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산(楞伽山) 내소사(來蘇寺) 불기 2558(2014)년 6월 1일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
부처님이 능가경을 설했다는 산으로 능히 모든 마장(魔障)을 끊고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 능가산에 소담하게 내려 앉은 연꽃인 듯한 능가산 내소사,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창건 되었다고 전한다. 혜구(惠丘) 두타 스님이 이곳에 절을 세워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고 하였는데 그 중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보유한 문화재로는 국가 지정 문화재 4점과 지방 유형 문화재 2점이 있다. 근대의 선지식인 해안대종사가 출가하고 설법한 도량이다.
내소사는 상단 중단 하단으로 이루어진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데, 하단(下壇)에는 천왕문(天王門) 봉래루(蓬萊樓) 그리고 좌우에 종각인 보종각(寶鍾閣) 그리고 범종각(梵鍾閣)이 있고, 중단에는 삼층석탑을 구심점으로 하여 설선당(說禪堂) 무설당(無說堂)이 있으며, 상단에는 대웅전(大雄殿), 삼성각(三聖閣)이 있어 예불을 하는 신앙적인 주된 공간이다.
6월 1일 내소사, 개암사, 진묵대사 어머님 묘소가 있는 김제 성모암을 순례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중 까다로와진 여행자 보험의 절차상 문제로 애초에 5월 25일로 예정되었던 일정을 1주일 연기하여 6월 1일에 진행하게 되었으며, 이때문인지 정회원의 참여가 저조하였고, 대신 여타 일일회원이 30여명이 동참함으로서 6월 1일 내소사, 개암사, 성모암 순례를 성공적으로 회향하였습니다.
특히 통도사 사찰안내팀 적멸도량회 소속인 괴정동 거주 보살님의 도반 6명이 동참하였고, 다대포 거주 보살님들이 5명이 팀을 이루어 동참 신청을 헀으나, 당시 40여명이 참석 확정되어 있어 44명 정원인 버스에 좌석이 부족하여 동참이 불가하다고 양해를 구하였습니다.
대불련 동문 몇분이 동참하였고, 그 중 검도 8단이며 금당 최규용 선생과 허주스님에게서 황궁다법을 전수 받은 한중차문화연구회장 겸 부산차문화진흥회 부회장이며 2013년 11월 부터 2014년 4월 까지 부산일보에 '이근주의 다반사'라는 칼럼을 연재한 이근주님이 동참하여 내려오는 버스내에서 차에 대한 강설이 있었습니다.
당초에는 내소사와 개암사만 예정되어 있었으나, 회원 몇분의 건의와 동참자중 다음달에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자제분이 있다기에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 千年 香火之地)이며 수험생들의 합격기도 명당처(明堂處)로 소문난 진묵대사 어머님의 묘가 모셔져 있는 전북 김제의 성모암을 추가하여 삼사를 순례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정보다 부산 도착 시간이 늦어지는 관계로 산청약초식당에서 약초정식으로 저녁공양을 하였습니다.
내소사 대웅보전과 개암사 대웅보전에는 '송광사 부산분원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 리본을 단 공양물(떡)을 올렸습니다.
이번에도 여래지보살님과 정연일님이 각 10만원을 보시 하셨습니다. 두분 이 인연공덕으로 업장이 소멸되고 불보살님 가피가 항상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출발시간 20분전에 불교TV에서 발매한 새벽예불 DVD를 돌리면 버스는 도량송과 종송, 타고명종이 울리는 도량이 됩니다. 출발 5분후면 오분향례가 진행되고 이어서 칠정례가 시작되면 전문포교사인 수행심 보살님의 목탁과 DVD에 맞추어 예불을 올리고 이산혜연선사 발원문, 반야심경, 천수경 봉송으로 차내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명제에 따라 순례사찰에 대한 사전지식 습득을 위해 5페이지 분량의 사찰안내 인쇄물(아래 왼쪽 사진)을 배부하였으며, 버스내 새벽예불후 (1)한국의 명찰 '능가산 내소사'(46분). (2)사찰기행 '조화와 균형의 도량 능가산 내소사(23분, 불교건축은 자연과 인간과 종교를 모두 아우러는 어머니 같은 건축이라고 정의하는 동국대학교 건축과 김홍일교수해설) (3)사찰여행 휴 '개암사 ' (20분) DVD를 불교TV에서 구입하여 버스내에서 방영하였습니다. 당일 첫번째 순례사찰에서 사시불공 동참후 바로 예불대참회문으로 108배를 하는데 기존에 배부하였던 2장의 기도포(예불대참회문과 절하는 공덕)중 예불대참회문 기도포의 글씨가 안경을 낀사람은 108배 하면서 땀 때문에 안경을 벗으면 잘 안 보인다기에 안경 없이도 볼 수 있게끔 글씨를 크게하여 A4 반절크기 44페이지 분량의 책자로 제작하여 배부하였습니다.
책자 제작 비용은 지난번 백팔고찰순례 회향날 만원씩 모금하여 단장, 총무, 재무, 수행심 보살 등의 수고에 감사 선물을 하려고 했다는데, 제가 받은걸로 하고 보관했다가 이번에 동참자가 적으면 이번 순례 비용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다행히 일일회원이 30여명 동참하여 그럴 필요가 없기에 감사 선물을 받을 대상이되는 몇분과 의논하여 책자를 제작하였습니다. 추후 천수경(조계종 표준 한글천수경포함, 반야심경(조계종 표준 한글반야심경 포함) 등을 보완하고 표지를 좀 더 업그레이드 하여 정회원에게는 다시 배부 할 예정입니다.
10시 30분경 버스가 전나무 숲길을 우회 천왕문 앞까지 진입하여 한국의 100대 걷기 좋은 길중 하나인 유명한 전나무 숲길을 걷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나 삼사를 순례하려면 시간상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천왕문 앞에서 내소사 사무장이며 포교사단 부산지역단 군포교 항만정사팀에서 수행심 보살님과 같이 활동하는 안병국 포교사님이 사찰안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간 순례 사찰 소재 지역 시·군 소속 문화해설사들의 해설을 여러번 들었는데 불교에 대한 식견이 조금 부족한 듯 하여 관광이 아닌 순례단인 저희들로서는 조금은 아쉽곤 했는데 전문 포교사이자 내소사 사무장이신 안병국님의 해설은 우리 단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안병국 포교사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내소사에 주석하셨던 해안(海眼·1901∼1974) 스님의 오도송이 천왕문 주련으로 걸려 있습니다.
백양사 학명(鶴鳴)스님 밑에서 약관의 나이에 깨달음을 얻으셨던 해안스님은 조실 학명스님이 7일만 정진하면 깨달을 수 있다는 조실 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6일째 되던 날 저녁에 저녁 범종소리가 울리고 방선(放禪) 죽비(竹篦)를 치는 소리에 몰록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때의 오도송이라고 합니다.
할매당산나무와 보리수 나무를 지나.....
봉래루는 조선 태종 12년 (1414)에 건립한 전면 5칸, 측면 3칸, 2층 누각의 맞배지붕의 건축물로 자연과 어우러지게 모양과 크기가 제 각각 다른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고 기둥을 그렝이질(주춧돌의 표면에 맞게 기둥 밑 부분을 깎는 것)하여 세웠다.
대웅보전 - 보물 제291호 쇠못 하나 쓰지 않은 짜 맞추기 공법으로 지어진 대웅보전(大雄寶殿)은 1633년 조선 인조 때 세워진 금당(金堂)으로 전해진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 축대위에 덤벙 주초(柱礎)를 놓고 외 삼포 내 오포로 이루어진 다포계 양식의 건물로 기둥은 바같쪽이 배흘림이고 안쪽 기둥은 민흘림이다. 기둥과 처마 사이의 공포로 무거운 지붕이 사뿐히 하늘로 상승할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모니불 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다.
후불벽화인 '백의관음보살좌상'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이러한 관음보살상은 강진 무위사, 완주 위봉사, 공주 마곡사, 창녕 관룡사, 양산 신흥사에서도 볼 수 있다.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이다. 이광사의 글씨는 해남대흥사 강진 백련사 지리산 천은사, 해남 녹우당 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아주 뛰어난 명필이다. 대(大)자를 잘 보면 마치 사람이 무엇에 걸리지 아니하고 소탈하게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양이다.
대웅보전 꽃문살 사진은 2009년 제3차 고찰순례시 사진입니다.
此花凡有三名 未敷之時 名屈摩羅 將落之時 名迦摩羅 己敷未衰 處中之時 開榮勝盛 稱分陀利 이 꽃(흰연꽃)에 무릇 세 가지 이름이 있으니 피기 전의 이름은 굴마라(屈摩羅)요, 떨어지려 할 때의 이름은 가마라(迦摩羅)이며, 이미 피어 시들기 전까지 중간의 한창 무성할 때의 이름이 분타리(芬陀利)이다. --원효(元曉)대사의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에서---
연꽃창살 굴마라(연꽃이 피기전) 문양이라고 하는데 꽃을 연결하는 잎의 가장자리가 조각나 있어 연잎은 아닌듯 한데....?
내소사 대웅보전 꽃창살 국화꽃 문양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잉어를 물고 있는 용
내소사의 전설 대웅보전을 중수할 때 대목이 3년 동안 기둥, 서까래와 나무토막만 깎아 놓자 어느 날 선우스님이 장난삼아 나무토막 하나를 슬쩍 감추어 놓았다. 마침내 나무 깎기를 멈추고 대웅전을 짜 맞추는 날, 나무 한 조각 하나가 부족한 사실을 알고 목수는 주지 스님에게 자신은 대웅전을 지을 자격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선우스님이 감춰둔 나무 조각을 내어 놓지만 부정 탄 나무라 하여서 한 조각이 부족한 채로 대웅전을 지었다.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하려는 듯 내소사 대웅전은 쇠못 하나 쓰지 않은 짜 맞추기 공법으로 지어졌으며 대웅전 천장 우측에 나무 한 토막이 빠져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대웅전 단청에 관한 전설인데 대웅전 건립공사를 맡은 화공이 단청을 하는 동안 절대 안을 들여다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여러 날이 지나도 기척이 없어 궁금해진 이 절의 선우스님이 문틈으로 엿보니 푸른 새 한 마리가 붓을 문 채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새가 마무리를 안 하고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미완의 대웅전으로 남게 됐다. 설화의 내용대로 대웅보전의 동쪽 도리중 하나는 바닥 색칠만 한 채 단청을 넣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전설은 조선왕조 최고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불씨잡변'을 저술하고 숭유억불 정책으로 점철된 조선시대에, 불교를 비방하고자하는 유생(儒生)들의 저의가 은근슬쩍 들어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나무 한토막이 빠져 있다는건 내소사 대웅보전은 부정(不淨)을 탄 법당이고, 단청을 마무리하지 못한 건 올바르게 불사를 다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 수행자임에도 인내심이 없다고 은근히 비하(卑下)하고 있다.
빨간 화살표 부분이 전설상 나무 한 토막이 빠져 있는 부분
삼층석탑 - 전북유형문화재 제124호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영산회괘불탱화 (靈山會掛佛幀畵) - 보물제1268호 <사진출처:문화재청> 이 불화는 야외에서 큰 법회나 제를 지낼 때 걸어놓고 예배하는 괘불(掛佛)로서, 1700년(숙종 26)에 제작된 영산회상 괘불입니다. 영산회상이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와 제자들을 그린 불화를 말하는데, 중앙에는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두른 거대한 석가모니불이 붉은 법의를 걸치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배부근으로 올리고 서 있습니다. 이 괘불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앞쪽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뒤쪽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및 다보여래, 아미타여래 등이 모두 석가모니를 향하여 시립하고 있습니다. 이 괘불은 각 존상의 광배 안에 존상의 명칭을 적어 놓아 이후 다른 괘불의 존상 명칭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20분정도 비탈길을 걸어 올라오니 관음전입니다. 대웅보전 단청 한 곳을 마무리 하지 못한 채 날아간 그 관음조는 능가산 중턱에 앉았는데, 그때부터쯤 노스님이 암자를 짓고 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스님을 관음조의 화신이라고 불렀으며, 이후에도 암자에 스님들이 살았으나 어느 때 부터 암자는 폐쇄되고 터만 남게 되었는데 그 암자터를 복원하고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을 봉안하여 모든 공덕을 성취하는 관음기도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양귀비입니다 꽃양귀비
고려동종 - 보물제277호 이 동종은 고려 고종 9년(1222)에 내변산에 소재한 (신)청림사에서 제작되었으나 청림사가 폐사된 후 오랫동안 매몰되었다가 조선 철종 4년(1853) 내소사에 옮겨진 것으로 전형적인 고려후기의 동종입니다.
종 정상부에는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과, 큰 용머리를 가진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있는데 용뉴인 이 용이 포뢰라는 용인데 소리지르기를 좋아하고 고래를 무서워해서 고래모양으로 만든 당목이 종을 치면 놀라서 크게 소리 지른다고 하며, 그 옆의 한국 종에만 있는 음통 때문에 ‘코리안 벨(Korean Bell)'이란 독자적인 학명을 취득하였다고 합니다.
설선당과 요사 - 전북유형문화재 제125호 <사진출처:문화재청> 내소사의 대중 요사로서 승려들의 수학 정진과 일상생활을 위한 공간입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자형의 폐쇄적인 평면을 하고 있으며, 지면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건물의 일부를 2층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넓은 대방과 승방, 부엌 등이 배치되고, 2층의 고루(高樓: 높은 다락집)는 각종 곡물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벽면에 여러 개의 환기창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이 건물은 1640년(인조 18)에 내소사를 중건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법화경 절본사본 - 보물 제278호 - 보물 제278호 <사진출처:문화재청> 법화경절본사본은 1415년(태종 15) 이씨 부인이 남편 유근(柳謹)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제작한 묘법연화경의 필사본으로 모두 7권 7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표지는 감지(감색으로 물들인 종이)에 금니(금박의 가루로 그림이나 글씨를 쓰는데 쓰임)로 외곽을 두르고 내부의 4매의 연화문을 배치한후 그 안에 책이름을 쓰고 백지 위에 법화경의 본문을 써 내려갔으며, 글씨는 한면에 6행씩으로 한 행에 17~19자의 행당 자수는 일정치 않으나 제 1권에는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부처님과 권속들을 섬세하고 정교한 필선과과 능숙한 솜씨로 그려낸 변상도가 있습니다. 건실한 필치가 돋보이는 이 사경은 조선시대 초기의 사경으로서 완전하게 보존된 보기 드문 일품에 속한다 하겠습니다.
높이 약 20m, 둘레 7.5m의 약 천여년 쯤 되는 할매 당산나무 여기에 사진이 없는 절입구의 할배 당산나무는 술먹고 노름하다 절 밖으로 쫓겨 났다고 합니다.
추후 표구용으로 이번 순례시 받은 개암사와 내소사 인영입니다.
내소사에 가거든, 멀찍이 떨어져서 하늘로 사뿐히 날아 올라 갈듯한 대웅보전을 보고, 돌계단을 올라가서 대웅보전의 절묘한 꽃문살을 보고, 그리고 고개를 들어 사람이 걸어가는 듯한 글자의 ‘大雄寶殿’ 편액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참배하고, 그런후 천정의 장엄을 보고, 불단 뒤로 돌아가 관음보살을 친견하면 지금 여기가 극락이리라. (내소사 대웅보전 천정에는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고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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