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108)천년고찰순례기

[스크랩] 심원사, 원심원사 / 5월 28~29일 제25차(추가)

청원1 2012. 1. 12. 13:59

 

 

         심원사

                         2011년 5월 28~29일

              제25차 백팔고찰순례 3번째 순례 사찰 

              2009년 5월부터 83번째 순례사찰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에 위치한 심원사는 ‘생지장보살 도량(生地藏菩薩 道場)’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심원사가 개창된 곳은 지금의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경기도 연천군 보개산(寶蓋山)으로, 『심원사지(深源寺誌)』에 의하면 647년(신라

       진덕여왕 원년)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설립한 영원사(靈源寺)ㆍ법화사(法華寺)ㆍ

       도리사(?利寺)와 함께 영주산(靈珠山)의 4대사찰 중 하나로 창건되었으며, 당시의

       이름은 흥림사(興林寺)였다고 한다. 영주산의 4대사찰 중 나머지 3개 사찰은 고려

       때 폐사되었으나 흥림사만은 명맥을 유지하며 전승되었다.

 

       720년(성덕왕 19)에는 사냥꾼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지장보살의 감화를 입어 산내

       암자인 석대암(石臺庵)을 세워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신앙 성지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859년(신라 헌안왕 3)에는 범일(梵日) 스님이 천불을 조성하고 이듬해에 성주암

       (聖住庵)ㆍ남암(南庵)ㆍ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였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사적기에도 법희거사(法喜居士) 민지(閔漬)가

       1307년(충렬왕 33)에 석대암의 사적을 짓고 1320년(충숙왕 7)에 사적비를 세웠다는

       기록만이 전하고 있다. 1393년(조선 태조 2) 3월에는 화재로 모든 전각이 전소되어

       3년 후인 1396년(태조 5)에 이를 애석히 여긴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건물을 3창(三創)

       하면서 산이름을 영주산에서 현재의 보개산으로 바꾸고 절 이름도 심원사로 고쳤다고

       한다. 1398년에 무학대사가 성주암을 중창하였고, 1400년(정종 2)에는 심원사 승려들이

       석대암을 중창하였다.

 

       수많은 영험과 함께 사세가 확장되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595년 인숭(印崇)ㆍ정인(正印) 스님 등이 중건하였다. 왜란 이후에도 불사가 끊임없이

       이어져 1689년에 박신윤(朴信允)의 시주로 5층석탑이 조성되고, 1807년(순조 7)에는

       기봉(寄峯) 스님이 임금의 축수를 위해 축성암(祝聖庵)을 창건하였다.

 

       이후 심원사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1854년 신학(信學)ㆍ보성(寶性)

       스님의 축성암 중건에 이어 1861년에는 철종이 내린 내탕금(內帑金)으로 석대암을

       중건하였다. 1876년에 현허(玄虛) 스님이 성주암을 중창하고 나한전을 중건하였으며,

       1887년에는 김상궁의 시주로 석대암이 중건되었다. 1891년에 이만성(李晩惺) 처사가

       논과 밭을 석대암에 희사하였으며, 1893년에는 이정엽(李正燁)이 일본제 범종을

       희사하였다. 1889년 계선(戒善) 비구니가 남암의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903년에

       나라로부터 받은 정계비(定界碑)를 절 입구에 세웠으며, 1906년에는 임상궁이 왕실의

       희사를 받아 심원사에서 나라를 위한 치성을 올리도록 하고 땅 7만2천269평을

       매입해 주었다.

 

       근대까지 금강산 유점사에 딸린 말사로서 석대암ㆍ지장암ㆍ남암 등의 산내암자와

       250칸의 당우, 1천602위의 불상과 탱화ㆍ탑이 있었던 대찰이었으나 1907년 의병

       300명과 일본군의 싸움에서 가람의 대부분이 전소되었다. 이에 연수(蓮?) 스님을

       중심으로 1909년 복구작업을 시작하여 병화로 폐허화된 가람을 정비하여 이듬해

       함경남도 북청군 대동사(大同寺)에서 목조불상 8위를 이안하여 봉안하게 되었다.

 

       이후 일제시대에도 중건불사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1918년 연수스님이 초암화백

       (草庵畵伯)을 청하여 천불을 조성하였고, 1925년에는 보개산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석비와 부도들을 절 입구 영원교(靈源橋) 부근의 광장으로 옮겨 부도군을 조성하였다.

       1927년에는 주지 진학(鎭學) 스님이 보통강습소를 설립하여 인근 고아들을 가르쳤으며,

       1928년에 영원교를 비롯한 반야(般若)ㆍ불이(不二)ㆍ신흥교(新興橋)를 가설하고 절

       입구의 도로를 확장하였다.

 

       1931년에 가람을 중수하고 내부 전각에 중종 2구를 봉안하였으며 석대암도 중수하였다.   

       1935년에는 독립운동가 한규설(韓圭卨)의 부인 박선심화(朴善心華)와 그녀의 동생

       박대선화(朴大善華)에게 큰 이적이 생겨 스님들의 공부를 위한 화산경원(華山經院)의

       발심을 이루었으며, 1936년 두 자매의 희사로 화산경원이 설립되었다. 당시 심원사는

       스님들의 불교교육도장으로 화산경원이 이름을 높였으며, 경내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봉향각(奉香閣)ㆍ산신각ㆍ객실ㆍ고방 등 수많은 전각과, 목제로 조성된 아미타삼존과

       삼신불상, 협시보살인 문수ㆍ보현보살, 소조로 만든 천불상과 석조아미타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부속암자로는 성주암ㆍ석대암ㆍ지장암ㆍ남암의 4개암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찬란한 역사와 성보를 가진 심원사도 1950년 6ㆍ25로 폐허가 되었고,

       전쟁 후에는 비무장지대에 속하게 됨에 따라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이에 주지

       김상기(金相基) 스님은 1955년 현재의 위치로 절을 옮겨 중창하고 심원사라 편액하였다.

 

       현재의 가람은 1962년에 지은 명주전과 1970년에 지은 대웅전ㆍ요사채가 있고,

       유물로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된 연천군 심원사지 부도군이 있으며,

       명주전의 석조지장보살좌상은 생지장보살 도량의 본존으로 그 영험력의 신통함이

       전국에 알려져 있다.                                 <출처:koreatemple.net>

 

 

       명주전(明珠殿)

            <주련>

       이 주련글은 지장보살에 대한 탄백(歎白)으로서 지장청 탄백의 원전은 지장보살본원경

       (地藏菩薩本願經) 견문이익품(見聞利益品 제12)에 나오는 게송이다.

       제1연 地藏大聖威神力이 게송에는 吾觀地藏威神力(내 지장보살 위신력을 살펴보니)

       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大雄殿)

 

        해질무렵 심원사

 

       <설화1>   까마귀와 뱀의 인과

       옛 신라시대의 이야기로, 당시 강원도 철원땅 보개산 기슭에 큰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가지가 휘도록 먹음직스러운 배가 열린 어느 해 여름날, 까마귀 한 마리가

       배나무에 앉아 짝을 찾듯 ‘까악까악’ 울어대고 있었다. 배나무 아래에는 포식을 한

       독사 한 마리가 여름을 즐기고 있었는데, 이때 까마귀가 다른 나무로 날아가는 바람에

       가지가 휘청거리며 커다란 배 한 개가 독사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느닷없이 날벼락을 맞은 뱀은 화가 나서 독기가 오른 머리를 하늘로 쑥 뽑아 사력을

       다해 독을 뿜어내었다. 독기가 살을 파고들면서 순식간에 까마귀는 힘이 쑥 빠진 채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뱀도 너무 세게 얻어맞은 데다 독을

       다 뿜어내어 죽고 말았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어처구니없이 까마귀와

       뱀이 함께 죽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까마귀와 뱀은 죽어서까지도 서로 원한이 풀리지 않았고, 뱀은 죽어서 우직한

       멧돼지가 되고 까마귀는 암꿩으로 환생하였다. 멧돼지가 된 뱀이 먹이를 찾아 산을

       헤매던 어느 날, 마침 암꿩이 된 까마귀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멧돼지는 전생의 일을 기억하며 살며시 등성이로 올라가 발밑에 있는 큰 돌을 힘껏

       굴렸고, 암꿩은 미처 피할 겨를 없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까마귀를 죽인 멧돼지는 속이 후련하였다.

 

       그러나 이때 사냥꾼이 그곳을 지나다가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꿩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단걸음에 자신의 오두막집으로 내려가 부인과 함께 요리를 해먹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태기가 없던 사냥꾼 아내에게 그달부터 아기가 들어

       서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열 달이 지난 후 사냥꾼의 아내는 옥동자를 분만하였고,

       두 내외는 금지옥엽 정성을 다해 아들을 키웠다. 이윽고 아들은 씩씩한 소년이 되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활쏘기를 익혔다. 그러나 전생의 업보를 통해 태어난 아이는

       멧돼지를 잡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고,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느 날 사냥을 허탕치고 두 부자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 아들이

       멧돼지가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 저기 멧돼지가 있어요!”

       아들의 외침을 들은 사냥꾼은 정신이 번쩍 들어 활시위를 당겼고, 화살은 멧돼지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멧돼지가 죽은 것을 확인한 아들은 기뻐 날뛰며 소리쳤으며,

       장성할수록 더욱 멧돼지를 증오하는 마음이 커져갔다. 세월이 흘러 사냥꾼은 사냥도구

       를 아들에게 물려준 채 세상을 떠났고, 중년에 이른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여전히

       사냥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개산으로 사냥을 나간 아들은 그날따라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이상한

       산돼지를 발견했다. 그 산돼지는 우람할 뿐 아니라 온몸에서 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보는 순간,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적중시켰다. 그러나 금멧돼지는

       피를 흘리면서도 여유있게 환희봉을 향해 치닫는 것이었다.

 

       그는 멧돼지가 숨어있는 곳까지 쫒아 올라갔지만, 멧돼지는 간 곳이 없고 돼지가 있어야

       할 장소에 지장보살 석상이 샘 속에 몸을 담근 채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석상의 몸에는 사냥꾼이 명중시킨 화살이 꽂혀 있었고 사냥꾼은 그 묘한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까마귀와 뱀의 인과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처님

       께서 멧돼지로 화현하여 화살을 맞은 까닭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물 속에 잠긴 작은

       석상을 꺼내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석상은 보기보다 무거워 끄덕도 하지 않았고 날이

       저물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튿날 그 자리를 다시 찾은 사냥꾼은 또 한번 놀랐다. 어제 분명히 샘 속에 잠겼던

       석불이 어느새 물 밖으로 나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이에 크게 깨달은 그는 석불

       앞에 합장하고 출가하기를 결심하게 되었으며, 그를 따르는 3백여 무리를 동원하여

       절을 짓고 석불을 봉안하였다.

 

       지금도 강원도 철원 보개산에 가면 신라시대 이순석이란 사냥꾼이 지었다는 절 석대암

       이 있으며, 지금은 심원사 명주전에 모셔진 지장보살은 석 자의 키에 왼손에는 구슬을

       들고, 왼쪽 어깨에는 사냥꾼의 화살이 박혔던 자리라고 전하는 한 치 가량의 금이

       뚜렷이 남아 있다.  <출처:koreatemple.net>

           <설화2>부처님 이마의 도끼

        옛날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 심원사에는 강원공부를 마친 지 얼마 안 되는 묘선이라는

        젊은 스님이 있었다. 매사에 의욕적인 스님은 어느 날 노스님을 모시고 산책을 하던 중,

        노스님에게 절의 보수를 위해 백일기도를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날로 백일기도에 들어간 묘선스님의 기도는 간곡하였고, 백일 회향하는 날 밤 꿈에

        ‘내일 아침 일찍 화주를 구하러 나가서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이 심원사 중창불사의

        시주가 될 것’이라는 부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잠에서 깬 묘선은 들뜬 마음으로

        길 떠날 채비를 하고 노스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묘선스님이 막 산문 밖을 나서는데 웬 나무꾼 하나가 아침 일찍부터 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다 꿈 생각이 난 묘선스님이 나무꾼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랫마을에 사는 머슴 박씨였다. 순간 스님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머슴 박씨가

        우리 절 중창불사 시주가 될 수는 없을 텐데…. 그냥 지나갈까’ 하며 망설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첫번째 만난 머슴 박씨에게 다가가 공손히 인사하고 간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주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박씨는 한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오십 평생 못간 장가, 이제 가서 뭘 하겠나. 차라리 그 동안 머슴살이로 모은 재산을

        절 짓는데 보시하여 부처님께 공덕이나 지어야지.’

        그렇게 마음을 결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심원사의 시주가 되리라는 불심을 세웠다.

        그 후 박씨는 40년간 모은 전 재산을 시주하여 심원사 불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머슴 박씨가 시주를 한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

        하더니 그만 자리에 몸져눕고 말았다. 그러나 돈을 모두 절에 시주한 터라 박씨는

        약도 쓸 수 없었다.

        주인집에서는 머슴이 일을 못하고 눕게 되자 공밥을 먹일 수 없다며 박씨를 절로 보냈고,

        절에서는 박씨를 위해 극진히 간병하면서 정성껏 기도를 올렸으나 차도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병은 악화되었고 끝내 박씨는 죽고 말았다. 마을에서는 묘선 스님이 순진한 머슴

        박씨를 속여 재산을 모두 빼앗고 결국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며 이웃동네까지 소문이

        퍼졌다.

        더 이상 심원사에 머물 수 없게 된 묘선스님이 절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새벽예불을

        올리기 위해 법당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촛불 속의 부처님을 바라보는 묘선스님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가피는커녕 시주자를 죽게 한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묘선스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헛간으로 발길을 옮겼다. 스님의 손에는 어느새

        도끼가 들려 있었고, 법당의 부처님 이마에는 순식간에 도끼가 내려쳤다.

 

        그길로 절을 나와 전국을 만행하는 묘선스님의 발걸음은 늘 무겁기만 했다. 심원사

        부처님 이마에 박힌 도끼가 빠지지 않는다는 소문은 전국에 퍼졌으며, 그렇게 30년이

        지난 어느 날 묘선스님은 심원사 부처님께 용서를 빌고 자신이 그 도끼를 뽑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심원사로 돌아왔다.

 

        절은 30년 전 불사가 중단된 모습 그대로였고, 법당 문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부처님의

        이마에는 도끼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묘선스님은 참회하는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마침 그때 법당에는 돈독한 불자로서 새로 부임한 젊은 사또가 부처님 이마의

        도끼를 손수 뽑겠다며 와 있던 중이었다. 법당에 들어선 사또는 삼배를 올린 후 부처님

        이마의 도끼를 뽑자, 의외로 도끼는 쉽게 쑥 빠지는 것이었다.

 

       도끼를 들여다본 사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끼에는 '화주 시주 상봉'이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문밖에서 바라보고 있던 묘선스님은 그때

       비로소 부처님이 머슴 박씨를 죽게 한 뜻을 깨달았다. 스님은 사또 앞으로 나아가 불상

       에 도끼가 박힌 내력을 이야기하며, 사또가 30년 전에 죽은 이 절의 시주자인 머슴의

       환생이라고 말해주었다.

 

       지금까지 내력을 들은 사또는 ‘시주 화주 상봉’이란 바로 오늘의 인연을 부처님께서 미리

       예언하신 뜻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간 일어나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사또는 스님께 머리 조아리며, ‘부처님의 뜻으로 인연 맺어 스님과 제가 다시 만났으니

       심원사 불사의 모든 비용을 시주하리라’고 다짐하였다. 이에 사또는 스님을 봉양하고

       심원사 중창불사의 화주가 되었다. 이후 스님의 공덕으로 심원사 중창불사는 30년 만에

       다시 시작되었고, 묘선스님은 심원사를 중창한 후 큰스님이 되어 많은 신도를 교화

       했다고 전한다.   <출처:koreatemple.net>

          <설화3>앉은뱅이와 장님

        이 이야기는 견불령(見佛嶺)과 대광리(大光里)라는 지명과 연관된 석조 지장보살상의

        영험담이다. 고려 초에 심원사의 산 아랫동네에는 어려서 열병을 앓아 장님이 된

        이덕기(李德基)와, 소아마비로 앉은뱅이가 된 박춘식(朴春植)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동네친구였던 그들은 만나면 언제나 자신들의 신세한탄을 하곤 하였다.

        어느 날 그들은 서로 자신들의 전생을 이야기하며 한탄하고 있었는데, 마침 심원사의

        스님이 대종불사(大鐘佛事)를 위한 시주를 청하였다. “대종불사에 시주하면 부처님의

        가피로 재앙이 소멸되고 현생의 복을 얻을 것”이라는 스님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은

        대종불사의 화주가 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시주할 돈도 쌀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몸을

        담보로 시주를 모으러 다니는 화주(化主)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장님 이덕기는 발을

        쓸 수 없는 앉은뱅이 박춘식을 업고, 박춘식은 이덕기의 눈이 되어 열심히 구걸하여

        대종의 조성을 위해 시주하였다. 그러기를 3년이 되던 해에 마침 타종식의 날이 다가

        왔으며, 그들은 대종의 타종식을 보기 위해 ‘나무법 나무불 나무승’을 외우며 대광리의

        산길을 따라 절로 향하였다.

 

        절에 이르기 전 첫 타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자 순간, 앉은뱅이 박춘식은

        오색구름을 타고 밝은 구슬을 손에 지닌 지장보살님이 하늘에서 심원사 쪽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앉은뱅이 박춘식은 “지장보살님이 보인다!”고 소리치며

        자신도 모르게 장님의 등에서 펄쩍 뛰어내렸는데, 갑자기 두 다리가 쭉 펴지는

        것이었다. 박춘식의 외침을 들은 장님 이덕기 역시 그 광경을 보고 싶어 함께

        소리치며 눈을 비비자, 갑자기 앞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산마루 위의 오색구름에 쌓여 큰 빛을 발하고 있는 지장보살님을 향해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였다. 그들의 정성이 마침내 지장보살님의 가피를 입게

        된 것이다. 지금도 이 전설은 철원지역은 물론 전국 각지에 알려져 영험 있는

        지장보살의 가피를 받기 위해 많은 불자들이 심원사를 찾고 있으며,

        그들이 지장보살님을 본 고개는 견불령(見佛嶺),

        그들이 살던 마을은 부처님의 큰 광명이 머무르는 동네라 하여 대광리(大光里)라

        부르고 있다. <출처:koreatemple.net>

 

       석조지장보살좌상(石造地藏菩薩坐像)

       명주전의 불단 위에서 중생을 굽이살피며 앉아 있는 지장보살로서, 영험 높은 보살로

       널리 알려져 있다. 높이 90㎝, 폭 70㎝의 자그마한 소형 불상으로 석불로 만든 특이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에서 볼 수 있는 두건을 쓴 모습으로, 내리감은 두 눈은 매우

       길게 묘사되어 있으며,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한껏 머금고 있다. 상호의 이목구비는

       중앙으로 몰려 있지만 자비로운 모습이며, 턱 중앙에는 보조개를 머금은 것 같은 홈이

       파여 있다.

       석대암(石臺庵) 창건설화를 증명하듯 왼쪽 어깨에 이순석이 쏜 화살에 맞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오른손 위에는 가슴 아래로 한 알의 보주(寶珠)를 쥐고 있다. 전반적으로

       신체는 상호에 비해 신체가 세장한 모습으로 불신은 삼각형의 안정된 구도를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이 지장보살은 도금을 하여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칠이 벗겨지고 말아

       현재에도 개금이나 장식을 하지 않고 있으며, 그로 인해 더욱 정감있는 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11시 부터 정현 주지스님 법문이  있었다

          주지스님 법문후 지장보살정근 철야정진에 동참

         아침 6시 50분경 원심원사로 향하기전 주차장에서 바라본 건너편 산줄기

         와불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원심원사

          2011년 5월 28~29일

          제25차 백팔고찰순례 4번째 순례 사찰

          2009년 5월부터 84번째 순례사찰

 

 

 

        군부대의 바리케이트를 지나 7시 40분경 원심원사에 도착

          극락보전

                      <주련>

        이 시는 고려 때 나옹스님이 지은 것이다. 이 시가 지어진 이면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20살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충격을 받아 출가한 스님에게 누이동생이 있었다.

        이 누이동생이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 자꾸 절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옹스님

        은 만나주지 않고 다른 스님에게 다른 곳으로 가고 없다 하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

        그래도 누이동생은 이 절 저 절을 나옹 스님을 수소문하여 찾아 다녔다. 이리하여

        나옹스님은 누이동생에게 편지를 써 두고 누이동생이 찾아오면 전하게 하였다.

 

        “나는 이미 세속을 떠나 출가한 몸이라 속가의 가족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유가에서는

        가족을 가까이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우리 불가에서는 가족을 가까이하는 것을 수도의

        장애라고 여긴다. 앞으로는 나를 찾아오지 말고 아미타 부처님이 어디 있는지 내 생각

        이 날 때는 이 부처님 생각을 가슴에 얹어 두고 생각이 막힐 때까지 하고 있어라.”

        편지의 마지막에 써둔 시였는데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자기에 대한 생각을

        끊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11월 제72호>

 

        위 念頌(염송)은 장엄염불에도 들어 있으며, 불교의식을 행할때나 새벽종성시

        持誦(지송)되고 있다.

 

           대웅전

 

 

 

출처 : 백팔고찰순례단
글쓴이 : 청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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