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 2011년 4월 24일 제24차 백팔고찰순례 3번째 순례 천년고찰 / 2009년 5월부터 72번째 순례고찰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하여도 석불 석탑이 일천기씩이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 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 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없이 유실되어온 뼈아픈 세월을 살아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설 야지에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여러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 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또한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 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석질로 빚어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 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 운주사 서쪽 산능선에는 거대한 두 분의 와불(미완성석불)님이 누워있다. 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이 천번째 와불님이 일어나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마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우주법계에 계시는 부처님이 강림하시어 하화중생의 대 설법을 통한 불국정토의 이상세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 으로 조성한 대불사가 아닐까한다. <출처 : 운주사 홈페이지>
운주사 배치도
석불군"가" 합장 수인의 모양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배치된 형식이다. 바위너설 안에 모셔져 있는데 자세히 관찰해보면 풍우를 피할수 있게 바위 너설 위를 인공적으로 다듬어 낸 흔적을 엿볼수 있다. 바위너설이 실내의 법당 역할을 훌륭히 해낼수 있도록 조성한 듯 싶다. 다른 곳의 불상 보다도 그 생긴 모양이 특이하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가 인상적이다. 그저 우리 이웃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마치 천불천탑을 세웠던 듯 이런식으로 불상이 배치된 것을 보면 마치 천불이 이곳에 실재했는 듯 싶다. 맨 오른쪽 불상 대좌 뒤편에서는 8-9세기로 추정되는 금동 불상과 여래 입상이 출토 되었다. 특이하게도 중성불의 개념을 깨뜨려 아버지부처 어머니부처 아들 딸 부처로 부르고 있는데 운주사 불상을 바위너설 야지에 집단적으로 배치한 모습과 더불어 이 또한 운주사만이 가지는 특이한 개성이라 할만하다
탑 높이 10.7M로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화사하고 수려한 탑이다. 가는 옥개석(지붕돌) 과 처마의 끝이 백제식 목조건물처럼 치솟아 세련미가 느껴진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형식과 같아서 백제계 석탑이라 한다. 탑신석 안에 겹마름모 꼴의 기하학적 무늬와 네잎의 꽃잎 문양은 유일하게 운주사의 탑만이 간직하고 있다. 겹마름모꼴은 사방팔방에 계신 부처님을 그리고 중앙의 네잎의 꽃잎문양도 사방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처마안의 무늬를 보면 밝은 빛이 하늘로 치솟는 듯한 인상이다. 운주사에 있는 각 골짜기의 부처님이 비로나자불(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만큼, 이처럼 환한 빛살이 중앙에서 하늘로 퍼져오르는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비로자나탑이라 불러도 좋을 듯 싶다. 아래 거대한 기단석도 잘라서 운반하였고, 일설에는 이 탑을 운주사 중심탑이라하여 돛대탑이라 부르기도한다.
팔작지붕 형태의 돌집으로 그 안에 두분의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두분의 석불은 남과 북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권 40 능성현 불우조에 이 상배불이 언급되어 있다.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 천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이다. 자세히 보면 남북의 문설주 위아래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닳아진 것이 돌문이 달려있어 예불을 볼때는 열고 닫았을 거라 여겨진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돌문을 열고 닫을 때 조정의 인재들이 죽어나가 세상이 시끄러워 도선국사의 아내가 이 돌문을 떼어 영광 칠산앞바다에 내다버렸다한다. 두분의 불상이 거대한 돌집 안에서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는 채로 조성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며 건축학적으로 매우 주목되는 훌륭한 작품이다.
자연적인 거북형의 영귀산에 자리한 명당탑에 비해 인공적인 거북형의 하대석 위에 자리한, 10각 기단부, 연꽃문양의 기단갑석에 둥근 탑신석과 둥근 원형의 옥개석(지붕돌)을 갖춘 아름다운 석탑이다. 원과 원으로 이어진 우주전체를 조형하고 있는듯한 인상이다. 기단갑석에 두른 연꽃문양, 그 위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부처밖에 없다. 탑 전체가 부처를 상징한 탑이다. 달리보면 일반적인 탑의 꼭대기 부분인 앙화와 보륜 그 위의 보개, 수연, 보주, 찰주 등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탑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연화탑은 현재 6층만 남아있으나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온전히 남아있었다면 그 해석이 더 용이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아하고 개성적인 아름다운 석탑은 이곳 운주사만이 가지고 있는 최상의 석탑 예술의 특징이다. 둥근 처마를 잘빗어 내린 옥개석(지붕돌)과 둥근 탑신의 절묘한 조화도 경이롭고 자세히 관찰해보면 기단갑석의 연화무늬의 선을 쪼은 정자국이 방금한 듯 남아있어 조형자의 혼과 숨결을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수 있다. 위 석조불감과 원형다층석탑은 보수중이어서 2007년 1월 사진을 올립니다.
4층 석탑 및 대웅전과 지장전
발형다층석탑
'마'석불군의 석불좌상 (배치도 E)
명당탑과 4층석탑
운주사 전경
공사바위 / 영귀산 8부능선 산마루에 놓인 거대한 둥근 바위이다. 위에 오르면 운주사 탑과 불상들 그리고 먼 산들이 한눈에 발아래 굽어 보인다. 바위 이곳 저곳을 움푹 파 인공으로 조성한 자리가 여럿 보인다. 그중 가장 아래 큰 자리가 도선국사가 앉아서 운주사 천불 천탑의 대공사를 관리감독했다 하여 공사바위라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이 공사바위는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모두 관찰할수 있으며 비가 오면 바위 아래 움푹 패인 의지처가 있어 그곳에 들면 안전하게 지낼수 있다. 수많은 수행스님이나 도인들이 그 자리에 앉아 수행을 했었던 듯 반들반들 닳아져 있다. 이곳에 이 바위 한덩어리가 솟아올라 있는 것도 신비로운데 또 그것을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고난받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용한 선인들의 혜안과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석불군"바"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형태의 와불이다. 이는 열반상(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이 누운 상)과는 다르게 좌불(앉은 모습)과 입상(선 모습)으로 자연석 위에 조각된 채로 누워있다. 이렇게 좌불과 입상의 형태로 누워있는 부처님은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이 부처님은 좌불 12.7미터, 입상 10.26미터의 대단히 큰 불상이다. 나침반을 갖다대면 거의 정확히 남북으로 향하고 있어 이 천번째 부처님이 일어나면 곤륜산의 정기를 이 민족이 받아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지상 최대의 나라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운주사의 좌불은 비로자나부처님이고 옆에 입상은 석가모니불이다. 그리고 이 두 분을 지키는듯 아래 서있는 노사나불(머슴부처, 시위불, 상좌불)도 옆에서 떼어내 세운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한 삼불 신앙의 형태로서 떼어서 어딘가에 세우려 했던 것인데 과연 어디다 우려했을까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역사의 기록에서 이런 대단위 불사가 사라진 까닭을 생각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시위불 / 와불아래 시위불로 불리는 석불 입상이 있는데 운주사 일대의 석불 중 가장 전형적이며 특히 운주사와 관련된 설화의 중심부분이기도 하다. 와불을 중심으로 주불이 비로자나 부처님이고 좌협시불이 석가모니불, 우협시불이 노사나불이다
칠성바위 중 일부 / 북두칠성은 농사의 풍요, 생명의 관장, 죽은 영혼이 돌아가는 별로 믿었다한다. 원시시대 고인돌 관뚜껑, 고구려 장군총, 무용총 무덤안의 천상도 북쪽에도 북두칠성이 정확히 찍혀져 있다. 민가의 할머니들이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새벽에 기원을 드릴 때 북쪽 하늘에 뜨는 별이 바로 북두칠성이다. 불교에서도 우리 민간 신앙을 받아들여 삼신각 혹은 칠성각을 짓고 거기에다 모셔놓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민속신앙들을 수용해 내어 불교가 우리화 되어온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북두칠성의 별을 표현하여 제작한 예는 어디에도 없다. 칠성바위를 기준으로 와불은 북극성의 위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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