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선종비판 - 서원사 서진스님

청원1 2012. 1. 10. 19:04

이 글은 서진스님께서 서원사 홈페이지에 올리신 글을 읽고 공감하여 올리는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문답을 원하시는 분은 http://www.seowonsa.or.kr로 가셔서 교리문답에

글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1. 불교의 수행법

불교란 성불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불교의 방대한 경전들은 성불하는 방법에 대한 것보다는 성불 한 자의 삶이 어떠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더 많은 설명을 하고 있는데 구태여 석존 교설 중 성불하는 방법으로 언급되고 있는 교리를 들자면

37보리분법과 육바라밀행 이외에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불교에서의 수행법은 자연스럽게 요가의 수행법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불교의

정토신앙이나 참선수행도 이러한 요가의 수행법을 받아들이면서 발전된 것들이다.

불교가 요가의 수행법을 받아들인 것은 요가학파는 교리보다는 수행법에 모든 것을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요가 수행법은 불교뿐만 아니라 인도의 육파철학을 비롯한 모든 인도의 종교에서

수용되어졌다.

이렇게 해서 받아들인 마음을 가라앉혀 사물을 잘 생각하는 요가의 수행법을 불교에서는 선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중국에 전래되면서 중국의 도교사상과 접목되면서 조사선이라는 독특한 중국불교를

탄생시키게 된다.

2. 중국에서의 선의 수용

중국이 선을 수용하는 것을 살펴보면 후한의 환제(桓帝)의 건화(建和) 3년(148) 서북인도로에서

낙양으로 온 안세고(安世高)가 인도의 좌선의 방법을 설한 선행법상경(禅行法想経), 대안반수의경

(大安般守意経), 음지입경(陰持入経) 등을 번역하여 소승의 선법이 전했는데  이들의 내용은 소승적

법수명목(法数名目)을 들고 있기 때문에 선수(禅数)의 학이라고도 불리었고 당시 이것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이가 많았다.

또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좌선삼매경(坐禅三昧経)을 불타발타라(仏陀跋陀羅, 覚賢)가 여산(廬山)에서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禅経)을 번역하였다.
이 후 북위의 효문제(471-499)가 인도로부터 불타선사를 맞이하여 스스로 귀의하고 낙양 동쪽에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를 세웠다. 여기에 보리달마(菩提達摩)가 와 중국 조사선의 기초를 열었다.

3. 조사선의 발전 과정

그 후 보리달마(?-528 ?)의 선법은 혜가(慧可, 487-593)에게 그리고 혜가의 선법은 승찬(僧璨, ?-606)

에게 승찬의 선법은 도신(道信, 580-651)에 전수되었는데 도신에 이르러 많은 사람이 집단생활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풍조는 불법을 민중에게 포교하는 것 보다는 자신들만의 수행만을 중시여겼기에 자신들의

생활을 신자들의 보시에 의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연히 자급자족의 경제체제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되어 그들은 경작 잡역에 종사하면서 수행을

하였기에 이윽고 선원의 생활규범인 청규(清規)를 형성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도신의 선법은 홍인(弘忍, 601-674)에게 전수되었고 홍인문하에 신수(神秀, 606?-706)와 혜능

(慧能, 638-713)이 나와 북종선(北宗禅), 남종선(南宗禅)을 성립시켰다.

후 혜능 문하에 청원행사(青原行思, ?-740)가 나왔고 청원행사 문하에서는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과

남악회양(南岳懐譲, 677-744)이 나왔다.

그러나 당시 남종선보다 북종선이 더 우세하여 북종선이 유행하는 것을 막기위하여 청원행사의 문하 신회

(神会, 668-744)는 북종선이 점오(漸悟)법이라 하여 비방하였다.

어쨌든 그 후 북종은 점차 약해져 오로지 남종만이 번영하였기에 그 후 선종이라 하면 남종에 한정하게

되었다.

이후 남악의 법계인 마조도일(馬祖道一, 701-786), 청원의 법계인 석두희요(石頭希遥, 700-790)가 나와

독자의 선풍을 높여 남종선의 일대 발전을 가지고 왔다.

이후 마조의 법계 백장회해(百丈懐海, 720-814)는 백장산(百丈山)에 들어가 19년간 머물며 선원 독자의

생활규범인 백장청규(百丈清規)를 제정하고 대소승계를 구분치 않고 전혀 새로운 입장에서부터 총림(叢林)을

확립하여 선원 독립의 기초를 쌓았는데 거기에는 인도에서 전해 온 계율과 중국적인 예교(禮教)를 통합한

교묘한 조화가 보인다.  

청규는 보청법(普請法)을 정하여 모두가 일시에 노역에 종사하고 십주사의 감독지도에 의하여 선원은

운영되었다. 만약 생활규범을 범하면 규장에 대중을 모아 의발도구를 태우고 편문으로부터 좇아냈다.

이처럼 선원의 자치체제가 확립되어 불교를 민중으로부터 격리시켜 민중의 흥망성쇠와는 상관없이

산중에서 홀로 살 수 있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 후 마조도일의 문화에서는 백장의 제자 위산영유(潙山靈裕, 771-853)와 그의 제자 위산혜적(慧寂,

814-890)에 의하여 위앙종(潙仰宗)이, 황벽희운(黄蘗希運)의 제자 임제의현(臨済義玄, 867적)에 의하여

임제종(臨済宗)이, 약산유엄(薬山惟儼, 751-834)의 계통에서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와 그의 제자

조산본적(曹山本寂, 840-900)에 의하여 조동종(曹洞宗)이 생겼다.

그리고 청원행사의 문하에서는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에 의하여 운문종(雲門宗)이, 청원문익

(文益, 855-958)에 의하여 법안종(法眼宗)이 생겼다.

이상의 위앙종(潙仰宗), 임제종(臨済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의 다섯을

오가(五家)라 하고 오가 중 임제종(臨済宗)이 가장 우세하여 송(宋)대에 여기에서 황용파(黄龍派)와

양기파(楊岐派)가 나뉘어 이것을 오가칠종(五家七宗)이 성립되었다.

이처럼 동일의 법계인 육조 혜능의 문에서 이처럼 분파가 생긴 것은 모든 선사들이 각자의 성격에서

생긴 선풍(禅風)에 의한 것이다.

4. 한반도에 있어서 조사선의 전개

그 후 육조 혜능의 선법은 신라 말에 한반도에 전래되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이루다가 고려 중엽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의하여 천태종(天台宗)이 성립되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보조국사

(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에의하여 구산선문이 연합을 하였는데 모두가 육조혜능의 제자라는

이유로 종명을 육조혜능이 머물던 조계산에서 따와 조계종(曹溪宗)이라 하였던 것을 태고(太古)

보우(普愚)가 임제선으로 그 종풍을 장악하였고 조선에 와서 불교가 탄압받자 포교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수행만을 위하여 산중에 은둔하며 자급자족을 하였던 생활양식으로 인하여 조계종의

법맥만이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불교의 수행법은 임제선인 간화선밖에는 없는 줄 알게 되었으니 웃물 안

개구리도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다.


5. 선종비판

① 불교는 수행의 종교가 아니라 포교의 종교이다.

석존께서 초전법륜에서 다섯 명의 비구에게 최초의 법문을 하시고 “뭇쏘의 뿔처럼 홀로서 나아가

이 법을 전하라“하셨지 수행하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행(포교)를 하다가 기후로 인하여 만행이 불가능하게 되면 안거(수행)를 하였지 안거하다가

쉬는 시간에 만행을 하라 하지 않으셨다.

또 항상 포교를 위하여 탁발에 의지하여 생활하라 하였지 자신의 수행을 위하여 자신의 먹걸이를

자급자족하여 만들라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든 사항들을 선종은 백장청규라는 것을 정하여 놓고 위반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으면서 어찌 스스로를 불교라 하는가.

② 불교는 성불하여 사는 것이 목적이지 성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 성불은 일부 특권층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하는 바라문교에 정면으로

맞서서 성불은 누구나 쉽게 얻을 있는 것이라 가리키셨다.

단지 성불을 하였다고 생각하는 자의 삶은 성불한 것이 아니기에 성불을 목적으로 하여 사는 삶이

성불한 자의 삶이라 가리키면서 불교의 목적이 성불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경전은 성불한 자의 삶에 대하여서만 설하고 있을 뿐 성불하는 방법은 그다지 설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성불 그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불하여 사는 삶을 불교가 중시여기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하여 불교는 인도 민중들 속으로 파고들어 갈 수 있었지만 후 아비달마가 성불을

난해하게 만듬으로써 불교는 민중에게서 멀어져서 결국 인도에서 멸망되게 되었다.

그런데 조사선은 성불하는 그 자체를 위하여 민중과의 삶을 버리고 산중에 들어가 홀로 사는 삶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성불하는 자는 가뭄에 콩 나 듯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경전에서 설하는 삶은 언제나 실천할 것인가.

 

중국에 전래되어 조사선이 성립되기 전까지의 선에 대하여는 전혀 비판할 마음이 없다. 하지만 백장청규를

정하여 놓고 자신들만의 수행을 위하여 민중을 외면하여 민중들의 흥망성쇠와는 상관없이 살면서 불교를

염세적인 종교로 만들어 놓고서도 스스로가 대승불교임을 자처하는 조사선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리고 옛날의 선종은 민중에게 포교하지 않은 까닭에 자신들의 먹거리는 시주에 의지하지 않았고

스스로 노동하여 해결하였지만 현재의 한국선종은 민중들의 시주를 공짜로 받아 먹으면서 자신들을

위하여 수행하니 이것 역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리고 성불을 대단히 어려운 것을 몰고 가는 조사선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수없이 찾아오는 환자들 중 가끔 가다가 한 명씩 완치시키는 병원이 어찌 병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화선 밖에는 접할 기회가 없어 어쩌다가 한 명씩 성불하고 또 성불이 목적이 되어

경전에서 설한 삶은 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불교를 보고 부러워하고 흥분하는 한국의 불교도들이

불쌍하다.

 

 

 

출처 : 원불사(源佛寺)
글쓴이 : 旦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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