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108)천년고찰순례기

[스크랩] 청량사 / 2월 27일 제22차(64)

청원1 2011. 8. 8. 06:23

 

 

 

 

    

    늦겨울비가 뿌리는 가운데 제22차 고찰순례가 진행되었다. 오늘은 청량사에서

     사시불공과 108배, 점심공양을 하기로 되어있다.

     6시 10분경 출발과 동시에 불교TV에서 제작한 해인사 새벽예불 DVD와 전문포교사인

     수행심보살의 목탁에 따라 예불을 올리고 천수경을 봉독하였다.

     이어서 불교TV의 <한국의 명찰 등운산 고운사>, <내가 가고 싶은 절 청량산 청량사>

     DVD를 시청하며 오전 9시 30분경 청량사 일주문에 도착하니 공양물을 운송하기 위해

     청량사에서 봉고차를 일주문 있는데 까지 보내주어 공양물을 싣고 몇사람이 동승하여

     청량사로 올라갔다.

     공양물은 이영숙 보살님이 떡공양, 김정미 보살님이 꽃공양을 올렸다.

     불기2553(2009)년 영축총림 통도사 화엄산림대법회 13번째 성오스님(전 백양사 주지)

     현수품-2(오전법문), 현수품-2(오후법문) DVD를 버스내에서 시청할 예정이다.

 

     일주문

 

      거대하고, 빽빽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열두 봉우리가 나그네의 눈길을 잡는다.

     그 연화봉 기슭 한 가운데 연꽃처럼 둘러쳐진

     꽃술 자리에 자리 잡은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6)에 의해 중창된 천년 고찰이다.


     창건당시 승당등 33개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던

     대사찰로 봉우리마다 자리잡은 암자 에서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메웠다고 한다.

     또한 자연경관이 수려한 청량산에는 한때는 신라의 고찰인

     연대사(蓮臺寺)와 망선암 (望仙菴)등 대소 27개소의 암 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 절은

     피폐하게 되어 현재는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이 남아있다.


     청량사의 법당인 유리보전은 창건연대가 오래되고 짜임새 있는

     건축물로 인하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청량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은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께서

     입산수도 한곳이라 의상봉이라 불리며, 이곳을 비롯해 보살봉,

     연화봉, 축융봉 등 12개의 암봉이 있고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등 12개의 대와 8개의 굴과 4개의 약수터가 있다.


     청량사에는 불교의 우수한 유적 건물이 많았으나 어느 때인가

     소실 등으로 인하여 거의 없어지고 현재 신라시대 대찰의 모습은

     없지만 망월암 등 33개 암자가 있었던 유지가 있고,문수보살, 지장보살,

     16나한등이 봉안되어 중생의 근기에 맞는 기도처로서

     손색없는 도량의 모습을 띄고 있다. <출처:청량사 홈페이지>

 

 

    안심당 /  사찰내의 전통다원

 

    늦겨울빗속 자욱한 안개사이로 간간이 잔설이 보인다.

     청량사 5층 석탑

     청량사에는 잘 쌓아 올린 석축과 함께
     5층 석탑과 3층 석탑이 절집의 배치에 조화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지현 스님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부처님이 비를 맞고 있을 정도로 청량사는 피폐해져 있었다.
     이 비 맞던 불상 안에서
     <훗날 인연 있는 승려가 제자리에 모시라>는 글귀와 함께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 사리 5과가 나왔다.
     이에 따라 모든 봉우리의 기가 모이는 자리인
     유리보전 앞 사자목에 3층 석탑을 세우고 진신사리를 모셨다.

     하지만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 3층 석탑이 조금씩 허물어지자
     이 탑을 선불장 아래 잔디밭으로 옮겼다가 다시 산신각 옆으로 옮기고,
     1990년 5층 석탑을 유리보전 앞 지금의 자리에 세우고
     이곳에 진신 사리를 모셨다.

     유리보전

     유리보전은 조선 후기 건물로
     연화봉과 반야ㆍ문수봉 아래
     가파른 경사면에 자리잡은 건물이다.
     워낙 경사가 급해 단단한 석축을 쌓아(특히 유리보전 앞 석축은

     붉은 색을 띠고 있어 이채롭다)
     너른 대지를 조성한 후 전각을 세웠다.
     이 유리보전은 청량사의 중심 전각으로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47호로 지정(1974.12월)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전각은
     유래가 흔치 않은 명칭을 지녔다.
     이 건물은 다포계인 것 같으나
     주심포계와 절충한 조선 후기 건물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큰 보 밑에 간주를 세워 후불벽(後佛壁)을 구성해
     다른 건물에서 보기 힘든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전각으로
     즉, 약사여래는 동방의 유리광세계(琉璃光世界)를 주재하는 분으로
     중생의 치병을 서원으로 삼은 분이다.
     중생이 육체적으로 고통받을 때,
     혹은 정신적으로 번뇌에 허덕일 때
     약사여래는 자비로운 손길로 중생의 인기를 받아 왔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찰에 약사전이 들어서 있는 것은
     이러한 약사여래의 신통력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안에는 단아한 모습의 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였다.
     한편 유리보전의 현판(260×60cm)은
     고려 후기의 공민왕(恭愍王)이 직접 쓴 친필이라고 전한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 지방에 피난 온 적이 있었으므로 친필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석조고니불상도 이채로왔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유리보전은 1705년(숙종31)에 중수한 이후 1974년 내외부를 중수했으며
     1989년과 2000년에 보수했다.
     유리보전 앞에는 세 갈래로 자란 노송 한 그루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 자리를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 부르니,
     곧 세 개의 뿔을 가진 소무덤인 셈이다.

     또한 유리보전에는 '10왕전(十王殿)'이 있었는데
     만월암으로 옮겼다가 다시 유리보전으로 옮겨 놓았다.

 

                      <주련>

           
위 주련의 출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신역, 80권본)

            권제13  광명각품 제9(卷第十三 光明覺品第九)에 나오는 게송.


     유리보전에 모셔진 약사여래불문수, 지장보살

    이곳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은 특이하게도 종이를 녹여 만든 귀중한 지불이다.

     

     화분에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이라는 리본이 보입니다. 김정미 보살님이

     올린 꽃공양입니다. 이영숙 보살님이 올린 떡공양은 상단 불공후 신중단에

     옮겨졌습니다.

    

     유리보전에서 사시불공후  전문포교사인 수행심보살님의 집전으로

     '예불대참회문'이 인쇄된 기도포와 절하는 공덕이 인쇄된 기도포를

      좌복에 펴고 禮佛大懺悔文(예불대참회문)에 따라 89분의 부처님 명호를

      칭명하면서 108배를 하였다.

 

     유리보전 앞의 삼각우총과 삼각우송

     삼각우총은 현재
     청량사 유리보전 앞에 위치해 있는데
     사찰에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원효 대사가 청량사 창건을 위해 진력을 쏟고 있을 때
     하루는 사하촌(寺下村)에 내려가게 되었다.
     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논에서
     일을 하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마침 농부가 뿔이 셋이나 달린
     소를 데리고 논을 갈고 있었다.
     하지만 이 뿔 셋 달린 소는 도대체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이에 원효 대사가 농부에게
     이 소를 시주하여 줄 것을 권유했더니
     농부는 흔쾌히 이 뿔 셋 달린 소를 시주했다.
     이에 원효 대사는 소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신기하게도 이 소는 절에 온 후 고분고분해지더니
     청량사를 짓는 데 필요한 재목이며
     여러가지 물건들을 밤낮없이 운반하더니
     준공을 하루 남겨 놓고 생(生)을 마쳤는데
     이 소는 '지장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원효 스님은 이 소를 지금의 삼각우송 자리에 묻었는데
     그곳에서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나
     후세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삼각우송',
     이 소의 무덤을 '삼각우총'이라 불렀다.

    왼쪽부터 선불장, 산신각, 심검당, 요사채

 

     범종각

 

 

      청량사 순례를 마치고 일주문을 나서기 전입니다.

 

 

출처 : 백팔고찰순례단
글쓴이 : 청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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