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차

[스크랩]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9 - 보이차 속 칠자병차①

청원1 2015. 6. 15. 05:14
보이차 속 칠자병차①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9
칠자병차의 유래는 골동보이차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운송수단인 마필이 하중을 견딜 수 있는 60kg의 무게와 수송 길이었던 다마고도(茶馬古道)의 통행여건에 의해 둥근 보이차의 무게는 357g로 정해졌다. 이때 보이차의 총칭은 보이원차(普洱圓茶)라 했으며, 개별 상점에서 만든 보이차는 모두 자신들의 상호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다.

칠자병차.


오늘날 병차(餠茶)와 원차(圓茶)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서로 다른 재질의 보이차로 존재했다. 당시 상인들은 보이차의 품질을 두 가지로 나눠 만들었는데, 고급 찻잎으로 잘 만들어진 둥근 차를 ‘원차’라 하여 주로 해외시장에 판매한 반면 하등급 찻잎으로 만든 것은 ‘병차’라 하여 판매대상은 주로 서역지역이었다. 즉 둥근 모양은 같으나 원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 것이다. 공산중국 치하 아래 처음 만든 둥근 보이차 곧 인자보이차의 포장지를 보면 ‘중차패원차(中茶牌圓茶)’라는 글귀가 있다. 글자에서 알 수 있듯 고급 찻잎으로 만들었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 원차이다.

지금 우리가 시중에서 접하고 있는 둥근 형태의 보이차는 대부분 칠자병자다. 칠자병차는 보이원차의 전통 포장법과 같이 7편을 한 죽통에 담았다. 칠자병차의 이름에 대해 예로부터 여러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운남의 민족문헌에 따르면 ‘칠자(七子)’란 ‘다복다손(多福多孫)’의 의미며, ‘병차(餠茶)’는 둥근 모양의 보이차를 가리킨다고 적혀있다.

‘칠자병차’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쇄물로서 등장하게 된 해는 1973년부터다. 이는 문화대혁명 때인 1972년에 그동안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라 불렸던 회사의 이름을 ‘중국토산축산진출구공사운남성차엽분공사(中國土産畜産進出口公司雲南省茶葉分公司)’로 개명한 후 비로소 포장지의 인쇄물에 ‘칠자병차(七子餠茶)’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흔히 보이차의 시대적 흐름을 고대와 현대로 나누는데, 그 가름의 잣대가 바로 1973년이다. 1973년은 보이차의 역사에 있어 한 획을 그었던 해다. 회사 이름을 바꾼 것을 비롯해 자체적 수출업무기능의 실현 그리고 미생물발효의 탄생 등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이 해부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대보이차와 현대보이차의 차이는 발효에서 나타난다. 고대보이차의 발효는 자연산화에서 비롯된 것이며 현대보이차의 발효는 미생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다르다. 고대보이차는 다시 골동보이차 즉 호자급(號字級)보이차와 인자급(印字級)보이차로 나뉘지만 모두 자연발효에서 진화(陳化)된 상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골동보이차를 제1세대, 인자보이차를 제2세대 그리고 현대보이차 즉 1973년 이후의 보이차를 제3세대 보이차라 부른다.
제1세대 보이차는 이무(易武)의 개인상점에서 만들어졌던 반면 제2세대와 제3세대 보이차는 모두 국영 맹해차창을 중심으로 생산된 제품이다. 그리고 지금 보이차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신제품들을 가리켜 제4세대 보이차라 부르고 있다.

제3세대 보이차 즉 현대보이차의 또 다른 이름은 숫자급보이차라고 한다. 시장에서 이를 ‘숫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호자급과 인자급의 명칭에 관한 흐름을 일관성 있게 맞추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미생물발효의 탄생을 기점으로 보이차 출하공장을 곤명공장(昆明)은 1번, 맹해공장은 2번, 하관공장(下關)은 3번이라고 지정하여 제품을 관리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 취다헌 - 醉茶軒
글쓴이 : 취다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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