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남해 금산 보리암 - 2월 19일(일요일)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남해 금산 보리암(菩提庵)
자암(自庵) 김구(金絿)가 화전별곡(花田別曲)에서 '한 점 신선의 섬'이라 하여 '일점선도(一點仙島)'라 부른 남해(南海). 세존도(世尊島), 도솔(兜率)의 뜻인 지족(知足), ‘미륵이 돕는다’는 뜻의 미조(彌助) 등 불교와 연관된 지명이 적지 않은 불국토(佛國土) 남해(南海).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올리고 왕위에 오르게 되자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보광산에서 ‘비단을 두른 산’이란 뜻의 금산(錦山)으로 개명한 그 산이 자리한 남해(南海). 내 고향 남해의 금산, 그 남해 금산에 자리한 보리암(菩提庵).
토요일(18일) 밤늦게 까지 해운대에서 차를 마시다가 집에 와서 잠자리에 든게 일요일 01시, 03시 20분경 다시 일어나 준비하여 관음사 새벽예불에 동참하고, 월요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생각나서, 월요일 보리암에 갈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비가 안온다는 일요일 당일 가기로 하고, 새벽예불과 천수경 봉송이 끝나고, 새벽기도 시작전 서둘러 나와서 사상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06시 20분발 남해행 버스에 탑승 보리암에 도착하여 사시 불공에 동참하고 점심공양후 하산하여 14:05 남해발 버스로 부산에 도착하니 16:10 전날 저녁 차회에서 일부 70 ~ 80년대 노차를 마셔서인지 피곤함을 못 느꼈다.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고 아미타불의 무량공덕을 찬탄하면서 일체중생의 고통을 거두어 주시는 해수관음보살. 헬기를 이용하여 보리암으로 해수관음을 옮기던 날 광채가 나타나는 이적으로 더 유명해졌다.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보리암(菩提庵)은 동해 낙산사(洛山寺) 홍련암(紅蓮庵), 서해 강화도(江華島) 보문사(普門寺)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관음 기도 도량이자, 전국의 3대 기도처 중의 하나이며, 설악산(雪嶽山) 봉정암(鳳頂庵), 팔공산(八公山) 갓바위가 낙산사와 보문사를 대신하기도 하지만, 보리암은 3대 기도처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기도의 효험이 높은 곳이다. ‘보광전(普光殿)’은 원래 고대 중인도(古代 中印度) 마가다(摩迦陀 Mgadha)국 보리도량(菩提道場)에 있었다고 하는 불전(佛殿)의 명칭으로 부처가『화엄경(華嚴經)』을 설(說)하는 아홉 번의 법회(法會), 즉 칠처구회(七處九會) 가운데 제2회와 제7회, 제8회가 각각 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 보광법당중회(普光法堂重會), 보광법당삼회(普光法堂三會)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마도 여기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내부 블단에는 목조 감실관음보살상(木造 龕室觀音菩薩像)이 모셔져 있는데, 이 보살상은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향(香)나무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으로서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통견(通肩)의 법의(法衣)에 결가부좌한 채 아미타불이 새겨진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오른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그 좌우측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이 협시하고 있다. 사시불공시108배로 참회하고, 선망조상과 일체중생이 극락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인연있는 모든 분들이 길사와 경사는 항상 만나고 재해와는 절대로 만나지 않기 (常逢吉慶 不逢災害, 상봉길경 불봉재해)를 기원하고, 우리 가족도 건강하고 하는 일이 순탄하기를 발원하였습니다. 보광전(普光殿) 감실관음보살상(木造 龕室觀音菩薩像)
대장봉이 호위하는 해수관음 일월봉과 화엄봉이 호위하는 해수관음 삼층석탑(石塔)이 서 있는 절벽(絶壁)을 ‘탑대(塔臺)’라 부를 정도로 천길 낭떠러지 위에 서있는 높이 1.65m 크기의 이 탑은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王妃) 허황옥(許黃玉)이 인도(印度) 아유타국(阿踰?國)에서 올 때 풍파(風波)를 만나 건너오지 못하다가 배의 밑바닥에 파사석(婆娑石)을 싣고 오자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건너오게 되었다고 전해 오는 돌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가져와 역시 허황옥(許黃玉)이 인도(印度)에서 가져온 불사리(佛舍利)를 모시기 위해 탑을 세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탑은 고려 초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이 삼층석탑은 기단(基壇) 남쪽에 나침반을 가져가면 N극과 S극이 남북(南北)을 반대로 가리키는 자기난리(磁氣亂離) 현상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석탑속에 우주의 기가 흐르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어서 혹은 온천수가 흐르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다. 과학 이상의 그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다.
멀리 왼쪽 위로 상사바위가 보인다.
조선 숙종 때 전라남도 돌산에 살고 있던 젊은 어부가 남해 상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 총각이 살고 있는 집에는 결혼하자마자 남편을 잃은 젊고 어여쁜 과수댁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총각은 새벽 일찍 바다에 나가고 과수댁은 아침에 들에 나가 농사를 짓다 보니 둘이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루는 총각이 조금 늦게 바다에 나가게 되어 방을 나서는데 우물가에 있는 그녀를 보게 되는 순간 한눈에 반해 상사병으로 몸져 눕고 말았다. 과수댁은 며칠째 세들어 사는 총각의 신발이 그대로인 것을 보고 이상해 여겨 총각의 방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어디가 아프신지요. 왜 요즘은 바다에도 안 나가고 방에 누워 계신지요?” 총각은 부끄러움에 말을 떼지도 못하다가 결국 사실을 말하게 되었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만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그만 상사병에 걸려 이렇게 앓고 있다오.” 과수댁은 총각의 아픔을 알았지만 정절을 지켜야 하는 아낙네로써 선뜻 총각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음식과 약을 들여 보냈지만 상사병은 나을 줄 몰랐다. 총각이 죽음을 앞둔 지경에 이르자 과수댁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받아 주려고 했지만 이미 마음의 병은 몸까지 중독시키고 말았다. 과수댁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상사바위 이야기가 생각났다. 마을 뒤 금산에 있는 상사바위에서 사랑을 나누면 총각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몸져 누운 돌산 총각을 데리고 금산 상사바위에 올라 힘겹게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자 총각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그 후 둘은 혼인하여 아들딸 낳고 오래오래 살았다는 낭만적인 설화가 깃들어 있는 바위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상사바위전설>은 사회의 관습, 신분, 윤리의 제약과 한계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거나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현실의 여건 때문에 지속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이나
남해의 전설은 총각의 한을 과부가 풀어주었다는 내용이다. 상사의 한을 풀었기 때문에 총각은 죽지 않아도 되며, 상사바위 또한 비극의 공간이 아닌 상사 풀이의 공간으로 변이되고, 사회의 관습이나 신분, 윤리의 제약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룬 이야기로 승화된다. 그래서 남해는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동적이고 진취적이다. 학창시절 여름한철을 보내기도 했던 상주 해수욕장
형리암이 대장봉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전날 저녁 차회시 선보인 원나라 시대 차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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