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차 고찰순례는 법주사와 공림사, 반야사를 순례하게되는데, 추석연휴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다수회원이 회비를 납부하고도 참석하지 못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5시 40분경
낙동초등학교 아래에 도착하니 버스와 몇몇회원이 이미 와 있었다. 아침공양 대용인 주먹밥
과 물, 김, 일회용 물수건을 봉지에 넣어 재무보살과 몇몇보살이 배부하고, 이어 정일헌 거사
가 정성스레 작성한 사찰안내 인쇄물을 배부하고 정연일 거사가 매회 법공양하는 소책자를
나누어준 후 6시 15분경 출발과 동시에 전문포교사인 수행심 보살님의 집전으로 아침예불과
천수경을 독송하였다. 선산휴게소에서 15분간 휴식후 탑승과 동시에 불교TV에서 제작한
<한국의 명찰 속리산 법주사>DVD를 시청하였다. 이번에는 2009년 통도사 화엄산림법회
8번째인 전 용주사 주지 정락스님의 <비로자나품>과 <여래명호품>DVD를 귀가시
시청할 예정이다.
이번달부터 육법공양 희망자가 없을시 회비중 5만원을 회원들에게 순차적으로 지급하여
공양물을 준비토록 하였는데 이번에는 수행심 보살이 공양물(떡)을 준비하여 법주사
대웅보전에 올리고 사시불공에 동참하였다.
대형주차장에 주차하고 풍치도 느끼면서 걸어가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우리 순례단은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순례를 수행의 일환으로 삼기에, 하루에 세사찰을 순례하려면 시간에 쫓겨
참배를 등한시 하는 경우가 있을까 염려되어 법주사 안까지 버스가 들어 갈수 있도록 여러
경로를 통하여 부탁하였던바 일요일이라 곤란하다고 하였는데, 전날 법주사로부터 버스가
안에까지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통보받았다.
9시 20분경 버스가 법주사 금강문 앞에 도착하자 마자 인연이 있는 월은 노스님께 인사드리
기 위하여 임일심감사와 여래지보살과 나는 월은스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는데 스님께 드릴
우전차와 수제차 2통을 여래지 보살님이 준비해 주셨다. 번번히 여래지보살님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여래지 보살님께 감사드립니다.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에 자리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속리산의 8개의 봉우리와 8개의 대(臺), 8개의 돌문이 그것인데 이들이 연꽃잎처럼 감싼
터에 절은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법주사를 둘러싼 속리산은 산 그자체로 불국토의 형상을
취한 셈이다.
일찍이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은,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은 진리를
멀리 하려 하는구나.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는데 속(俗)이 산을 떠나려 하는구나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라며 산 이름의 뜻을 시로 풀었다.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법맥을 이은 영심대덕(泳深大德)이 길상사(吉祥寺)로 본격적인 사찰
의 문을 연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법상종 사찰로 자리 매김하였다.
이때부터 절에는 미륵장육상을 모셔 미륵하생의 도량으로서의 구실을 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동생인 도생
(道生) 승통이 주지를 맡는 등 법상종 사찰로 위치를 굳혀갔다.
이후에는 자정(慈淨), 신미(信眉), 일선(一禪), 각성(覺性), 희언(熙彦), 만공(滿空), 금오(金烏)
선사 등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지켜왔다.
진표(眞表) 율사와 영심(영심) 대덕 때 만들어진 미륵불 중심의 가람배치는 고려시대에 들어
화엄과 미륵을 함께 모시는 신앙형태를 취하면서 대광명보전과 산호전의 두 불전 축이 직교
하는 배치형태로 자리 잡았다.
근래 들어 다시 산호보전 청동미륵대불을 조성하여 다시금 미륵신앙의 중심지를 표상하고
있다. 법주사를 대표하는 건물은 5층 목탑형태의 팔상전인데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었지만
현존하는 몇 되지 않는 목탑에 속한다. 조선후기 왕실과의 관계는 사찰 안에 왕실 원당인
선희궁 원당을 짓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법(法)이 상주할 수 있는 탈속의 세계를 상징하는 법주(法住)란 절 이름처럼 법주사는
청동미륵대불을 중심으로 하여 미륵도량으로서 거듭나고 있다.
<출처:koreatemple.net>
일주문 /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
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위 사진은 2007년 순례시 사진이며, 이번 고찰순례에서는 버스가 금강문 앞에까지
진입한 관계로 일주문 사진은 촬영하지 못했다.
금강문 / 태장계에 이른 계단을 금강문(金剛門)이라고 한다. 곧 지성의 힘, 금강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떨쳐버린 이후에 비로서 나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주련>
擁護聖衆滿虛空 옹호성중만허공
都在毫光一道中 도재호광일도중
信受佛語常擁護 신수불어상옹호
奉行經典永流通 봉행경전영유통
옹호하는 성중들은 허공에 가득하여
부처님의 미간백호 광명속에 자재하고
부처님법 믿고 지녀 어느 때나 옹호하며
모든 경전 받들어서 길이 유통 시키시네.
註)옹호성중(擁護聖衆): 불법을 수호하는 모든 신들.
호광(毫光): 백호광(白毫光)을 말함. 부처님의 미간에 있는 백호(白毫)에서 나오는 광명.
부처님의 32相 중 하나로 깨끗하고 부드러워 세향(細香)과 같으며, 오른쪽으
로 말린 데서 끊이 없이 광명을 놓음.
일도(一道): 한 가지의 도리. 하나의 실다운 도. 곧 불도(佛道)를 말함.
☞ 이 게송은 신중청(神衆請) 중 가영(歌詠)에 나오는 게송입니다.
일주문을 지나 수정교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법주사 가람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첫 입구가
금강문(金剛門)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에는 돌담이 늘어서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금강문은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
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阿金剛力士)라 부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金剛力士)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금강문에서 천왕문을 향하여
천왕문 / 금강문을 통해 깨뜨릴 수 없는 불법의 세계를 지나면 천왕문(天王門)을 만난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앞면 3칸에는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고
양쪽의 끝 칸에는 문이 아니라 작은 판창(板窓)을 달았다. 대개 사찰의 금강문은 앞면 3칸
정도의 규모인데, 이처럼 5칸을 마련하고 양옆에 판창을 댄 법주사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국내의 천왕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현재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련>
천왕문의 주련에는 두가지의 게송이 적혀 있다. 천왕문의 기둥이 모두 6개이므로......,
앞의 4행짜리 게송과 뒤의 2행 게송이 함께 이어져 있는 것이다. 앞의 것과 뒤의 것이
갖는 내용상의 연관성은 없다.
威光遍照滿乾坤 위광편조만건곤
眞界無爲解脫門 진계무위해탈문
雲暗日明身內影 운암일명신내영
山淸水碧鏡中痕 산청수벽경중흔
부처님의 위광(威光)이 온 천지에 가득 차 있으니
해탈문(解脫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 진계다
구름이 어둡고 해가 밝은 것은 모두 내 마음의 그림자
산이 맑고 물이 푸른 것은 거울 속 흔적(痕迹)이로다
四大天王威勢雄 사대천왕위세웅
護世巡遊處處通 호세순유처처통
사대천왕(四大天王)의 위세가 크기도 하네
이 세상 두루 다니며 통하지 않는 곳이 없도다
동쪽 세계를 관장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손에 비파를 들고 인간 감정의 기쁨의 세계를
총괄한다. 남쪽 세계를 관장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칼을 들고 사랑의 감정을 주관한다.
서쪽 세계를 관장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과 여의주를 들고서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하고,
북쪽 세계를 다스리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탑 또는 큰 깃대를 들고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한다.
인간사를 관장하고 있는 사천왕은 착한 일과 악한 일을 적절한 시기에 판단하여 그에 따른
상과 벌을 내린다고 한다.
천왕문에서 팔상전을 향하여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옛 기록과 기단석(基壇石의) 양식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 창건했을 무렵에는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었다.
2층 건물의 구조를 위해 안에는 두 줄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 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하였다. 2층에 비해 1층이 높은 편이지만 좌우로 7칸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감안하면
아주 적절한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남도 마곡사(麻谷寺)의 대웅전과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 전라남도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지금의 건물은 2005년 10월 4년간의 공사끝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만에 옛모습
그대로 원형 복원한 것이다.
<주련>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편시방중)
三世如來一切同 (삼세여래일체동)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원운항부진)
威光遍照十方中 (위광편조시방중)
月印千江一體動 (월인천강일체동)
四智圓明諸聖士 (사지원명제성사)
賁臨法會利群生 (분임법회이군생)
부처님은 이 우주 모든 곳에 두루 계시니
3세(과거·현재·미래)의 부처님 다르지 않네
넓고 넓은 원력 다함이 없고
넓고 넓은 깨달음의 세계는 오묘해서 다 말할 수 없네
부처님의 위광이 시방세계에 가득차고
천갈래 강에 비친 달은 천개로 보여도 근본은 하나
4지(여래의 네가지 지혜)에 통달한 많은 성인들
두루 법회에 임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네
법주사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 /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
(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였다.
연화대좌 위에 좌정한 삼신불은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 둘레 390㎝로서 우리 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다.
즉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
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닫집 없이 후불탱의 위를 막아 천룡이 불상과 불화를 호위하도록 했다.
대웅보전 사시불공에 동참하여 정근하고 있는 고찰순례단원들
청동미륵대불 /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었는데,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90년에는 붕괴 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2000년
들어 원래 제 모습을 찾아주자고해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했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갔다.
미륵불상복장유물 / 1939년부터 1964년까지 조성한 시멘트 미륵불상에서 나온 복장유물
팔상전(捌相殿국보 제55호) /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
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
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도란 1)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 태어
나는 장면, 3)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 시키는 장면, 7)성불 후 녹야원
에서 설법하는 장면, 8)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
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
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
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
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
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명부전 / 진영각과 삼성각 사이에 있다. 청동미륵불을 조성하면서 삼성각과 함께 지었다.
원래 법주사에는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지장전이라 하여 지장보살을 봉안한 전각이 있었
으나, 이후 18세기와 20세기초의 가람에는 지장전이 사라졌다.
대웅보전에는 사시불공후 49재가 있는 관계로 목탁을 치는 것이 어려워 여기 명부전에서
우리 순례단원들은 수행심 보살의 집전으로 108불보살 명호를 칭하며 목숨들어 지성 귀의
하는 108배를 하고 108참회를 하였다.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 1624년(인조 2) 벽암(碧巖) 대사가 중창한 이래 고종 29년(1892)에
중수한 기록이 있고 천장을 비롯한 지붕가구의 일부는 후대에서 수리된 모습을 남기고 있다.
1974년에 전체적으로 해체 복원 작업을 하였다. 하지만 원통보전을 받친 기단과 계단, 초석은
고려 전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
으로 꾸몄다.
안에는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관음보살상은 목조로 머리에는 아름다운 보관을 썼다.
무릎 아래 좌우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봉안하였다. 보살상 뒤로는
관음탱이 있고, 오른쪽 벽에는 제석천룡탱이 걸려 있다.
☞ 원통은 '주원융통(周圓融通)'의 줄임말이다. 즉, 진리는 두루 원만하여 모든 것에 통해
있다는 의미로 관음보살의 불격(佛格)을 표시하는 용어이다.
법주사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 / 관음보살을 달리 원통대사(圓通大師)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통이란 널리 통하여 두루 막힘이 없는 것, 즉 궁극적 깨달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관음보살은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관세음
(觀世音)이란 세간의 음성을 관(觀)한다는 의미이다. 즉 사바세계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듣고서 그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비의 보살인 것이다.관음보살상은 목조로
높이는 280㎝이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보관을 썼다. 그 중앙에는 아미타불의 화불(化佛)을
나타냈으며,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중생의 아픔을 달래 주는 듯하다. 무릎 아래 좌우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봉안하였다. (원통보전은 수리중이라 출입이
통제되어 위 사진은 법주사 홈피에서 다운 받음)
삼성각 /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칠성(七星)·독성(獨聖)·산신(山神)
을 탱화로 봉안하였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고, 산신은 우리 나라 고유의 재래신앙이 불교
에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독성은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삼성각은 이처럼 불교와 외래신앙이
습합된 결과로서 특히 산신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대개 가람의 외곽에 들어 서 있다. 그러나
법주사의 가람 구조상 산 쪽으로 진출하기 어려웠던 듯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자리 잡았다.
진영각 / 진영각(眞影閣)은 명부전과 나란히 서 있는 앞면 7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진영각은 조사각이라고도 하며 고승대덕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이다. 조사라고 하는 말은 어느
학파를 창건하거나 또는 크게 중흥시킨 선덕으로서 후학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스님을 일컫는
말로 특히 선가에서 즐겨쓰는 말이다.
본래 법주사에는 조사각(祖師閣)이라 하여 조선 후기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暎嬪李氏)
가 원당으로 사용하던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에 모셨었는데, 1991년 지금의 진영각을 새로
지었다. 18세기 중엽에 작성된 호영 스님의 법주사전경도에 의하면 영자전(影子殿)이라 하여
지금의 삼성각 위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안에는 법주사의 창건주 의신 조사, 전법초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모두 30분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범종각 / 범종각은 팔상전의 동쪽 정면에 있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976년 종무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다. 안에는 범종(梵鍾)·운판(雲板)·법고(法鼓)·
목어(木魚) 등이 있다. 이 네 가지의 법구(法具)가 불당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를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네 가지 법구들은 각각의 용도와 의미를
지닌다. 먼저 범종은 지옥에서 한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운판은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모두 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영원한 해탈심을 느끼게 한다.
또한 법고는 땅 위에 사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목어는 물 속에 사는 생명들을 위해 울린다.
<주련>
종각 <북면>
願此鍾聲遍法界 (원차종성편법계)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유암실개명)
三途離苦破刀山 (삼도이고파도산)
一切衆生成正覺 (일체중생성정각)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철위지옥의 모든 어둠 다 밝아지소서
삼도와 도산지옥의 고통에서 떠나
일체 중생을 바로 깨닫게 하여주소서
종각 <남면>
靑山疊疊彌陀窟 (청산첩첩미타굴)
滄海茫茫寂滅宮 (창해망망적멸궁)
物物拈來無掛碍 (물물념래무괘애)
幾看松亭鶴頭紅 (기간송정학두홍)
첩첩으로 깊은 청산 미타굴이요
망망한 푸른 바다는 적멸궁일세
물물이 오감에 걸림 없는데
소나무 정자에 학의 머리 붉음 몇번이나 봤는가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 대웅보전에서 팔상전에 이르는 앞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걸작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 있다. 국보 제5호로,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이다. 신라
시대의 석등은 대개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대석을 두 마리의 사자
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이다.팔각의 지대석은 아래 위에
가는 테를 돌리고 우주를 나타냈다.
윗면에는 역시 팔각의 고임을 나타냈고 다시 그 안에 원형의 고임을 새겼다. 하대석은 한
겹의 커다란 연꽃문양과 그 속에 또 다른 꽃문양을 조각하였다.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
져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두 마리의 사자가 뒷발로 버티어서고 앞발로 상대석을
받치는 모습으로 새겼다.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댄 채 머리가 위로 향한 똑같은 모습이다.
사자의 조각은 매우 정교하여 크고 둥그런 눈, 머리의 갈기, 몸체의 근육 등이 마치 살아
있는 느낌이다.사자가 받들고 있는 상대석의 아랫 부분은 두 줄의 가는 받침위에 원형에
가까운 앙련석이다. 다시 그 위의 화사석은 팔각으로 네 면에만 장방형의 화창(火窓)을
냈다. 이곳에 구멍이 여러 개 남아 있다.
옥개석은 위에서 아래로 약간의 경사를 보이고 추녀 끝에서 반전되었다. 옥개석의 위에는
복련과 공모양의 보주로 장식하였다.법주사의 역사에 있어서 영심 대사의 중창 이후 즉
8, 9세기의 사정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처럼 뛰어난 석탑이 있어 8세기 번성하던
절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어 다행이다.
석연지(국보 제64호) / 높이 200㎝, 전체 둘레는 665㎝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형물이 어떠한
용도로 쓰였는지는 불확실 하다. 연꽃 모양으로 조성된 연못이라는 뜻에서 연지라고 부른다.
전체 구조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전체 석조물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과 팔각 기단부, 그 위
의 구름과 연꽃의 형상이 조각된 원통형의 중대석, 석연지의 몸체, 그리고 상단의 난간이
그것이다. 기단은 외곽에 장방형의 부재로 사각의 테를 두르고 안에 지대석을 두었다.
하대석은 팔각으로 각 면에 안상과 우주를 새겼다.
위에는 3단의 층단으로 체감을 줄여 올라 가다가 복련으로 살짝 덮었다. 중대석은 전체 구조
의 기둥 역할을 하는데 둥글게 피어나는 구름문양이 사방을 감쌌다. 위의 거대한 상대석을
받치기 위해 윗면을 아래보다 넓게 하여 안정감 있어 보인다. 상대석인 연지는 반구형
(半球形)이다.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3단의 커다란 앙련을 새겼고 다시 그 연꽃 속에는 보상화문을 화려
하게 나타냈다. 연지의 가장 윗부분은 일종의 난간처럼 보인다. 즉 연지 위에 동자 기둥을
세우고 난간이 올라섰는데, 둥근 원형 면마다 천인상(天人像)을 새겼다.
일부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상단에 놓인 이 난간의 형상으로 미루어 혹 향로(香爐)를 조성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한 송이 연꽃을 염두에 두고
조성했으면서도 섬세하게 조각하여 재질이 화강암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사천왕 석등 아래사진은 문화재청에서 다운받음
사천왕 석등 (보물 제15호) / 대웅보전 앞에 높이 3.9m에 이르는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이
있다. 보물 제15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상대석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사천왕 석등이라
부른다. 전체적으로 팔각이 기본 구조를 이룬다.
지대석은 방형으로 네 개의 돌로 구성했다. 그 위의 하대석은 2단인데 하단의 각 면마다
안상을 얕게 부조하였다. 상단은 그릇을 엎어 놓은 형상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면을 줄이고
8개의 복련을 나타냈다. 중대석 즉 팔각의 간주석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이 늘씬하게 올라갔고
윗부분에만 8개의 앙련을 새겼다.
간주석의 위아래로는 각각 3단, 2단의 옥개받침을 두었다. 화사석 역시 팔각으로서 각 면에는
화창과 사천왕을 번갈아 두었다. 장방형의 화창 주위에는 쌍사자석등과 같이 구멍이 남아 있다.
사천왕의 조각은 매우 역동적이다. 화강암으로 이 정도의 사실적 조각을 이룩했다는 사실이
신라인의 예술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하고 끝에서 약한 전각
(轉角)을 두었다.
위에는 둥근 보주가 있으나 새로 보수한 것이다. 이 사천왕 석등에서 우리는 신라 석등의
전형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장식성이나 조각 기법으로 보면 쌍사자 석등과 같은
8세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 청동 미륵대불 오른쪽에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보살상이 서 있다. 흔히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이라 부르는 이 보살상은 두툼한 판석
과 커다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의 입상이다.
전체 높이 2m에 이르는 이 보살상은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장하는 희견
보살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희견 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 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보살상은 하나의 돌로 대좌에서 머리 위의 판석까지를
조각하였고, 맨 위의 향로만이 다른 돌이다. 보살이 밟고 서 있는 대좌는 별다른 조각 없이 판석
에 가깝다. 아마도 이 대좌의 반쯤은 땅속에 묻어 고정시켰던 것 같다.
보살상의 상호는 심하게 파손되어 전혀 알아 볼 수 없으나 볼록한 가슴, 굵은 다리와 팔에서
역동적 분위기가 나타난다. 어깨에 두른 겉옷은 팔을 들 때 자연스럽게 펼쳐지듯이 가슴을
활짝 드러내며 옆으로 젖혀졌다. 속옷은 하의에만 표현하였는데 배꼽 아래로 띠 매듭이 보인다.
두 팔과 머리로 떠받친 그릇받침은 투박한 판석이다. 그 위의 향로는 네 겹의 굵은 연꽃잎을
둘러 화려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가섭존자(迦葉尊者)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희견
보살은 단정한 모습에 왼손에는 깃발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므로 이 보살상과는 거리가 있다
는 것이다. 오히려 석가여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가섭 존자에 가깝다고 한다. 가섭 존자는
석가가 입멸한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 말고 세상에 남아 가사와 발우를
전하라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러한 경설을 바탕으로 두고 법주사의 보살상은 희견 보살이 아닌 가섭 존자가 미륵불에게
전할 가사와 발우를 머리에 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명칭은 가섭
봉발가사탑(迦葉奉鉢袈裟塔)으로 해야 옳다고 한다. 이러한 이견도 주목할 만하다. 일찍부터
법주사는 미륵도량이었고 가람 곳곳에는 미륵불과 관련된 유물이 산재하고 있으므로 미륵신앙
을 구현한 가섭존자의 조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은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서 현재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의자 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로서 이러한 예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이 유일한 작품인데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 높이는 5m로서 머리에 불룩한 나발이 있고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다.
상호는 치켜 올라간 눈 꼬리, 정면을 향한 도식적 귀, 작은 입과 더불어 군살이 보이는 턱의
모습으로 인해 정교함이 부족하다.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였다.
다리는 연화대좌 위에 걸쳤는데 한껏 벌리고 않은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전체적으로 보면
머리로부터 어깨·팔·무릎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평면적이고 거칠게 조각하였다.
이렇듯 현실성이 부족한 조각이지만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추상적 아름다움을
느끼게도 한다. 마애여래의상 왼쪽 아래에 2개의 또 다른 조각이 있다.
그 하나는 짐을 싣고 있는 말[馬]과 그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이 음각되어 있다. 이는 창건주
의신 조사가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돌아와 법주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를 도설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말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牛]의 모습이다. 절의 중흥조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법주사로 가는 도중에 한 소가 진표 율사에게 무릎 꿇고 경의를
표했다는 설화를 나타낸 것이다.
마애여래의상을 비롯해서 이 두 가지 설화를 담고 있는 암각화는 예술적으로는 우수하지
못하다. 그러나 절의 구심점인 미륵불과 창건의 설화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마애여래의상 북쪽 벼랑에는 또 다른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심하게
마멸되어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대좌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의 모습이다.
왼손에는 지장 보살이 지니는 특유의 여의주가 새겨져 있어 지장 보살로 추정한다. 상호의
표현과 옷자락의 모양 등으로 미루어 마애여래의상과 동시대인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장 보살은 지옥세계의 구세주이지만 미륵신앙과의 관계에서 살펴보면 석가불과
미륵불의 중계자이기도 하다.
즉 석가불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시대(無佛時代)를 주재하면서 미륵불에게
석가불의 법을 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암각의 지장 보살은 바로 마애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며 수행하는 모습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표 율사의 수행과정에서
보면 이 마애미륵불과 지장 보살과의 관계는 달리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진표 율사는 혹독한 수행을 통해 지장 보살에게서 인가를 받고 법을 전해 받지만, 스님은
궁극의 뜻이 미륵에 있어 그치지 않고 더욱 분발하며 수행하였다고 한다. 진표 율사의 경우
신앙의 중심은 지장이 아니라 미륵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수행담이 암각화로 표현되면서
미륵불은 정면에 크게 새기고, 지장보살은 구석에 작게 표현했던 것은 아닐까 추정해본다.
철당간지주 /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철확(鐵)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당간과 지주가 합쳐진 말이다. 당간은 절의 행사나 법회
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높게 세운 깃대로서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고도 부른다. 지주는 이
당간을 세울 수 있도록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버팀돌이다. 일반적으로 당간은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남겨진 예가 거의 없고 지주만 남아 흔히 당간지주라고 부른다.법주사의 당간지주는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기
위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다.이런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던 것이다. 1910년 무렵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철확(보물 제1413호 ) /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철확(鐵)
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쇠솥은 높이 120㎝, 지름 270㎝, 두께 10㎝의 거대한 규모로서 철확이라고도 부른다.
본래는 강원 옆 공양간 주위에 있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3,0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일 수 있다고 하는데 가람 곳곳에 있는 거대한 석조물통 및 항아리와
함께 번성했던 법주사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물이다.
법주사에서 카레등으로 점심공양을 하고 13시 10분경 다음 순례고찰인 공림사로 향했다.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1962.12.3) / 속리산에 입구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상판리
17-3번지에 서있는 수령 6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1962년 12월23일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높이 15m, 가슴둘레 4.5m, 가지의 길이는 동쪽 10.3m, 서쪽
9.6m, 북쪽10m의 노거수이다.
속리산으로 들어 가는 길 가운데 위치하여 동쪽으로 도로가 있고 서쪽엔 천황봉에서 발원한
한강 상류의 한 지류인 속리천이 흐르고 있다. 밑부분에는 외과 수술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아직도 수세는 싱싱하고 나무 모습은 마치 우산을 펼쳐 놓은 듯 단아하여 곧잘 명승 속리산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나무이다.
이 나무의 고유한 이름은 정이품송이니 나무가 벼슬품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1464년에 신병에 고통받던 세조가 온양온천과 속리산을 찾아 치료를 할 때 이 나무 아래 이르
러 타고 가던 연이 나뭇가지에 걸릴 것을 염려하여 ‘연 걸린다’라고 하자 신기하게도 늘어졌던
나뭇가지가 스스로 하늘을 향하여 무사히 통과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 서울로 돌아갈 때는 마침 쏟아지는 소나기를 이 나무 아래서 피할 수 있어 신기하고 기특
하여 나무에 대하여 전무후무하게도 벼슬을 내린 전설이 깃든 나무이다.
조선시대 6조의 판서가 정2품이니 요즘으로 보면 장관급 나무입니다.
공림사로 향하는 도중 여기서 잠깐 버스에서 내려 단체 촬영도 하였습니다.
'백팔(108)천년고찰순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야사/ 9월 26일 제17차(50) (0) | 2010.10.19 |
---|---|
공림사/ 9월 26일 제17차(49) (0) | 2010.10.11 |
휴휴암/ 8월 28, 29일 제16차(추가) (0) | 2010.09.21 |
낙산사 (홍련암)/ 8월 28, 29일 제16차(47) (0) | 2010.09.21 |
건봉사 / 8월 28, 29일 제16차(46) (0) | 2010.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