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어쩌다 보니 단풍철을 놓친것 같다. 11월 첫주에 작년처럼 노포동에서 심야버스
를 타고가 양양에 내려서 오색으로 가서 대청봉을 거쳐 봉정암에 갈려고 했으나 때마침
당리동 부산은행 앞에 신행단체인 <삼보회>에서 30일 새벽 2시 30분에 출발하는 차가
있다기에 예약하고, 30일 새벽 2시 10분경 집을 나섰다. 새벽 2시 20분경 탑승하여 2시
30분에 출발하여 8시 30분경 용대리에 도착하였다.
09시경 백담사 입구 修心橋에 도착.
내설악 첫 관문에 있는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의 <백담사적기>에 의하면 647년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처음 지었
다고 합니다. 창건 후 1772년(영조 51)까지 운훙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불리
우다가 1783년 최붕과 운담이 백담사로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금강문
문수동자상과 밀적금강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를 들고 입을 다물고 "훔"소리를 내며 방어자세를 취하는
모습으로,여래의 온갖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5백의 야차신
夜叉神)을 거느리고 현겁(賢劫) 천불의 법을 수호하는 신으로달리 "훔금강역사"라 한다.
보현동자상과 나라연금강
"나라연금강"은 천상계의 역사로서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나 되고, 입을 벌려
"아"소리를 내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 모습으로 "아금강"이라고도 한다."아"와"훔"은 고대
인도어의 첫글자와 끝글자로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과 완성을 상징하며, 공격
자세는 출발 시점에서의 진취적으로 나아감을 뜻하고 방어자세는 소멸단계에서 거두어
들이는 것을 상징화시켜 묘사한 것이다.(입 모양으로 두 금강을 구별하는 방법에는 이론이 있다.)
솟을문
솟을문 안에서
범종루
만해기념관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는 1905년 이 곳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고 입산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어 <조선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를 집필하고 <님의침묵>이라는 시
를 발표하는등 불교유신과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일제의 민족 침탈에 항거하여 민족독립
운동을 구상하였던 독립운동의 유적지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사 오도송
男兒到處 是故鄕 남아도처시고향
幾人長在 客愁中 기인장재객수중
一聲喝破 三千界 일성갈파삼천계
雪裏桃花 片片飛 설리도화편편비
장부는 가는곳마다 곧 고향이거늘
사람들은 시름속의 나그네로 오래도록 보내네
한소리 큰할로 삼천 대천세계를 깨뜨리니
눈속 복사 꽃잎이 흩날리네
극락보전 앞
極樂堂前滿月容 극락당전만월용
玉毫金色照虛空 옥호금색조허공
若人一念稱名號 약인일념칭명호
頃刻圓成無量功 경각원성무량공
극락당 앞의 만월 같으신 모습
금빛의몸 백호광명 온누리를 비추시네.
누구든지 아미타불 일념으로 부르오면
찰나간에 무량공덕을 원만히 이루리.
출처:백담사 홈피
영시암으로 향하는 도중
멀리 영시암에서 순례객에게 공양할 죽을 쑤는 연기가 피어 오릅니다.
영시암(永矢庵)은 가야동계곡과 구곡담계곡이 합류되는 수렴동계곡 옆에 앉아 있습니다.
백담사 에서 3.5km, 오세암에서 2.5km 정도 거리를 둔 곳입니다. 백담사와 오세암 중간에
있어 오고가는 중생들에게 죽이나 국수 공양을 하는 아름다운 절입니다. 조선 숙종 15년
(1689)에 발생한 장희빈 사건으로 삼연 김창흡은 그의 아버지 김수항이 죽임을 당하자
세상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산수를 즐기다 이곳에 암자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과 완전히 인연을 끊겠다'고 맹세하며 '영시암(永矢庵)'으로 이름합니다.
한국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어 터만 남았던 것을 1988년 무렵 도윤스님이 중창하였습니다.
영시암에서 쌀죽 공양을 하고 오세암으로 향합니다.
주의 팻말이 있는데로 올라가면 만경대인데 오늘은 봉정암 까지 가야하기에
그냥 지나칩니다.
오세암 천진관음보전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647년(신라 선덕여왕 13) 이곳에 선방을
짓고 머물렀던 자장 율사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관음보살의 도량임을 나타내기
위해 관음암이라 하였다.
1445년(조선 세조 1)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이 곳에서 출가하였고, 1548년
(명종 3) 보우(普雨)가 이 곳에서 기도하다가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판사로 발탁되었다.
1643년(인조 21) 설정(雪淨)이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름을 바꾼 데
따른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설정이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암자에서 키웠는데, 어느 날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
혼자 양양까지 다녀와야 했다. 그 동안 혼자 있을 4세된 어린 조카를 위하여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놓고, 조카에게 밥을 먹고 난 뒤 법당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에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면 잘 보살펴줄 거라고 일러주고 암자를 떠났다. 그러나 설정은 밤새
내린 폭설로 이듬해 눈이 녹을 때까지 암자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눈이 녹자마자 암자로 달려간
설정은 법당에서 목탁을 치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 조카를 보게 되었다. 어찌된 연유
인지 까닭을 물으니 조카는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밥도 주고 재워 주고 같이 놀아 주었
다고 하였다. 그 때 갑자기 한 젊은 백의여인이 관음봉으로부터 내려와 동자의 머리를 만지
면서 성불(成佛)의 기별을 주고는 한 마리 푸른 새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다.
이에 감동한 설정은 어린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암자를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후기 1888년(고종 25)에는 백하(白下) 스님이 중건하면서 1만일을 기한으로 염불
정진하는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를 열기도 하였다.
그 뒤 1950년에 일어난 6ㆍ25전쟁으로 모든 전각이 불타 없어졌으나 근래에 관음전 등을
비롯하여 삼성각ㆍ요사 등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당 뒤로는 관음봉·동자봉이, 오른쪽으로는 공룡릉이 올려다보이며, 인근에 내설악의
꽃으로 일컬어지는 만경대가 있다.
白衣觀音無說說 백의관음무설설
南巡童子不聞聞 남순동자불문문
甁上綠楊三際夏 병상녹양삼제하
巖前翠竹十方春 암전취죽시방춘
백의관음 설함없이 설하시고
남순동자 들음 없이 들으시네.
화병 위의 푸른 버들 늘 여름이요
바위 앞에 남색 대나무는 봄을 알리네.
백의관음
동자전
汝得人身不修道(여득인신불수도)
如入寶山空手來(여입보산공수래)
憂患苦痛欲何爲(우환고통욕하위)
如今自作還自受(여금자작환자수)
네가 사람으로 태어나 도를 닦지 않으면
마치 보배 산에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오는 것과 같도다.
왜 우환과 고통만 취하려 하는가.
오늘 네가 지은 것만큼을 스스로 돌려받는다.
오세동자상
보기 드물게 천진관음보전에서는 어떤 외국인이 108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세암을 출발하여 봉정암으로 가는 길입니다.
드디어 용아장성이 그 당당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외호하는 용아장성...... 그 기세가 천지를 누를 듯 하다.
멀리 공룡능선이 구름에 쌓여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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