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 12월 27일 제8차 (22)
호구산 용문사(虎丘山 龍門寺)는 원효 스님이 여기서 지척인 금산(錦山)에 보광사를 먼저
창건한 다음 호구산에 첨성각(瞻星閣)을 세우고 금산에 있었던 보광사를 이 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용문사가 위치한 곳은 호랑이의 등에 해당한다고 하며, 조선 현종때 백월대사가 용소마을의
용연(龍淵)위에 위치한 사찰이라 하여 용문사(龍門寺)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용문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승려들이 용감하게 싸운 호국사찰이다.
훗날 이런 호국의 불심에 감동한 숙종 임금은 용문사를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고 왕실의
축원당을 세웠다. 수국사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나라를 지키는 사찰’의 의미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호국사찰의 증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용문사에 보관 중인 총신 및 총구가 세 개
달린 개인용 화기인 삼혈총통(三穴銃筒)과 그리고 숙종이 호국사찰임을 표시하기 위해 내린
수국사금패(守國寺禁牌)와 봉산수호패(封山守護牌)가 그것이다. 금패란 지방의 관청이나 관리가
사찰을 함부로 하는 것을 금하는 표지이며 봉산수호패에서 말하는 봉산(封山)이란 왕과 왕비의
능묘를 보호하거나 기타 특수한 목적을 위해 벌목하는 행위를 금하기 위한 표지다. 다시 말해서
봉산수호패(封山守護牌)란 용문사가 자리한 호구산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표지인 것이다.
봉산수호패에는 앞면에 ‘남해용문사(南海龍門寺) 향탄봉산수호총섭(香炭封山守護總攝)’을,
뒷면에는 이 패를 발급한 ‘예조(禮曺)’와 그 수결(일종의 싸인)을 새겼다. 숙종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77년이 지난 1674년에 즉위했다. 종전 후 100년이 다 되어서도 용문사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숙종은 이것으로도 감사의 마음을 다 나타내지 못했다고 보았는지 연꽃 모양의
옥등 2개와 촉대 1개를 하사했었으나,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빼앗아갔다고 한다.
용문사는 철원군 심원사, 전북 고창군 선운사 도솔암, 전북 완주군 송광사, 충남 서산군
개심사, 경주 기림사 등과 함께 지장기도 도량으로 일컬어진다.
용문사의 사천왕상 발밑에는 탐관오리와 양반이 밟혀 있는데 이는 용문사에서만 볼 수 있는
사천왕상으로 남해가 유배지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듯 하다.
스님의 자상한 사찰안내에 감사드립니다.
용문사의 녹차밭입니다.
까치집이 한가롭습니다.
용문사 순례를 마치고 고성 옥천사로 가는중 달리는 버스창을 통해 찍은 창선 ·삼천포 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