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번뇌와 보리 / 종범스님

청원1 2017. 11. 15. 06:31

 

 

번뇌와 보리

 

번뇌(煩惱)는 한 마디로 말하면 어리석음이고, 보리(菩提)는 깨달음이다. 그래서 이 번뇌(煩惱)와 보리(菩提) 이것은 아주 불교(佛敎) 신행(信行)에 기본(基本)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중생(衆生)에게는 세 가지 장애(障碍)가 있다고 하였다.

 

그 세 가지 장애(障碍)가 있기 때문에 중생(衆生)이라고 한다. 그 첫 번째 장애(障碍)는 고(苦), 괴로움이다. 그 괴로움이 장애(障碍)가 된다. 고(苦)에는 온갖 고(苦)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고장(苦障)이라고 한다.

 

그 괴로움 중에는 몸에 관련된 괴로움이 있고, 또 마음에 관련된 괴로움이 있고, 사람에 관련된 괴로움이 있다. 그런데 이런 괴로움들을 가만히 보면,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옛날에 내가 다 이렇게 저렇게 만든 데서 생겼다.

 

이것을 업(業)이라고 한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부터 고통이 오고, 내 몸도 과거에 내가 어떻게 이 몸을 관리를 했는가에서 오고, 내 정신도 다 나의 옛날 생활과 관련이 있다.

 

이것을 업(業)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업(業)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오니까. 그것을 업장(業障), 고장(苦障)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업(業)에서 고(苦)가 오는 것은 좋지 않은 업(業)을 지었기 때문에 고(苦)가 오지, 좋은 업(業)을 지으면 괴로움이 오지 않는다.

 

그것을 죄업(罪業)이라고 한다. 죄업(罪業)이라고 하는 것은 고통(苦痛)을 만들어 내는 업(業)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고통(苦痛)은 죄업(罪業)에서 오는 것이지, 지혜(智慧)의 업, 또 선업(善業) 이런 데서는 오지 않는다.

 

그러면 그 죄업(罪業), 자신이 받게 될 고통(苦痛)을 왜 지었을까? 그것은 어리석어서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미혹(迷惑), 잘못보고, 죄업(罪業)을 짓고, 그 죄업(罪業)으로 말미암아 고통(苦痛)이 오니까. 그 미혹(迷惑)을 아주 근본번뇌(根本煩惱)라고 한다.

 

이것을 혹장(惑障), 미혹(迷惑)한 장애(障碍)라고 이름한다. 이것을 중생고뇌(衆生苦惱)의 혹업고(惑業苦) 삼장(三障)이라고 한다. 혹장(惑障), 업장(業障), 고장(苦障)이라고 한다. 그래서 축원(祝願)할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삼장돈제(三障頓除), 삼장(三障)을 다 일시(一時)에 제거(除去)하고 오복증숭(五福增崇), 오복(五福)을 잘 증대(增大)시키고, 자꾸 숭상(崇尙)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축원(祝願)을 계속 합니다. 그게 삼장(三障)이다. 그런데 이 삼장(三障) 중에서 제일 문제가 혹장(惑障) 즉, 번뇌(煩惱)이다.

 

 

번뇌(煩惱)로 말미암아 죄업(罪業)을 짓고, 그 죄업(罪業)으로 고통(苦痛)이 오니까. 문제는 혹장(惑障), 업장(業障), 고장(苦障)의 삼장(三障) 중에서 이 미혹(迷惑)한 장애(障碍)를 어떻게 하면 소멸(消滅)을 할까?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다.

 

혹(惑)은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의 번뇌(煩惱)를 뜻하고 업(業)은 혹(惑)으로 인하여 짓게 되는 선악(善惡)의 행위(行爲)를 의미하며, 이 업(業)에 의하여 받게 되는 생사(生死)가 곧 고(苦)이다.

 

중생이 번뇌로 말미암아 업을 짓게 되고 그에 대한 과보로서 나고 죽는 괴로움의 세계를 윤회하게 되는 과정을 인과(因果)로서 나타내며 3 가지 번뇌(煩惱) 순서(順序)를 제시(提示)한 것으로 번뇌도(煩惱道), 업도(業道), 고도(苦道)를 3도(三道)라 하며, 3계(三界)에 유전(流轉)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미혹(迷惑)한 장애(障碍)를 보면, 혹(惑)과 업(業)은 항상 같이 간다. 어리석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동(行動)을 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무엇과 같은가?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경전(經典)에서 많이 설명을 했는데,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 왔는데, 둥그렇게 뭉쳐 있는 금덩어리를 하나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 금덩어리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금덩어리가 아니고 황금색 뱀이었다.

 

황금색 뱀이 똘똘 뭉쳐서 웅크리고 있다가 보니까. 이것을 황금(黃金)으로 잘못 보았다. 황금(黃金)으로 보는 순간에 욕심(慾心)이 났다. 그 욕심(慾心)이 나니까. 쌓아 가지고 온 것이다. 이게 업(業)이다.

 

황금(黃金)으로 보는 그것이 미혹(迷惑)이고, 그것을 쌓아 가지고 오는 그것이 업(業)이다. 이게 죄업(罪業)이다. 그러면 이 뱀이 겨울잠을 푹 자고 봄에 깨어서 나오면 어떻게 될까? 고(苦)가 오게 된다. 전부가 이런 관계(關係)다.

 

분명히 괴로움인데, 그것이 괴로움인줄을 모른다. 그래서 탐심(貪心)을 내고 그 탐심(貪心)의 결과(結果)가 고통(苦痛)이 오게 된다. 중생(衆生)은 고(苦)를 낙(樂)으로 보는 미혹(迷惑), 알고 보면 고(苦)인데, 그 당시(當時)에는 전부(全部) 즐거움으로 보인다.

 

그래서 번뇌(煩惱)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못 보는 것이 아니다. 잘못 보는 것이다. 그것이 미혹(迷惑)이다. 이것을 사견(邪見), 망견(妄見)이라고도 한다. 이런 것을 전부 합쳐서 번뇌(煩惱)라고 하는데, 번뇌(煩惱)를 순수한 동아시아 언어로 표현(表現)하면 망상(妄相)이다.

 

그러니까. 번뇌(煩惱)가 무엇일까? 망상(妄相)이다. 그래서 이것을 합쳐서 ‘번뇌(煩惱)망상(妄相)’이렇게도 쓰는데, 사실 같은 말이다. 이것은 항상 혹(惑)이 있으면 업(業)이 온다. 또 업(業)이 있으면 고(苦)가 온다.

 

그래서 이 혹(惑), 업(業), 고(苦)가 늘 따라 다닌다. 또 설명(說明)을 하기를, 이 혹(惑), 업(業), 고(苦)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어스름한 밤에 오솔길을 걸어서 가는데, 거기에 말라서 죽은지 오래돼서 빼빼 마른 둥치만 남은 고목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귀신(鬼神)으로 본 것이다. “야! 여기 귀신(鬼神)이 서 있다.” 그러니까. 귀신(鬼神)이라고 생각하고 보자 굉장히 무서웠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도망을 갔다.

 

여기서 고목나무를 귀신으로 보는 망상(妄相) 그것이 미혹(迷惑)이다. 무서우니까. 도망가는 행위 그것이 업(業)이다. 귀신(鬼神)이 사람보다 굉장히 빠르니까. 아주 죽을힘을 다해 도망을 가다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해서 온갖 몸을 다치고 굉장한 괴로움이 온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고목나무를 고목나무로 바로 인식(認識)하고 보았으면 무서운 생각이 않일어나고, 무서운 생각이 않일어나면 도망갈 일도 없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하고, 망상(妄相)이라 그러고 사견(邪見), 망견(妄見)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것이 미혹(迷惑)이다.

 

그러면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정견(正見), 바르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정견(正見)은 깨달음이고, 사견(邪見)은 번뇌(煩惱)다. 이게 미혹(迷惑)이다. 이렇게 번뇌(煩惱)라고 우리가 쓰는데, 번뇌(煩惱)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번조요동(煩燥搖動) 번거롭고 조급하고 요동해서

뇌란신심(惱亂身心) 몸과 마음을 괴롭고 어지럽게 함이

고명번뇌(故名煩惱) 이름하여 번뇌라고 한다.

 

번뇌(煩惱)는 요동(搖動)하는 것이고 요란(搖亂)하게 움직인다. 조급한 것이 번뇌(煩惱)고, 번거로운 것이 번뇌(煩惱)다. 가만히 있으면 이것은 번뇌(煩惱)가 아니다.

 

그리고 뇌란신심(惱亂身心) 몸과 마음을 뇌란(惱亂), 괴롭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것을 번뇌(煩惱)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번뇌(煩惱)에는 지말번뇌(枝末煩惱)가 있고 근본번뇌(根本煩惱)가 있다.

 

근본번뇌(根本煩惱)라고 하는 것은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을 비롯해서 온갖 자만(自慢)이라든지, 악견(惡見), 의심(疑)들이 있다. 또 지말번뇌(枝末煩惱)는 여러 가지 숫자가 있는데, 근본(根本) 중에 근본(根本)이 무명(無明)이다. 무명(無明)은 아주 근본(根本) 번뇌(煩惱)고, 그 이외는 거의 다 지말번뇌(枝末煩惱)다.

 

그러면 그 중에서도 크게 말할 때,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그래서 탐(貪), 진(瞋)이라고 하는 것은 다 업(業)인데, 이게 다 번뇌(煩惱)에서 오는 것이다. 근본(根本)이 치(癡)인데, 이게 망상(妄相) 사견(邪見) 미혹(迷惑)이라고 한다.

 

그리고 온갖 죄업(罪業)이 있는데 알고 보면,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이 아주 근원(根源)이 된다. 그러면 이 화(嗔)내는 분노(忿怒), 이게 바로 번뇌(煩惱)인데, 분노(忿怒)는 무엇인가?

 

비유로 말하면 불(火)과 같다. 화(火)가 한 번 일어나면 불(火)이 된다. 그래서 불(火)났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불(火)난 곳에 잘못 가면 큰일 난다. 그리고 탐(貪)이라고 하는 것은 물(水)이다. 이것을 진화탐수(瞋火貪水) 성내는 것은 불(火)이고, 탐내는 것은 물(水)이다.

 

그런데 진화(瞋火) 이 화내는 것은 눈에 보인다. ‘저 사람 화(火)났구나’ 보통 알 수 있다. 그러나 탐수(貪水) 이 욕심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화(火)내는 것은 화(火)가 일어날 때는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위력(威力)이 대단하지만 화(火)는 꺼져 버린다.

 

어떤 사람은 십년(十年)에 한 번 화(火)내는 사람도 있다. 십년(十年) 동안 화(火)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산(火山)이 폭발(爆發)하듯이 나중에 또 화(火)를 낸다. 잔잔한 성격의 화(火)를 않내는 사람이 한 번 화산(火山) 폭발(爆發)하듯이 화(火)를 내면 큰일 난다.

 

하지만 자주 나지는 않는다. 또 화(火)날 때는 보인다. 그런데 탐수(貪水) 탐(貪)은 물(水)이기 때문에 물(水)이라고 하는 것은 깊숙이 흐르면 보이지도 않고, 흐르지 않을 때가 없이 계속 스며들어서 흐르는 것이 물(水)이다.

 

그래서 이 탐심(貪心)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순간도 멈추는 때가 없다. 화(火)는 일어났다가 또 멈추기도 하지만 이 욕심(慾心)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계속 흐른다. 어느 틈에든지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다.

 

이게 탐애진심(貪愛瞋心)이다. 그래서 우리 고통(苦痛)을 차분히 살펴보면 분노(憤怒) 화(火)로 말미암아 생기는 고통이 상당히 많다. 그 때 화(火)를 내지 않았으면 고통(苦痛)이 훨씬 줄어들었을 텐데, 그 화(火) 한 번 낸 것을 가지고 평생(平生)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아이가 하도 울어서 화를 못참고 아이를 번쩍 들어서 창문 너머로 던졌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 아이 몸에 장애가 와서 평생(平生) 고(苦)를 짊어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게 바로 화(火)로 말미암아 생기는 고통(苦痛)이다. 또 화(火)를 잘못 내서 생기는 고통(苦痛)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부인(夫人)에게 폭력(暴力)을 한 번 썼다가 평생(平生) 그 말은 듣고 또 듣는다.

 

전쟁(戰爭)도 화(火)다. 화(火)로 말미암아 생기는 고통(苦痛)이 굉장히 많다. 그리고 탐욕(貪慾)으로 인(因)하여 생기는 고통(苦痛)도 이루 말할 수 없다. 거의가 다(皆) 탐욕(貪慾)으로 인(因)하여 생기는 고통(苦痛)이다. 그런데 이것은 표시(表示)도 없다.

 

화(火)로 생기는 고통(苦痛)은 표시(表示)가 있는데, 그 탐심(貪心), 욕심(慾心)으로 생기는 고통(苦痛)은 표시(表示)가 없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전부(全部) 자기 욕심(慾心)에서 오는 화(火)가 많다.

 

그 중에서도 어리석어서 오는 고통(苦痛)이 탐심(貪心), 진심(瞋心)에서 오는 고통(苦痛)보다 훨씬 더 많다. 알고 보면 전부(全部) 어리석어서 오는 고통(苦痛)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다 어리석어서 오는 고통(苦痛)이다.

 

무엇을 잘못 알아서 그렇다. 분명히 자기가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좋지 않았다. 젊음이 오래 가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금방 지나갔다. 좋은 사람이 항상 좋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 반드시 나빠진다.

 

나하고 사이가 좋지 않는 것은 과거(過去)에 전부 좋았던 사람이다. 나하고 좋았던 사람이 아니면 절대 나빠질 수가 없다. 지금 사이가 나쁜 사람은 과거(過去)에 전부(全部) 나하고 좋았던 사람이고, 지금 나하고 좋은 사람은 앞으로 나빠질 사람이다.

 

이것이 세간법(世間法)이다. 그런데도 이런 것을 모르고 있다. 전부(全部) 근본(根本)이 바로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망견(妄見)이고, 망상(妄相)이고, 사견(邪見)이다. 그래서 이런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을 알고 보면 전부(全部) 어리석어서 그렇다.

 

그러면 어리석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망상(妄相)인데, 우리 본각진지(本覺眞知) 본래(本來) 깨달아 있는 청정심(淸淨心)이다. 그리고 참되게 아는 지혜(知慧) 그런 본심(本心)이 있다.

 

그런데 한 순간 허망(虛妄)한 생각으로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진여법(眞如法)이 하나인 줄을 우주(宇宙) 만법계(萬法界)가 진여(眞如) 일법계(一法界)인데, 진여(眞如) 일법(一法) 뿐이다.

 

불여실지(不如實智) 진여법일고(眞如法一故) 우주(宇宙) 만법계(萬法界)가 무엇이든지 진여(眞如)일 뿐인데, 그 진여법(眞如法)이 하나인 줄을 여실(如實)하게 알지 못하므로 무엇이 일어났는가?

 

불각심기(不覺心起) 이유기념(而有其念)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일어나 망념(妄念)이 생겼다. 불각심(不覺心)이 일어나 허망(虛妄)한 마음이 생겼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무명(無明)의 특징(特徵)이 하나인 줄을 모른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인가? ‘다른 것이 없는 것’을 하나라고 한다. 우주(宇宙) 만법계(萬法界)가 다른 것은 없다. 일체 만유(萬有)가 일진법계(一眞法界), 오직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일진법계(一眞法界) 하나의 진여법계(眞如法界)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그것이 근본번뇌(根本煩惱),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명(無明)의 특징(特徵)은 분별(分別)을 나눈다. 분별(分別)을 하지 않으면 무명(無明)이 아니다. 이것을 분별심(分別心)이라고 한다. 하나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나눈다. 그러니까. 망념(妄念)이 생긴다.

 

그러면 망념(妄念)은 무엇인가? 이것은 내 몸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자기 몸만을 몸으로 알고 다른 것은 모른다. 그리고 이 생각만을 마음으로 알고, 그 생각이 일어날 때나 않일어날 때나 항상(恒常) 상주(常主)하는 진심(眞心), 상주진심(常主眞心)은 모르고, 염기염멸(念起念滅)하는 망심(妄念)만을 자기 마음으로 안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야기 하기를, ‘사대(四大)를 몸으로 알고, 망상(妄相)을 마음으로 안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면 기억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런 분별심(分別心), 의식(意識), 사량(思量), 계교(計巧), 망상(妄相)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이런 것들만을 마음으로 알지, 그 무분별지(無分別智), 진지(眞智) 참다운 지혜(知慧), 분별(分別)이 없는 참 지혜(知慧)는 모른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자기 몸만을 몸으로 아니까. 그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알 수가 없다.

 

자기 몸만을 몸으로 아는 동시에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잃어 버렸다. 이것이 전도몽상(顚倒夢想)의 무명(無明)이다. 사량(思量), 계교(計巧), 망상(妄相), 분별심(分別心), 의식(意識)만을 마음으로 아니까. 무분별지(無分別智), 진지(眞智) 참다운 지혜(知慧)를 잃어 버렸다.

 

이런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원각경(圓覺經) 문수보살장에서 이렇게 잘 설명(說明)을 했다. 그래서 이것을 비유(比喩)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눈병(眼疾)이 났는데, 안질(눈병)이 있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니까. 허공(虛空)에 아주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이것을 공화(空華)라고 한다. 그런데 하늘에 꽃이 어떻게 해서 피었을까? 허공(虛空)에는 본래(本來) 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눈병(眼疾)에서 온 것이다.

 

비피병목(譬彼病目) 견공중화(見空中華) 급제이월(及第二月) 비유하면 눈병이 있는 사람이 공중에 꽃을 보는 것이나 두 개의 달을 보는 것과 같다.

 

공실무화(空實無花) 병자망집(病者妄執) 허공에는 진실로 꽃이 없으나 눈병이 난 이가 허망하게 집착한다. 그래서 허공은 본래 꽃이 없다. 그런데 그 꽃이 왜 생겼을까? 그것은 자기 눈에서 왔다.

 

그러면 이 몸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고 고통(苦痛)이 있는데, 이 몸에 고통(苦痛)은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법신(法身)을 잃어버린 데서 왔다. 법신(法身)을 잃어버리니까. 이 몸에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苦痛)을 그대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음은 망상심(妄相心)만을 마음이라고 하는데 그 망상심(妄相心)은 어디서 왔을까?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홀연념기(忽然念起) 명위무명(名爲無明) 홀연히 한 생각(妄念)이 일어나서 망상(妄相)을 가지고 마음이라고 여기니까. 그 참 지혜(知慧)를 잃어버린 데서 이것이 왔다.

 

그래서 이런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번뇌(煩惱)라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깨달아야 할까? 이런 무명(無明)과 번뇌(煩惱)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佛敎)인데, 그럼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수분각(隨分覺)과 구경각(究竟覺) 이런 것이 있다.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이다.” 자신이 자기를 보는 것이 깨닫는 것이다. 또 ‘깨닫는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집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자기 집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깨닫는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눈이 자기 눈을 보는 것이다.” 내 눈이 내 눈을 보려면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자기 눈을 가지고 다른 것은 다 볼 수 있는데, 자기 눈이 자기 눈을 본다는 것이다. 이게 깨닫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보는 것, 내 집에서 내 집으로 가는 것, 자기 집에서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눈이 눈을 보는 것이다.

 

가르침이 참 묘하다. 그러면 이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크게 보면 그렇고, 과정으로 보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육조대사(六祖大師) 구결(口訣)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각의유이(覺義有二) 일자외각(一者外覺) 관제법공(觀諸法空) 깨달음의 뜻이 둘이 있다. 첫째는 외각(外覺)인데, 밖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밖으로 어떻게 깨달을까? 관재법공(觀諸法空) 제법(諸法)이 공(空)함을 보는 것인데 그게 깨닫는 것이다.

 

밖으로 깨달음이 있으면 일체만물(一切萬物)이 공상(空相)이다. 공상(空相)이라고 하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보는 것이다.그러니까. 관재법공(觀諸法空) 제법(諸法)이 공(空)함을 보는 것이다. 이게 외각(外覺) 밖으로 깨닫는 것이다.

 

또 내각(內覺) 안으로 깨닫는 것이 있다. 안으로 깨닫는 것은 무엇일까? 이자내각(二者內覺) 지심공적(知心空寂) 마음이 공적(空寂)함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밖으로 공(空)함을 본다고 하는데, 다 공(空)한데, 하나 공(空)하지 않는 것이 있다. ‘공(空)하다’고 보는 마음은 있다. 이것은 공(空)이 아니다. 그러니까. 외각(外覺)만 가지고는 ‘○○도 불생불멸’이고 ‘○○도 不生不滅’이고 ‘○○도 공(空)’이라고 해봐도 그 ‘공(空)’이라고 하는 생각 하나는 남아 있다.

 

공부하고, 수행하고, 기도하고, 정진하는 사람도 전부 밖으로 공(空)함을 아는데 여기에 떨어져서 큰일 난다. 다 여기에 걸려 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는데, 그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는 마음이 떡 남아 있으면 한 생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생멸(生滅)이다.

 

그러면 거기서 더 들어가서 내각(內覺)을 해야 되는데, 내각(內覺)은 안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까지 공(空)함을 알아야 한다. 지심공적(知心空寂) 마음이 공적(空寂)함을 아는 것이 내각(內覺)이다.

 

이게 깨달음의 단계(段階)이다. 그리고 기신론(起信論) 같은 데서는 본래(本來) 한 생각이 일어나는 그 무명심(無明心) 이게 미세망념(微細妄念)인데, 미세망념(微細妄念)을 살피니까. 깨치니까. 더 이상 미세망념(微細妄念)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미세(微細)한 그 무명망상(無明妄相)까지 멀리 멀리 다 여의어 가지고 미세망념(微細妄念)을 다 여의어서 득견심성(得見心性) 본래(本來) 망상(妄相)을 일으키기 이전에 그 참마음, 본성(本來)의 마음을 본다. 이게 깨닫는 것이다.

 

망상(妄相)을 일으켰으니까. 그 망상(妄相) 첫째 망상(妄相)은 밖으로 모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과 좋게 보이고, 나쁘게 보이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보이는 것을 구하러 가는 것이 망상(妄相)이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아 이렇게 해서는 끝이 없구나” 안으로 자기 청정본심(淸淨本心)을 찾아 가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밖으로 욕심(慾心)을 내던 그 망상(妄相)이 안으로 참마음을 찾으러 들어간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망상(妄相)인데, 이미 일어난 업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청정본심(淸淨本心)을 찾아서 가는데, 그것이 수행(修行)이다. 그러다가 청정본심(淸淨本心)과 딱 마주칠 때가 있다. 이것을 등각(等覺)이라고 한다.

 

거의 청정본심(淸淨本心)하고 같아진다고 해서 등각(等覺)이라고 한다. 그러면 청정본심(淸淨本心)과 그 망상(妄相)이 하나가 된다. 이게 득견심성(得見心性) 심성(心性)을 본다. 그래서 이것을 구경각(究竟覺:보살의 수행이 원만하여 궁극적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경지)이라고 한다.

 

깨닫기 전에는 깨달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고, 그 번뇌없는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뜻이 있었는데, 나중에 가면 망상(妄相)도 없어지고, 번뇌(煩惱)도 없어지고, 본심(本心)이라고 할 것도 따로 없는 그냥 하나가 된다.

 

이것을 묘각(妙覺)이라고 하고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원각경(圓覺經)에서는 비유(比喩)로 말하기를, 조금 유쾌(愉快)한 비유(比喩)는 아니다. 사람이 자기 목을 자기가 매어서 죽을 때, 처음에는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매니까. 목을 매는 손이 다르고, 매어지는 목이 다르다.

 

그게 오래 되면 숨이 다 진(盡)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손도 없고 목도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비유(比喩)가 그렇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 손도 있고, 목도 있었다. 목은 매어지고, 손은 매니까. 목과 손이 다르다.

 

숨이 다 진(盡) 다음에는 손도 없고 목도 그냥 없어진다. 그래서 깨닫기 전에는 번뇌심(煩惱心)이 있고, 청정심(淸淨心)이 있는데, 깨달은 다음에 청정심(淸淨心)을 본 다음에는 번뇌심(煩惱心)과 청정심(淸淨心)이 없다.

 

이것을 심체이념(心體離念) 그 마음에서 망념(妄念)을 여윈 것이 깨달음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청정도인(淸淨道人)은 번뇌(煩惱)이니 지혜(知慧)이니 이런 구분(區分)이 없다. 청정도인(淸淨道人)은 무슨 수행(修行)이다. 수행(修行)이 아니다. 구분(區分)이 없다.

 

그래서 도인(道人)에게 큰마음 먹고 “도(道) 닦으러 왔습니다.” 그러면 도인(道人)이 볼 때는 아주 이상하고 새삼스럽다. “이 사람아 도(道)는 왜 닦으려고 하는가?” 도(道)를 닦으려고 하는 마음이 흉악(凶惡)한 망상(妄相)이다.

 

그러면 도인(道人)은 “멀쩡한 날에 도(道)를 닦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게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경지(境地)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마치 이런 것이다.

 

‘사람이 자기 눈을 볼 수 없다.’ 라고 해서 자기 눈을 볼려고 한다면 불견자안(不見自眼) 갱욕구견(更欲求見) 자기 눈을 보지 못하고 다시 보려고 하면, 기시자안(旣是自眼) 여하갱견(如何更見) 이미 자기 눈인데, 어찌 다시 또 자기 눈을 볼 수가 있겠는가?

 

내가 내 눈을 본다고 하는데, 이게 망상(妄相)이다. 이미 내 눈인데, 어떻게 내 눈을 보겠는가? 그러면 무엇인가? 약지불실(若知不失) 즉위견안(卽爲見眼) 눈을 잃지 않는 줄 알았으면 곧 눈을 본 것이다. 만약 자기 눈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 눈을 본 것이다.

 

내가 내 눈을 보는 방법은 내가 내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을 잃어버린 사실이 없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자기의 눈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전부 자기 눈을 보는 것이다.

 

이게 조금 어려운 이야기인데,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 알 사람이 있으니까. 걱정할 것은 없다. 그러면 내가 내 눈을 보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미 내 눈인데, 또 무엇을 본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인가?

 

지금까지 ‘내 눈을 잃어버린 사실이 없다.’ 라는 것을 알면, 그게 바로 내 눈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늘을 보는 것도 바로 그게 내 눈이고, 땅을 보는 것도 내 눈이고, 모든 것이 내 눈이다. 이게 자기 눈을 보는 방법이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을 찾는다고 이러니까. 이미 내 마음인데, 어디 가서 찾는다는 것인가?

 

‘내 마음이 전혀 달라짐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안다면 그게 바로 내 마음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 나면 ‘하늘도 내 마음이고, 땅도 내 마음이고, 사람도 내 마음이고, 내 눈으로 본다.’ 라고 하는 것을 알고 나면 모든 것을 보는 것은 내 눈이고, 그렇듯이 ‘내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한다.’ 라고 하는 것을 알고 나면 일체가 내 마음이다.

 

이것을 견성(見性)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말씀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수심결(修心訣)에 있는 법문(法問)인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시자심(旣是自心) 하갱구회(何更求會) 이미 자기의 마음이니, 어찌 다시 자기 마음을 알기를 구하겠는가? 이미 다 자기 마음이다. 마음을 찾는 것도 내 마음이고, 생각하는 것도 내 마음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境地)는 망상(妄相)과 진심(眞心)이 다 없어지는 것이다.

 

망상(妄相)도 없고 진심(嗔心)도 없고 다 없어지는 것이다. 비유(比喩)로 말하면 손도 목도 다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하게 죽는 것이다. 설죽으면 아주 고약해진다. 죽으려면 아주 푹 죽어야 한다.

 

설죽으면, ‘나 죽겠네’ ‘나 죽겠네’ 이것은 않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도(道)도 마찬가지다. 닦으려면 푹 닦아야지, 마음이 공(空)한 줄을 모른다든지, 겨우 색(色)이 공(空)한 것만 안다든지, 이 생각(思)을 일으키는 것을 가지고 도(道)를 삼는 것이 아주 어설픈 것이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생각(思)을 일으키는 것이 도(道)가 아니다. 망념(妄念)을 여의어서 진심(眞心)도 망심(妄心)도 없는 그 경지(境地)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것을 경책(警策)하는 것이다.

 

이미 자기 눈인데, 어찌 다시 보기를 바라겠는가? 하는 것처럼 이미 자기 마음인데, 어찌 다시 자기 마음을 알려고 하겠는가? 약욕구회(若欲求會) 변회부득(便會不得) 만약 자기 마음을 알려고 한다면 곧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참으로 자기 마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 다만 내 마음은 내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견성(見性:성품을 봄)이다. 이것이 자기 심성(心性)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보조(普照) 지눌(知訥) 스님의 유명(有名)한 법문(法問)이다. 내가 내 마음을 아는 것은 단지불회(但知不會) 내 마음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알지 못하는 것인 줄을 아는 것, 자꾸 내 마음을 알려고 하면 이것은 내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내 마음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그것이 견성(見性:성품을 봄)이다. 내 눈은 내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그것이 자기 눈을 본 것이다. 내가 내 눈(眼)을 보는 방법은 내 눈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내 눈(眼)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 나면, 나무도 내가 내 눈(眼)으로 보고, 눈(眼)이 본 것이다. 사람을 보는 것도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눈(眼)이 본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도 이미 내 마음인데, 내가 어찌 내 마음을 또 알겠는가?

 

내 마음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아는 그것이 견성(見性:성품을 봄)이다. 이것이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말은 다 빼고 선방(禪房)이나 도인(道人)들은 뒤의 두 구절(句節)만 사용하는데, 다만 알지 못할 줄 아는 그것이 견성(見性)이다.

 

이렇게 알지 못할 줄을 알아야 되는데, 자꾸 알줄만 아는 것이다. 모를 줄을 모른다. 즉 마음을 드러내서 무엇을 해결(解決)하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마음을 가라앉히면 다 해결(解決)되는데, 한 생각을 일으키면 해결(解決)이 않된다.

 

그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모든 문제(問題)는 마음 한 번 일어난 데서 다 일어났고, 모든 문제(問題)의 해결(解決)은 마음 한 번 가라앉히는 데서 사라진다. 그래서 다만 모를 줄을 아는 그것이 견성(見性)이다.

 

깨달음이 이렇게 쉽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알아내는 것이 절대(絶對) 아니다. 망상(妄相)을 쉬는 그것이 깨달음이다. 쉬면 밝아진다. 못 쉬면 어두워진다. 이것이 도(道)이다. 쉬면 밝아지는데, 못 쉬면 어두워진다.

 

그래서 생각이 앞을 가려서 어둡지, 생각이 푹 쉬면 밝고 환해진다. 이것이 자기가 자기 눈을 보는 것과 같다. 내가 나를 보는 것과 같다. 내 집에서 내 집에 가는 것과 같다. 내 집에서 내 집으로 가려면 어떻게 하는가?

 

간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자기 집을 아름답게 꾸미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지런히 공덕(功德)만 지으면 된다는 것이다. 중국(中國)의 규봉선사(圭峰密禪師)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 분이 법문(法問)하신 내용(內容)이 있다.

 

원각경(圓覺經) 대소(大疎)권4. 속장14. 267上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단괴공리유화(但怪空裏有華) 불각안중유예(不覺眼中有?)

 

다만 허공(虛空) 속의 꽃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기 눈 속에 백태(白苔)가 끼는 병(疾)이 있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참 무서운 법문(法問)이다. 눈 병난 사람이 허공에 꽃이 있는 것만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기 눈 속에 병(疾)이 있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외혐신심고뇌(外嫌身心苦惱) 불지내축미정(不知內畜迷情)

 

밖으로 몸과 마음에 고통(苦痛)이 있는 것은 싫어하고, 안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밖으로 허공(虛空)의 꽃(華)이 보이는 것은 눈병(眼疾)온 것이고, 또 고통(苦痛)이 오는 것은 자기 어리석은 생각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것이고, 이 망상(妄相)이 완전히 소멸(消滅) 되는 것이 구경각(究竟覺)이다.

 

종범스님 법문 終

 

출처 : 무진장 - 행운의 집
글쓴이 : 유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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