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의 진실지상주의는 독재권력이키운 모더니즘(퍼옴)
MBC와 그들을 지원해 온 세력들이 속속 드러나는 황박사 논문의 허위적 사실들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마치 전쟁터의 승자가 된 것으로 착각할까봐, 노파심에서 이 글을 올린다. 그들의 사고방식이 마치 제철을 모르고 피는 온실 속의 꽃처럼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우리 모두 알아야 하겠기에 이 글을 올린다.
나찌는 인간 신체의 비밀을 낱낱이 밝혀 내기 위해서 유태인을 마루타로 사용했다. 이처럼 윤리적인 판단이 선행되지 않은 진실 캐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가져 올 수 있다.
진실은 함부로 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파시즘의 광풍이 몰고 간 이후 서구의 지성들이 뼈아프게 깨달은 통찰이며, 대략 뭉뚱그려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우는 현대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실제로 황우석의 진실 캐기로 우리사회는 대재앙을 겪고 있다. 국가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그러지 않아도 열악하기 짝이 없는 우리나라의 과학 환경이 위축되고, 약소국의 설움을 딛고 선진국으로 도약한다는 자긍심에 행복했던 국민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대한민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진짜로 밝혀야 할 중대한 비리들은 이슈 바깥으로 밀려나고...게다가 수십조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던 수익성의 손실까지 따져 보면, 수천만불의 피해액과 수십만명의 불행한 이재민을 만들어 낸 미국의 카트리나보다 더 큰 재앙이다.
그럼에도 MBC 피디수첩과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이 아직도 진실의 추구는 <절대선>이라고 생각한다면, 더구나 자신들의 승리는 악에 대한 <선>의 승리이며 스스로 용기있는 자들이라고 자족하고 있다면, 그들이 대한민국의 언론과 여론을 주도할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세력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대한민국의 장래에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MBC 피디수첩과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은 알아야 한다. 진실의 폭로가 윤리적인 <선>과 일치하는 것은 오로지 중세의 교권과 같은 폭압적인 전제 권력 아래서일 뿐, 보편적인 이치가 아니라는 점을.
전제 권력의 권위와 힘은 은폐와 신비화에서 나온다. 따라서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는 일은 곧 전제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을 의미한다. 도전을 차단하고 은폐를 유지하려면 전제권력은 극악무도한 검열과 처벌 제도를 가동시켜야 한다. 필연적으로 전제 권력은 극악무도한 폭압 권력이 된다. 폭압권력 하에서는 은폐의 주체가 명백한 악의 실체이기 때문에 은폐된 사실을 밝히는 것은 무조건 <선>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뿐만 아니라 목숨 건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은폐의 주체가 극악무도한 전제 권력이 아니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는 독립투사의 은신처를 일경에게 고발한 정직한 조선인의 행동을 <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용감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은폐의 주체가 명백한 악이 아닌 경우,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는 것과 <선> 사이의 등식은 여지없이 깨진다. 그것은 용기도 아니요 선도 아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에 대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혹은 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윤리의 차원에 속한다. 즉 가치판단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에 관한 것은 진위판단의 문제이지만, 그 사실을 밝힐 것이냐 말 것이냐는 윤리의 차원에서 다루고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선>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결과는 어떠했나? 상자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善이었나? 판도라의 상자 에피소드가 정말로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인간에게 불행이 시작된 기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진실을 함부로 파헤치는 것은 악>이라는 경고이다.
다만, 전제적인 폭압권력 하에서는 지배권력이 총체적인 은폐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는 것은 곧바로 악에 대한 항거를 뜻한다. 그곳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은 언제나 <선>의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폭압적인 전제 권력 아래서는 진실을 밝히는데 별도의 윤리적인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모든 악을 척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일 뿐이다. 그래서 <진실지상주의> 이데올로기가 형성된다.
<진실지상주의>는 종교권력이라는 특정한 환경 속에서 형성된 <특수한> 이데올로기였다. 즉 폭압적인 전제 권력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 가치를 발휘하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해서 폭압적인 전제 권력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수정되거나 철회되어야 하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서구의 근대는 태생적으로 중세 교권에 대한 저항 속에서 싹튼 것이었기에, 중세의 저항 이데올로기인 <진실지상주의>는 서구의 근대 담론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제국주의와 함께 세계 도처에 전파되었다.
특히 폭압적인 전제권력이라는 점에서 중세의 교권과 다르지 않은 제3세계의 독재권력 하에서 <진실지상주의>는 제 가치를 발한다. MBC가 내세운 <진실만을 추구한다>는 케치프레이즈로 표상되는 <진실지상주의>는 실제로 우리나라 독재정권 하에서 광범한 호소력을 갖고 전파되어 뿌리를 내림으로써, 독재정권이 사라진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진리요 <선>으로 신봉되고 있다.
하지만, 서구의 지성은 혹독한 파시즘의 댓가를 치루고 나서, 자기들이 세운 <진실지상주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파시즘은 윤리의 고삐가 풀린 진실지상주의가 인류에게 어떤 처참한 재앙을 가져 오는지 뼈아픈 교훈을 남긴 역사적 사건이었다. 나찌가 인간 신체의 비밀을 낱낱이 알아내기 위하여 사용한 마루타는 진실지상주의가 가지고 있는 반윤리적인 맹점을 알게 해주는 하나의 충격적인 실례에 불과하다.
과학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가능했던 <파시즘>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깨달음 이후 등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진실지상주의>의 깃발을 내리고 일종의 윤리 우선주의를 표방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진위를 따지는 진리 담론은 내려 앉고, 가치를 숙고하는 윤리 담론이 부상한다.
포스트모던의 윤리 담론이 이룩한 획기적인 전환은 단지 진위 판단보다 가치 판단을 중시한다는 데 있 있는 게 아니라, 실은 순수한 진위 판단이란 존재 하지 않으며 진위판단에는 반드시 가치판단이 게재되어 있다는 점을 새롭게 인식했다는 데 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윤리 담론은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다>라는 통찰로부터 출발한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진실을 캐는 행위조차 어떤 특정한 의도성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진실캐기인 경우는 없다. 모든 진실 캐기는 특정한 의도에 의해 촉발된다. 세상에 캐야 할 진실들은 무진장하게 많다. 그런데 굳이 어떤 하나를 꼬집어 진실을 캐겠다고 나서는 것은 특정한 의도 때문이다. 심지어는 과학의 경우에도 새로운 발견들은 모두 그보다 앞선 발견을 부정하거나 미흡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순수하게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요컨대 모든 진실캐기는 '기획성 취재'인 것이다. 인간에 의해 발견되는 모든 진실은 누군가를 부정하고 다른 누군가를 두둔하기 위해 밝혀진 것들이다. 이처럼 모든 진실은 본질적으로 정치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이번 황우석 사건에 있어서도 MBC는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결과적으로 누구를 두둔하고 누구를 부정하게 되는지에 관해 진지한 고민을 했어야 했다. 진실을 파헤치는 것은 억울한 누군가를 그 억울함의 고통에서 구해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인데, 황우석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서 누구의 억울함을 보상해 주었나? 황우석 교수에게 부당하게도(?) 주도권을 빼앗겼던 대한민국 생명과학계의 다른 교수들? 아니면, 황우석 교수에게 부당하게도(?) 주도권을 빼앗겼던 세계의 생명과학자들? 아니면 노성일 이사장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이 모두가 생명과학계 내의 권력의 역학관계와 관련된 사람들이지 그 속에 대한민국의 민초들을 위한 배려가 낄 여지는 없다. 당신들이 <파시즘의 광기>라 부른 민초들의 분노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아직도 당신들은 알지 못하는가? 그러고도 MBC, 당신들은 여전히 민중의 지팡이라 자처하려는가?
MBC와 <한겨레>를 비롯한 일명 진보 세력들이 탈윤리적인 <진실지상주의>의 함정을 아직도 빠져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것을 보면 독재정권의 폐해가 저토록 질긴 것이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독재에 대한 투쟁에 길들여지면 윤리에 대한 섬세한 의식은 마비되고, 참(眞)에 대한 의식만 비대해진다. 이제 독재 정권은 사라지고 없는데도 관성의 법칙을 이기지 못한 인간의 의식은 윤리를 망각한 진실지상주의의 칼을 휘둘러 대한민국을 도무지 쓸어 담을 수 없는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야 말았다.
MBC여, 한겨레여, 오마이여, 프레시안이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진실을 운위하는 지식인들이여, 이제 독재정권은 사라지고 없는데 진실의 칼을 함부로 휘두르면 그 칼에 제일 먼저 베이는 것은 약싹바르지 못한 민초들이라오. 새해에는 제발 좀 깨몽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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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들 ②
- <파시즘의 광기>를 함부로 말하는 무지한 분들을 위한 강의
이번, 황우석 사건을 겪으며 이른 바 '황빠' 진영의 사람들이 뒤집어 쓴 가장 억울한 누명 가운데 하나가 <파시즘의 광기>일 것이다. <파시즘의 광기>는 인두겁을 쓴 악마들이나 자행했을 법한 극악무도한 살인과 파괴를 떠올리는 단어이다. 그런데 대중들이 힘을 모아 자신의 의사표시를 할 때마다, 기이하게도 이 땅에 식자연하는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끔찍한 <파시즘의 광기> 타령을 한다. 왜 그럴까? 정답은, 무식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식이 사람 잡는다고는 하지만, 멀쩡한 사람들을 천인공노할 죄인으로 몰다니!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는 법, 적어도 황우석 껀에서 <파시즘의 광기>에 날뛴 광인들이 도대체 누군지 우리 모두 똑똑히 알아야 하겠기에 이 글을 올린다.
독립투사의 은신처를 일경에게 밀고한 정직한 조선인은 선인인가, 악인인가?
절대 다수의 조선인이 이 <정직한 조선인>에 대해 악인이라 답할 것이고, 소수의 조선인들이 선인이라 답할 것이다.
그러면 이 소수의 조선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 중의 일부는 일본에 빌붙어 조선 민중을 착취해서 먹고 사는 매국노들이고, 또 다른 일부는 진실을 밝히는 것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선이며 진실을 은폐하는 것은 무조건 악이라고 주장하는 <진실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지식인들이다.
그런데, 매국노는 <정직한 조선인>이 자신의 밥그릇을 지켜 주었기 때문에 선인이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식의 노골적인 진술은 그 고맙기 짝이 없는 밀고자를 보편적인 <선>으로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헌데, 옆에서 진실지상주의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그것이야말로 매국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완벽한 알리바이이다. 매국노들은 진실지상주의자들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기로 마음먹는다.
같은 말을 반복하면 그 말이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말이 갖고 있는 주술성이다. 매국노들은 스스로 주술을 걸어 자신의 매국 동기를 잊어버리고 자신들도 원래부터 진실만을 수호한다고 믿기 시작한다. 이런 것을 두고 '자기기만에 빠진다'고 한다. 결국 더러운 매국노와 순결한(?) 지식인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지식인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여우>의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다.
진실의 편에 섰지만 결국은 그것이 허위의 세력을 비호하게 되는, 진실의 아이러니, 이것을 서구의 지성은 <파시즘>이라는 혹독한 댓가를 치루고 나서야 깨달았다. 따라서 파시즘은 서구의 지성을 그 이전과 이후로 크게 갈라놓는 사상사적인 전환점이 된다.
대학교 1학년 학생에게 철학에서 모더니즘이란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할까? 대뜸 이성중심주의라는 대답이 튀어 나올 것이다. 그 답변 속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답이 이미 들어 있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가 <모더니즘 이후>를 뜻하므로 이성중심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사상이다. 그러면 이성중심주의가 무슨 문제가 있길래 극복을 운위하는가?
파시즘을 통해 드러난 모더니즘이 갖는 중대한 문제점은 <사실에 대한 진술>과 <사실>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즉 <사실에 대한 진술>과 <사실> 사이에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믿는 것이다.
모더니스트들은 책상에 놓인 빨간 사과를 보고 <빨갛다>고 하는 진술은 사실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책상에 놓인 사과는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만 빨갛지, 흑백으로만 사물을 구분하는 개나 고양이의 눈으로 보면 회색으로 보일 것이다. 개나 고양이가 말을 할 줄 안다면 사과를 회색이라고 진술할 것이다. 이처럼 모든 진술은 어떤 사실을 특정한 시선으로 바라본 결과이지, 결코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바로 이 통찰로부터 새롭게 열리는 사상적 지평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실에 대한 진술>은 하나의 <진술>일 뿐, <사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 즉 <사실>과 <진술>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의 발견과 인식,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다
대중집단이 감성적으로 흥분 상태가 되어 집단 행동을 하게 될 때면, 우리나라의 식자들이 전매 특허처럼 들고 나오는 말이 <파시즘의 광기>이다. 저번의 <붉은악마>들에 대해서도 그랬고, 이번의 황우석 사건에 대해서도 <그분들>은 그렇게 꾸짖었다. 그러니까 <그분들> 이 <파시즘의 광기>로 정죄하는 기준은 두 가지 요소이다. 감성과 집단성. 헌데, 미안하게도 그 분들은 파시즘의 본질이 뭔지 모르면서 대단히 무식한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였을 때 감정의 상승에 가속도가 붙고, 집단이 죄 없는 한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무자비한 테러를 가하는 것은 옛날 고리짝부터 있어온 이른 바, <희생양제의>이다. 격앙된 감정 상태에서 일어나는 과격한 집단 테러는 굳이 파시즘에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예수의 처형이야말로 희생양 제의의 전범인데, 예수의 처형을 파시즘의 광기라고 하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애국의 열정도 우리나라의 일부 식자들에 의해 <파시즘의 광기>로 지목되는 주요 항목 중 하나이다. 애국의 열정은 집단화된 감성의 가장 전형적인 모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집단을 이룰 때 쉽게 일어나는 감정적 격앙과 집단적 마취 현상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해 왔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집단적 상황에서 초래되는 고양된 정서>야말로 숭고한 종교의 시작임을 그의 저서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고증하고 있다.
요컨대, 집단적 상태에서 일어나는 감성에 의한 판단과 행동은 모든 종교적인 태도의 본질일지언정, 파시즘만이 갖는 파시즘의 본질적 요소는 아니라는 얘기다.
서구 지성이 뼈아픈 반성과 숙고 끝에 찾아낸 파시즘의 광기의 근본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감성의 광기>가 아니라 <이성의 광기>였다. 요컨대, <사실에 대한 진술>을 <사실>과 구분하지 못하고 그 둘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이성중심주의의 맹점을 역이용함으로써 파시즘이라는 <신종> 폭력이 가능했다는 통찰에 이른다.
<파시즘이라는 신종 폭력>은 우리의 이성이 잠시 방심하고 있는 사이, 감성이라는 나쁜 친구의 꼬임에 빠져 삐딱선을 타는 바람에 탄생한 사생아가 아니다. 이성이 하나의 종교처럼 군림하게 될 때, 진리만이 최고의 가치로 신앙될 때 필연적으로 탄생한 이성중심주의의 적자이다.
이성중심주의자들을 속이기는 의외로 쉽다. 그들은 경험적 사실을 맹신하기 때문에 특정한 경험적 사실성을 입증하는 몇 개의 자료만 들이 내면 쉽게 설득당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가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말이 있다. 어떤 누군가가 악의를 갖고 작심한다면, <배가 떨어졌다>는 하나의 파편적 <사실>과 <배나무 아래서 갓끈을 맸다>는 또 다른 파편적 <사실>을 시간적인 연속성이라는 <실>로 엮어서 <갖끈을 고쳐 맨 선비는 도둑>이라는 <진술>을 <짜깁기> 해 낼 수 있다.
이처럼 티끌만한 <사실>들을 <꿰매서> 태산만한 <진술>로 부풀리는 <기술>을 몽타쥬 수법이라고 한다. 진실지상주의자들은 경험적 사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몽타쥬에 대한 인식 자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갖끈을 고쳐 맨 선비는 도둑> 이라는 <진술>을 <사실>로 믿어 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경험적 사실성>에 눈이 멀어, 티끌만한 잘못을 대들보만한 중죄로 정죄하는데 동참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더구나, 이성을 절대시하는 <이성의 종교>에 미친 사람들의 광기는 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우상의 종교>에 미친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상의 종교를 따르는 신도들과 달리 이성의 종교를 신봉하는 신도들의 자기확신은 절대적이다. 우상의 종교에서 인간은 신의 노예이다. 우상의 신도들은 신 앞에서 항상 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며, 따라서 수없이 번민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겸손해지는 존재이다.
반면 이성의 종교에서 인간은 신의 자리에 올라앉았다. 이들이 갖는 자기 확신은 하늘을 찌른다. <이성의 광기>는 정말 아무도 못 말린다. 파시스트들에 의해 티끌만한 잘못이 중죄로 <몽타쥬>되었을 때, 몽타쥬에 대한 의식이 없는 진실지상주의자들에 그것은 중죄로 보일 뿐이다. 유태인의 티끌만한 잘못을 태산만한 중죄로 부풀려 응징하는데 동참한 <이성의 광기>, 이것이 신종 폭력, 파시즘의 요체였다.
자, 그럼, 황 우석 교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언론에서는 황교수 논문의 결함을 대들보만한 잘못인 양 대서특필하고 있는데, 혹시 황우석 교수의 논문이 갖는 결함이 티끌만한 잘못은 아닐까?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닌 필자로서는 그 어떤 대답도 100%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전문가라 하더라도 개인마다 천차만별의 기준을 가지게 마련이므로 어차피 누구도 100% 장담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 진상이 아직 조사 중이기는 하지만, 그 어떤 조사 결과가 되었든, 정황상,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티끌만한 잘못일 가능성이 99%라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상식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 생각해 보시라. 그것이 대들보만한 잘못이라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세계의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이 모르고 지나갈 리 없다. 모르고 지나갔다는 사실은 그 결함이 티끌만한 잘못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결정적 단서이다. 즉 과학논문이 아무리 엄밀성을 요구해도 그 정도의 결함은 티끌로 취급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확고한 근거이다.
그렇다면, 황교수 문제는 티끌만한 잘못이 대들보만한 중죄로 몽타쥬된 것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건전한 이성의 눈에는 이렇게 명료하게 보이는 <꿰멘 자리>가 <경험적 사실성>에 맹목적으로 집착해 있는 이성의 광신도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경험적 사실성>에 대한 맹신과 진실지상주의 특유의 흑백논리가 합세하여 티끌만한 잘못을 대들보만한 중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날뛰었던 쪽은 네티즌들이 아니라, MBC와 MBC를 지원한 언론 및 지식인 그룹이었다. 정말 희대의 코미디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무대에서는 나찌에 놀아난 어리석은 군중의 역할을 사회 최고의 지식인들이 맡아서 하는 코미디가 아직도 열연중이다.
이성의 광기에 충만하신 대한민국 최고의 지식인 나리들께서는 민초들의 애국적 열정을 국익에 눈먼 비이성적 애국질이라고 크게 질타하신다. 그렇다 조국의 사랑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부터 피어오른다. 나의 아내를 사랑하고 나의 가족을 사랑하고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따뜻한 감성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일이다. 차가운 이성만 가지고는 죽었다 깨나도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따뜻한 감성이 없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못한다. 그런데 애국<질>이라니? 뭐 잘못된 것 있나?
이성의 종교에 미친 지식인 나리들께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베트남의 미라이 양민 학살 사건을 보도한 미국인 기자를 거론하며 일거에 목청을 돋운다. 조국이 저지르는 반윤리적인 과오에 대해서 이성을 차리고 직언을 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지, 제식구만 감싸고 도는 것은 비이성적 애국질이라고. 이 정도면, 일차방정식만 풀 줄 알지, 도무지 이차 방정식만 나와도 손도 못 대는 코찔찔이 수준 학생의 대답이다
이차방정식만 풀 줄 알아도 <강대국인 조국에 저항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지만, 약소국인 조국을 난도질 하는 것은 잔인한 행위라오> 하고 타이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황우석 교수 껀을 미라이 양민 사건과 비교해서 애국을 운위하자면 미라이 양민학살과는 은폐의 대상과 희생자의 사회적 성격(황우석 껀에서는 어떤 희생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등, 다차방정식을 풀어야 답이 나오는 문제이다.
윤리는 다차방정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애국의 열정도 파시즘의 광기로 치닫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진실의 아이러니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애국의 열정도 파시즘의 광기로 달려가지 않는다.
벽창호 같은 진실지상주의자들에게 진실의 아이러니를 알리기 위해 넷티즌들이 선택한 일종의 충격 요법을 가지고 파시즘의 광기 운운하는 것은 적반하장도 보통 적반하장이 아니다.
엠비씨의 광고주들을 협박(?)해서 광고해약 사태를 초래하는 정도의 충격 요법 가지고 파시즘의 광기 운운 하려 한다면, 국회에서 자기 주장을 관철하겠다고 의자 집어 던지고 몸싸움을 벌이시는 국회의원님들의 폭력은 <파-파시즘>의 할아버지 정도 되겠다. 국회의원님들의 몸싸움에 비하면 넷티즌들의 의사 표현은 평화적이고 지성적이기 그지없다.
앞으로는 <파시즘의 광기>, 제발 함부로 들먹이지 마시라,
좀 아는 사람이 보면 정말 말씀하시는 분들의 수준이 보인다.
필자가 좀 아는 척했다면, 죄송!!
PS : 심심풀이 땅콩 삼아 문답풀이를 제안합니다. 모두 함께 풀어 봅시다.
<문항1> 황우석 사건에서 <정직한 조선인>에 해당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MBC ②MBC에 고발한 연구원 ③아직 오리무중인 배후세력
<문항2> <매국노>는 누구?
①고발한 연구원 ②MBC ③노성일
<문항3> <일본경찰>은?
①MBC ②한국의 생명화학계 교수들 ③세계과학계 교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