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과 다도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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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차조(茶祖)' 에이사이 선사, 일본의 다도 발전에 큰 공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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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다거’라는 말은 당대(唐代) 고승이었던 ‘종심(從?)’(주 1)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종심선사가 조주(趙州) 관음사에 상주(常住)하였던 까닭에 사람들은 그를 ‘조주고불(趙州古佛)’이라 칭하였다. 그래서 ‘종심’선사란 이름보다 ‘조주선사’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다. 조주선사의 ‘끽다거’에 얽힌 일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조주선사는 자신을 찾아 조주선원에 새로 온 학인에게 물었다. “여기를 온 적이 있느냐?” 학인이 답하여 말하기를 “온 적이 있습니다.” 하자, 조주선사는 “차나 먹고 가게!”라고 하였다. 다른 학인에게 또 물었다. “여기 온 적이 있는가?” 학인이 “온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조주는 또 “차나 한잔 마시게!” 라고 하였다. 이를 보고 있던 주지가 괴이하게 여겨 조주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째서 온 적이 있어도 ‘차나 한잔 마시게’ 하시고, 온 적이 없다고 해도 ‘차나 한잔 마시게!’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조주는 주지에게도 “차나 한잔 마시게”라고 답하였다. (주 2)
조주선사가 세 번씩이나 똑같이 “차나 마시게!”라고 한 의도는 학인들의 망상분별(妄想分別)을 제거해 주기 위함이었다. 즉, “불법은 다만 평상 중에 있는 것이니, 기이하고 특이한 생각을 짓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일단 한번 망상분별에 빠지게 되면 곧 ‘본성(本性)’과 더불어 상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선종에서 자주 말하는 ‘평상심’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차를 보면 차를 마시고,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으면 되는”(주 3) 평상시의 자연스러움 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선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선종에서는 또한 ‘자오(自悟)’를 강조한다. 즉, 스스로 깨달으란 것이다.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로(理路:이치)에 빠지지 말고, 순전히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여 참선수행을 하다가 문득 마음의 꽃이 피게 되면 곧 전혀 다른 신천지와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평상심만이 청정무구한 마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요, 오직 청정한 심경에 도달하는 것만이 비로소 스스로 선기(禪機)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주 4) 이후, ‘끽다거’ 세 글자는 불가와 다도에서 뿐만이 아니라 널리 승·속(僧俗)을 초월하여 많은 세인들의 입에 회자되는 명구가 되었다.
3) 일본의 에이사이(榮西)선사와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
에이사이(榮西) 선사는 송(宋)나라 때, 중국으로 건너가 불교를 배우고 돌아 간 일본의 유학승 중의 한 명이었다. 에이사이 선사(禪師)는 남송(南宋), 효종(孝宗)의 건도(乾道) 4년(1168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절강(浙江)의 천태산(天台山)과 육왕산(育王山) 등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아울러 장강 이남의 유명사찰 들을 두루 찾아 다녔다. 에이사이 선사가 중국에 유학하고 있던 기간은 마침 남송(南宋)의 사회경제가 소강상태에 놓여 있었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음차풍속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은 물론, 장강 이남의 각지에는 종차(種茶), 제다, 음차 등의 풍속이 도처에 흥행하여 실로 가관이었다. 에이사이는 폭 넓게 불경을 연구하면서도 남는 시간에는 차의 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몰두하였다. 남송 광종(光宗)의 소희(紹熙) 2년(1191년)에 이르러 에이사이 선사는 드디어 유학을 마치고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 때, 그는 수많은 불교경전을 가지고 왔음은 물론, 동시에 대량의 차 종자까지도 함께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에이사이 선사는 귀국 후, 가져온 차 씨를 비전(肥前:현,佐賀縣)의 세부리산(背振山)에 심었다. 동시에 차 씨를 도가노오(?尾)에 있는 고우잔사(高山寺)의 묘우에상인(明惠上人)에게 주었다. 묘우에 상인은 에이사이 선사의 지도에 따라 차 씨를 도가노오(?尾)― 현, 우지(宇治)지방 ―에 심었다. 《日本의 茶道》에 의하면, 도가노오차(?尾茶)는 그 후로 “본차(本茶)라는 명성을 얻었고, 다른 고장의 차는 비차(非茶)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우지(宇治)에서 생산되는 ‘옥로차(玉露茶)’는 이미 일본에서는 명차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에이사이 선사는 그 밖에도 차에 관한 저술을 남겼는데, 1211년에 그가 쓴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는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광범위하게 전래되었다. 이후, 일본의 독특한 다도는 점차적으로 그 학술적 체계를 확립해가며 발전되어 갔다. 《끽다양생기》의 저술 시기는 비록 중국 당나라의 육우의 《다경》(서기 780년에 저술)보다 약 400여년이나 늦긴 해도, 그러나 일본 내에서 음차건강법을 널리 보급하고 선전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기엔 충분했다. 《끽다양생기》는 상?하 두 권으로 편찬되었는데, 상권 제일 첫머리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차는 말세(末世)에는 양생의 선약(仙藥)이요,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목숨을 연장하는 기묘한 술법이다. 산골짜기에 이것이 자라면 그 땅은 신비스럽다. 이것을 따는 모든 사람은 목숨이 길어진다.” (주 5)
이어서, 에이사이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변증법을 이용하여 끽다(喫茶)가 강심(强心)과 오장의 건전(健全)은 물론 양생에 유익한 도리를 논술하였다. 그는 책 속에서 차(茶) 및 차의 공능과 효능에 관계있는 중국 고문헌들을 대량으로 인용하여 논술하였다. 하권에서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는 각종 질병에 대해 중점 분석하고, 그 예방과 치병(治病)의 묘술(妙術)로 ‘끽다법(喫茶法)’과 ‘상죽법(桑粥法:뽕죽을 쑤어 먹는 법)’을 제시하였다.
에이사이 선사는 차(茶)가 능히 만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신이 《끽다양생기》〈하권?끽다법〉에서 당나라 진장기(陳藏器)의《본초습유(本草拾遺)》를 인용한 뒤,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귀(貴)하느니 차(茶)로다. 위로는 여러 천상계의 신령에 통하고, 아래로는 배불리 먹어서 침해를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준다. 다른 약들은 오직 한 가지 병만을 치료할 뿐이나, 차는 만병(萬病)의 약일 뿐 이다.” (주 6) 당시, 에이사이 선사는 손수 직접 찻잎을 이용하여,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대장군을 치료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오랫동안 낫지 않던 그의 당뇨는 곧 완치되었다. 이로 인해 에이사이 선사의 《끽다양생기》는 일본에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음은 물론 당시의 일본인들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들 "차가 도대체 무엇인가?"하며 그 실체를 무척 궁금해 하고 알려는 욕망이 고조되었다. 이런 것을 볼 때, 비록 중국으로 전래받은 일본의 다문화가 현재 일본만의 독특한 ‘다도(茶道)’로 발전된 것은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닐 것이다.
-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1) 종심(從?:778~897년) 선사는 산동성 조주부(曹州府)에서 출생했으며 속성 학(?)씨, 법명은 종심(從?)이다. 2)《五燈會元》卷4. 3)《祖堂集》卷10. “遇茶喫茶, 遇飯喫飯” 4) 葛兆光《佛影道踪》 5) 金明培 譯著,《日本의 茶道》(서울, 保林社)의 115쪽에서 재인용함. 이 책에는《끽다양생기》의 원문과 해석 및 주석이 상세함으로 참조 바람. 6) 전게서(前揭書) 135쪽~136쪽. 원문: “貴哉茶乎, 上通神靈諸天境界, 下資飽食侵害之人倫矣, 諸藥唯主一種病, 各施用力耳, 茶爲萬病之藥而已.” 166쪽~167쪽.
-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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