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파계사 / 12월 26일 제20차(59)
제20차 백팔고찰순례 두 번째로 순례한 팔공산 파계사는 신라시대 804년(애장왕 5)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고, 1605년(선조 38)에 계관스님이 1695년(숙종 21) 현응스님이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신라 애장왕 5년 당시 왕의 사촌인 심지왕사가 이 절을 창건했다. 심지왕사의 아버지는 신라 제41대 헌덕왕이었는데, 헌덕왕은 나이어린 조카(제40대 애장왕)를 폐위시키고 왕위를 얻는 피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심지왕사는 이미 그 같은 일이 있기 전에 출가하여 팔공산에서 득도하고 파계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온다.
잡을 파(把) 자를 쓴 파계사란 절의 이름은 아홉 갈래 물줄기를 한 곳에다 모은다는 뜻이다. 비보풍수의 원리에 따라 절 앞에 큰 저수지를 만들고 주변 아홉 개의 계곡물을 끌어들이고 있다. 누각도 누를 진(鎭)을 붙인 진동루(鎭洞樓)이다. 진동루는 조선 숙종 41년(1715)에 지었고, 그 뒤 1970년과 1976년 두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 모습을 갖추고 있다. 앞면 5칸·옆면 3칸의 2층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양식 으로 되어 있다. 안쪽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누각의 1층을 통로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진동루 옆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로 익공계(翼工系) 형식으로 겹처마에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 이층 건물입니다.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습니다. 이층에 모셔진 범종각 에는 사물(四物)인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파계사에는 대웅전 대신 큰법당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만 있다. 심지왕사는 팔공산에 먼저 동화사를 중창하고 같은 산에 두 부처님을 모실 필요가 없다면서 파계사에는 관음보살만 모셨다고 한다.
觀音菩薩大醫王 (관음보살대의왕) 甘露甁中法水香 (감로병중법수향) 灑濯魔雲生瑞氣 (쇄탁마운생서기) 消除熱惱獲淸凉 (소제열뇌획청량) 관세음보살께서는 크나큰 의왕이시니 감로병 중 법수의 향기로 마구니의 구름 씻어내고 서기를 일으키니 온갖 번뇌 걷어내어 청량함을 얻게 하네. 출전 ; 석문의범 쇄수게 가영(釋門儀範 灑水偈 歌詠)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법당으로 앞면 3칸·옆면 3칸에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일반적인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는 건물이다. (바로 위 사진과 아래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다운받음) 보물 제992호인 건칠관음보살좌상(乾漆觀音菩薩坐像)은 유리상자를 씌워 단독으로 모시고 있다. 고려후기 불상양식을 따른 것으로 높은 보관과 통견의(通肩衣)를 걸치고 있으며, 원통전의 주존불로서 좌우 보처없이 불단 위에 정좌하고 있다. 가슴과 배, 양 어깨와 두 팔을 거쳐 양쪽의 무릎까지 흘러 내린 영락(瓔珞) 장식의 교차가 매우 화려하고, 머리 위의 보관(寶冠)에는 전면에 가득한 꽃무늬와 당초무늬가 상당히 세밀하고 정교하며 여러 곳에 수십 개의 보석이 박혀 문자 그대로 보관이다. 천의(天衣) 속으로 깊게 트인 가슴에 수평으로 입혀진 상의와 띠 매듭이 보이는 것은 조선 시대에 유행한 불상의 착의법(着衣法) 을 따르고 있다. 1979년 개금할 당시에 영조 도포가 발견되었으며, 이 불상의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세종 29년(1447)에 불상을 중수한 기록이 적힌 복장 발원문이 있지만, 고려말과 조선 초에 보살상들에 영락 장식이 나타나는 경향으로 보아 1395년에 조성된 영덕 장륙사 건칠 보살좌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불상의 조성시기는 14세기말과 15세기 초로 추정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산령각 입니다.
기영각에는 성종 숙종 덕종 영조의 위패가 모셔져있습니다. 기영각은 숙종 36년(1696)에 현응 조사가 성전암과 더불어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며 1974년과 1983년의 두 번에 걸친 보수공사가 실시되었습니다. 화강석 바른층 쌓기 기단 위에 건립된 정면3칸, 측면2칸 규모의 겹처마 팔각지붕입니다. 구조양식은 덤벙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주상에 주두(柱頭)와 함께 앙서(仰舌)와 쇠서(牛舌)를 장식한 외1출목(外一出目) 주심포계 (柱心包系) 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구는 5량가(樑架)이나 우물 천장으로 가리어져 있습니다. 이 건물은 주심포계 건물로 주두의 장식이 번잡하게 발달한 조선후기 공포양식 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파계사에는 조선후기 숙종 때 현응대사(玄應大師)가 일으킨 삼중창에 대한 설화가 전한다. 조선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인해 사람 취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스님들은 갖가지 부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러한 사정은 파계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 날 현응스님은 파계사만 이라도 부역을 없애고자 하리라는 원(願)을 세우고, 7백여 리의 길을 걸어 한양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에는 승려의 도성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대문 밖에서 머물면서 한강물을 져다가 민가에 날라주며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숙종은 남대문 2층에 올랐더니 남대문 밖의 세 번째 집 위에서 청룡과 황룡이 찬란한 광명을 놓아 하늘에 사무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왕은 ‘남대문 밖 세 번째 집에 가서 사람이 있거든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마침내 현응스님은 숙종을 알현하게 되었다. 왕은 스님에게 한양에 온 까닭을 물었다. 스님이 불교계의 어려움과 승려의 부역에 대해 자세히 아뢰면서 소원을 말하자, 아들이 없었던 숙종은 스님에게 한양백리 이내의 기도처에서 생남기원(生男祈願)을 해 줄 것을 청하였다. 현응스님은 쾌히 수락하고 때마침 한양가까이에 와 있던 금강산 만회암(萬灰庵)의 농산 대사(聾山大師)와 각각 수락산 내원암(內院庵)과 북한산 금선암(金仙庵)에서 기도를 시작 하였다. 70여일이 지났을 때 현응스님은 선정(禪定)에 들어 이 나라 백성들 중 임금의 지위 에 오를 복을 지닌 사람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한 나라의 앞날을 이끌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왕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려면 자신이 죽든지 농산대사가 죽는 수밖에 없었다. 현응스님은 파계사의 일을 처리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어 농산대사에게 간곡한 편지를 올려 왕자의 몸으로 태어날 것을 청하게 되었는데, 이에 농산대사는 “내가 나라의 위축(爲祝)기도 를 맡은 것으로 인(因)을 삼았는데,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과(果)가 벌써 돌아왔구나, 아 50년 동안 망건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라 말하고 백일기도를 회향한 날 밤에 입적(入寂) 하였다. 그날 밤 농산대사는 숙종과 숙빈(淑嬪) 최씨의 꿈에 현몽하였고, 그 이듬해인 1694년 (갑술)에 왕자로 탄생하여 커서 영조가 되었는데, 실로 그의 예언대로 52년 동안 재위하였다.
이에 숙종은 파계사를 중창하도록 명하고, 파계사 반경 40리(里)에서 거두 들이는 세금 모두 를 파계사에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응대사는 세금을 주는 대신 왕실의 위패(位牌)를 파계사 경내에 모심으로써 유생들의 행패는 물론 각종 부역의 피해 없이 승려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하였다. 현재에도 부도밭 옆에는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 下馬碑)’가 남아 있는데 이는 바로 그때 세운 것이라 한다. <설화출처:koreatemple.net>
예년에 보기 드문 추위로 꽁꽁 얼어 붙은 저수지가 아홉 계곡 따라온 지기를 뭉쳐 설기(洩氣)를 막고 있습니다.
우리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은 아홉 계곡을 타고 내려온 기운을 취기하여 듬뿍 받고, 관음보살께서 내린 法水香으로 魔雲을 걷어 내며 <송림사>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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