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108)천년고찰순례기

월정사 / 6월 27일 제14차(40)

청원1 2010. 7. 4. 06:12

상원사 순례를 마치고 월정사로.... 

 

동대 만월산 관음암에는 일만의 관음보살이,

남대 기린산 지장암에는 일만의 지장보살이,

서대 장령산 수정암에는 일만의 대세지보살이,

북대 상왕산 미륵암에는 일만의 미륵보살이,

중대 지로산 진여원에는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오대산.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 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행하며 오대의 각 대마다

거주하는 오만 보살에게 일일이 참배하였다고 하는 그 오대산의 중심 사찰인 월정사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의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다.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

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

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어 왔다.


그 오대산의중심 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1400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곳 전나무 숲의 그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僧伽의 얼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이었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

하라”는 게송을 문수로부터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 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 뒤로 유동보살 -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燃燈佛)에게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이름 - 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와 또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두타승 신의 스님이 자장율사가 초가를 지었던 터에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 이후로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 있던 이 암자는 수다사(水多寺) - 진부면 수항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 의 장로 유연스님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로 차츰 규모가 커졌다. 그 무렵의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월정사 홈페이지에서-

 

 ▲적광전 석가모니부처님

 

 백두대간의 심장부인 진산 만월산 자락의 한 기운이 엉긴 곳에 자리한 적광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매우 큰 법당으로,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갖가지 문양이

어우러진 단청은 매우 화려하다.

 

적광전 현판과 주련柱聯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주련의 넉 줄은 자장율사의 불탑게이다. 

     萬代輪王三界主만대윤왕삼계주

     雙林示滅幾千秋쌍림시멸기천추

     眞身舍利今猶在진신사리금유재

     普使群生禮不休보사군생예불휴


     만대의 왕이며 삼계의 주인이여

     사라쌍수 열반 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지금 여기에 모셨으니

     뭇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를 쉬게 하지 않으리.

 

 원래 이 자리는 과거에 나타난 일곱 분의 부처님을 모신 七佛寶殿이었으나 6.25전쟁때

아군에 의해 여타 전각과 함께 전소되었다. 1969년 만화스님이 주지로 계실때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나무를 사용하여 중건 하였다.

 

 대체로 적광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 적광전은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의 불상 형태를 그대로 따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이는 1964년 만화스님 법당 중창당시에는 현판이 대웅전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탄허스님의 오대산수도원을 기념하기 위해 결사의 주主 경전이었던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의미로 적광전으로 고쳐 현판을 달았다.

 

 국보 제 48호 팔각구층석탑

팔각구층석탑은 연꽃무늬로 치장한 이층 기단과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그리고

완벽한 형태의 금동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석탑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하나, 그 무렵의 탑들은 평면 정방형에 삼층 또는 오층의 탑으로

이루어진 것에 견주어, 이 탑은 평면이 팔각형이며 탑의 층수도 구층에 이르는 늘씬한 자태를

이루어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경의 탑으로 보는

것이타당하다.


이 탑은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상륜부에 일부 금동장식을 더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부분이 더러 있으나 오늘날 까지도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다. 기단은 아래층 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연꽃 장식을 베풀었다.

그 위로는 굄돌을 놓아 위층 기단을 정성스레 받들어 기단 전체가 마치 부처님의 연꽃 대좌

처럼 장식 되었다.

 

그 위에 탑신을 받았으니 탑신은 곧 부처님이다. 탑신 안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으니

불사리는 부처님의 진신이나 다를 바 없고 그러한 진신의 부처님이 연꽃 대좌 모양의 기단위에

계신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기단 위에는 부처님을 앉히기 위한 방석과 같은 석재를 별도로

끼웠으며 탑 앞의 석조보살 좌상도 부처님과 같은 탑 앞에서 공양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탑신은 각 층마다 줄어듦이 적고 층수는 구층을 헤아려 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팔각은 불교의 실천수행에 기본이 되는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지고 일층의 사면에는 네모난 감실이 하나씩

있는데, 남면의 감실이 가장 크며 문틀을 단 흔적도 있다.


몸돌은 모서리마다 귀기둥이 새겨지고 끝은 밑면이 수평이고 위는 곡면으로 처리하여 추녀

끝이 살짝 위로 솟아 가뜬해 보이며 추녀 끝마다 풍탁이 달려 탑은 언제나 바람의 향기를

음미한다.


흐트러짐이 없는 정연한 상륜은 보탑의 격조를 한층 더하여 주며, 여기에 금동장식을 더하여

탑 위에 보관을 얹은 듯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하여 보탑의 절정부는 세련된 조형미

를 유감없이 발휘 하였다.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하여 1970년 해체보수를 통하여 1층 2층 6층 9층을 새 돌로 갈았으며 그

당시에 1층과 5층에서 총 12점의 사리구가 발견이 되었다. 은제의 불상 1구와 4점의 청동 거울,

금동 향합과 향주머니, 진신사리경 등의 총 12점의 유물들은 2003년 6월 보물로 일괄 지정

되었다. 또한 2000년 8월 월정사석조보살좌상 보수공사 시에 지하 1m아래에서 탑의 기단부로

보이는 또 하나의 유구가 발견이 되어 학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팔각구층석탑은 높이 15.2미터로 우리나라의 팔각석탑으로는 가장 크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서도 단연 으뜸이며 고려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주목받고 있다.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강원도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된 이 보살상은 턱이 약간 길고 눈두덩이

두껍고 뺨은 도톰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어 복스럽게 느껴진다. 머리위에 높다란

원통형 관을 쓰고 있는데 관 옆에 작은 구멍이 얕게 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에 장식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발寶髮은 양 어깨의 앞과 뒤로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고, 두 귀는

보발 등으로 살짝 감추어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기고 앞가슴은 영락으로 장엄한 채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아 무엇을 잡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금 아래로 내려놓은 오른쪽

팔꿈치는 아래에 받침을 괴었는데, 재미있게도 이 받침은 동자상童子像이다. 대좌는 둥글며

커다란 중판연화문重辦蓮花文을 조각했다.


이 보살은 탑을 향하여 한가운데가 아닌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앉아 있고, 상체가 하체에

견주어 큰데 이것은 우리 눈의 착시현상을 감안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것은

고대 인도의 관습에 따라 자신을 낮추고 스승에게 최상의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보살상이 약왕보살임은 법화경에 잘 나와 있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는 과거 일월정명덕

日月淨明德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희견보살喜見菩薩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체색신삼매炫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 환희심에 가득한 보살은 여러 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이백 년 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월정명덕국日月淨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명덕여래는 그

가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

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러고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을 두 팔을 태우며 칠만 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약왕보살이다.


팔각구층석탑 앞에 있는 이 보살좌상은 근래에 조각되어 조성된 것이고,

원래 석조보살좌상은 현재 성보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밝은색의 복제된 석조보살좌상과 탑이

약간은 부조화 스럽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상과 경전이 봉안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보살상이 그 앞에 있을 때

그 위의(威儀)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며, 보살이 행한 공양의 의미는 공양의 대상이 되는 불탑

그 앞에 서있을 때 살아나는 것이다. 팔각구층탑과 보살상이 하나의 공간 속에서 불전(佛前)

공양이라는 숭고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고 볼 때, 박물관 속의 보살상을 다시 원래 자리로

옮겨 놓는 것이 당초 팔각구층탑의 조탑(造塔) 정신을 유지.계승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 [사찰 100미 100선] 77.월정사팔각구층석탑 중에 

 

  수광전(壽光殿) /  지장전(地藏殿)

 무량수전은 서방 극락정토의 교주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수광전, 극락전 이라고도

불리운다. 아阿란(아미타(바)Amitabha 무량광無量光·무량수無量壽) 한량없다 無의 뜻이며

미타는 수명을 뜻하니 목숨이 없는 수명의 다함이 없는 부처님이란 뜻이다. 월정사 무량수전

은 상단에는 아미타부처님과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모시고 뒤쪽

으로 극락의 법회 장면을 묘사한 목각탱화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를 모시고 있다.


중단에는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지장시왕(地藏十王 )목각탱화를 봉안하고 있으며, 하단에는

지옥의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인로왕보살님을 금선묘(金線描)의 탱화로 봉안하고 있다.

지금 무량수전은 1989년 도명스님 때 시작해 1992년 현해스님이 완공 廻向했다.

 

주련을 살펴봅니다.

 靑山疊疊彌陀窟   겹겹으로 푸른산은 아미타불 법당이요

청산첩첩미타굴(제일 오른쪽 기둥)

滄海茫茫寂滅宮   아득하게 넓은바다 적멸보궁 도량이라.

창해망망적멸궁(제일왼쪽기둥)

 

오른쪽 두번째 기둥부터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 부처님은 어느곳에 계시는가.

아미타불재하방 

着得心頭節莫忘   마음속에 깊이새겨 한시라도 잊지말라.

착득심두절막망  

念到念窮無念處   생각하고 생각다해 무념처에 이르르면

염도염궁무념처   

六門常放紫金光   어느때나 온몸(육근문六根門)에서 자색금빛 빛나리라.

육문상방자금광  

         

 

 

 

 

 

 육수관음상(六手觀音像)

 

금강문 / 월정사는 불이문의 자리에 금강문을 두고 있다. 금강문의 오른쪽에는 움금강역사상

이라고도 하는 나라연금강이, 왼쪽에는 훔금강역사상이라고도 불리우는 밀적금강이 있다.

금강역사를 쉽게 구분할려면

입을  '아' 하고 벌리고 서있는 역사가 나라연 금강

입을  '훔' 하고 다문 역사가 밀적 금강입니다.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입니다.  

나라연은 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의 백만배나 된다고 합니다. 

금강저(vajrapani, 벼락을 상징)를 들고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벌린 입은

산스크리트어 데바나가리 표기에서 첫 음소 “아(अ)”를 상징한다.

 

 밀적금강(密蹟金剛)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사적을 모두 듣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산스크리트어 데바나가리 표기의 마지막 음소(म) “흠”을 상징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리스 문자 알파와 오메가가 사물의 처음과 끝을 의미하듯이 “아”와 “훔”도 사물의 시작과

마지막을 의미한다. 둘을 합친 옴(ॐ)은 산스크리트에서 “절대성”을 상징한다.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오른손에 용을 왼손에 여의주를 들었고,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왼손에 비파를 들었고,

    남방 증장천왕僧長天王은 오른손에 보검을 들었다.

  천왕문(天王門) / 일명 사천왕문四天王門이라고도 하며 대개 일주문 다음에 천왕문(天王門)

이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수미산 중턱에 살고 있는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신장神將을

모신 전각이다. 이 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 서, 남, 북에서 그들 무리와 살면서 인간의 선악

을 관찰하며 불법을 수호한다. 

 

관음사 백팔천년고찰순례단은 천왕문을 나서서 14차 마지막 순례 사찰인

대관령 보현사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