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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도>
목 차
Ⅰ. 序論
Ⅱ. 本論
Ⅱ-1 다도의 정의
Ⅱ-2. 다도의 역사
Ⅱ-3. 차의 종류
Ⅱ-4. 다도의 정신세계와 예법
Ⅱ-5. 다회(茶?)와 다회의 과정
Ⅱ-6. 다도의 예법문화
Ⅱ-7. 한일 다도 비교
Ⅱ-8. 외국의 다도
Ⅲ. 結論
Ⅳ. 참고 문헌 및 사이트
Ⅰ. 序論
일본의 수많은 전통문화들 속에 일본인들의 특징과 정신세계, 일본이라는 나라의 가치관 등이 뚜렷이 베어있는 문화는 다도문화라고 여겨진다. 과제의 주제를 다도문화로 정하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인들이 다도를 즐기고 다회를 갖는 그 습관 속에서 나의 주관으로 느껴온 일본인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의 양상들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인들의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이 뿌리내리고 일본인들의 생활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다도문화의 성립 배경과 발전과정, 그리고 우리나라의 다도문화와의 차이점, 차의 종류, 다회의 과정 등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Ⅱ. 本論
1. 다도의 정의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은 단순히 목마름을 달래려는 생리적인 욕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즐기는 대개의 음식이 다 그렇듯이 물을 마시는 것도 단순히 목을 축이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맛있는 음료를 추구하며 그것을 즐기는 특별한 방법을 만들어 내었던 것을, 어느 정도 수준의 문화를 꽃피운 모든 나라들의 습성에서 공통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일본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데 기울인 관심과 그로 해서 빚어진 문화적 격식들은 보는 이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할 만큼 독특하다. 일본인들은 차를 마심에 있어서 단지 그 맛을 음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사람이 모여 차를 마시는 순서와 차를 접대하는 방식, 다도구의 제작 양식 등을 일정하게 정하고 각 단계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와 같이 다실을 꾸미고 다도구를 준비하여 차를 마시면서 다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는 전체 과정의 양식을 통틀어 '다도'라 한다. 우리나라에도 차를 마시는 예법이 없지 않으며 중국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일본 사람들만큼 그것에 세세한 규칙을 정하고 집착하지는 않으니 다도라 하면 누구나 일본식의 문화를 떠올리게 된다.
일본의 다도는 크게 세 가지의 요소들로 이루어진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다실과 다도구들의 물질적인 요소, 차를 마시는 방법에 관한 행위적인 요소, 다도에 관련된 미의식과 종교성들의 정신적인 요소가 그것이다. 곧 다도란 이런 요소들을 배워 익히며, 손님에게 접대하는 과정을 즐기는 일종의 유희 활동이자, 그런 가운데 세련된 의례로 전승된 전통 예능의 한 가지이며, 그것에 온 마음을 다 써서 몰입하다 보니 구도의 경지에까지 닿게 된 정신 활동인 것이다.
2. 다도의 역사
▣ 일본 다도의 교조 리큐(利休)
일본 다도의 시조는 무라타 슈코(村田珠光), 중흥조는 다케노 쇼오(武野紹?)지만 교조라고 할 때는 센리큐(千利休)를 뜻한다.
리큐는 노아미(能阿?)의 흐름을 계승한 다인(茶人) 기타무키 도친(北向道陳)으로부터 다도를 배우고 후에 도친의 소개로 슈코류(珠光流)의 다인으로 널리 알려진 다케노 쇼오(武野紹?)에 사사하여 다도의 극치를 깨우쳤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두 장군 아래서 다두(茶頭)가 되었고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궁중에서 다회를 열었을 때 참여하여 다회의 후견인 역활을 수행함에 따라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천하제일의 다인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다가 1591년 2월 28일 히데요시로부터 자결명령을 받고 자진함으로써 70년의 일생을 마쳤다.
리큐는 다도의 교조로서 뿐만 아니라 다도의 수호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다도의 이론을 완성시켰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고안을 통해 다실에서부터 다정(茶亭), 다구(茶具), 다도예법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일상다반의 생활근원을 개혁하여 문화적으로 향상시키는 동시에 정신적으로 깊이 있게 만들었다.
▣ 리큐의 다도개혁
다(茶) 애호가로서의 여러 가지 다사(茶事)개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두가 된 그의 만년에 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리큐는 슈코 당시부터 초암(草庵)의 다실로서 출현한 다실풍의 건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연구 개량을 가해서 개조했다.
다다미방 내부에 고(菰)천장, 통나무 기둥, 칠벽, 작은 출입문 등 설비를 개량했다. 또 다다미 4장 반의 다실 외에 다다미 3장, 2장, 1장 반의 작은 방도 만들었다. 다다미 3장의 방은 쇼오 때까지는 명물 다도구를 갖지 않은 와비차인 전용의 다실이었으나 리큐의 식견에 따라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다다미 3장, 2장의 작은 다실에서 당(唐)에서 들여온 도구를 사용하여 다회를 개최하는 습관이 되었다. 그러나 다다미 두 장의 좁은 다실은 귀인이나 와비차인 또는 명인(名人)들이 사용하고 한장 반짜리 다실은 명인의 절대공간으로서 은근하고 극비사(極秘事)였던 것이다.
연회석 요리도 선원의 회석(?石:茶를 대접하기 전에 내는 간단한 요리)을 바탕으로 간소하게 한 결과, 국 두가지, 반찬 세가지를 무거운 요리로 치고 국 한가지, 반찬 한가지를 가볍게 대접하는 것을 통례로 삼았다.
매실에 꽂는 꽃도 화려하지 않은 계절의 초화를 가볍게 꽂는 것을 상(上)으로 치고 봄, 겨울에는 엷은 동백꽃, 여름, 가을에는 무궁화를 애호했다. 다인의 복장도 다회에 참석할 때는 위에 무명옷을 입는다. 도구를 처음 쓰는 다회나 처음 다회에 초청되어 참석할 때는 위에 황색의 새 통소매 옷을 입는 것을 예의로 삼았다. 와비차인은 항상 무명옷, 수수한 종이옷을 입는다.
다회에 나갈 때는 휴대품은 띠, 두건, 휴지, 수건 두개, 부채 등인데 매번 새것을 중히 여겼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의 초대를 받고 갈 때는 약간 헌옷을 사용해도 되었다. 또 초청객의 몸가짐으로서 속인은 머리를 땋고 수염을 가지런히 하며, 승려나 불문(?門)에 귀의한 사람은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 다인과 다애호가 및 명인
리큐는 먼저 다인으로서의 자격을 엄격히 규정했는데 보통 다인, 애호가, 명인의 3단계로 나누었다. 보통 다인은 차 맛을 식별할 줄 알고 차도 잘 끓이며 다도의 사범으로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애호가는 훌륭한 다도구를 소유하고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공적이 많은 다도구를 소유하고 뚜fut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공적이 많은 다인을 말한다. 명인이란 다도구를 감식하는 안목이 뛰어나고 차도 잘 끓이며 신념, 창의, 업적 세 가지를 갖추고 그 외에 당(唐)에서 수입한 다도구를 소유하고 다도에 깊은 의지를 갖는 등 자격을 고루 갖춘 다인을 말한다.
이 같은 구분을 보면 리큐시대의 다도는 오늘날과 달리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 차를 끓이는 법
리큐는 차 끓이는 방법도 개혁했다. 말차(抹茶)에는 진한 차(濃茶)와 묽은 차(薄茶)의 구분이 있는데 오로지 묽은 차를 끓여야 하며 그것이 진(?)의 차라고 하고 있다.
리큐는 60세 무렵까지는 탁자의 차를 진(?)이라 하고, 풍로(風?)의 차를 행(行)이라 하며 화로(?)의 차를 초(草)라고 정했는데 60을 넘은 만년에 이르러 차의 방법이 크게 바뀌었다. 탁자의 차의 고류(古流)에도 정통하고 있는터에 탁자는 애호가에게는 불필요한 장식물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차란 단지 물을 끓여서 차를 달여 마시는 것 뿐"이라는 내용의 리큐의 도가(道歌)가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리큐는 묽은 차를 달이는 것이 진(?)의 차라고 규정하고 진한 차를 진(?)이라고 하던 종래의 통설을 부인했다.
▣ 다도수행
리큐는 노(일본연극의 일종)의 연습을 모방해서 다도수행을 규정했다. 일정한 연령을 구분해서 각기 적합한 모습을 요구하고 있는 점이 매우 비슷하다.
즉 15세에서 30세까지는 모든 것을 스승에게 맡기고 그대로 따른다. 30세에서 40세까지는 자기 의견을 들여온다. 다도의 관례와 절차, 여러 가지 법칙을 연구하는 것도 기초에 관해 잡담을 나누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10중 5정도는 자기의 의견을 채택한다. 40에서 50에 이르면 대담하게 스승과 반대로 해본다. 스승이 서쪽으로 가면 나는 동쪽으로 간다.
그런 가운데 자기류를 창안해서 훌륭한 다인이라는 평가를 얻게된다. 그리고 50에서 60까지의 10년 간은 다시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한잔의 물을 온고히 옮기는 듯이 한다. 이와 동시에 모든 도(道)의 명인의 창위와 태도를 모범으로 삼는다.
▣ 다인이 조석으로 소리내어 읽는 말
리큐는 다인이 조석으로 크게 읽는 말로 첫째 마음은 물론 다도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다도에 깊은 뜻을 가져야 한다. 둘째 인내, 어려운 일, 싫은 일도 꾹 참는다. 높은 도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건 인내를 필요로 한다. 셋째 그릇 이는 인격을 뜻한다. 다도의 스승도 인간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리큐는 항상 다사를 생계의 방편으로 삼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다도에 몸을 바쳐온 리큐의 순수한 삶의 방식과 그것을 생활의 방편으로 부끄럽게 여기는 기개는 사카이라는 자치도시에서 태어난 애호가의 기백 때문이다.
▣ 득도의 객과 주인
어느날 리큐의 제자 남보 소케이(南坊宗啓)가 다사에 있어서 객(客)과 극인간에 서로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물었다. 리큐는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음이 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도를 깨달은 객과 주인이라면 특별히 노력할 필요 없이 자연히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된다.
리큐는 "득도의 객과 주인은 주, 객이 모두 마음속으로부터 공경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 리큐의 죽음
다도의 스승으로서 리큐의 권세는 당시 다도라는 예도(芸道) 자체가 상류무사계급사회에 보급되어 있었던 만큼 일종의 은연한 세력이 되어 차츰 그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외교면까지 뻗쳐있었던 것 같다.
1590년 내란이 일어나 히데요시는 천하의 대군을 이끌고 관동(?東) 지방에 출장했는데 이때 리큐도 수행했다. 내란이 평정되고 리큐는 먼저 귀경했는데 그 다음해인 1591년 돌연 죄를 뒤집어쓰고 리큐의 자택인 후신안(不番庵)에서 고향인 사카이에 칩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의 죄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다이도쿠지(大?寺)의 산문인 긴모가쿠(金毛閣)에 리큐의 목상(木像)을 안치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도구의 감정과 매매에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천하제일의 다도스승이라고 칭송 받던 리큐는 70세의 나이에 결국 활복자결한다. 리큐가 활복자결하는 현장에는 전날부터 3천명의 군사들이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리큐문하의 다이묘들의 만일의 행동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리큐는 왜 죽어야 했는가? 역사학자, 문화사가들이 여러 가지 추측 내지 추리를 펼쳤고 역사소설가는 리큐의 딸을 둘러싼 사건을 들먹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추측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가장 확실한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역시 다이도쿠지(大?寺) 산문의 목상사건과 다도구 감정과 매매에 얽힌 부정사건인데 이는 당시 귀족과 승려의 일기 또는 무사들의 서신 등에도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틀림없다.
그러나 목상과 다도구 사건이 생겼기 때문에 처벌된 것이 아니라 리큐를 처벌하는데 있어서 이 두 사건을 거론한 것이다. 여기서 리큐 처벌의 진정한 원인을 대국적으로 추리해보면 전국시대에 사카이 시민의 기골(?骨)이 참화의 근원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농지 측량과 무기몰수를 통해 농민과 도시상공인으로부터 생산권과 무기 행사권을 빼앗는 동시에 일본 전 국토를 통일하는 실적을 거둠에 따라 신분법령을 공포, 사농공상의 분리를 꾀했다.
이에 따라 사카이란 자유무역도시도 오사카의 위성도시가 되었다. 기백 있는 사카이 시민들이 소상인으로 전략해갔다. 무사를 무사로 여기지 않는 기개 있는 사카이 시민들이 지배층에게는 눈의 가시였다. 더구나 천하의 다이묘(大名)를 문하에 거느리고 히데요시 면전에서 직언을 서슴치 않으며 고개를 쳐드는 천하제일 다도의 스승 리큐도 눈에 가시였다. 그래서 특권을 자랑하는 이 평민출신 다도의 스승이 없어져야할 필요성이 생겨 서둘러 처벌된 것이다.
▣ 다정자(茶亭子) 칠인과 리큐7철(七哲)
리큐 사후 그의 다도는 제자들에 의해 전승되었는데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을 옛날부터 리큐 7철(七哲)이라고 부른다. 어느날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정자다사를 가졌는데 점다 방법이 고법(古法)에 비해 매우 생략되었다. 그 이유를 추궁했더니 리큐는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은 고법을 약간 개량했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리큐를 칭찬하는 동시에 이 방법을 마음대로 전수하지 못하게 금지시키고 서약서를 쓰게 했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스스로 이 다법을 전수받고 이어 관백(?白:당시 일본 최고위 직책) 7인에 의해서만 상전(相?)토록 허가했다. 이를 "정자7인"이라고 청했다. 리큐7철의 기원은 히데요시 생존 당시에 정해진 "정자7인"에 있는 것 같다.
▣ 리큐의 평민제자
리큐의 많은 제자 가운데 "정자7인"이니 "리큐7인"으로 불리는 사람은 이를테면 리큐의 무사제자였고, 일종의 후견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리큐는 사카이의 평민이었기 때문에 그의 직제자는 이들 무사제자보다는 평민제자였음이 틀림없다. 즉 사카이 평민 다인으로 알려진 산상종이(山上宗二), 주길옥종무(住吉屋宗無), 만대옥종안( 万代屋宗安), 중종보(重宗甫), 하카다의 애호가 신곡종심(神谷宗심)등을 들 수 있다.
▣ 三千家의 성립
종단(宗旦)이 승계한 천가(千家)정통 다도는 그의 손자에 이어졌는데 그의 자식때부터 세 집으로 나뉘어졌다. 그것을 3센케(千家)라 한다.
소사(宗左)의 자손을 오코테 센케(表千家)라 하고, 소시쓰(宗室)의 계통을 우라 센케(裏千家)라 한다. 종단(宗旦)의 차남을 이치오 소슈( 一翁宗守)라 했는데 그는 다카마쓰(高松)번의 다두가 되었다. 이 종수 계통의 다류를 무샤노코지 센케(武者小路千家) 또는 간큐안 센케라 한다. 이 오모테 우라 무샤노코지의 다도유파를 3센케류 라고 부른다.
▶ 오모테 센케(表千家)
오모테 센케는 센케의 정통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센리큐로부터 현재 13세 소쿠추사미 소사에 이르고 있다.
오모테 센케의 종가는 현재 경도시 상경구 소천통 사지내상 불심암( 京都市 上京? 小川通 寺之?上 不審庵) 안에 있으며 구전가(久田家)와 굴내가(堀?家)를 두 날개로 하며 명고옥시(名古屋市)의 요시다 다카부미를 표현각(表玄閣)이라 칭하고 도쿄와 오사카에도 연습소를 두어 종가의 스승이 직접 출장교수하고 있다. 교토시의 하원서점(河原書店)에서 "다도잡지"란 기관지를 월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 우라센케(裏千家)
센 소탄(千宗旦)의 4남 선수종실이 아버지 소탄이 세운 다실 곤니치안(今日庵)을 계승, 곤니치안 1세라고 칭한데서 비롯되며 현재의 12세 붕운제 종실(鵬雲? 宗室)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라센케 종에서는 센리큐를 1세로 하고 현재 15세라고 부른다.
▶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
센 소탄의 차남인 일옹종수(一翁宗守)가 고송번(高松蕃) 송평가( 松平家)의 다두에서 물러나 귀향, 코토의 무샤노코지(武者小路)에 다실 관휴암(官休庵)을 짓고 관휴암 1세라고 한데서 비롯되어 현재 10세 유인제 종수(有隣? 宗守)에 이르고 있다.
무사노코지 센케는 쿄토를 기반으로 하여 종가의 선조인 인연으로 고송(高松)에도 확고한 지반을 구축했다. 도쿄에는 과거 유호제 종수(愈好? 宗守)가 직접 출장 지도한 인연으로 주로 지식층간에 보급시켰다.
3. 차의 종류
차에는 크게 우롱차, 홍차, 녹차가 있는데, 어느 것이든 같은 차나무에서 만들어진다. 그 차이는 가공법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마시는 옥로나 센차(煎茶), 반차(蕃茶), 호우지차(ほうじ茶)등의 일본차도 결국 전부 녹차다. 녹차는 다른 차와는 달리 차 잎이 산화효소의 기능을 가능한 빨리 멈추게 한다고 한다. 이 가공법은 차가 가지고 있는 성분이나 영양, 색깔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가공법이기도 해서 일본 차의 독특하고 산뜻한 향기, 약간 떫은맛과 단맛은 차 잎이 본래 가지고 있는 맛을 최대한 살린 것이라고 한다.
▣ 차의 종류 - 크게 불발효차, 반발효차, 발효차로 나뉜다.
▶ 불발효차(녹차)
1) 센차(煎茶/せんちゃ) : 찻잎을 잘게 썰어 말린 후,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차 를 말하며, 일본차의 약 80%가 이 센차이다.
2) 교꾸로(玉露/ぎょくろ) : 그늘에서 비료 등의 영양공급을 충분히 하여 키운 고 급 녹차이다. 값도 비싸고 맛과 향이 강해서 적은 양을 마신다.
3) 맛차(抹茶/まっちゃ) : 일본 최초의 차. 찻잎을 곱게 갈아 뜨거운 물에 풀어 마 시는 차로, 찻잎을 함께 먹는다.
4) 반차(番茶/ばんちゃ) : 오래된 큰 찻잎으로 만든 차로써, 중가급품의 차를 의미 한다.
5) 메차(芽茶/めちゃ) : 센차(煎茶)나 교꾸로(玉露)를 만들면서 새 싹(芽)을 가려내 어서 만든 차이다. 맛과 향이 강하며 카페인 등 자극 성분도 많다고 한다.
6) 쿠키차(?茶/くきちゃ) : 센차를 가공할 때 생기는 줄기(?) 부분을 모아서 만 든 차이다. 독특한 향과 깔끔한 일본의 맛을 느낄 수 있다.
7) 현미차(玄米茶/げんまいちゃ) : 센차(煎茶)나 반차(番茶)에 볶은 현미를 섞어 넣은 차이다. 고소한 향 때문에 인기가 많은 편이다.
8) 호우지차(焙じ茶/ほうじちゃ) : 반차(番茶)를 볶아서 달인 차로서 카페인이나 폴리페놀 등 자극물질이 적고 맛이 시원하여 자극적인 맛을 싫어하는 사람이 나 어린이들에게도 권할 수 있는 차이다. 또한 깔끔한 맛이 식후의 차로서 적 격이다.
▶ 반발효차
1) 우롱차 : 반발효차로 대만이나 중국 등에서 제조되고 있다. 산뜻한 일본의 맛 을 즐길 수 있다.
▶ 발효차
1) 코차(紅茶) : 차 잎을 완전히 발효시킨 것이다. 인도 등에서 제조되고 있다.
4. 다도의 정신세계와 예법
다도의 정신세계에 대하여 알아보자. 천하제일의 종장(宗匠)의 명성을 얻은 리큐는 다도인의 갖추어야할 기본정신으로, 주인과 손님 모두가 대등하고, 서로 존경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정숙한 가운데 예의를 지켜 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화경청적(和敬?寂)으로 표현되는 다도정신은 와비차로 구현되어 일본 다도의 본류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다도의 예법은, 주인이 감상 가치가 있는 찻잔에 좋은 차를 끓여 대접하는 방법과 이를 받아 마시는 손님의 마음가짐으로 이루어진다. 주인은 다다미 4장 반이 기준인 다실, 다실의 정원인 로지(露地), 차를 마실 때 나오는 간단한 요리인 가이세키(?石)요리, 차도구의 준비 등에 세세한 주의를 기울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비우고 손님을 접대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손님 또한 다도의 예법에 어울리는 복장과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복장은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복장은 피하는 것이 좋다. 가지고 올 준비물(모치모노(持ち物))은 오차카이(お茶かい)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차를 마시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은 준비되어 있다. 오차카이의 경우는 센스(扇子―다도용의 작은 부채), 카이시(?紙- 접어서 품에 지니는 종이로 다도 때는 과자를 놓거나, 차종을 닦는데 쓰인다), 요지(楊枝―과자를 먹을 때 사용하는 이쑤시게), 코부쿠사(こぶくさ차 도구를 닦기도 하고, 차 도구 앞에 깔기도 하는 작은 수건) , 그리고 이들을 넣는 후쿠사바사미(ふくさばさみ이상의 물건을 넣는 가방) 등이 필요하다. 이 이외의 물건, 즉 차를 대접받는데 필요 없는 물건은 가지고 가지 않는 편이 좋다. 인사는 차가 앞에 나오면 우선 가져 다 준 사람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다. 또한 차를 내어 주는 사람에게, 차에게,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차를 내어 준 사람에게, 다 마신 후 차를 물리는 사람에게 목례 등 여러 번 인사를 해야 한다. 오카시(과자)는 반드시 차보다 먼저 나오는데, 차를 마시기 전에 먹는 것이 기본이다. 남으면 가지고 가도 되지만, 차를 마시면서 먹어서는 안 된다. 마시는 방법은 오른손으로 잡고 아래에 왼손을 바친다. 찻잔을 조금씩 돌리면서 차의 색깔과 거품의 정도 등을 감상한다. 한 모금 마신 후 맛과 향을 음미한다. 나머지를 한 입 반 정도에 다 마신다. 그래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역시 주인의 접대하는 마음 씀씀이에 상응하는 마음가짐을 갖추고 임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다도의 예를 살펴보자.
1) 손님은 앉아서 조용히 기다린다.
2) 한토(半東-차를 내어 주는 사람으로, 오차카이를 진행한다.)가 손님의 정면에 앉아 차를 손님 앞에 놓는다.
3) 한토가 가볍게 목례를 하면 손님도 그에 응해 양손을 무릎 앞 다다미에 붙이고 목례를 한다.
4) 한토가 물러 난 후, 양손으로 찻잔을 가볍게 들어 올려, 옆 손님 쪽으로 찻잔 하나 정도쯤의 거리로 옮겨 손님에게 양손을 무릎 앞 다다미에 붙여 가볍게 목례를 한다.
5) 옆 손님이 답례의 목례를 하는 것을 확인 한 후 다시 양손으로 찻잔을 가볍게 들어 원래의 자리로 옮겨 둔다.
6) 양손을 무릎 앞 다다미에 붙이고 주인을 향해 목례한다.
7) 오른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려 왼손 손바닥으로 옮겨 올린 후, 찻잔에 가볍게 목례를 한다.
8) 오른 손으로 찻잔을 시계 방향으로 가볍게 (45도 전후) 움직인다.
9)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오른쪽 손끝을 무릎 앞 다다미에 붙이고 주인을 향해 목례한다.
10) 남은 차는 맛을 음미하면서 두 모금 반 정도로 나누어 전부 마신다.
11) 찻잔을 왼손에 올린 채 자신의 입을 댄 부분을 오른손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마신 흔적을 닦는다.
12) 닦은 손가락은 카이시나 손수건으로 닦는다.
13) 오른 손으로 찻잔을 시계 돌아가는 방향으로 3번 정도 돌려 맨 처음과 반대 방향으로 정면을 향하게 한다.
14) 오른 손으로 찻잔을 다다미의 정면에 놓고 아무 말 없이 기다린다.
15) 한토가 손님 앞에 앉아 찻잔을 정리하는 것을 허락 받기 위해 목례하면, 손 님은 양손을 무릎 앞 다다미에 붙여 가볍게 목례한다.
5. 다회(茶?)와 다회의 과정
1)다회: 차 마시기 모임
주인이 다실에 손님을 모셔서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다회' 또는 '다사'라고 한다. 다도를 즐길 수 있는 다실, 곧 차를 마시는 방과 다도구들이 갖추어져 있고 좋은 이야깃거리가 있다면, 언제라도 스승이나 제자 또는 벗을 초대하여 다회를 열었다. 다회는 여는 때와 목적들에 따라서 일곱 가지 경우로 나뉘는데 이를 '다사칠식'이라고 한다.
첫째, 가장 일반적인 것은 '낮 다회'로, 정오에 모여 간단하게 식사를 곁들여 차를 마신다.
둘째, 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밤 다회'는 주로 겨울밤에 여는데 이때는 긴 겨울의 정취를 이야깃거리로 삼는다.
셋째, 아침에 여는 '아침 다회'는 주로 여름날 아침에만 열며, 이른 아침에 느끼는 청량감을 맛보기 위하여 다실에 여름 꽃으로 꽃꽂이 장식을 하여 두고 여름 아침의 분위기를 이야깃거리로 삼는다.
넷째, '새벽 다회'는 새벽 네 시쯤부터 동이 트는 풍경을 보면서, 동이 트는 동안의 맑고 신선한 정취를 이야깃거리로 삼는다. 손님들과 시간을 미리 약속해 둔다.
다섯째, 다실에 신분이 높은 귀한 손님이 다녀간 바로 뒤에, 손님보다 격이 낮아서 함께 차를 마실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 귀한 손님의 체취를 느끼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차를 마시는 경우가 있다. 비록 함께 차를 마시지는 못했으나, 그 손님이 다녀간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그 손님이 쓰던 다도구로 차를 마시며 그이의 정취를 느껴 보기 위해서 여는 다회를 '자취 다회'라 한다. 귀한 손님의 자취를 음미하며 감상에 젖어 보는 데 의미가 있다.
여섯째, 미리 알리지 않고 불쑥 찾아 온 손님을 위하여 여는 다회를 '불시 다회'라고 한다. 이 경우에는 일일이 절차를 갖추지 못하며 손님도 이를 탓하지 않는다. 격식이 이미 어그러졌으므로 파격적인 분위기를 즐기는 다회가 된다.
일곱째, 그 해에 새로 딴 찻잎을 차 단지에 넣어 봉해 두었다가 십일월에 손님을 모신 자리에서 개봉하고, 그 자리에서 찻잎을 작은 맷돌에 갈아 차를 대접하는 다회를 '개봉 다회'라 한다. 손님이 보는 앞에서 개봉하고 그 자리에서 차를 가는 일은 그 손님에게 소중한 것을 접대한다는 정성의 표시가 된다.
다회를 여는 양식은 이와 같은 일곱 가지가 기본이지만, 이 밖에도 특별히 손님을 한 분만 모시고 여는 '독객 다회', 손님이 식사를 하고 왔을 경우 다과만 내는 '식후 다회', 밤새 다실에 피워 두었던 숯불의 타다 남은 불꽃 모양을 감상하기 위하여 아침에 손님을 모시고 여는 '타다 남은 불꽃을 감상하는 다회' 들 해서 그때그때 적절한 목적에 따라서 다채로운 다회를 열 수 있다.
2)다회의 과정
일본 사람들이 다도에서 쓰는 차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찻잎을 잘게 썰어서 말린 잎을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차를 '전차'라 하고, 찻잎을 곱게 갈아 뜨거운 물에 풀어 마시는 차를 '말차'라 한다. 말차도 가루를 많이 넣어 진하게 타면 농차라 하고, 엷게 타면 박차라고 한다.
그러면 다회가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낮에 여는 '낮 다회'의 예를 들어 살펴보자.
먼저 다회를 주최하고자 하는 사람, 곧 다회의 주인은 손님들에게 초대 편지를 낸다. 다회에 참석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답장을 받으면 다회를 열 준비를 한다.
다회가 열리는 날, 손님들은 약속한 시간에 다실 정원 입구의 대기실에 모인다. 여기서 손님들은 한 사람씩 '정객', '차객'. '삼객', '사객', '말객' 들 해서 역할을 나누어 맡는다. 그에 따라서 다실 안에서 앉는 자리와 차를 대접받는 순서가 정해진다. 손님들은 시간에 맞추어 바깥 정원의 굽은 길을 걸어 들어가서 정원 한쪽에 준비된 걸상에 앉아 기다린다. 주인이 맑은 물을 담은 통을 들고 나와 손 씻는 물그릇에 물을 채워 놓고 들어간다. 손님들은 일어나서 차례로 손을 씻는다. 손을 씻는 것은 속세의 먼지를 깨끗이 씻어서 몸도 마음도 깨끗하게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다음으로 주인은 안쪽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이하며 인사를 나눈다. 다회가 열리는 다실의 안쪽 정원은 나무를 심고, 길을 구부러지도록 만들어 그윽한 느낌이 들도록 꾸민 것이다.
다실은 소박한 느낌을 풍기도록 꾸미는데 보통 이엉으로 지붕을 만들고 벽에는 흙을 발라 자연을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한다. 주인은 안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문으로 먼저 다실에 들어가서 손님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손님들은 '니지리구치'라는 작은 문을 통해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낮추어 기어 들어가듯이 다실로 들어간다. 이 문은 일본 다도의 독특한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니지리구치는 몸을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도록 작게 만드는데 그 크기는 가로 육십 센티미터 세로 육십 센티미터 정도이다. 문을 이렇게 작게 만드는 데는 까닭이 있다. 다실에 들어가면 누구나가 다 속세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같은 자격으로 만나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문을 작게 만든 것이다. 다실에서는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으며 인간 본연의 겸손한 자세로 돌아가서, 모두가 평등한 관계에서 다회를 진행해야 한다는 의도를 그렇듯 작은 문으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문을 이처럼 작게 만드는 까닭을 다르게 보는 이도 있다. 누구나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은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하고 있으니 이 공간 안에서는 모두가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겸허한 마음으로 차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이다.
6. 다도의 예법문화
1) 먹고 쉬고 마시고 대화한다.
다실 안으로 들어와 앉은 손님과 주인이 인사를 나눈 뒤, 손님들은 차례대로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주인은 먼저 '이로리'라고 부르는 실내용 붙박이 화덕에 숯불을 피우고 손님들은 숯불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감상한다. 이때 주인은 향을 피워 정취를 돋운다. 이어서 준비해 두었던 '회석 요리'를 내어 손님들을 대접한다.
회석이란 본래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선방에서 수행하는 젊은 승려들이 긴긴 겨울밤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참을 수 없어서 돌을 따뜻하게 데워서 품속에 넣어 허기를 잊으려 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회석 요리는 잘 차려 풍성한 잔치 요리와 달리, 잠시 시장기나 속여 둘 정도의 간단한 식사를 가리킨다. 그러니 흔히 밥 한 주먹, 반찬 한두 가지, 국 한 그릇으로 차린 조촐한 상차림이 회석 요리의 대표되는 것이다. 회석 요리를 먹을 때는 술을 곁들이게 되는데, 술은 취기가 오르지 않을 정도로 조금만 마신다. 회석 요리를 다 먹은 뒤에 주인은 다과를 낸다. 손님들은 다과를 다 먹은 뒤에 일단 정원으로 나간다. 중간 휴식을 위한 것이다.
손님들이 나가서 쉬는 사이에 주인은 다실에 걸어 두었던 족자를 떼어 내고 그 자리에 꽃을 장식하고 차를 준비한다. 준비가 끝나면 걸어 두었던 징을 쳐서 손님들에게 들어올 시간이 되었음을 알린다. 손님들은 다시 손을 씻고 차례대로 다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주인은 먼저 맛이 진한 농차를 낸다. 이로리에 새로 숯을 얹어 불길을 다시 돋우고 다과를 낸 뒤, 이번에는 맛이 엷은 박차를 낸다. 그 동안에 손님과 주인은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누고, 시도 짓고 다회의 감상도 이야기하며 즐긴다. 손님은 다실의 꾸밈새나 다도구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다도구의 아름다움이나 다실의 그윽한 분위기 또는 장식한 꽃꽂이나 족자의 격조들을 칭찬하여 주인에게 답례한다.
2) 세속적인 잡담은 금한다.
보통 다회를 한 차례 진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네 시간 안으로 하며 그보다 길어지지 않도록 한다. 손님의 수는 다섯 명을 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한다. 다섯 명이 넘게 되면 이야깃거리가 분산되거나 손님들이 편을 갈라 이야기를 나누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회에서 무엇을 이야깃거리로 삼는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다도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리는 다케노 조오가 말하기를 "다실에 들어오면 세속적인 잡담은 금한다."고 했다. 다실에서는 돈에 관한 이야기, 남녀 관계 이야기, 정치에 관한 이야기들은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이 세 가지를 빼고 나면 할 이야기가 무엇이 있겠는가마는, 예술에 관한 이야기나 차에 대한 이야기를 이상적인 이야깃거리로 삼았으니 다실을 통해서 풍류를 즐겨야 한다고 했다.
다실에는 반드시 족자를 걸거나 꽃꽂이 장식을 해 둔다. 다실은 차를 마시는 공간이자 예술 감상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도회지 한가운데 있는 다실의 경우, 다실을 나서면 곧 번잡한 도회지 한가운데라고 해도, 다실 안에서는 깊은 산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곧 다실의 공간은 '저자 거리 가운데에 있는 산속 집' 같은 분위기로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실은 일상생활과 예술 세계를 연결짓는 완충 지대 구실을 한다. 다실에 들어감으로써 번잡한 일상 생활로부터 벗어나서, 정신적으로 해방된 예술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3)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센노 리큐는 16세기 무렵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지던 차 마시는 풍습을 다듬고 체계화해서 다도의 경지를 개척한 사람으로 '다성'이라고 일컬어진다. 그이는 다실을 만드는 법, 다도구를 만드는 법, 다도구를 배치하는 법, 차를 대접하는 법들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이를 <남방록>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그 책의 들머리에 실려 있는 한 일화에는 다도에 임하는 마음가짐과 미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센노 리큐의 제자가 스승에게, 다회를 열 때 주의해야 할 점과 스승이 여는 다회의 비결을 물었다. 센노 리큐는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다회를 여는 데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은 없다. 그저 차를 마시는 자리는 여름에는 서늘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야 좋다. 숯불의 세기는 물이 끓을 정도면 좋고, 찻물은 마시기 좋을 정도로 따뜻하면 좋다." 무언가 충격적인 말씀을 기대했던 제자는 너무나도 평범한 대답에 성이 안 차서 볼멘소리를 했다. "그 정도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입니다." 이에 스승은 다시 말했다. "네 말이 옳다. 그러나 그런 다회를 진행하기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야. 자네가 내게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게. 나야말로 진정 그런 다회에 참석해 보고 싶네."
좋은 다회란 지극히 자연스럽게 소박한 공간에서 평온한 마음으로 차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도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일 같지만, 정작 이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는 뜻이다.
다실에서는 찻물을 끓이기 위해 불을 피우는데, 계절에 따라 붙박이식 화덕과 이동식 풍로를 구별하여 쓴다. 화덕은 찻물을 끓일 뿐 아니라 난방의 구실을 겸하기 때문에 겨울 동안에만 쓰고, 풍로는 화덕과는 달리 가마솥에만 열을 집중시킬 수 있어서 방안 전체의 온도를 높이지는 않기 때문에 여름에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찻잔이나 꽃꽂이나 벽에 거는 족자를 선택할 때도 계절에 맞추어야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의 실용성과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연장되어 조화를 이루는 곳에 다도의 이상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일본 다도의 기본 규율인 '사규'의 밑바탕이 되는 귀중한 정신이기도 하다.
4) 기본이 되는 네 가지 규율
사규란 네 가지의 규율, 곧 지켜야 할 네 가지의 기본 규율을 말한다. 불교의 선종에서는 승려들의 생활양식이 '화', '경', '청', '적'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센노 리큐는 바람직한 다실의 분위기, 곧 다도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도 이 네 가지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화'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며, 나아가 불심에 의하여 서로가 하나로 잘 어우러지는 상태를 말한다. 다실에 모인 주인과 손님이 각기 개성을 발휘하는 독립, 독보적인 존재이면서도, 모두 함께 부처의 성정으로 돌아감으로써 서로 하나가 되는 상태가 바로 화이다. 곧 각자가 저마다 개성을 지닌 사람임과 동시에 모두가 공통적으로 불심을 지니고 있음으로써 하나가 되는 상태의 정신을 말한다.
'경'이란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일방적으로 윗사람을 섬기라는 말이 아니다. 주인이나 손님 모두가 존엄한 인격체임을 서로 인정할 때 저절로 우러나오는 상호 존중의 마음가짐을 말한다. 늘 서로 합장하는 자세로 서로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다도에 임하라는 것이다.
'청'은 감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깨끗한 상태로 임하라는 것을 말한다. 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욕심을 떨쳐 버림으로써 참된 자유로움을 얻어, 청정무구한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경지를 말한다. 이 청은 정신세계의 청정을 말할 뿐만 아니라 다실과 다도구를 청결하게 다루는 일과도 통하는 정신이다.
'적'은 조용한 상태, 곧 다실에서는 정적을 유지하라는 뜻이지만, 다도에서는 공간적인 정적을 뛰어넘어 주위 환경에 동요되지 않는 정신적 정적 상태의 심경을 말한다. 이는 나아가, 불교적인 의미의 '원적', 곧 '열반' 또는 '대조화'의 경지와도 통한다.
이와 같은 다도의 사규, 곧 '화', '경', '청', '적'은 주인과 손님이 다실에 모여 진행하는 다회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이상적인 경지이다. 다도는 다실과 다도구라는 예술품으로서의 물질세계와 더불어 구도의 잣대라 할 '화', '경', '청', '적'이라는 정신세계를 지닌다. 이 두 가지의 세계가 많은 일본 사람들을 다도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의 근원이다.
7. 한일 다도 비교
1) 한국 다문화의 특징
인류는 차를 애초에 식용할 수 있는 식물이자 병을 낫게 하는 약으로 썼다. 그러나 싫증나지 않는 좋은 맛과 각성효과, 생산의 용이함 등으로 기호 음료로 발전하면서 음다(?茶)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음다 문화"는 차나무와 물과 다구와 사람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물질적 정신적 성과이다. 따라서 한 지역에 사는 민족의 오랜 음다문화는 그 민족의 생활관습과 민족적 특성, 실미적 능력, 정신적 가치체계 등 크게 변하지 않는 내면적 바탕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의 외적 현상은 인접문화나 정치적 상황, 경제와 사회현상 등의 지배를 받아, 포용. 전이. 창조를 거쳐 변하게 되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1400년 이상 이어져온 한국의 다문화는 부분적으로는 변화하면서 나무의 뿌리나 줄기와 같은 민족문화적 특성과 철학을 지녔으므로 다가올 시대에는 보다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다. 한국 다문화는 다례. 다도철학. 음다풍속. 다구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 의식다례의 발달
한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의식다례가 발달하였다. 평상다례와 구분되는 의식다례는 산신. 조상신. 가신. 누에신 등에게 차를 끓여 올리는 헌공다례와, 살아 있는 사람에게 격식과 예를 갖춘 행사로서 차를 드리는 진다의례로 나뉜다.
차는 사람이 몹시 좋아하며 몸에 유익하면서 정신을 맑게 하는 각성효능이 있으므로 귀중한 음료였다. 따라서 사람이나 신을 대하여 경건하고 기쁜 마음을 나타내는 최상의 대접으로 차를 썼다. 그리고 차의 각성효과는 신과 인간과 교감이 이루어지게 하고, 신에게 헌공한 차는 다시 인간이 마심으로써 뜻을 같이한다는 유대의식도 생기게 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인간의 염원이 신에게 전달되고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간단한 제사에는 차를 제일 중요한 제물로 여겨 다례를 올렸다.
조상신 등의 혼령에게 차를 올린 최초의 사서기록은 661년에 가야국 시조인 수로왕에게 차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으며, 고려의 사찰에서는 승려나 불자의 횬령에게 차를 올린 기록들이 있다.
조선시대에 왕실과 귀족층에서는 간단한 제사에서 차를 올렸는데 낮에 지내는 제사를 "주다례"라고 했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지내는 제사를 "별다례"라고 하였다. 이러한 다례는 외국에는 없는 이름이다. 조선 말엽에는 서민층도 "주자가례"를 본 따 제사다례라는 독특한 문화가 생겨났고 기제사에 차를 쓰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산 사람에게 차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한 경우도 많았다. 팔관회나 정월 초하루의 조회, 조정의 큰 잔치, 중형(重刑)을 줄 때 등에 왕과 신하가 의식 진행절차에 따라 정중히 차를 마셨으며,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의례, 그리고 왕실의 행사로 태후나 왕자의 책봉, 왕태자 생일 축하 등에도 격식을 갖추어 진다의례(차를 들고 가서 드리는 의식)를 행하였다. 근세에는 회갑연때에 부모에게 의식을 갖추어 차를 오리는 다례도 행하여졌다.
2) 수양다도의 발달
한국은 중국과 달리 마시는 물이 맑고 좋으므로 단순한 마실거리로 차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손님 접대시에 술이나 대용차도 흔히 사용되었다. 그런데 차의 중요한 특성인 각성효과와, 차사에서 세밀함과 정성이 있으면 차의 맛이 크게 다르다는 점은 항상 공부하며 깊게 사유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잡념을 없애며 수양하게 하는 음료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즉, 다사와 음다는 유가, 불가, 도가의 도에 이르는 길의 안내자인 동시에, 도에 도달한 경지의 마음과 정신상태가 되는 것이다.
음다가 수양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는 앞선 기록은 설총이 "차와 술은 정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내용과, 최치원이 차를 참선하는 노인이나 도가의 신선들이 좋아하는 선물로 인식한 내용과 함께, 자신은 차를 얻었으므로 근심을 잊게 되었다는 글에서 볼 수 있다.
수양다도를 중시한 대표적 다인으로 한국의 다도사상을 최초로 확립한 사람은 이색이다. 그는 차를 손수 끓여 마시는 일을 성의. 정심. 수신하는 일로 여기는 군자수신의 다도관을 가졌다. 즉 다사는 유학의 달도를 위한 실천적 공부방법이었던 것이다. 또한 초의 장의순은 다사의 포법은 중도사상의 공부라고 하였고, 추사 김정희는 차를 끓여 마시는 것이 도의 본체를 터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불가에서는 이웃나라와 마찬가지로 다도는 선과 같다는 인식이 일찍부터 있어져왔는데 이러한 다선일여는 승려뿐 아니라 선비들도 마찬가지여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한 잔의 차는 바로 참선의 시작", "차의 맛은 선의 맛", 혹은 "명선"이라는 글을 쓰게되었다. 또한 차는 부처라고 했으며, 7세기 보천의 불공다례에서 알 수 있듯이 차를 마시면 깨우쳐 오도하게 되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여겼음을 사서나 시문,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주의 "끽다거(차 한 잔 마시고 가게)"라는 의미로 흔히 쓰였고 승려들은 평소의 다생활도 마음을 청정하게 닦는 수행으로 여겼다.
도가에서도 차를 마시면 몸과 마음이 수양되어 득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도가의 도인을 신선이라 하는데, 한국 신선사상의 근원은 중국 도가와는 별개로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신선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조선 시대에 와서 독특한 한국단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 도가적 다도사상은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다.
차를 끓여 마시면 심재. 전일. 좌망하여 도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즉 귀중한 차를 정성들여 끓이는 일은 도를 닦는 과정이며, 차를 마신 후에는 득도한 뒤와 같이 자유롭고 조화로우며 자신과 사물을 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규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Teaism and Taoism are same"이라고 말했다.
음다를 수양방법으로 여긴 것은 선비나 승려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차는 외로움을 달래고 마음을 다스려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여겼고, 나아가 도를 깨칠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도 다생활이 마음을 수양하고 정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점이 중시되어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명상 다례법을 수련하기도 한다.
▣ 독창적 다구의 발달
한국의 다구는 중국다구의 영향도 받았으나 대체로 매우 독창적인인 것이었다. 의식다례가 유난히 발달한 한국은 다구도 제사 때나 예의를 갖출 때 쓰는 것이 발달하여 민족문화적 특성을 지녔고 일찍부터 야외용 다구가 발달하였다. 산이나 들의 천신, 용신, 그리고 옥외부처 등에게 차를 바쳤고 선비들은 물가나 산 속에서 즐겨 차를 끓여 마시는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다도를 예술문화로서 즐기는 계층이 귀족이나 백성들보다는 문인들이므로 심미적 기준도 이 땅에 사는 선비들의 예술적 감각과 사상에 기초하여 그 차원이 무척 높았다.
▣ 다조와 상보
한국의 다구는 온갖 다구를 올려놓고 찻일을 하는 넓은 탁자의 종류로서 조리대에 해당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인의 음다풍속을 보면, 붉은색의 다조를 놓고 그 위에 온갖 다구를 놓은 후 붉은 색의 비단상보를 덮는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큰 다조가 사랑방이나 마당 혹은 처마 밑에 놓여 있는 것을 차 끓이는 풍속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평평한 큰 다조에 화로와 퇴수기를 제외한 온갖 다구를 올려놓고 차를 끓이고 있다. 때로는 다조가 다과상을 겸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조 위에서는 물을 다루는 일을 하므로 천을 깔아 일하기 편하게 하며, 상보를 덮어둔 오늘날의 다조상보는 고려의 전통에 따라 역시 삿된 액을 쫓아내는 붉은 색을 쓴다.
▣ 석지조와 다구함
신라의 네 화랑 선인인 사선이 경포대와 한송경에서 석지조라는 돌못화덕을 사용하여 천신께 차를 끓여 바쳤다. 석지조는 큰 돌덩이 하나에 바람구멍이 있는 풍로와 물을 담는 작은 못이 함께 파져서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한국만의 독특한 다구이다.
또한 승려화랑인 충담은 남산의 부처에게 차를 끓여 올렸는데, 이때 다구를 담아 짊어졌던 앵통이 있었다. 충담은 육우와 동시대인이나 다구는 사뭇 다르다고 할수 있다.
▣ 찻그릇
한국은 의식다례용 찻잔이 발달하였는데, 그 용량이 매우 크거나 굽이 무척 높은 찻잔이 많이 쓰여졌다. 그리고 "茶"字를 써 놓은 신라. 고려. 조선의 오래된 다기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데 제사에 쓰는 다병이나 신이나 부처에게 올리는 찻잔에 "茶"字를 새긴 것은 일반 그릇과 구별하여 예의바르고 귀중하게 다루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반 음다용 잔은 1인용 잔과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마시는 큰 잔이 있다. 문사다도가 성했던 고려 말렵에는 1인용 찻잔의 안쪽에 학이나 그름 모양의 백색상감이 새겨져 있는 잔들이 많았는데, 이는 탁한 유차보다 맑은 탕차를 선호함으로 인해, 다탕을 담았을 때 그 형상이 비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귓대다완이 있어 말차를 솔로 점다할 때나 탕차를 삼베에 걸러 각잔에 따를 때 썼다. 오늘날의 한국다기는 실용성과 손바닥의 촉감을 중시하는 편이다.
▣ 다술과 공대와 다선
고려시대에는 말차를 끓일 때 거품을 일으키기 위해 여러 가지 모양의 고리다술을 써서 휘저었다. 또한 단차를 잘게 부수기 위하여 대나무 막대로 된 공대를 썼으며 17세기에는 말차를 휘젓는 대나무 다선을 세계 최초로 독창적으로 만들었다.
▣ 세밀하고 자연스러운 행다례
한국 다례의 특징은 세밀함과 자연스러움에 있다.
차를 끓이는 주인은 차의 본래 성품을 잘 드러내기 위해 세밀하고 정성을 들여서 끓이는 유가적 공부자세를 지니게 된다. 동시에 주인과 손님의 전체 행동은 군더더기가 없고 인간 본위이며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워, 차와 주인과 손님은 하나의 자연이 되는 도가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위적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마음이 자유롭고 편안한 자연스러움이며 차를 끓일 때는 차가 주인공이고, 차를 마실 때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며, 차를 마신 후에는 정신이 주인공이 된다.
▣ 차마시는법
차는 오감으로 마신다고 한다. 귀로는 찻물을 끓이는 소리를, 코로는 향기를, 눈으로는 다구와 차의 색을, 입으로는 차의 맛을, 손으로는 찻잔의 감촉을 즐기기 때문이다.
차는 두세 번 나누어 마시되, 입안에 차를 머금고 굴리듯이 마시면 차가 입안에 고루 배여서 차가 지니고 있는 탄닌의 살균작용과 불소성분으로 인해 치아에 좋고, 풍미를 한층 오래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잎차를 마실 때는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오른손으로 잔을 잡고 왼손으로는 잔을 받치며 소리가 나지 않게 마셔야 한다. 차를 다 마시고 나면 찻잔에 남은 향기를 음미한 후 잔을 내려놓거나 잠시 기다렸다가 입안에 남은 차의 뒷맛을 차를 마시는 일과 관련된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감상하는 것도 차의 풍미를 즐기는 한 방법이다.
7. 한일 다도 비교
풍류도니 풍류니 하는 것들은 우리들 한국인의 실생활 속에도 많이 젖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은 풍류를 아는 사람이다라고 표현한다든지, 옛 선비들의 풍류가 어떻고 하는 식의 말들이 모두 그러하다.
옛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시대 화랑들의 신선도 내지는 그들의 풍류가 또한 그러하였으며, 고려시대 양이정의 지붕을 청자기와로 덮은 채 유유자적하던 고려의 귀족들의 풍류는 또한 그 나름대로의 고급스런 풍류였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또한 많은 시인묵객들은 술과 차와 더불어 풍류를 논하였으며, 단원 김홍도의 형식과 당시의 이른바 체통을 벗어난 제반 형식의 특이한 화풍 또한 그 나름대로의 풍류의 한 산물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우리들의 선조는 풍류와 더불어 유유자적한 그네들의 삶을 살아 왔으며 이러한 풍류 속의 하나의 유희 내지는 하나의 더불어 사귐의 한 방편으로 차와 술은 없어서는 안될 하나의 필수적인 기호였으며 음료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찾아오거나 야외로 놀이를 나가거나 필수적으로 술과 차는 동반하였음에도 그것은 풍류의 목적이 아닌 수단이요 방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술과 차는 그들이 읊은 시문학의 세계에서 잘 나타나듯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자연 속에서 느껴지는 대로의 차를 즐겼고, 그것이 굳이 표현한다면 한국의 다도였던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일본의 다도 우리나라와 당 시대로부터 이어지던 일본의 형식화된 다도형성기 이전까지는 거의 같은 괘도를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일본의 다성이라 일컬어지는 센노리큐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 우리의 오랜 중앙집권 기간인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는 시기 굳이 비교하자면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거의 500여년간 - 조총과 일본도가 난무하는 군웅할거시대 다시 말해 전국시대라는 전란기 속에서 차를 접하였다. 그리고 에도시대에 도쿠가와 바쿠후 시대 250여년간은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가긴 하였으나, 봉건체제라는 특수성상 크고 작은 영주들간의 분쟁은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무사들의 계급문화는 우리와 큰 분기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우리나라의 문사들이 들이며 산이며 자연이 있는 곳이면 발걸음 닿는 대로 움직여 편안하게 술자리를 열거나 야다회를 열어 술을 마시고, 차를 만끽하며 풍류를 즐기며 시를 읊음에 있어 자연스러움을 만끽하였지만, 일본의 무사들은 엄격하게 통제되고 선별된 인원(다회참가자가 믿을 수 있는 손님들만 초청하는 초청장의 발부)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차를 목적으로 한 장소(무기를 휴대하지 못하고 장검을 가지고는 출입할 수 없도록 좁은 문을 설치한 다실의 고안 등)에서만이 그나마 마음놓고 차를 즐기며 풍류를 논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다도는 당초부터 차가 목적이었고 다회를 통한 풍류를 논한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풍류속의 차와는 같다고 볼 수 있는 면이 있으면서도 아주 다른 발전과정을 거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풍류 속의 차를 즐기는 것과 차를 목적으로 모여 풍류를 즐기는 양국의 다도문화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차만을 목적으로 모이게 되는 일본의 다도가 한국의 다도에 비하여 형식화되고, 차 속에서 풍류를 논하기 위한 각 종 다도구의 고안과 많은 다서, 그리고 많은 다시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다도에서 많은 도자기 명품에 대한 감상문들이 에도시대 활동했던 많은 다인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바로 이와 같이 차를 목적으로 모인 다회에서 차만이 주제가 됨에 따라 그 다회의 시간동안 모든 대화의 주제는 차를 둘러싼 다기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가운데 차의 유희는 많은 다시와 예법 등 형식화된 하나의 사회예법 (엄밀히 말해 무사귀족계급들의 다도문화)으로 계승 발전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일간의 다도비교는 바로 이러한 밑바탕 위에 양자를 조명해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커피 한 잔을 마시더라도 경망스럽다거나 예의가 아니라는 식, 경양식 집에 가더라도 포크가 어떻고 식칼은 어느 손으로 하듯이 차도 하나의 음료이며 역사적 전통을 지닌 기호품이기에 모여 차를 마시는 사람들간에 당연 예법은 있어야 될 것이며, 또 친근한 친구들이나 나 자신이 즐기는 나만의 우리들만의 풍류 속에서 차를 마실 때, 굳이 다완이라는 이름의 고급도자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어느 분의 말씀처럼 보온병에 가득 차를 담아 산 정상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쏘이면서 자신만의 풍류를 즐기며 보온병 뚜껑에 차를 마시는 그 멋은 가히 현대 풍류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8. 외국의 다도
땔감, 쌀, 기름, 소금, 간장, 식초와 차가 생활필수품이라 할 정도로 차는 대만사람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주요 음료이다. 주로 반발효차인 오룡차, 포종차를 즐겨마시고 자스민차를 들기도 한다. 식당이나 호텔에는 주로 자스민차를 많이 내놓고, 가정에서 또는 차모임에서는 고급의 고산 운무차를 즐겨마신다. 거리곳곳에 전통다관이 있어 손님을 만날 때 또는 여가가 있을 때 다 관에 와서 차의 향기와 맛을 음미한다.
중국은 한족을 포함하여 54개의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이 중 한족은 전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어 각 지역마다 고유의 음다 풍속과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다. 지역에 따라 주로 마시는 차가 달라 양자강 이남 지역은 녹차나 홍차를 마시고, 산동성 이북의 북방인은 자스민차, 복건성과 광동성은 우롱차, 티벳등의 서쪽지역은 떡차나 벽돌차를 즐겨 마시고 있다. 그러나 한족들은 차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소수 민족과 같이 차에다 버터나 소금과 같은 재료를 넣지 않고 차만 우려 마시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음차 방법에 있어서도 차와 물의 등급에 대해 세분화되어 있으며 우롱차의 경우에는 의홍에서 생산되는 소형의 자사다구를 사용하여 차를 우려 마시며, 광동지역에서는 얌차라 하여 차를 마시면서 여러 가지 만두나 튀김 요리를 먹는 음다풍습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들 광동 요리는 기름기가 많기 때문에 차를 마시지 않고는 요리를 많이 먹을 수가 없기에 먼저 무슨 차를 마실 것인지 주문을 받은 뒤, 차를 마시면서 종업원이 끌고 다니는 요리 운반 차에서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으면 된다. 일반적으로 가격이 비싼 편이 아니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다관이나 호텔에서 얌차를 먹으로 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중국 신강의 위구르족은 같은 민족이라 할지라도 음차 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남쪽지역에서는 향차를 주로 마시고 밀크티를 마시지 않으나 북쪽지역은 이와 반대로 밀크티를 마시고 향차를 마시지 않는다. 위그르족의 밀크티는 몽고족의 밀크티와 비슷한데, 먼저 벽돌차를 파쇄한 뒤 차 덩어리를 철제 주전자나 알루미늄 주전자에 넣고 물을 붓고 끓인다. 차가 우러나면 신선한 우유 혹은 양젓을 넣고 다시 소량의 소금을 넣은 뒤 더 끓인다. 몇분 뒤에 찻잔에 따라 식사와 함께 차를 마신다. 향차는 남쪽지역에서 구리주전자를 사용하여 차를 끓이거나 구리주전자가 없을 때는 목이 긴 도자기를 이용하여, 먼저 차와 함께 후추나 계피, 정향 등의 향료가루를 주전자에 넣고 서서히 물을 부은 뒤 불 위에 얹어 4-5분 끓인다. 차 찌꺼기나 향료가루가 찻잔에 함께 나오지 않도록 주전자에 거름 망을 붙여 걸러서 마시며 보통 아침, 점심, 저녁 식사와 더불어 차를 마신다. 운남 지방은 차나무의 원산지로서 여러 소수 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운남성에는 8개의 민족 자치주가 있으며 15개의 자치현이 있다. 이들 민족 중 한족의 음차 방법이외에 염파차, 수유차, 고차, 소차, 뢰향차, 유차, 용호투차 등 비교적 특이한 음용 방법이 많이 있다. 염파차는 먼저 차 덩어리를 부수어 작은 토기 그릇에 넣은 뒤 토관을 불 위에 얹어 차잎이 '퍽퍽'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구운 다음, 토기관에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붓고 다시 5분 정도 더 끓인다. 소금 덩어리를 차탕 중에 넣고 끓여서 짠맛이 나면 화로에서 꺼내어 찻잔에 따른 뒤 개인의 기호에 따라 끓인 물을 더 부어서 마시면 된다. 염파차를 마실 때는 보통 옥수수떡을 함께 먹는 습관이 있다.
티벳 지역의 음다 풍습은 밀크티와 수유차(수油茶), 그리고 차 그대로 우려 마시는 방법이 있으며, 이중 수유차(수油茶)는 티벳 지방의 독특한 음다 방법으로 당나라의 문성공주(文成公主)가 티벳 왕에게 시집온 후 차 마시기를 제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수유차(수油茶)를 만들어 대신들에게 제공하여 점차 손님 접대의 예절로 자리잡게 되었다.
몽고는 유목 민족으로 생활 습관상 하루 3번의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세 번의 차를 마시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뒤 가족들과 함께 한번의 식사를 하는 삼차일반의 습관이 있다. 만약 저녁에 소나 양고기를 먹을 경우에도 식사 후 다시 차를 마시고 잠을 자게 된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차 소비량은 매우 많은 편이어서 1인당 연간 약 9kg의 차를 소비하고 있다. 몽고족이 하루 세 번의 차와 한끼의 식사로 어떻게 생활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하겠지만 이들은 차를 마실 때 볶은 쌀이나 치즈, 밀가루, 튀김 등과 같은 밀크티를 마시기 때문이다.
영국인의 음다는 17세기에 시작되는데 처음에는 궁중의 귀족층에서 시작되어 점차 서민에게 까지 널리 확대되었다. 18세기 중엽, 영국인들의 아침 식사는 매우 풍성한데 비해 점심은 비교적 간단한 편이었고,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점심과 저녁 사이의 시간이 비교적 긴 편이었다. 따라서 베드포드공작 부인인 안나가 고안해 낸 방법은 오후 5시에 여러 사람을 초청하여 차와 과자 등을 제공하면 배고픈 것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찬성하게 되었고, 점차 귀부인들이 경쟁적으로 차회를 개최함에 따라 점차 일종의 예의로서 자리잡게 되었고, 커피 하우스나 레스토랑, 여관, 극장, 티 하우스 등에서도 오후 차를 제공하게 되었다.
아이스 티의 유래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에서 개최된 국제박람회에서 리차드라는 영국의 차 업자가 차의 선전을 위해 박람회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마침 7월경이어서 무척 더운 날씨였다. '차는 건강에 좋다' 라는 표시판을 걸고 뜨거운 홍차를 끓여 시음 활동을 하였으나 무더운 여름날씨 때문에 누구도 차에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홍차에 얼음을 넣고 '차가운 홍차'라고 외치면서 사람들에게 권유하게 되자 더운 여름 날씨로 목이 마른 손님들이 대거 모여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리챠드는 영국인이었지만 미국에서 아이스 티를 만든 이래 미국 과일의 대표격인 레몬을 차에 넣어 상쾌함을 강화시킨 아이스 레몬티에 의해 미국 레몬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모로코는 아프리카 사막지대의 기후 영향으로 비가 적으며 소나 양고기가 주식이기 때문에 과일이나 채소의 섭취가 부족되기 쉬워 차를 많이 마시고 있다. 이들이 마시는 차는 녹차 위주로서 중국 절강성에서 생산된 주차(誅茶)나 미(眉茶)차를 주로 마시며 1인당 연간 소비량은 1kg을 넘어서고 있다. 모로코의 음차 역사는 200년이 넘으며 이슬람교를 믿는 관계로 술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 차를 많이 마시고 있다.
Ⅲ. 結論
이처럼 일본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다도문화에 대해서 여러 면으로 살펴보았다. 일본에게 있어서 차라는 것은 단순히 목마름을 축이고 그 맛을 음미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여 차를 마시는 순서와 접대 방식, 다도구의 제작양식 등을 일정하고 그 단계들에 있어서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였다. 즉, 차를 마심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다도문화 속에서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깊은 뿌리를 내리도록 하였고, 그들만의 가치관과 깊은 뿌리의 사고관념 등이 다도 문화에 고스란히 베어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다도문화는 차 하나에 그들의 정신세계를 담아내고 다실과 다도구에 그들의 물질세계의 관념을 담아내며, 다회의 과정 속에 일본인들이 생활양식과 가치관 등을 담아낸 커다란 전통문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오랜 역사 속에서 다도의 도입과 쇠퇴의 과정, 발전의 시기들을 거쳐 올 수 있었던 것이고 일본인들의 사상 속에 깊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일본의 다도문화는 그들에게 있어 빠질 수 없는 그들만의 전통문화인 것이며, 그들의 사고관과 생활문화가 고스란히 베어있는 문화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다도문화가 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일본의 전통문화 중 하나인 다도문화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이를 그저 우리나라의 다도문화와 같이 가볍게 여겨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었으나, 일본의 다도문화는 우리나라의 다도문화와 다르게 좀 더 넓고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넓은 의미로 보아 일본의 다도문화는 그들에게 있어 일본인들의 정신활동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