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차와 기타
[스크랩] <차로읽는 동서문화>(9)日 리큐의 茶道미학
청원1
2016. 10. 23. 22:31
<차로읽는 동서문화>(9)日 리큐의 茶道미학
이광주 기자
일본의 독특한 다경(茶境)을 이룬 자노유(ちゃのゆ茶湯)와 그것이 추구한 와비(わび)차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주광(珠光)소구에 의해 창시되고 센 리큐(千利休1522~91)에 이르러 큰 결실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선종에 뿌리를 두고 그로부터 나왔다. 주광소구 모두가 삭발한 선종이요 선사의 행실에 전념했다. 자노유의 진미를 초암(草庵)에 찾은 리큐의 다도 또한 다선일미를 지향했다. 그러나 일본의 차문화는 처음부터 지배계층의 사교적성격이 짙었으며 최고 권력자에 줄곧 쫓아다닌 리큐의 다도 또한 그의 생애만큼 굴절이 많았다고 할 것이다.
茶室 모양새까지 규정 '형식미' 극치
리큐는 자노유란 오직 물로 차를 달여 마시는 것으로 알지어다라고 읊었다. 사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있는대로의 다기로 가볍게 차를 달임을 다례의 진수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의 제자인 종인(宗仁)은 당시 최고의 다서(茶書)라 할 저술 산상종이기(山上宗二記) 곳곳에서 스승의 명인다움을 칭송하면서 리큐는 명인이었기에 산을 언덕, 서(西)를 동(東)으로 자노유의 법을 깨고 제멋대로 자유로워도 재미있어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리큐는 과연 선풍의 와비차에 그토록 투철했을까.
산상종이기는 당물(唐物)소지, 훌륭한 감정가이며 행다에도 뛰어난, 이 세가지를 두루 갖추고 한길에 뜻이 깊음(一道志深)을 명인이라 하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인의 자격으로서 먼저 훌륭한 감정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에 주목하자.
훌륭한 감정가란 다기는 물론 그밖의 모든 좋은 도구에 대한 올바른 눈을 지닌 감식가를 말한다. 좋은 도구란 당송나라의 명품뿐만 아니라 역대 명인들이 애호한 도구도 포함한다. 좋은 감정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좋은 도구를 지니고 조석으로 가까이 해야 한다. 그리하여 훌륭한 다인에게는 명품을 소지하는 것이 요구됐다. 리큐는 이미 23세의 젊은 나이에 그가 애장(愛藏)한 명품 주광 다완으로 행다하여 또 한번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다경과 함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그가 지닌 명품 또한 수를 더하였다.
茶人의 자격 '훌륭한 감정' 첫손!
선배 다장(茶匠)들을 제치고 최고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98)의 다두(茶頭)가 된 리큐의 행다의 뛰어남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한 분야의 기예에 뛰어난 자에 대해 천하제일(天下一)의 칭호가 정해졌는데, 리큐 시대에는 자노유모노(茶湯者)스키모노(數寄者)와비스키(侘數寄)명인 등 엄연한 서열이 있었다. 리큐가 당대 다회의 명인 천하 제일의 종장(宗匠)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렸음은 물론이다.
한편 산상종이기는 다인은 불법(佛法)가도(歌道)노(のう能)난무(亂舞)도검(刀劍)의 구별없이 모든 예도(藝道)에 관해 그 명인을 본받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며, 다회의 스승이 될 각오로 몸을 바쳐 오로지 소양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광소구리큐 모두 선인들을 본받으며 차사에 30년 헌신하였다. 15세 때부터 지녀온 일도지심의 경탄할 마음가짐이다.
이제 리큐 다도의 본질을 이루는 그의 독특한 심미주의를 리큐형(利休形)이라고 불리는 자노유를 둘러싼 제반 시설과 도구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먼저 리큐의 미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는 다완(茶碗)에 관해 생각해보자. 다완은 일본에서 오래도록 자기의 대명사였다. 다례와 함께 송나라에서 전해진 천목청자 다완은 다인의 비장품이었으며 주광 이후 와비차가 지향되면서 일본의 다완이 쓰이고 특히 조선 전래의 분청사기가 그 색조형태품격으로 하여 극상으로 귀히 여겨졌다.
오랫동안 탐내온 조선 다완을 자기 소유의 성곽과 바꾸기를 제의한 어느 제후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리큐의 다완 취향은 중국 것에서부터 조선의 다완으로, 그리고 일본풍으로 옮겨졌다. 리큐는 다완의 색깔로는 검은 빛을 띤 녹색을 좋아하였다. 그는 주변에 많은 도공을 두었으며 특히 임진왜란(왜의 장수들은 조선 도자기와 도공 약탈에 열을 올렸다)때 납치한 기와공(工)부부의 자식인 도공으로 하여금 만들게 한 이른바 종역형(宗易形-종역은 리큐의 본명)다완은 그의 미학의 절정을 이룬다고 할 것이다.
조선도공이 빚은 명품 '宗易形 다완'!
다실〓다석(茶席)으로 말하자면 4조반3조2조1조반의 방이 있다. 실내 양식을 살펴보면 천장은 줄 천장이며 방 상좌(도코노마床の間)의 폭은 4척3촌, 깊이는 2척4촌, 기둥은 각(角)기둥이 아닌 통나무요, 벽은 풀을 쓰지 않는 칠한 벽, 출입구는 쪽문이다. 칠한 벽은 농가의 벽을 보고, 쪽문은 어부들의 출입문에서 착상을 했다고 한다.
그 다음 다정(茶庭)은 원래 몇 그루의 나무가 심어진 쓰보노우치(つぼのうち坪內)와 다석에 이르는 좁은 길이다. 리큐는 쓰보노우치에 손 씻을 물을 떠놓는 푼주를 놓고 나무는 한두 그루만 심었다. 다석에 이르는 좁은 길 로지(露地) 또한 다석다정과 더불어 단순한 통로가 아닌 하나의 천지(天地)로 생각되고 의장(意匠)된다. 거기에서는 리큐가 고안한 셋타(雪)라는 신발을 주객 모두가 신었다.
이제 다석 안의 소도구를 들여다보자. 족자는 불가의 말씀인 법어(法語)와 앞선 차 명인들의 글씨를 제일로 여겨 비장의 명품이 쓰였다. 꽃그릇(花器)의 꽃은 단색을 한두 가지(枝)가볍게 꽂는 것이 좋고 화려한 주홍색은 금기였으며 밤 다회에는 꽃을 피하나 흰꽃은 괜찮다고 한다. 차단지향로차솥물주전자차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구 하나하나 빈틈없이 연출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상과 같은 리큐 미학의 완벽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일인들이 즐겨 쓰는 이치고 이치에(一期一會)란 말이 생각난다. 다회마다 인생에 오직 한번의 차사(茶事)라고 명심하여 주객(主客) 모두가 소홀히 하여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이치고 이치에일본 다도의 미학을 잘 표현한 이 말에서 필자는 일본 무사도(武士道)의 검은 미학을 엿본 듯하여 당혹스럽다.
이광주 기자
일본의 독특한 다경(茶境)을 이룬 자노유(ちゃのゆ茶湯)와 그것이 추구한 와비(わび)차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주광(珠光)소구에 의해 창시되고 센 리큐(千利休1522~91)에 이르러 큰 결실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선종에 뿌리를 두고 그로부터 나왔다. 주광소구 모두가 삭발한 선종이요 선사의 행실에 전념했다. 자노유의 진미를 초암(草庵)에 찾은 리큐의 다도 또한 다선일미를 지향했다. 그러나 일본의 차문화는 처음부터 지배계층의 사교적성격이 짙었으며 최고 권력자에 줄곧 쫓아다닌 리큐의 다도 또한 그의 생애만큼 굴절이 많았다고 할 것이다.
茶室 모양새까지 규정 '형식미' 극치
리큐는 자노유란 오직 물로 차를 달여 마시는 것으로 알지어다라고 읊었다. 사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있는대로의 다기로 가볍게 차를 달임을 다례의 진수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의 제자인 종인(宗仁)은 당시 최고의 다서(茶書)라 할 저술 산상종이기(山上宗二記) 곳곳에서 스승의 명인다움을 칭송하면서 리큐는 명인이었기에 산을 언덕, 서(西)를 동(東)으로 자노유의 법을 깨고 제멋대로 자유로워도 재미있어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리큐는 과연 선풍의 와비차에 그토록 투철했을까.
산상종이기는 당물(唐物)소지, 훌륭한 감정가이며 행다에도 뛰어난, 이 세가지를 두루 갖추고 한길에 뜻이 깊음(一道志深)을 명인이라 하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인의 자격으로서 먼저 훌륭한 감정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에 주목하자.
훌륭한 감정가란 다기는 물론 그밖의 모든 좋은 도구에 대한 올바른 눈을 지닌 감식가를 말한다. 좋은 도구란 당송나라의 명품뿐만 아니라 역대 명인들이 애호한 도구도 포함한다. 좋은 감정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좋은 도구를 지니고 조석으로 가까이 해야 한다. 그리하여 훌륭한 다인에게는 명품을 소지하는 것이 요구됐다. 리큐는 이미 23세의 젊은 나이에 그가 애장(愛藏)한 명품 주광 다완으로 행다하여 또 한번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다경과 함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그가 지닌 명품 또한 수를 더하였다.
茶人의 자격 '훌륭한 감정' 첫손!
선배 다장(茶匠)들을 제치고 최고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98)의 다두(茶頭)가 된 리큐의 행다의 뛰어남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한 분야의 기예에 뛰어난 자에 대해 천하제일(天下一)의 칭호가 정해졌는데, 리큐 시대에는 자노유모노(茶湯者)스키모노(數寄者)와비스키(侘數寄)명인 등 엄연한 서열이 있었다. 리큐가 당대 다회의 명인 천하 제일의 종장(宗匠)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렸음은 물론이다.
한편 산상종이기는 다인은 불법(佛法)가도(歌道)노(のう能)난무(亂舞)도검(刀劍)의 구별없이 모든 예도(藝道)에 관해 그 명인을 본받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며, 다회의 스승이 될 각오로 몸을 바쳐 오로지 소양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광소구리큐 모두 선인들을 본받으며 차사에 30년 헌신하였다. 15세 때부터 지녀온 일도지심의 경탄할 마음가짐이다.
이제 리큐 다도의 본질을 이루는 그의 독특한 심미주의를 리큐형(利休形)이라고 불리는 자노유를 둘러싼 제반 시설과 도구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먼저 리큐의 미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는 다완(茶碗)에 관해 생각해보자. 다완은 일본에서 오래도록 자기의 대명사였다. 다례와 함께 송나라에서 전해진 천목청자 다완은 다인의 비장품이었으며 주광 이후 와비차가 지향되면서 일본의 다완이 쓰이고 특히 조선 전래의 분청사기가 그 색조형태품격으로 하여 극상으로 귀히 여겨졌다.
오랫동안 탐내온 조선 다완을 자기 소유의 성곽과 바꾸기를 제의한 어느 제후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리큐의 다완 취향은 중국 것에서부터 조선의 다완으로, 그리고 일본풍으로 옮겨졌다. 리큐는 다완의 색깔로는 검은 빛을 띤 녹색을 좋아하였다. 그는 주변에 많은 도공을 두었으며 특히 임진왜란(왜의 장수들은 조선 도자기와 도공 약탈에 열을 올렸다)때 납치한 기와공(工)부부의 자식인 도공으로 하여금 만들게 한 이른바 종역형(宗易形-종역은 리큐의 본명)다완은 그의 미학의 절정을 이룬다고 할 것이다.
조선도공이 빚은 명품 '宗易形 다완'!
다실〓다석(茶席)으로 말하자면 4조반3조2조1조반의 방이 있다. 실내 양식을 살펴보면 천장은 줄 천장이며 방 상좌(도코노마床の間)의 폭은 4척3촌, 깊이는 2척4촌, 기둥은 각(角)기둥이 아닌 통나무요, 벽은 풀을 쓰지 않는 칠한 벽, 출입구는 쪽문이다. 칠한 벽은 농가의 벽을 보고, 쪽문은 어부들의 출입문에서 착상을 했다고 한다.
그 다음 다정(茶庭)은 원래 몇 그루의 나무가 심어진 쓰보노우치(つぼのうち坪內)와 다석에 이르는 좁은 길이다. 리큐는 쓰보노우치에 손 씻을 물을 떠놓는 푼주를 놓고 나무는 한두 그루만 심었다. 다석에 이르는 좁은 길 로지(露地) 또한 다석다정과 더불어 단순한 통로가 아닌 하나의 천지(天地)로 생각되고 의장(意匠)된다. 거기에서는 리큐가 고안한 셋타(雪)라는 신발을 주객 모두가 신었다.
이제 다석 안의 소도구를 들여다보자. 족자는 불가의 말씀인 법어(法語)와 앞선 차 명인들의 글씨를 제일로 여겨 비장의 명품이 쓰였다. 꽃그릇(花器)의 꽃은 단색을 한두 가지(枝)가볍게 꽂는 것이 좋고 화려한 주홍색은 금기였으며 밤 다회에는 꽃을 피하나 흰꽃은 괜찮다고 한다. 차단지향로차솥물주전자차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구 하나하나 빈틈없이 연출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상과 같은 리큐 미학의 완벽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일인들이 즐겨 쓰는 이치고 이치에(一期一會)란 말이 생각난다. 다회마다 인생에 오직 한번의 차사(茶事)라고 명심하여 주객(主客) 모두가 소홀히 하여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이치고 이치에일본 다도의 미학을 잘 표현한 이 말에서 필자는 일본 무사도(武士道)의 검은 미학을 엿본 듯하여 당혹스럽다.
출처 : 찻잔속에 담는 풍경
글쓴이 : 안티아조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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