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108)천년고찰순례기

보림사 / 7월 25일 제15차(44)

청원1 2010. 8. 22. 08:12

도갑사를 오후 2시 40분경 출발하여 제15차 고찰순례 세번째 순례 사찰인 보림사에 도착하니

오후 3시 30분경이었는데, 산문 입구에 문화해설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림사(寶林寺)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지금은 사세가 많이 약해졌지만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가운데 가장 먼저 산문을 연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다. 절은 가지산파의 법맥을

이어받은 체징(體澄)이 창건하였다.

 

고려시대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지만 인종 때 왕사인 원응국사 학일(圓應 學一)이 잠시 머물렀고,

송광사의 6세 국사 원감국사 충지(圓鑑 沖止, 1226~1293)나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 등 대선사

들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어 선맥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14년(1414)에 실시한 사찰정리 때 장흥지역의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어 법등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후 1657년(효종 8)에는 국가 수호사찰이 되었으며, 1726년(영조 2)부터 나라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크게 피해를 입어 일부 전각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비록 건물은

사라졌지만 삼층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 좌상, 동부도, 서부도, 보조선사 창성탑, 보조선사

창성탑비 등은 절의 옛 위용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철로 만든 비로자나불 좌상은 858년(헌안왕 2)

에 김언경(金彦卿)이 자신의 봉급을 모아 조성한 상으로 수작에 속한다. 최근에 이르러 대적광전과

대웅보전 등을 다시 지으면서 사세를 정비하고 있다. 또한 선원을 새로 구비하여 신라 말이래 선종

대가람으로서 종지와 선풍을 지키려는 많은 수행자들이 용맹정진하고 있다. <출처:보림사 안내 팜프렡>

 

보림사는 중국 남종선의 초조인 육조 혜능이 살았던 소주 조계산 보림사와 같은 이름이다. 이는

우리나라 선종의 본산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 중국의 보림사와 더불어 삼보림

이라 일컬어진다고 한다.

보림사의 창건설화 : 보조선사가 가지산에 와서 땅을 살펴 보니 절집을 세우기에 좋은 자리가

있었는데, 그 곳에 있는 연못에 큰 용이 살고 있어 절을 지을 수가 없었다. 마침 인근 마을에 눈병

이 돌고 있었는데, 보조선사가 연못에 흙과 돌을 던지면 눈병이 낫는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사람들

이 그 연못에 돌과 흙을 던져 용은 어쩔수 없이 연못을 떠나고 그 자리에 보림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주문

▲‘가지산보림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 내부 한 가운데에 돌출된 용두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일주문 내부의 현판 / '선종대가람', '외호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선종대가람' 현판 왼쪽에 '옹정 4년'이라 적혀 있어 일주문은 영조 2년(1726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고찰순례단원들이 사천문을 향하고 있다.

이 문을 지나면 대적광전 앞마당에 이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안에는 통로

좌우 칸에 대형 목조사천왕상과 금강역사상을 모셔서 금강문과 천왕문의 역할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상 앞에는 홍살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사천문은 보림사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보림사중창

기'에 1666년 사천왕과 사천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17세기 무렵보림사에 사천문

이 있었다고 추정 할 수 있다.

 

사천왕(四天王)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하던 귀신들의 왕이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부처님께 귀의하여 영원토록 정법(正法)을 수호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사찰을 지키는 호법천왕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사천왕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천상계(天上界)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사천왕천(四天王天)에 살며, 그 나라의 왕인 제석천왕(帝釋天王)의 지시에

따라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수호신이다.

 

또 사천왕(四天王)과 그 부하들은 온 천지를 돌아다니면서 이세상의 선악을 모두 살펴서 그 결과를

매월 8일에는 사천왕의 부하들이, 14일에는 사천왕의 태자들이, 15일에는 사천왕 자신들이 제석천

에게 직접 보고하는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천왕(四天王)은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

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신적 존재이다.

 

천왕문의 사천왕상은 대개 비파, 칼, 탑, 용 등의 지물을 들고 고통스러운 표정의 악귀를 밟고 있는

모습이다. 문의 좌우에 둘 씩 배치되는데, 입구에서 보면 오른쪽에 비파를 든 동방 지국천왕(持國天

王)과 탑을 든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왼쪽에 보검을 잡고 잇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용과

여의주를 든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찰에 따라 지물

의 내용과 위치가 다른 경우가 있다.

 

▼보림사 목조사천왕상(寶林寺 木造四天王像)-보물  제1254호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수미산의 서구여니주에 계시면서 나쁜것을 물리치고 넓은 눈으로

국토를 바라보며 지키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선신(善神)이다. 그 옆에 있는 북방 다문천왕(多

聞天王)은 수미산의 북구로주에 주석하면서 재물과 복덕의 부귀를 맡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많이 들으며 불법을 옹호하는 천신이다.

 

♦비파를 들고 있는 지국천왕은 수미산의 동쪽 동승신주에 주석하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나라

다스리는 천왕이다. 보검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은 수미산의 남섬부주에 주석하면서 항상 사람

관찰하고 더욱 이익을 넓게 중생의 이익을 많게해주는 선신(善神)이다.

▲천왕문에 걸린 목판과『보림사중창불사기록』에 의하여 중종 10년(1515)에 조성되고 이후 2차례

에 걸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사천왕상 가운

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각 부의 조각이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기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寶林寺 三層石塔 및 石燈) -국보  제44호

 

이 두 기의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탑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대적광전을 향하여 왼쪽의 것

(남탑, 높이5.4m)이 보륜이 3개, 오른쪽의 것(북탑, 높이5.9m)이 보륜이 6개인 점이 다를 뿐

형식은 동일하다. 아래에서부터 살펴보면 6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넓은 지대석 위에 각각

우주(隅柱)와 탱주(撐柱)를 새긴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으로 이루어진 2중기단을 올렸다. 기단부

위로는 갑석을 마련하고 각각 별석으로 제작한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올렸는데, 각 탑신은

우주만을 장식하였다. 탑신에는 일반적으로 사리공이 위치하는데, 사리구와 탑지가 들어있던

사리공이 발견된 곳은 1층 탑신석의 상부 중앙이었다. 옥개석은 넓고 얇은데, 완만한 낙수면에는

반전이 뚜렷하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각각 5단이며, 상층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체감율은

안정적이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련과 보륜, 보개, 보주를 갖추어 거의 완형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층 탑신부 사리공에서 발굴된 탑지에 따르면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하며,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적광전 / 대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대적광전 주련 

오른쪽으로 부터 1번째기둥부터 4번째기둥

蟭螟眼睫起皇州  초명안첩기황주

玉帛諸候次第投  옥백제후차제투

天子臨軒論土廣  천자임헌논토광

太虛猶是一浮漚  태허유시일부구

작은벌레 눈썹가에 황제가 나라를 세우니,

옥과 비단을 제후들이 차례로 바치네.

황제가 누대에 올라 국토의 크기를 논하지만,

끝없는 저 허공도 하나의 뜬 거품과 같도다.


초명이라는 사람의 눈썹에 사는 벌레가 있다고 합니다.  이 벌레의 속눈썹에 황제의 나라를

세우니 주위에 작은 나라의 제후들이 옥과 폐백을 싸짊어지고 차례로 투항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황제는 누각에 올라 자신의 국토가 얼마나 넓은지 자랑합니다. 그러나, 저 끝없는

허공도 물거품인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 사바세계를 뜻합니다. 삼천대천세계에 비하면 먼지보다 작은 초명이의 속눈썹

같은 사바세계에서, 재물과 명예, 권력을 갖기 위해 싸우고, 종교와 민족, 국가간에 대립하여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는 사바세계.........., 이번 생에서의 사바세계와의 인연이 다할때 기필코

극락왕생 하여서 아미타부처님 친견하고 성불하기 발원합니다.

臨終悉願往西方 나무아미타불   共覩彌陀成佛道  나무아니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5번째 6번째  기둥

空空跡絶於義天 공공적절어의천

湛湛言忘於敎海 담담언망어교해

비고 비어서 자취가 의천에 끊어 졌고

담담한 것이 가르침의 바다에 말을 잊게 합니다

(크고 넓은 깨침의 길 하늘에도 자취없고,

깊고 깊은 가르침은 이를길이 그지없어

가르침의 바다에서 말할길을 잊었다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국보  제117호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을 결하고 있는데, 이는 비로자나불의 수인이다.

철불은 새로 조성한 불단 위에 연화좌대를 놓고 봉안하였으며 머리 위에는 화려하게 조각한

아자형 닫집을 걸어 장엄하였다. 닫집은 다포계 공포를 내외로 짜고 내부 천장에는 용과 구름

등을 새겨 걸었다.

 

철불 후벽에는 홍지바탕에 금니로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권속들을 묘사한 비로자나후불홍탱을

봉안하였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

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다.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 광적스님 법문을 들으며 / 꼬마 아가씨도 열심입니다.

광적스님께서 1시간이 넘게 법문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광적스님께서는 수행중에 경전을

간추린 63페이지의 노트 복사본, 청담스님이 속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필사한 복사본 그리고

나무아미타불 CD를  나누어 주시며 한시라도 빨리 서방정토에 갈 준비로 염불 수행을 하라고

합니다. CD는 용량을 대폭줄여 본 순례기의 배경음악으로 올립니다.


관음사 삼장반에서 정토삼부경을 공부하는 일부 단원들은 공파스님으로부터 듣는 법문과

맥을 같이하는고로 더더욱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에서 부정취중에 하근기인 범부는 오행(6바라밀)을 닦아서 믿음(4신)을 이루어

부정취중 상근기에 이르러 삼심을 개발하고 십선업을 일만겁 동안 닦아야 정정취가 되며,

정정취(10주)가 3대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여 색구경천에 이르러야 성불할 수 있는데,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윤회가 있는 삼계와는 별도의 세계인 윤회가 없고 삼악도에 떨어지지도

않으며 항상 여러 부처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부처가 되는것이 보장된(보처보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광적스님께서 복사하여 단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내어주신 수행 노트

 

청담스님께서 속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필사한 복사본

 

대웅보전 / 대웅보전은 원래 조선 초기 건물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84년에 제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중층 불전으로 내부는 상하가 트인 통층이다.

 

주련

塵墨劫前早成佛 진묵겁전조성불

爲度衆生現世間 위도중생현세간

巍巍德相月輪滿 외외덕상월륜만

於三界中作道師 어삼계중작도사

진묵겁(오랜 세월) 전에 이미 성불을 하셨지만,

중생 제도를 위해 세간에 출현하셨나니,

높고 높으신 덕상은 달처럼 원만하셔서,

천상천하를 인도하는 부처님 되셨네

 

명부전 /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미타전

 

 

보조선사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碑)-보물  제157호

탑은 바닥돌부터 지붕돌까지 모두 8각으로, 통일신라 부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의 아래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하였고,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로 띠를 두른 약간 배가 부른 모습이다. 8개의 큰 연꽃조각 위에 놓여진 탑신의 몸돌은 앞·

뒷면에 문짝 모양을, 그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겼다. 두터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서까래를 표현해 놓았고, 윗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파여져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완전한

모양은 아니지만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보조선사(804∼880)는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

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 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보물 제158호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통일신라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비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비문 글씨는 7행 중간의 선(禪)까지는 김원이 해서체로 쓰고, 그 뒤로는 김언경이 행서체로

이어 썼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추측된다. 청말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

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이라고 평한 바 있다고 한다.

 

 

 

▲저기 보이는 수각아래 약수는 한국자연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한 물이라 한다.

 

 

▲무위사, 도갑사에 이어 보림사를 마지막으로 15차 고찰순례를 마치고, 우리 순례단은 저 일주문

을 지나 업연이 남아있는 속세로 돌아가, 오늘 순례에서 배우고 느낀바를 도움삼아 정진하고 

또 선업을 쌓아 남은 업장을 닦아내려 합니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 위에, 어둠속에서도 강물은 어둠을 제치고 지혜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혜의바다(海)에 어리석음의 바람이 잦아들고 번뇌의 물결이

                                쉬어지면, 일체의 모든 것이 본래의 참모습으로 현현하게 될것입니다.   

 

우리단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구산선문의 전래과정을 인터넷상에서 옮겨 적음으로서

보림사 순례기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구산선문이란 선종의 9산을 말한다. 선종의 선의 출발은 석가모니 부처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마하가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법을 하면서 연꽃 한 송이를 들자 가섭 혼자

빙그레 웃었다. 이것이 바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이다. 그래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선의

시작으로 본다. 스승인 석가모니와 제자인 가섭 사이에 마음과 마음으로,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전한 것이 선이다.


인도의 스물여덟 번째 존자인 보리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그는 중국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된다. 달마에서 혜가(慧可)-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혜능(慧能)으로 계승된다.

이를 일러 ‘33 조사’라 한다.


6조 혜능부터 본격적인 중국선종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한다. 불립문자란 문자에 입각하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고 주장한다.

 

육조 혜능(638-713)은 선종의 법통을 단순히 이어받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의 혁신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 선종의 진정한 창립자로 불린다. 그와 그의 제자들에 이르러서야

중국불교는 인도적인 것에서 벗어나 중국의 성격에 맞게 독자적인 영역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7조가 회양(懷讓, 677-744), 8조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마조의 뒤를 이은 9대조사가

서당 지장이다. 이 지장의 제자가 통일신라에서는 도의선사-홍척국사-적인선사이다.

이중 가장 먼저 서당지장의 제자가 된 이는 도의(道儀)선사다. 도의선사는 784년(선덕왕 5년)에

당나라에 유학해 서당 지장(西堂 智藏)에게 깨침을 받은 승려로 821년에 귀국해 선종을 전파했다.

그렇지만 기존의 승려와 귀족들로 이루어진 왕권 불교의 질서에서 그의 교리는 대접받지 못했다.

선종의 특성인 개인주의적이고 개혁적 성향을 지녀 반체제적, 반권위적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결국 도의선사는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함을 깨닫고 서라벌을 떠나 설악산 기슭에 진전사를 짓고

40년 동안 선정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다 열반했다. 그의 의발을 전수 받은 염거화상 역시 설악산

억성사에서 주석하며 선지를 폈으나 선문을 세우지는 못했다.


이후 도의의 사상은 염거(廉居)를 거쳐 염거의 제자인 체징으로 전해지면서 체징이 가지산파를

형성하여 구산선문의 제일 윗자리에 두게 되었다.

 

이처럼 구산산문은 9개의 선종 사원이다. 이는 당나라 유학파 승려들이 들여온 선종이 호족세력

과 결합하여 각 지방에 근거지를 두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9개의 선종사원이 구산산문 또는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최초의 본산은 도의가 개창한 가지산문이고 마지막 본산은 왕건의 스승인

이엄의 수미산문이다. 선종의 개조자들은 대개 지방호족이나 6두품 출신이다. 특히 범일, 무염의

경우는 진골출신이었으나 6두품으로 강등된 경우이다. 구산산문은 다음과 같다.

 

1. 가지산문: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가 가지산에 머물러 보림사를 개창하면서 도의의

   사상은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되어 가지산문을 이루었다.
2. 실상산문: 홍척스님이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하여 실상산문을 형성했다.

3. 동리산문: 839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혜철 스님이 곡성 태안사를 중심으로

   동리산문을 이루었다.

4. 사굴산문: 범일스님이 강릉 굴산사에서 사굴산문을 이루었다. 사굴산문은 강릉의 지방호족

   으로서 진골이었던 김주원의 후손인 명주도독의 후원을 받았다.

5. 봉림산문: 당나라에서 귀국한 현욱 스님으로부터 선풍을 이어받은 심희 스님은 창원에

   봉림사를 창건하고 봉림산문을 이루었다.

6. 사자산문: 중국 보원 스님의 선풍을 이어받고 귀국한 도윤의 제자 절중 스님이 스승을

   계승하여 영월에 법흥사를 창건하고 사자산문을 이루었다.

7. 희양산문:  830년에 귀국한 혜소의 법을 이어받은 도헌 스님이 문경에 봉암사를 창건하고

   희양산문을 개창했다.

8. 성주산문: 호서지방에서는 보철 스님의 선을 이어받은 무염 스님이 보령의 성주산문을 열었다.

   성주산문은 보령지방에 대규모 장원을 가지고 있던 김흔의 후원을 받아 개창되었다.

9. 수미산문: 911년(효공왕15)에 중국에서 귀국한 이엄스님은 해주의 수미산에서 광조사를

   지어 수미산문을 열었다. <출처 : 황도사의 사주여행>

 

 

16차 고찰순례는 설악산 신흥사, 금강산 건봉사(등공대 참배, 적멸보궁 철야정진),

관음진신주처 관음성지 오봉산 낙산사(홍련암에서 사시불공) 순례(8월 28일, 29일 1박 2일)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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