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등산

경주남산

청원1 2006. 4. 2. 06:46
[경주 남산] 천년 신라의 추억
아, 마애불! 높으신 몸 굽어살피사 인간사 아픔 보듬고…

신라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 경주 남산. 그곳에는 아직도 신라가 살아 숨쉬고 있다. 남산 삼릉곡의 상선암 마애대좌불이 서라벌 너른 들판을 굽어보고 있다.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 절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은 기러기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 같다. 경주 남산을 일컫는 말이다.

• [여행수첩] 경주 남산

경주 남산을 보지 않고 경주를 다녀왔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1,000년의 신라를 품었고 지금껏 그 신라가 살아 숨쉬는 서라벌의 진산(鎭山)이다.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이 능선을 잇는 남산은 동서로 4km, 남북은 9km인 길쭉한 타원형의 생김새다. 높이나 규모로 보면 뭐 별거냐 싶지만 돌도 많고 골짜기도 많은 ‘작지만 큰’ 산이다.

삼릉곡 상선암 위의 바둑바위는 경주 시내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왼쪽). 7분의 부처와 보살이 한데 모습을 드러낸 칠불암(가운데). 삼릉 옆 솔숲은 노송의 굽어진 가지와 뿌리가 빚는 선의 물결로 황홀하다(오른쪽).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나정이 남산 자락이고, 신라의 종말을 가져온 포석정이 또한 남산에 깃들어 있다. 남산에는 왕릉이 13기, 절터가 147곳이 있고 불상 118기, 탑이 96기, 석등이 22기 등 발견된 문화유적의 수가 672개에 달한다. 유네스코는 ‘살아있는 박물관’ 남산을 2000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신라인은 왜 이 남산에 그토록 많은 부처를 새겨놓은 것일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라인들은 남산의 바위 속에 신들이 머물며 백성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이후 불교가 전래되고 나서 바위 속의 신들이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순정한 믿음 하나로 단단한 화강암을 쪼아낸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게 아니라 바위에서 부처를 끄집어낸 것이다. 신라의 많은 설화들은 남산에 사는 부처와 보살이 이따금씩 산에서 내려와 권세 있는 자들의 나태함을 호되게 꾸짖고 서민들의 아픔을 보듬어 준다고 말한다.

● 칠불암과 신선암

박제되지 않은 ‘살아있는 신라’ 남산을 오르는 길, 우선 봉화골의 칠불암 코스를 택했다. 진달래가 유난히 곱다는 골짜기다. 남산의 동편 자락 통일전에 차를 대고는 한참을 걸어 산길에 들어섰다. 보문호 주변 벚꽃나무에는 아직 벚꽃이 피지 않았는데 남산의 진달래는 이제 막 흐드러져 분홍의 물감을 노송 사이사이에 흩뿌리고 있다. 꽃잎 하나를 따서 입에 물었다. 혀끝에 스미는 달착지근함. 봄의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산길이 깊어지며 진달래의 자취가 차츰 잦아들고 대신 노란꽃들이 얼굴을 내비친다. 꼭 산수유를 닮은 생강나무 꽃이다. 50분쯤 걸었을까 시원한 물맛의 약수터가 나왔고 이곳부터는 경사가 급해지며 작은 대나무인 시누대 숲이 펼쳐졌다. 빽빽한 시누대 터널을 지나 하늘이 열리면서 조그마한 절집이 나타났다. 칠불암이다.

넓지 않은 마당에 석탑 하나 서있고 그 뒤로 7분의 부처와 보살이 바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높은 절벽을 등진 삼존불 앞에 사각의 바위가 놓여졌고, 그 바위의 각 면에도 불상이 새겨져 있다. 남산의 눈부신 바위 절벽과 어우러져 웅장함이 느껴지는 조각상들이다.

칠불암 위 깎아지른 절벽 위에는 신선암이 있다. 신선암으로 오르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헉헉’ 거리는 거친 숨소리는 낭떠러지 위 좁은 바위 난간을 지나며 탄성으로 바뀌었다. 경주의 넓은 들을 내려다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든 부처가 바위에 그림을 그려넣은 듯 자리하고 있다.

아침 안개가 짙을 때는 신선암 바로 아래 골짜기 까지 안개 바다를 이룬다고 한다. 신선암이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이곳에 서면 모든 이들이 신선이 되는 기분이리라. 그래서인지 신선암의 부처는 연꽃의 좌대가 아닌 구름 모양의 좌대에 올라 앉았고, 다리도 편안히 풀어헤치고 있다.

● 삼릉곡

남산 답사의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은 삼릉계곡이다. 10기 이상의 가장 많은 부처를 만나는 코스다. 삼릉곡 산행은 삼불사에서 시작한다.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미소를 품은 배리 삼존불이 길에서 가깝다.

서산의 마애불이 보호각을 철거하니 미소가 사라졌다고 하던데, 이 배리 삼존불은 보호각이 설치되며 미소를 잃었다. 바위에 새겨진 부처의 표정은 햇살이 그려넣는 것인데 그 햇살을 받지 못하니 얼굴은 언제나 무표정이다.

삼불사를 지나 삼릉 앞 아름다운 솔숲 터널을 통해 산으로 오른다. 맨 처음 만나는 부처는 목 없는 석조여래좌상. 조선시대 억불숭유정책에 희생된 부처다. 목을 자르면 부처의 생명도 끝이 난다고 여긴 것일까. 이 불상 옆에는 이제 막 바위에 내려서는 듯한 마애관음보살이 서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화장을 한 듯 입술이 불그스름하다. 채색불상이다. 온몸에도 색이 칠해졌을 텐데 다 벗겨지고 유독 입술에만 남은 것이다.

힘있는 붓으로 한번에 그려낸 것 같은 선각육존불을 지나면 찬기운을 뿜어내는 계곡 가에 석굴암의 부처를 닮은 늠름한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떨어졌던 불두를 다시 이어 붙이느라 얼굴에는 시멘트로 빚은 성형수술 자국이 있다. 등 뒤에 있던 현란한 무늬의 광배가 부서진 채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삼릉계곡의 정점은 상선암이다. 남산의 불상중 좌불로는 가장 큰 마애불상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머리와 어깨는 바위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아래 부분은 바위 표면에 선으로만 묘사하고 있어, 마치 바위 속에서 부처가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을 포착한 느낌이다.

부처의 오른쪽 귀 뒤편 바위 틈에는 작은 진달래 나무가 자라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진달래꽃을 귀에 꽂은 부처는 언제 또 내려와 세상을 다독이려는가.


경주=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