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차

[스크랩]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4 - 보이차의 종류

청원1 2015. 6. 15. 05:12

보이차의 종류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4
“이곳의 사대부 그리고 백성들이 마시는 차는 찻잎을 찐 후 덩어리 모양을 만든다. 그들은 이를 보차(普茶)라고 부른다.”

명나라 사람 사조제의 <전략>에 기록된 글이다. 이 글은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글로 보일 수 있지만, 필자의 눈에는 수많은 보이차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가 담겨져 있는 글로 보인다.

첫째, 여기서 말한 ‘보차(普茶)’는 보이차를 말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보이차에 관한 사료(史料)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둘째, ‘전’이라는 곳은 지금의 운남(雲南)을 가리킨다. 즉 보이차의 원산지는 운남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셋째, 차의 모양은 줄기 형태가 아닌 덩어리 상태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명나라 만력(萬曆, 1573~1620)년간에 기록된 것으로,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당시에도 지금처럼 찻잎을 우려 마시는 것이 일반적인데도 불구하고 운남 지역에서는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덩어리 형태의 차를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보이병차를 대나무 껍질로 포장하는 모습.


보이차의 총애는 청나라 들어오면서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공으로 바치는 공차(貢茶)의 가지 수는 무려 여덟 가지다. 물론 모양도 다르고 무게도 달랐다. 이중 가장 큰 것은 마치 사람의 머리모양과 같은 것으로 무게는 자그마치 다섯 근이다. 이를 ‘인두공차(人頭貢茶)’라고 한다. 지금도 금과공차(金瓜貢茶)가 하나 남아있어 항주의 중국농업과학원차엽연구소(中國農業科學院茶葉硏究所)에서 소장하고 있다.

청나라부터 흥하기 시작한 보이차의 인기는 청나라와 함께 스러져갔으니 이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보이차가 공차로 지정된 것은 1729년 옹정(雍正) 10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정권말기에 도달하자 혼란과 소요로 인하여 공차는 방화와 약탈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에 조정도 어쩔 수 없이 1908년 광서(光緖) 30년 때 공납을 폐지시켰으며, 200년 동안 궁중의 영욕과 함께 했던 보이공차는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진다.

 
 
조공으로 바쳤던 공차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의 사업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운남에서 보이차를 운영하는 상점들이 상당했다. 대부분 이무(易武)라는 곳에 모였다. 가게에 따라 취급하는 품목의 질도 각자 달랐다. 대체로 품질 좋은 것은 해외로 갔고, 질이 낮은 것은 티베트, 몽골, 위구르 등 빈민지역에 팔았다.

차라는 것은 원래 잎으로 만든 줄기형태인데, 운반할 때 부피가 크고 쉽게 끓어지는 단점도 지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안된 방법이 바로 찻잎을 압착하여 긴압차(緊壓茶)로 만드는 것이다.

보이긴압차 중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둥근 형태의 원차(圓茶)이다. 원차의 무게는 357g이다. 예로부터 일곱 편을 묶어 죽순껍질로 포장하는 것이 전통방법이다. 조정으로 보낸 공차는 말할 나위 없이 가장 좋은 찻잎을 원료로 삼는다. 좋은 찻잎이란 봄에 딴 여린 찻잎 춘첨(春尖)을 말한다. 그러나 민간의 상품은 그러한 고급 찻잎만을 쓸 수가 없다.

이에 민간 보이차는 대부분 가공할 때 비율에 따라 찻잎을 혼합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혼합 찻잎의 등급은 1, 3, 5, 7, 8, 9의 6등급으로 나뉘는데, 대체로 보이차 겉 표면에는 20%정도의 3등급 찻잎을 쓴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7등급 20%, 8등급 30%, 9등급 40%의 비율로 채운다. 물론 좋은 등급의 찻잎은 잎차 형태 즉 산차(散茶)로 10등급으로 나눠 비싸게 내다판다.

둥근 형태의 원차는 70년대 접어들어 이름을 ‘칠자병차(七子餠茶)’로 고쳐져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또 다른 형태의 보이차가 보이는데, 사발처럼 생긴 타차, 심장모양처럼 닮은 긴차(緊茶) 그리고 네모난 모양 중 벽돌처럼 생긴 전차와 정사방형의 방차(方茶)가 있다.

출처 : 취다헌 - 醉茶軒
글쓴이 : 취다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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