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서 남도답사 일번지를 해남과 강진으로 꼽은 유홍준 교수는
'무위사 극락보전의 아름다움' 제하의 글에서 "남도답사 일번지의 첫 기착지로 나는 항상
무위사를 택한다. 바삐 움직이는 도회적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무위사에 당도하는 순간
세상에는 이처럼 소담하고, 한적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아름다움도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더욱이 그 소박함은 가난의 미가 아니라 단아(端雅)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라고 쓰고 있다.
이제 우리 고찰순례단은 西方安樂刹 接引衆生大導師님께 공양을 올리러, 그리고 유홍준
교수가 말한 그 『단아(端雅)한 아름다움』을 찾아서 무위사 순례에 나선다.
무위사 연혁
<무위사사적>을 보면 절은 삼국 통일후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갈옥사(葛屋寺)로 창건한 것이 첫번째 중창이라 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효공왕 9) 이후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한다. 따라서 무위사는 형미 스님
이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절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고려시대인 946년(정종 1)에 형미가 제3창을 하면서
모옥사(茅屋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946년은 이미 형미가 입적한 30년
뒤에 최언위가 지은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가 세워진 해라서 믿기
어렵다. 이것은 아마 형미가 모옥9茅屋)이던 무위갑사를 왕건의 후원을 받아 크게 중창
하면서 교화를 펼쳤던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무위사는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형미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절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가지 활동 기록이 보여지는 등
자못 활기를 띠고 있어 주목된다. 나라에서는 1407년(태종 7) 12월에 각처의 명찰로 여러고을
의 자복사(資福寺)를 삼게 하였는데, 이 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이것은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선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그 성격이 변동되었
음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사격의 변동은 고려후기의 천태종 백련결사의 활발
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白蓮
結社)도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 성격 변동에도 영향을 끼쳤
을 것으로 믿어진다.
결국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이미 천태종 소속의 사찰이 되었다가
조선 초기 사찰통폐합의 2차정리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된 듯하다. 이
무렵의 연혁을 보면 1430년(세종 12)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6년(성종 7)에는 극락보전 후불벽이
만들어졌고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극락보전묵서명(無爲寺極樂殿墨書銘)>으로
확인된다. 이 묵서명을 보면 극락보전 건립에 관직을 부여받은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곧 극락전 건립이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던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임과 함께 국가적인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社)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보전의 건립, 아미타삼존도 · 아미타여래도등의 벽화
조성은 그 조성 시기 및 신앙 배경 등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왜냐하면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水陸齎)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 의식으로서 적
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재는 곧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가지 포용하려는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의식인 것이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보전이 건립되고 아미타불의 벽화가 조성되는 것은 이와 같은 신앙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1555년9명종 10년)에 태감(太甘) 스님이 4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했다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무위사란 절 이름이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407(태종
7)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무위사사적>의 이 부분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잰왜란 ·
병자호란 두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절은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
이 일도(一道)에 으뜸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 법당과 요사가 훼손되어져 몇 개의 전각
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에는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석주가 제작되었다.
1739년 (영조 15)에 해초(海超) 스님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는데 당시 미타전· 천불전 ·
시왕전이 있었다. 당시의 주지는 극잠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절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극락보전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극락보전을 수리 보수하고 1975년 벽화보존각을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
했다. 1975년에는 편광영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 · 해탈문 · 명부전 ·
천불전을 다시 짓고 1991년에 산신각을 1995년에는 이미 있던 동쪽 요사를 늘려 지었다.
- 출처 : 무위사 홈페이지 -
▲ 남강 휴게소 / 06:10경 낙동초등학교 아래서 출발하여 07:10경 남강휴게소에
도착한 고찰순례단 탑승 버스 옆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백팔고찰순례단원들.
제15차 고찰순례는 1년 중 가장 더운때인 7월 4째주 일요일이다. 그래서 여러가지로
고민을 했어야 했는데, 그 중에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 땡볕아래서 1시간 가량 걸어
가면서 참배해야하는 코스에, 나무 그늘마저 드문 천불천탑으로 알려진 운주사 순례였다.
몇몇 단원에게 의견을 묻고 운주사 문화해설사에게 현지 사정을 듣기 위해 전화를 했더니
예상했던 대로 노약자에게는 무리가 있을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우리 순례단원중에
노약자는 없지만, 아직 중생이기에 더운 날씨 때문에 수많은 탑과 부처를 참배하는데
소흘함이 있을까 염려되어 내년 4월 순례 예정인 장흥 보림사를 이번에 순례하고 운주사는
내년 4월에 순례하기로 하였다.
06시 10분경 낙동초등학교 아래서 출발하자 말자 불교 TV에서 제작한 아침예불 DVD와
포교사인 수행심 보살님의 목탁에 따라 아침예불을 올리고, 남강휴게소에서 승차후는
13차 순례와 14차 순례시에 이어서 '2009년 통도사 화엄산림대법회' 4번째와 5번째인
통도사 수좌 향과스님의 <세주묘엄품>과 전 금산사 주지 평상스님의 <여래현상품>,
<보현삼매품> 법문 DVD를 시청하였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조사당 같은 고려시대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종묘나 명륜당 대성전
에서 보이는 단아함이 여기 그대로 살아 있다. 거기에다 권위보다 친근감을 주기 위함인지
용마루의 직선을 슬쩍 공글린 것이 더더욱 매력적이다. 치장이 드러나지 않은 문살에도
조선 초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단정함이 살아 있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권에서-
유홍준 교수는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 모습처럼 되어 보렴"하는 충언을 들려주는 것
같다며 학생들은 극락보전의 이 낮은 목소리를 못 듣는 것 같다면서, 단순한 미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 극락보전 - 국보 13호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 공포는 주심포 양식이다
주심포 양식은 고려초기에 신라와 송의 건축양식을 바탕으로 주두위에만 짜는 양식이다.
특징은
『 기둥위에 바로 주두를 놓았고 치목이 아름답게 되어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을 하였다. 』
『 전통 목조 건축의 가구 형식 중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
『 배흘림 기둥에 간단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
현존 건축물로는
『 고려 중기 :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
『 고려 후기 : 수덕사 대웅전(1308), 부석사 조사당 』
『 조선 초기 : 무위사 극락전 (1746) 』
▲ 극락보전 목조 아미타삼존불 좌상(보물 제1312호) 와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제313호) / 수미단과 신중단에 올려진 떡, 과일 등
공양물은 우리 고찰순례단원인 원융거사가 헌공하였다.
願我盡生無別念(원아진생무별념)원컨대 생명 다할때까지 다른 생각 가지잖고
阿彌咤佛獨相隨(아미타불독상수)아미타불 공덕상만 따르겠습니다
心心常係玉毫光(심심상계옥호광)마음은 항상 옥호광에 이어 있고
念念不離金色相(염염불리금색상)생각은 금색 무량수불에서 떠나지 않으리.
조선 초기의 아미타삼존불상. 왼쪽에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을,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
(地藏菩薩像)을 협시로 한, 아미타삼존불상 형식의 대표적인 예이다. 조성 시기는 1476년
(성종 7)에 제작된 후불벽화(後佛壁畵)와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미타상은
오른발이 보이는 길상좌(吉祥坐)의 자세이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후불벽화 본존의
손모양과 같게 함으로써 아미타불임을 알려준다.
통견의 두툼한 옷, 왼쪽 어깨의 옷깃 양식, 띠 매듭의 규격화 등은 조선시대 초기 불상의
불의(佛衣)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왼쪽 다리를 내린 반가좌(半跏坐)의 관음보살상은 꽃장식
을 오려 덧붙인 묵중한 보관을 썼으며, 오른쪽 다리를 내린 반가좌의 지장보살상은 두건을
쓰고 있다. 전체적으로 충만하면서 단정하고 엄숙한 얼굴, 처진 젖가슴, 넓은 무릎 폭, 두툼한
불의, 독특한 옷주름을 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후기 불상의 영향을 받은 조선 초기의
불상양식이다.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벽화로서,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해 별도로 세운
흙벽에 채색그림으로 그렸다. 앉은 모습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이, 오른쪽
에는 지장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화면의 맨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이 2불씩이 그려져 있다.
불상 위쪽의 반은 천판에 쌍룡이 있는 寶蓋形(보개형) 닫집을 조성하였고,
나머지 반은 井자형으로 구획하였으며, 각 구획마다 꽃 한 송이씩을 그려 넣었다.
晝夜 六時예 曼陁羅花ㅣ 듣거든 하 風流ㅣ 그츬슷 업스니.
每日 淸旦애 曼陁羅花 담아 諸佛 供養이 그츬 슷 업스니. - 석보상절 에서 -
주야 여섯 때에 만다라 꽃이 떨어지거든 하늘의 풍류가 그칠 사이 없네.
매일 맑은 아침에 만다라화를 담아 제불께 공양함이 그칠 사이 없네.
(.....하 * 風流...... *자리에 자판에 없는 글자라서 입력 할 수 없었음)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
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
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 여러 단원들이 기와불사하고 받은 액자용 사진을 집에서 촬영했습니다.
아래 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하고는 솜씨 부족으로 색상이 차이가 나는데,
위 사진과 무위사에서 받은 사진의 색상은 거의 같습니다.
위 사진 왼쪽 아래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파랑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데 벽화에 얽힌 설화와 관계가
있지는 않은지 추측해 본다.
▲백의수월관음도-보물 제1314호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국보 제313호)의 뒷면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무위사 지오스님 집전에 따라 우리 순례단원들은 사시불공을 올리고,
백중이 가까워옴에 따라 지장보살 정근을 하였으며, 정근중에 각자가 108배를 하였다.
지오스님께서는 우리 백팔고찰순례단과 이날 사시불공 공양물을 헌공한 원융거사. 축원희망
단원들의 가족 축원을 3번에 걸쳐 정성스럽게 축원해 주셨다.
무위사 법정 주지스님께서 바쁘신 중에도 불구하고 우리 순례단원들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
사찰연혁과 내력 등을 양팔을 벌리는 등 제스쳐를 섞어가며 장시간 자상히 설명해 주셨다.
▲ 삼층석탑(도지정 문화재자료 76호)
조성 연대는 선각대사편광탑비의 조성 연대(946년)와 동시대이거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은 고려초기로 보인다.
▲ 선각대사 편광탑비(보물 제507호)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 명부전 (冥府殿)
▲ 미륵전 석불입상 (彌勒殿 石佛立像)
▲ 삼존불화(三尊佛畵)
극락전 내부 동측 내벽 중앙에 그려진 그림으로 지금은 해체되어 보존각에 진열해 놓았다.
가로로 긴 화면 가운데에 설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협시보살
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삼존불 사이와 주위로는 합장한 채 본존을 향하고 있는 입상의 두
보살상과 6비구를 배치하였으며, 멀리 뒤로는 마치 기암의 월출산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암산을 그려 넣었다. 비교적 활달한 필치에 적황색의 색조, 당당한 체구의 인물 형태 등에서
고려적 색채가 어느 정도 엿보이긴 하지만, 사각형의 얼굴과 연꽃대좌의 형식적인 꽃잎 표현
조선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본존불의 낮은 육계와 정상계주, 고식(古式)의 눈ㆍ코ㆍ
입 표현, 다소 위로 올라간 왼손, 회화성이 돋보이는 자연스러운 옷주름 처리 등은 이 삼존불도
를 후불벽화와 거의 같은 시기의 그림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요소들이라 할 수 있겠다.
▲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
극락전 내부 서측벽 중앙에 그려져 있던 것으로 이 역시 지금은 보존각에 보관ㆍ진열되어
있다. 삼존불도와 같은 크기의 화면으로 8대보살과 8비구를 거느린 아미타불이 극락왕생자
를 맞이하는 장면이다. 전체적인 구도가 매우 자연스럽고 우측을 향하고 있는 인물들의 동적
인 자세와 스케치 풍의 필치, 그리고 익살스럽고 자유로운 얼굴 표정 등으로 회화성과 함께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삼존불도와 거의 동일한 색채와 필치, 인물 형태를 하여 같은
시기 작품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은 무위사에서 유기농 야채 비빔밥으로 점심공양후 12시
40분경 15차 두번째 순례고찰인 도갑사로 향했는데, 가는 도중 차창 너머로 멀리 펼쳐지는
월출산의 기암 등과 그리고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달리는 차창 너머로는 보기 힘든 월출산의
빨간 구름다리가 단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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