여 수행을 통해 소화(消化)를 시키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한다.
청한다는 것은 단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 되게 해 주십사’라고 간청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 자신이 온 마음과 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덕을 받아들여서 실현시키겠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지 못한다면 부처님의 공덕이 바다만큼의 깊이와 넓이로 있은들
자신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퍼내어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직접 스스로 해야 할 몫인 것이다.
* 證:증거 증, 증명할 증 / 憶:기억할 억, 생각할 억 / 復:다시 부, 회복할 복 / 餘:남을 여 /
曾:일찍이 증 / 摶:모일 단, 뭉칠 단 / 及:또 급, 미칠 급 / 校:셀 교, 교정할 교,
학교 교 / 計:셀 계, 꾀 계 / 籌:꾀 주 / 請:청할 청 / 隨:따를·따라서·좇을 수
▶ 아래의 내용부터는 화엄경(華嚴經)의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서 인용된 부분이다.
보현행원품의 내용은 부처님의 공덕(功德)을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열 가지 대원(大願)을
닦아야 함을 밝히고 있다.
먼저 열 가지 대원(大願)을 밝히고,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를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내용의 끝에 지금까지 설한 내용을 요약하여 거듭 게송(偈頌)으로
밝히고 있는데, 아래 부분은 이 게송에서 인용한 것이다.
아래부터의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보현행원품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所有十方世界中 三世一切人師子
있는바 시방세계 속의(계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人師子]들에게
我以淸淨身語意 一切遍禮盡無餘
제가 청정한 몸[身]과 말[語]과 뜻[意]으로써 일체 두루두루 예경(禮敬)을 다하되 남김없이 하며,
普賢行願威神力 普現一切如來前
보현보살의 행(行)과 원(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널리[普] 모든 부처님[如來] 앞[前]에 출현하고,
一身復現刹塵身 一一遍禮刹塵佛
한 몸 다시[復] 티끌 수와 같이 많은 곳곳[刹塵]에 몸을 나타내어, 티끌 수와 같이 많은 곳곳에
계신 부처님들께 일일이 두루두루 예경합니다.
▶ 이 부분이 보현행원품에서 인용되는 첫 구절로써, 보현보살의 10대원(大願) 중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예경제불(禮敬諸佛)’이다.
먼저 내가 배워야 하고 나를 일깨워 주는 큰 스승인 부처님에게 지극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깊은 존경의 예배(禮拜)를 드린다.
이런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만큼 부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기도 하다.
한(限)없는 믿음이 솟아나기에, 한없는 예경을 표(表)하고 싶은 것이다.
너무나 한이 없어 삼천대천세계에 계신 모든 부처님께 이 한 몸 일일이 나타내어서라도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에게 예경을 올리고 싶은 절절(切切)한 마음으로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어찌 이 우주에 티끌 수만큼 많은 부처님들에게 일일이 예경(禮敬)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삼세(三世)에 걸쳐 많은 부처님들에게.
과거에 가서 할 수도 없고, 미래에 가서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보현보살의 행원(行願)의 힘을 빌려서라도 예경을 하겠다는 것이다.
보현행원품에서 관련 내용을 인용해 보자.
“...諸佛世尊을 我以普賢行願力故로 深心信解 如對目前하야 悉以淸淨身語意業으로 常修禮敬하되...”
(모든 부처님들을 내가 보현보살의 행원력으로써 깊이 마음으로 믿고 알아가기를 마치 눈앞에서
대하듯 하며, 청정한 몸과 말과 뜻으로 항상 예경을 닦아가되...)
예전에 보현보살이 대원력을 세우고 크게 실천하였던 것처럼
나도 마치 눈앞에서 부처님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으로 깊은 믿음을 내어 알아가고,
몸과 말과 정신을 모두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써 ‘상수예경(常修禮敬)’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부처님에 대한 진정한 예경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지극하게 내어
내 자신이 부처님처럼 되려고 애쓰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항상 청정하게 닦아 나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체득(體得)하여 자신을 정화(淨化)해 가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에 대한 최고의 예경이라 하겠다.
이것이 보현보살이 모든 부처님께 지극한 예경을 올리는 방법인 것이다.
*인사자(人師子) : 부처님의 다른 칭호.
*신어의(身語意) : 3업(業)을 말함. 3업(業)은 불교에서 인간의 행위를 3가지의 업(業)으로
나눈 것으로,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 또는 語業), 마음으로 짓는
의업(意業)을 합하여 말하는 것이다.
지은 업의 내용에 따라 선업(善業)과 악업(惡業), 선도 악도 아닌 무기업(無記業)으로
나누기도 한다
*찰진(刹塵) : ‘진(塵)’은 ‘미진(微塵)’을 뜻함. ‘찰진’이란 무수한 국토를 일컫음.
※ 찰(刹) : ① 범어 ‘ksetra'의 음략(音略)으로 ‘토전(土田), 토(土), 국(國), 처(處)’
등으로 번역. 곧 ‘국토(國土)’의 뜻인데 범한병칭(梵漢竝稱)으로 ‘찰토(刹土)’라
하기도 한다.
② 범어 ‘laksata'의 음략(音略)으로 ‘표치(標幟), 기치’의 뜻으로 쓰인다.
깃대, 혹은 탑의 심주(心柱)를 가리키기도 한다. 사원(寺院)을 ‘사찰(寺刹), 범찰(梵刹)
이라 혹은 명찰(名刹)이라 하는 것도 사원 건물 앞에 찰(刹), 곧 당간(幢竿)을 세우는
풍습(風習)에서 온 것이다.
於一塵中塵數佛 各處菩薩衆會中
하나의 티끌[一塵] 속에 티끌 수만큼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고, (그 계시는) 각각의 처소마다
보살의 대중(大衆)들이 함께하고 있구나.
無盡法界塵亦然 深信諸佛皆充滿
티끌에 비유된 ‘다함이 없는[無盡;끝이 없는] 법계(法界)’에도 또한 그러하니[위에 언급한 것처럼],
모든 부처님들이 다[皆;모든 곳에] 충만하여 계심을 깊이 믿습니다.
各以一切音聲海 普出無盡妙言詞
각각의 부처님들께서 일체의 음성(音聲) 바다로써 널리 다함이 없는 묘한 말씀[妙言詞]을 내시니[出]
盡於未來一切劫 讚佛甚深功德海
미래의 일체 겁[劫;영원한 시간]이 다할 때까지 부처님의 매우 깊은 공덕 바다를 찬탄합니다.
▶ 티끌 수만큼 많은 세계[법계] 그 어디에도 부처님들이 아니 계신 곳이 없다. 그 부처님들이
계신 곳곳에는 부처님의 또 다른 현신(現身)이라 할 수 있는 권화보살(權化菩薩)에서 부터
부처님을 본받아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고자 애쓰는 지상보살(地上菩薩-수행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보살들이 운집(雲集)하여 있다.
이렇게 우주 법계 모든 곳에서 부처님은 중생과 함께 하고 계신 것에 대해 깊은 믿음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부처님들은 중생들에게 늘 진리의 가르침을 쏟아내고 계시는데, 그 가르침이 마치
바다와 같음에 탄복하여 앞으로 영원토록 그 공덕의 은혜를 갚겠노라 다짐을 한다.
부처님에 대한 찬탄(讚嘆)은 단지 부처님의 공적(功績)을 예찬(禮讚)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언제나 잊지 않고 몸과 말과 정신으로 그 분들을 이어나가겠다는 '자기(自己) 서원(誓願)'이고
'자기 다짐'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공덕의 베풀음이 끊어지지 않고 미래세(未來世)가 다하도록
영원토록 이어지게 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불자(佛子)들은 이러한 서원(誓願)과 의지를 보통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드러내고 있다.
①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 맹세코 한량없는 중생을 다 제도(濟度)하겠습니다.
②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 맹세코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를 다 끊겠습니다.
③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 맹세코 수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배우겠습니다.
④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 맹세코 부처의 깨달음을 이루겠습니다.
以諸最勝妙華鬘 妓樂塗香及傘蓋 如是最勝莊嚴具 我以供養諸如來
가장 수승(殊勝)하고 미묘(微妙)하게 만들어진 온갖 종류의 꽃장식[華鬘]과 음악[妓樂],
향료[塗香] 그리고 햇볕가리개[日傘] 등등, 이와같은 가장 훌륭한 장엄구(莊嚴具)로써
제가 모든 부처님들께 공양하오며,
最勝衣服最勝香 末香燒香與燈燭 一一皆如妙高聚 我悉供養諸如來
가장 좋은 의복(衣服)과 가장 훌륭한 향(香)과 가루향[抹香]과 태우는 향[燒香]과 등(燈)과
촛불[燭] 하나하나를 다 수미산(須彌山-妙高)과 같이 모아서 제가 모든 부처님들께
남김없이[悉] 공양하오며,
我以廣大勝解心 深信一切三世佛 悉以普賢行願力 普遍供養諸如來
제가 넓고 큰 승해심(勝解心;진리를 뛰어나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모든[一切] 삼세(三世;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들을 깊이 믿으며, 보현보살의 행(行)과 원(願)의 힘으로 널리 두루두루[遍]
모든 부처님들께 공양합니다.
▶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종류의 물품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내가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나의 스승에게 공양 올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공양(供養)'은 나를 법의 가르침으로 인도해 주는 나의 스승에 대하여 지극한 마음을 표출(表出)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내가 이렇게 능력있는 분에게 물건을 바치니, 능력있는 분도 나에게 복(福)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이건 공양이 아니라, 거래(去來)이다. 비즈니스이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부처님의 출가제자(出家弟子)들은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
출가 수행자의 의식주(衣食住)는 재가(在家) 신자(信者)의 공양(供養)에 의해 해결된다.
반면에 재가자(在家者)는 출가 수행자로부터 법보시(法布施)를 받게 된다.
이렇듯 재가자는 출가자에게 물질적인 공양을 베풀고, 출가자는 재가자들에게 진리의 가르침을
보시한다.
불자(佛子)라면 출가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릴 의무가 있다.
예참문(禮懺文) 앞 부분의 ‘금강상사(金剛上師)’에서 언급하였듯이, 출가 수행자는 재가자를
부처님의 가르침의 세계로 인도(引導)해 주는 매개체(媒介體)이기 때문이다.
법(法)의 세계로 인도해 주며,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질적인 공양도 해야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공양이 법공양(法供養)이다.
어떻게 하는 것을 법공양이라 하겠는가?
보현행원품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으로 그 설명을 대신한다.
“善男子야 諸供養中에 法供養이 最이니 所謂如說修行供養이며 利益衆生供養이며 攝受衆生供養이며
代衆生苦供養이며 勤修善根供養이며 不捨菩薩業供養이며 不離菩提心供養이니라.”
(선남자야, 모든 공양 중에 법공양이 가장 으뜸이니 이른바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이익 되게 해주는 공양이며, 중생을 자비심으로 품어주는[攝受] 공양이며,
중생의 괴로움을 대신해 주는 공양이며, 좋은 일[선근(善根)]을 부지런히 닦는 공양이며,
보살의 행[업(業)]을 버리지 않는 공양이며, 보리심[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는
공양이니라.)
*화만(華鬘) : 꽃 장신구의 하나.
*도향(塗香) : 향나무 가루로 만든 몸에 바르는 향료.
*산개(傘蓋) : 일산(日傘)의 덮개. 인도에서는 국왕(國王) 또는 귀인(貴人)의 뒤에 시자가 서서
일산을 가린다. 이러한 풍습으로 불상(佛像)에는 산개가 있다.
※일산(日傘) ; ①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세우는 큰 양산.
②황제, 황태자, 왕세자들이 행차할 때 받치던 의장 양산.
*말향(抹香) : 주로 불공(佛供)에 사용하는 가루향. 침향(沈香)과 전단(栴檀)의 가루를 쓴다.
*소향(燒香) : 태우는 향.
*묘고(妙高) : ‘묘고산(妙高山)’을 말한다. 묘고산은 ‘수미산(須彌山)’의 역어(譯語)이다.
我昔所造諸惡業 皆由無始貪嗔癡 從身語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
제가 옛날부터 지어왔던 모든 악업(惡業)은 모두 한없이 먼 과거로부터 나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던
탐(貪), 진(瞋), 치(癡)가 몸[身]과 말[語]과 뜻[意]을 좇아[從] 표출됨으로써 있게 된[由] 것이니,
제가 이제 이 모든 것[一切]을 다 참회합니다.
▶ 내게 어떤 허물이 생겼을 때, 사실 그 허물은 내가 반응했던 그 대상(對象)이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그 허물은 대상을 바라 본 나의 마음에서 일으킨 것이다.
어떠한 것을 대할지라도 현재의 나는 복잡다단(複雜多端)하게 얽혀있는 나의 이해관계(利害關係)에 의해
대상을 대하고 있다.
‘이해(利害)’라는 것은 ‘나’라는 관점에서 나오며, 그 ‘나’라는 놈에게는 ‘자기충족(自己充足)의
욕망[貪心]’이 있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경우 거칠어지는[嗔心]’ 경향이 있으며,
‘모든 사물과 상황을 합리적(合理的)이 아닌 자기(自己) 위주로 보는[癡心]’ 경향이 있다.
이 세 가지는 마치 내 몸을 망가뜨리는 독(毒)과 같이 내 마음을 끝없이 나쁜 상태로 만들어가고 있다 해서
‘삼독(三毒)’이라 한다.
내 속에 배어 있는 이 삼독은 몸짓[身]이나 말[語], 생각[意]을 통해서 드러나며 갖가지 죄업(罪業)을
짓게 만들고 있다.
이제 모든 죄와 허물의 원인은 남(눈앞의 대상)이 아닌 내 마음 속의 삼독(三毒)임을 바로 알고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참회(懺悔)는 대략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으로 설명한다.
이미 벌어진 상황에서 ‘잘못 되었습니다’라고 참회하는 것은 '사참'이라 할 수 있고,
모든 허물을 있게 만드는 근본원인인 오염(汚染)된 마음을 정화(淨化)하여 청정(淸淨)하게 하려는 것은
'이참'이라 할 수 있다.
사참(事懺)으로 시작하여 결국 이참(理懺)으로 가야 할 것이다.
(보현행원품)
“...... 我於過去無始劫中에 由貪瞋癡로 發身口意하야 作諸惡業이 無量無邊하니 ......
我今에 悉以淸淨三業으로 遍於法界極微塵刹 一切諸佛菩薩衆前에 誠心懺悔하되 後不復造하고
恒住淨戒一切功德하리라 如是虛空界盡하며 衆生界盡하며 衆生業盡하며 衆生煩惱盡하면
我懺이 乃盡이어니와 而虛空界와 乃至 衆生煩惱ㅣ 不可盡故로 我此懺悔도 無有窮盡하야
念念相續하고 無有間斷하야 身語意業에 無有疲厭이니라.”
[내가 지나간 한없는 세월동안 탐애와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몸과 말과 뜻으로 온갖
악한 죄를 한없이 지었느니라...... 내 이제 세 가지 업(身口意로 짓는 업)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티끌 수만큼 많은 세계에 계신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 앞에서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되
뒤에 다시는 짓지 아니하고 항상 청정한 계행(戒行)으로 일체의 공덕을 지으며 살아가리라.
이와 같이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끝나면)
나의 참회도 다하겠거니와(끝나겠거니와), 허공계와 중생의 번뇌가 가히 다 끝날 수 없으므로
나의 이 참회도 마침내 끝나지 못하고 생각생각 이어지되 잠깐이라도 끊어짐이 없으며,
몸과 말과 뜻으로 (참회를) 지어가되 지치거나 싫어하는 일이 없느니라.]
十方一切諸衆生 二乘有學及無學 一切如來與菩薩 所有功德皆隨喜
시방세계의 모든 중생과 이승(二乘;성문, 연각)과 배움이 있는 이[有學]와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
일체의 부처님과 보살님이 지니고 있는 공덕을 저도 함께 기뻐합니다.
▶ 불보살님들이 지니고 있는 공덕에 대해 수희(隨喜)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공부의 과정 중에 있는 분들과 더 나아가 일반 중생들이 지니고 있을 공덕에 대해서도
함께 기뻐한다고 하였다.
이는 하찮게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작은 공덕(功德)마저도 배우고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다.
그리고 일어난 허물은 자기 자신에게 돌리며 참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남에게 생긴 좋은 일에 대해서는 마치 내 자신의 것처럼 함께 좋아하고 기뻐하는 마음가짐이다.
에고(이기적인 속성)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마음가짐이다.
이런 마음으로 인연 있는 분들과 더불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내 자신은 맑고 깨끗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로는 불보살님의 대자대비하신 공덕을 표본 삼아 본받고자 하며, 앞뒤 좌우로는 늘 내 자신의 내면을
정화(淨化)시켜 나가면서 주변의 분들과 함께 기뻐하며 살아간다...
*여기서의 ‘무학(無學)’은 배움이 없는 무지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배움이 끊어져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수희(隨喜) : 남의 좋은 일을 자신의 일처럼 따라서 함께 기뻐함.
十方所有世間燈 最初成就菩提者 我今一切皆勸請 轉於無上妙法輪
시방세계에 계시는 세간(世間)의 등불이시며, 가장 처음 보리도(菩提道)를 성취하신 분에게
제가 이제 위없이 미묘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려 주실 것을 권(勸)하고 청(請)하옵니다.
▶ ‘시방소유세간등 최초성취보리자’는 중생들이 있는 모든 세계에서 항상 등불이 되어 주시며,
우리에게 처음으로 불교라는 가르침을 전해주신 분을 말한다.
즉, 보리수 아래에서 대각(大覺)을 성취하여 오늘날의 불교를 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가리킨다.
이렇게 우리와 같은 중생들을 제도할 목적으로 오신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언제까지나 미묘한 법의 수레바퀴[법륜(法輪)]를 굴려 주실 것을 간절히 권청한다.
시대적으로는 이미 우리의 현 세상에 계시지 않는 분들이지만, 그 분들의 가르침은
여전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고,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육신(肉身)은 아니 계시지만, 법신(法身)으로서 여전히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세세생생(世世生生) 법의 바퀴는 멈추는 일 없이 계속하여 굴러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불자(拂子)들은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도록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 나가는 것’은
우리 불자(佛子)들의 큰 사명 중의 하나인 것이다.
諸佛若欲示涅槃 我悉至誠而勸請 唯願久住刹塵劫 利樂一切諸衆生
모든 부처님께서 대열반(大涅槃)을 보이시려 하신다면, 제가 지성을 다해 권하고 청할 것입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량겁토록 머물러 계시오며 일체의 중생들이 이롭고 즐거울 수
있도록 해 주소서.
▶ 우리들에게 언제나 진리의 등불을 비추어 주시는 부처님이 혹여나 당신의 사명을 다했다고 하시어
우리 곁을 떠나실까 걱정이 되어 영원토록 우리 곁에 머물러 주실 것을 권청하고 있다.
사실 부처님의 법(法)은 중생들이 이어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육신(肉身)은 한시적(限時的)일 수밖에 없지만, 법신(法身)은 영원불멸(永遠不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토록 계셔줄 것을 간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난 이렇게 보고 싶다.
‘이 땅에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부처님의 육신이나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향한 내 마음이라고.
내 자신이 부처님과 영원히 이어지고 싶은 마음을 간절히 표현한 것이라고.’
所有禮讚供養佛 請佛住世轉法輪 隨喜懺悔諸善根 廻向衆生及佛道
부처님을 예경(禮敬)·찬탄(讚歎)하고 공양(供養)함으로써 있게 된 선근을,
(또) 이 세상에 오래 머무르시며 법(法)의 수레바퀴를 굴려 주실 것을 청(請)함으로써 있게 된 선근을,
(또한) (일체 중생과 대덕들 그리고 불보살님들이 지니고 있을 공덕을) 함께 기뻐함으로써 있게 된 선근을,
(또) (자신의 부족함을) 참회해 옴으로써 있게 된 바 모든 선근을
중생들과 보리도(菩提道)에 회향합니다.
▶ 지금까지 내가 해 온 행위에 대한 공덕(功德)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선근(善根)의 공덕을
모두 중생들에게 그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의 성취를 위해 회향(回向)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 온 행위는 앞에서 서원(誓願)했던 내용들이다.
위에 언급한 내용 순으로 짚어보자.
1)예경제불(禮敬諸佛) : “소유시방세계중 ~ 일일변례찰진불”
2)칭찬여래(稱讚如來) : “어일진중진수불 ~ 찬불심심공덕해”
3)광수공양(廣修供養) : “이제최승묘화만 ~ 보변공양제여래”
4)청불주세(請佛住世) : “제불약욕시열반 ~ 이락일체제중생”
5)청전법륜(請轉法輪) : “시방소유세간등 ~ 전어무상묘법륜”
6)수희공덕(隨喜功德) : “시방일체제중생 ~ 소유공덕개수희”
7)참회업장(懺悔業障) : “아석소조제악업 ~ 개유무시참진치”
무엇을 하든지 마지막에는 ‘회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결과는 내 자신이 떠안으며 참회하고, 좋은 결과는 내가 갖지 않고 다 남에게로 돌려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내면의 오염(汚染)이 정화(淨化)되어 우리도 부처님처럼 될 수 있는 것이다.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세상을 품을 수 있다면, 금강경(金剛經)의 말씀대로 ‘마음을 쓰되 머무는 바 없이
쓸 수 있는[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그런 상태가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가장 지극한 부처님에 대한 예경(禮敬)이며, 예찬(禮讚)이며, 회향(回向)이 되는 것이다.
※여기 본문 대목은 지금까지 해 온 것을 총체적으로 회향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수희참회'를 '수희'와 '참회'로 각각 풀었다. 앞서 '수희'의 부분과 '참회'의 부분이 각각
언급되어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회향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희참회'를 하나의 용어로 보기도 한다.
이럴 경우, 그 의미는 '참회를 하되, 기꺼운 마음으로 한다.'이다. 마지못해 하는 참회가 아니라,
나의 허물을 고쳐 바른 나로 만들기 위해 하는 참회이므로 기꺼운 마음으로 한다는 말이다.
願將以此勝功德 廻向無上眞法界
원하옵건대 이러한 수승(殊勝)한 공덕이 위없는 진리의 세계로 회향되게 하옵소서.
性相佛法及僧伽 二諦融通三昧印 如是無量功德海 我今皆悉盡廻向
(진리의 구현체인 만물의) 내면과 겉모습[性相], 삼보(三寶;佛法僧), 현상적인 세계와 이치적인
세계를 융통하는 삼매[二諦融通三昧印].
이와 같은 무량(無量)한 공덕바다로 제가 이제 모두 다 남김없이[盡] 회향하겠습니다.
所有衆生身口意 見惑彈謗我法等 如是一切諸業障 悉皆消滅盡無餘
중생에게 있는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즉) 미혹하게 보거나[見惑] (남을) 탄핵하고 비방하거나[彈謗]
나와 너를 가르는 마음[我法] 등등 이와 같은 일체의 모든 업장(業障)을 다 소멸시키어 남김이 없게 하며,
念念智周於法界 廣度衆生皆不退
생각 생각에 지혜가 법계(法界)에 두루 하여 널리 중생들을 제도하되 (힘들다고)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乃至虛空世界盡 衆生及業煩惱盡
그리고 허공의 세계가 다하고 중생과 업(業), 번뇌가 다할 때까지,
如是四法廣無邊
이와 같은 네 가지가 광대하여 끝이 없으니[無邊]
願今廻向亦如是
원하옵건대 (제가 하는) 지금의 회향 또한 이와 같습니다[끝이 없습니다].
▶ 예참문(禮懺文)의 마지막 귀결(歸結)도 역시 회향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회향은 기간이 정해져 있는 회향이 아니다.
중생들의 업(業)이 다 없어질 때까지, [業]
중생들의 번뇌(煩惱)가 다 사라질 때까지, [煩惱]
그래서 모든 세계에 있는 중생들이 다 부처님이 될 때까지, [衆生]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세계에서 중생들이 있는 곳이 다 사라질 때까지, [虛空世界]
나의 회향도 끝없이 계속 될 것이라는 서원(誓願)으로 끝을 맺는다.
예참문 풀이의 마지막은 성철(性徹) 큰스님의 말씀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내게 항상 다니는 사람에게는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배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면 날마다 아침에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도 새벽으로 꼭 108배를 합니다.
그 목적은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음같이 발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남을 구함이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我今發心 不爲自求 人天福報 ……
願與法界衆生 一時同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그리고 끝에 가서는,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합니다.”
……廻向衆生及佛道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했으니 기도한 공덕이 많습니다.
이것은 모두 일체 중생에게 가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원합노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없는 진법계에 회향하오며”
願將以此勝功德
廻向無上眞法界
그래도 혹 남은 것, 빠진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온갖 것이 무상진법계(無上眞法界)로,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하나도 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온 참회법입니다.
중국(中國)도 공산화(共産化) 이전에는 총림(叢林)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절에서 다 '참회'해 온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모두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의 근본자세이며, 사명이며, 본분입니다.』
(자기를 바로봅시다/성철스님/장경각)
*성상(性相) : 만물의 본성과 현상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제(二諦) : 진속이제(眞俗二諦)라고도 한다. 제(諦)는 ‘변치 않는 진리’이며, 이제론(二諦論)의 발달에
관하여는 여러 해석이 있다.
대승불교의 중심이 되는 논서(論書)로써 인도의 용수(龍樹-14대조사)스님이 지은 ‘중론(中論)’에 의하면,
"이제(二諦)로서 제불(諸佛)의 설법이 행해진다. 그것은 속제(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이 두 가지 진리의 구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뜻을 알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사물(事物)을 두고 말할 때, 중생의 눈에 보이는 부분을
속제(俗諦)·가제(假諦)·유위법(有爲法) 혹은 의언진여(依言眞如)라 부르고, 범부(凡夫)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부처님의 눈에만 보이는 부분을 진제(眞諦)·승의제(勝義諦)·제일의제(第一義諦)·무위법 (無爲法) 혹은
이언진여(離言眞如)라고 부른다.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후, 첫 가르침으로 설(設)하신 것이 사성제(四聖諦)이다.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가 그것이다.
제1성제인 고제(苦諦)는 중생의 삶은 ‘괴로움’이라는 가르침이며, 제2성제인 집제(集諦)는 그 괴로움에는
원인(原因)이 있으며, 그 원인은 ‘집착(執着)’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왜 중생들은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인식(認識)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부처님은 모든 사물의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아울러 온전히 볼 수 있으나, 중생은 사물의
겉으로 나타난 모습, 즉 보이는 부분만 보기 때문에 그 겉모습에 끄달리고 집착하게 된다고 하셨다.
용수(龍樹)스님이 중론(中論)에서 설명한 내용에 의하면,
사람들이 세계의 실제 모습인 공(空)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言語)·개념(槪念)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 사물들이 독립되고 고정된 본질을 갖고 실재(實在)하는
것처럼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空)은 일체의 개념들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용수스님은 일상적 언어나 관념의 타당성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는다.
용수스님에 의하면,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높고 낮은 2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으며 이 2가지 관점에 따라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2제(二諦)가 성립된다고 한다.
'진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야(지혜)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서 언어를 초월한 공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속제'란 세상 사람들의 상식적인 눈으로 보는 세계로서 진리가 가리워진 모습을 말한다.
용수스님은 이러한 일상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공(空)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언어의 사용과 철학적 사유는 속제의 단계에서, 가명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속제를 떠나서는 진제를 깨달을 수 없다고 용수스님은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모든 교설들은 주로 우리의 일상적인 관념에 근거하여 이루어졌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언어를 초월하는 공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견혹(見惑) : 미혹(迷惑)하게 보는 견해.
南無大行普賢菩薩
큰 원력(願力)의 실천자이신 보현보살님께 귀의합니다.
- 日行千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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