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마지막 신라인 고청 윤경렬

청원1 2010. 5. 13. 11:10

경주 고청 윤경렬 (古靑 尹京烈) 선생님의 생애 [1]
글번호: 2   글쓴이: 김기홍 조회: 53   스크랩: 3   날짜: 2007.05.05

          古靑 先生님

                徐 英 洙

          푸른 하늘, 깊은 생채기

          세월이 돋아나는 숨결을 찾아

          이름하여 겨레의 山

          南山을 오르신, 古靑 先生님.

           

          고향마을 세간살이 모두가 하나

          永生하는 골짝들이 열리는 귀도 하나.

          물소리 새소리를 허리춤에 차고

          하나의 길을 따라 하나를 찾아

          오르고 오르신 임, 자국도 하나.

           

          꼬부라진 남산길.

          허리 펴고 오르셔요.

          내려다 뵈는 그늘에서

          사랑을 앗다가

          산주령에 휘감겨 잃어버린 날을 향해

          이제는 허리 펴고 산을 오르셔요.

           

          곱슬머리 타래진

          얼굴 저편에

          千年 신라가 누워 앓고 있는데

          흰 두루막 고무신을, 솔가지에 걸어놓고

          삼화령 높은 奉에

          꿈을 캐는 그림자여.

           

          금오산 고위산을 왕래하는

          물소리에

          푸른 하늘 깊은 생채기

          알몸이 익는

          민족의 산 밟아오른 古靑 先生님.

          - 『겨레의 땅 부처님 땅』 출판 기념회 祝詩 -

           

'신라를 알고 싶으면 경주에 가 살아라. 겨레의 혼을 알고 싶으면 서라벌의 흙냄새를 맡으라. 그리고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고자 한다면 경주 남산에 가 보아라.'는 스승 고유섭 선생의 말을 따라, 윤경렬 선생님께서는 30살의 젊은 시절, 함경북도 주을의 고향을 떠나 옛 신라의 서울 경주에 터를 잡았다. 선생님께서는 '살아 있는 신라인'으로 불리우며 경주 남산 기슭에 살고 계신다.

이제 여든넷의 나이, 평생 신라의 수문장이 되어 서라벌의 맥을 잇고자 노력했고, 죽어서는 남산의 수호신이 되리라는 선생님께서는 한달에도 몇 번씩 노구를 이끌고 남산을 오르내리며, 부처님과 하늘과 땅을 잇는 이 성스러운 곳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선생님께서는 진홍섭씨와 함께 경주에 어린이 박물관학교를 세워 조상의 슬기를 가르쳐 온 공로로 외솔상(11회, 실천부문)을 받았으며, 풍속인형연구소인 고청사(古靑社)를 세워 풍속토우를 만들어 경주 민속품의 주맥을 이루어 오기도 했다.

고청 선생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1997년12월18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기사로 대한다.

윤경렬(84)씨는 인형을 만들던 사람이었다. 함경북도 경성군, 온천마을로 이름났던 주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흙으로 만든 토우 인형에 마음을 빼앗겼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조선 풍속을 따라 인형을 빚어 구운 다음 색칠한 것을 보고 그 기술을 배우러 일본까지 갔다오는 집념의 인형장이었다.


그가 경주 사람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인형 때문.

“일본에서 돌아온 뒤 풍속 토우를 만들었지만 팔 길이 막막했어요.
1943 년 아는 이 소개로 개성으로 나가게 됐고, 이듬해에 당시 개성박물관 관장이시던 고유섭 선생을 뵙게 됐지요.
고고미술학의 선구자이신 선생께서는 내가 일본에서 3년 동안 공부했다니까 일본놈의 독소를 빼기 전에는 조선 것은 해볼 생각도 말라고 혼을 내셨지요.”

윤씨는 독소를 빼기 위해서 역사가 깊은 곳으로 터전을 옮겨야겠다고 작정했다.
부여, 공주, 하다가 선뜻 경주를 골랐다. 운명이지 싶다.
경주에 턱 들어서는 순간, 그는 ‘경주에 내 뼈를 묻으리라’ 결심했다.
계림숲과 무열왕릉에서 그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힘차고 명랑한 예술이 있는가, 새삼 목이 메었다.
“경주에 있으면 고분 발굴 현장을 많이 보게 돼요. 몸은 다 썩었어도 그 사람들이 입었던 옷, 쓰던 그릇, 갖고 있던 무기, 온갖 장신구류가 베갯머리에 모여 있지요.
그걸 현장에서 하나하나 스케치를 했습니다. 사진기 로 툭툭 찍는 것하곤 달라요.
정확하게 관찰해서 그리게 되니까 옷주름 하나도 놓칠 수가 없어요.
지금 텔레비전 사극에 나오는 옷들은 대개 중국풍이 많아요. 고증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거지요.”

풍속 토우를 만들려면 옛 사람의 얼굴과 의복 일습을 알아야 했다.
그는 얼굴을 찾아 경주 일대를 헤매기 시작했다. 경주 남산에 들어가게 된데는 이런 내력이 있다.
남산을 한달에 두번꼴로 한 6백번쯤 오르내렸다.
수없이 눈과 마음에 새긴 이 현장답사 덕에 그가 쓰고 그린 <신라이야기> (창작과비평사 펴냄)는 동화책임에도 그 안에 담긴 삽화들이 신라시대의 풍속을 가장 정확하게 복원한 것으로 이름높다.

“경주 남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지요.
신라 사람들은 그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전통적인 바위신앙과 불교신앙이 합쳐진 거지요.
부처님 얼굴에 바로 신라 사람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고구려의 억세고 엄격함, 백제의 부드럽고 섬세함이 만나 빚어낸 한국인의 얼굴이 지요.”

그는 한국 사람 얼굴의 특징을 ‘꾸밈새가 없는 표정’이라고 했다.
시골 파파 할머니의 익살스런 얼굴, 고향 누님처럼 인정 듬뿍한 얼굴, 한마디로 생겨먹은 대로 구수하고 정겨운 얼굴이라는 것이다.
부지런히 마을들 을 돌아다니며 그 얼굴에 얽힌 이야기들을 모아 펴낸 <경주 남산 고적 순 례> <겨레의 땅 부처님 땅> 등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시절 그가 발로 읽어낸 남산의 육성이다.

“처음 남산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땐 나무꾼하고 나물 캐는 아낙밖에 없었어요.
저를 아는 이들이 한다리 건너 얘기들을 전해듣고 서울에서 내려 올 때마다 앞장서라고 해서 남산 답사가 시작된 거지요.”
요즘이야 문화 답사나 박물관학교 같은 행사가 유행처럼 전국으로 번졌지만 30여년 전만 해도 드문 일이었다.
윤경렬씨가 “내 평생 보람된 일은 우리의 풍속 인 형을 만든 일과 경주 남산을 조사하고 소개한 일, 그리고 경주의 어린이 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가르친 일”이라고 말하는 까닭 이다.
1954년 10월, 당시 경주 박물관장이던 고유섭씨와 힘을 더해 열었 던 ‘경주 어린이 박물관학교’는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에도 있듯, 아이 들에게 ‘겨레의 고운 얼을 길러준 뿌리’였다.

윤경렬씨가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한 건 그가 쓴 <마지막 신라인 윤경 렬―윤경렬 평생이야기>(학고재 펴냄) 때문이다. 윤씨가 마다했음에도 후 학들이 마련한 출판기념회가 12월5일 인사동 학고재에서 열렸다.
모처럼 먼 걸음을 한 그를 보러 찾아온 벗들에 둘러싸여 그는 술과 정에 곱게 취했다.

지금도 그는 경주시 양지마을의 인형공방 ‘고청사’(古靑舍·0561-772-9114) 문턱 낮은 집에서 한국인의 멋을 생각하고, 남산을 가고자하는 손 들을 맞으며 산다.
고청은 그의 자호. 원래 나만 홀로 익지 못해 아직 푸 르다는 뜻으로 고청(孤靑)이라 했으나, 이제는 옛날 속에서 푸르게 산다(古靑) 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동무처럼 손잡고 남산을 오르내리던 부인 ‘순이’를 3년 전 먼저 보낸 요즘 그의 나날은 고즈넉하다.
적적할라치면, “꼴꼴꼴” 술 떨어지는 소리가 좋은 상감청자 술병에 고량주를 받아놓고 남산을 친구 삼아 홀로 권커니 받거니 대작하는 멋을 안사람 삼았다. 가끔 지구상에서 가장 먼 곳, 고향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지만 자신이 경주 사람이 된 것은 필경 부처님의 뜻이었다고 믿는다.

 

 

 

          고청 윤경렬 선생님은 1999년 12월1일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출처 : 달빛청암의 경주 이야기
글쓴이 : 동살청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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