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108)천년고찰순례기

[스크랩] 해인사 / 11월 28일 제19차(55)

청원1 2011. 1. 7. 08:45

 

 

  法寶宗刹(법보종찰) 海印寺(해인사)는 佛寶宗刹(불보종찰) 通度寺(통도사), 僧寶宗刹(승보

  종찰) 松廣寺(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대 사찰로 꼽힌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

  처요, 이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

  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

  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

  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곹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

  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

  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

  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일주문 / 조선시대 세조3년 봄에 중수하여 그 뒤로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건축 양식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인 듯하다.

  마지막  중건은 1940년에 있었다. 일주문 정면에 있는 현판의 글씨 「伽倻山 海印寺」는

  근대 서가의 대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의 글씨로 산문의 격을 한층 더 높인다.

 

  <일주문 주련> 

  歷千劫而不古 역천겁이불고

  亘萬歲而長今 긍만세이장금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를 뻗쳤어도 항상 오늘이네.

 

 

 

 <봉황문 주련>

  雷鳴天地同時喉 뇌명천지동시후

  雨霽江山一樣靑 우제강상일양청

  物極魚龍能變化 물극어룡능변화

  道精石佛自神靈 도정석불자신령


 

  우뢰가 치니 천지가 동시에 사자후(獅子吼)하고

  비가 개니 강산이 한결같이 푸르다

  만물이 지극하면 어룡(魚龍)이 능히 변하고

  도가 정미로우면 석불도 절로 신령스러워진다

  봉황문(鳳凰門) / 일주문으로 들어서서, 수문장처럼 버티어 서 있는 천년 노목의 가로수를

  따라 그 정취에 취해 걷다 보면 두 번째 문인 봉황문이 나타난다. 이 봉황문은 천왕문이라고도

  불린다. 큰 절은 으레 천왕문이나 사천왕문 또는 금강문 따위로도 불리는 문을 갖고 있기 마련

  인데, 이 안에는 돌이나 나무 등으로 조각되거나 탱화에 그려진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은 본디 욕계 육천 가운데 사왕천에 머물면서 천상으로 들어오는 여러 착한 사람을

  보호하는 선신으로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하여 악한 것을 멸하고 불법을 옹호하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산문 입구에 봉안하여 수문역과 도량 수호역을 맡게 하였다. 이러한

  신중들은 대부분 힌두교의 영향이며, 불교가 대중화하는 가운데 인도의 민간 신앙과 함께

  접합될 때 생긴 사상이다. 출처:koreatemple.net

 

 

  해탈문 / 정면 6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로 동측에서 제3칸째에 솟을대문을 마련하여

  출입문의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해인사의 제3문으로서 초창연대는 알수없고 1490년 인수대비

  와 인혜대비가 중수할때 이 문도 새로 세우고 불이문이라 하였다 하나 화재로 인하여 19세기

  에 재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위사진은 봉황문 안에서 바라본 해탈문 입니다.)

  

   <해탈문 주련>

  毘盧遮那佛願力周法界     비로자나불원력주법계

  以最後勝體詣菩提道場     이최후승체에보리도량

  圓解脫深因登金剛寶座     원해탈심인등금강보좌

  伽倻山中成就無上正覺     가야산중성취무상정각

  海印三昧常說大華嚴經     해인삼매상설대화엄경

  一百四十功德不共二乘     일백사십공덕불공이승

  八萬四千法門高超十地     팔만사천법문고초십지


 

  비로자나불 원력이 법계에 두루하여

  최후의 승체로 보리도량에 나오시어

  원해탈심인으로 금강보좌에 오르시고

  가야산중에서 무상정각을 성취하셔서

  해인삼매에서 대화엄경을 상설하신다.

  일백사십공덕은 이승과 같지 아니하고

  팔만사천법문은 십지를 높이뛰어넘으셨다.

 

 

  구광루 / 구광루는 해인사의 모든 건물 가운데에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구광루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내용에서 따온 것인데,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 아홉 곳에서 설법하시

  면서 그 때마다 설법하시기 전에 백호에서 광명을 놓으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광루 주련>

  六根但守三空戒 육근단수삼공계   

  雙眼曾得七祖燈 쌍안증득칠조등   

  寶刹樓臺八面通 보찰루대팔면통   

  珠林雲樹千山合 주림운수천산합   

  淸景常開松嶺月 청경상개송령월   

  香泉時擊石門風 향천시격석문풍   

  玉毫不着世間塵 옥호불착세간진   

  日晃金輪湧佛光 일황금륜용불광 

  

  육근이 단지 삼공계를 지키기만하면

  쌍안으로 벌써 칠조등을 얻는것을.

  보찰 누대는 팔면으로 통하고

  주림 운수는 천산의모임.

  청경은 항상 송령월을 열고

  향천은 시시로 석문을 쳐서노래한다.

  옥호에는 세간의티끌이 닿지 않아서

  일황금륜으로 불광이 용솟음 친다.

 

 

 

  대적광전비로자나불삼존상(大寂光殿毘盧舍那佛三尊像) / 삼존불은 해인사 대적광전 법당

  안에 봉안되어 있는 비로자나 삼존불이다. 이것은 원래 금당사(金塘寺)의 불상인데 금당사가

  폐사되면서 그 말사(末寺)인 용가사로 옮겼다가 고종(高宗) 광무 1년(1897)에 본사(本寺)로

  이안(移安)한 것이다.   본존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이마 위

  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넓게 파인 가슴에는

  옷자락  을 집어넣고 있고 양 다리에는 물결 모양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손은 왼손 검지

  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본존의 왼쪽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오른쪽에는 실천을 통한 자비를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위치하고 있다.

  자세가 장중하고 온화한 가운데서도 위엄이 갖추어진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문화유산지식

  대적광전과 삼층석탑<정중탑>

 

  대적광전은 2층 건물로 비로전이라 불리다가, 조선 성종 19년(1488)에 다시 지으면서

  대적광전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화재가 있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지금의 건물은 순조 17년(1817)에 다시 지은 것을 1971년 대폭 수리한 것이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다.

 

  탑은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

  (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3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원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시에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깨뜨렸다. 위층 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가 약간 위로

  들려 있다. 또한 각 지붕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설치한 것이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보륜(寶輪:수레바퀴

  모양 장식), 보주(寶珠:구슬모양 장식) 등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1926년 6월 탑의 수리할 때 위층 기단에서 아홉 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수리후 다시 석탑 안에 넣어두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이었다는 점과 5단의 지붕돌받침 등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을 하나만 두는

  등 각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대적광전 주련>

   佛身普放大光明 불신보방대광명

  色相無邊極淸淨 색상무변극청정

  如雲充滿一切土 여운충만일절토

  處處稱揚佛功德 처처칭양불공덕

  光相所照咸歡喜 광상소조함환희

  衆生有苦悉除滅 중생유고실제멸


 

  부처님이 대광명을 두루비치심이여

  상호도 지극히 청정하시다.

  구름이 일체국토에 충만하듯이

  곳곳에서 불공덕을 찬탄하네.

  광명이 비치는 곳에 넘치는 환희여. 

  중생은 고통을 씻은듯이 잊는다.

 

 

  보안문(普眼門) / 장경판전 입구

 

   <보안문 주련>

  佛身充滿 불신충만

  法力難思 법력난사

 

  부처님은 법계에 충만하시고

  법력은 불가사의하다

 

  장경판전(陜川 海印寺 藏經板殿) 국보  제52호  /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

  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

  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

  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찰순례단은 대적광전에서 사시불공에 동참후 각 전각에 참배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참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찰 인근 금호관에서 점심공양한 산채비빔밥입니다.

 

 

 

  점심공양후 대구 용연사로 향했습니다.

 

출처 : 백팔고찰순례단
글쓴이 : 청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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