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8일 동아대학교 불교학생회 동문회에서 김종원 선배님의 기획으로, 수십년간 경주의
불교 유적을 연구 탐방해온 임상렬 전 교장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경주 남산 불교 유적지 몇군데를
'아는 만큼 보인다('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는 말을 되뇌면서
순례하게 되었다.
경주 남산은 불국토를 염원한 신라 백성들의 땅위의 부처님 나라이다.
왕족이나 귀족보다는 일반 백성들의 발원과 기원으로 이루어진 불국토이다.
위는 임창열 전교장 선생님이 준비해온 가이드북이다. 이날 임교장선생님은 노트북컴에
파워포인트로 경주로 향하는 버스내에서 이날 순례할 유적지를 1차적으로 설명하였다.
설명중에 종교적 가치는 논외로 하더라도 미술적 가치에 있어서 서양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동양에는
고려 수월관음도가 있는데 전 세계에 39점이 남아 있는중 우리나라에는 최근에 사온 2점을 합하여
6점이 있고 세계 3대 박물관중 하나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2점 있고 나머지는 전부 일본에
있다고 하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18세기 전반 의겸파 金魚(불화나 불상을 조성하는 무리들의 우두머리)인
의겸(義謙: 1690∼1760년경)이 그린 관음보살상이 유명한데 4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며
의겸의 그림 아닌 유일한 조각인 관음보살상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인근 대신동 내원정사
에 있다고 합니다.
경주남산일원
사적 제311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외, 내남면 용장리 외
이곳은 신라의 옛 도읍이던 서라벌의 남쪽을 가로 막아 솟아 있는 해발468m의 금오산과 494m의
고위산의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낮은 도당산․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통틀어 남산이라고
불리고 있다. 남산에는 신라 건국 이야기가 깃들인 나정, 신라 왕실의 연회장인 포석정터,
김시습이 거쳐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 를 지었다고 하는 용장사터 등 많은
신라시대의 유적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로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앙시 되어 많은 절과 탑이 서고 불상이 조성되었다.
그 흔적은 어느 계곡을 따라 들어가도 만날 수 있어 마치 야외 박물관이라고도 할 만큼 신라의
예술문화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위 남산 지도와 불상 명칭도는 임교장 선생님이 나누어 준 가이드북을 촬영한 것입니다.
경주 배리 석불입상
보물 제63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동
이 세 석불은 이곳 남산 기슭에 흩어져 누워 있던 것을 1923년에 지금의 자리에 모아서 세운 것이다.
중앙 여래상은 높이 2.66m 좌우의 보살상은 높이 2.3m이다. 특히 조각솜씨가 뛰어나 다정한 얼굴과
몸 등이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인 신비가 풍기고 있다.
▲경주 배리 석불입상 여래상
▲좌 보살상
▲우 보살상
풍만한 사각형의 얼굴,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진 뺨 등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간직한 이 석불들은 7세기경 신라 불상 조각의 대표적인 것이다.
▲망월사 앞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
보물 제 136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신라시대의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이곳에 남아 있는 이 석불좌상은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불상이다. 8각의 연화대좌에 앉아 있으며 별도로 마련된
광배에는 화불과 보상화 그리고 당초무늬로 장식되어 화려하며 특히 광배 뒷면에는 약사여래상
을 가는 선으로 조각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은 그 예가 드물다.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후반의 제작으로 보이며 전체높이 4.36m 불상높이 2.44m의 대작이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 항마촉지인을 하고
8각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석가모니불
▲광배 뒷면에 가는 선으로 조각된 동방유리광세계 약사여래불
골짜기 이름은 미륵곡, 방향으로 보면 서쪽을 보므로 아미타불,
가는 선으로 조각된 부처는 동쪽을 보므로 약사여래불
▲별도로 마련된 광배에는 화불과 보상화 그리고 당초무늬로 장식되어 화려하다.
석불 주위를 돌면서 부처님의 얼굴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 석불의 얼굴 속에서
근엄함과 자비로움, 그리고 친근함 등을 두루 느낄 수 있습니다.
옷자락의 흐름이나 화려한 광배 등 뒤어난 조각은 통일신라 예술의 향기를 보여준다.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보물 제198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자연암반에 감실을 파고 마련한 이 여래좌상은 단정한 자세에 상현좌를 이루고 하의는 얕게
새겼다. 양 어깨에 걸쳐입은 법의는 아래로 흘러 내려 옷자락이 물결무늬 처럼 부드럽게
조각되어 전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석불은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 석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시대 말기의 제작으로
판단되는데 이 불상으로 해서 이 계곡의 이름을 부처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석수장이가 돌을 쪼아 부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돌 속에 있는 부처님을 찾아 돌을쪼고 있다"고
시인 청마는 노래 했다.
이 부처님은 거의 일년내내 햇빛을 받지 못하는데, 동짓날 해뜨면 그 햇살이 부처님 像顔에
비로소 비친다는 할매 부처님은 정남에서 30도 치우쳐 앉아 계신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작고하신
고청 윤경렬 선생님은 나침판 들고 동짓날 살에는 새벽에 긴수건으로 두 귀를 두르고 아내 순이와
함께 이곳에서 그 장면을 보시고 감격의 희열을 느끼신점을 그의 저서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에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기에는 이 편한 할매부처에 반하여 텐트를 치고 밤을 세웠다는 일본인도
있었다고 한다
출렁이는 배좌는 바다요, 둥실하게 놓인 두 무릎은 언덕이요,
사각으로 우뚝 솟은 몸체는 바위산이라 그 위의 둥근 얼굴은
솟아오르는 달님이라 느낀다.
다소곳이 숙인 둥근 얼굴과 작은 육계가 솟아있는 큰 머리하며 알맞게 생긴코와 초승달 같은
눈섭아래로 명상에 잠겨있는 두 눈이 그려집니다 두 뺨을 형성하며 흘러내린 부드러운 곡면은
두툼한 입술에 잔잔한 웃음이 배어나오는 듯 합니다 머리부분에 남아있는 붉은 색은 채색을 한
흔적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와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경주 낭산(狼山)
사적 제163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보문동
남북으로 길게 마치 누에고치 처럼 누워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는 이 낭산은 신라 실성왕
12년(413) 8월에 산에 구름이 일어나 누각과 같이 보이며 향기가 매우 짙게 퍼져 오랫동안
계속됬다. 이것은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는 것으로 여기고[신유림(神遊林)] 이때부터
낭산에서 나무 베는 겄을 금지했고 성역으로 보존 받아왔다. 이곳에는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만든 여왕의 능을 비롯해서 그 아래쪽에는 호국사찰로 알려진 신라 향가의 현장
사천왕사터가 있다. 동북쪽에는 황복사터(皇福寺址)와 삼층석탑이 있으며, 중턱에는 낭산
마애삼존불 있고, 그 주변에는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陵只塔)이 있다. 산
자락에는 거문고의 명인 백결(百結)선생이 살았으며, 문창후(文昌候)최치원(崔致遠)이
공부하던 독서당도 있다.
신라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이 능은 신라 선덕여왕(632~647)의 능이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는 진평왕의 장녀로 태어나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 분이다. 재위 16년간 후일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 명장 김유신과
같은 영걸을 거느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았으며 분황사, 첨성대 등을 세웠고
특히 신라 최대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워 신라 불교 건축의 금자탑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곳에
능을 만든 것은 여왕의 유언에 따라 도리천에 장사 지낸 것으로 후대인 문무왕때 아래로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됨으로써 여왕의 예언이 증명되기도 했다.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帝釋天)이 다스리는 도리천(忉利天)이 있고, 그 도리천 아래수미산
중턱을 둘러싸고 펼쳐진 곳이 사왕천(四王天)이므로 사천왕사 위 도리천이 되는 셈이다.
또한 서라벌 중심에서 보면 남산이 오른쪽 다리에 해당하고 토함산이 왼쪽 다리에 해당되어
그 가운데 낭산이 있다.
▲이 능의 밑둘레는 73m에 달하는 원형 봉토분으로서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를 2단으로 쌓아 보호석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선덕여왕릉 인근에서 멀리 보이는 여왕의 부왕 진평왕릉
능지탑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이 탑은 예로부터 능시탑 또는 연화탑이라 불려 왔는데 이 주변에서는 문무왕릉 비의 일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이 "임종 후 10일 내에 庫門 밖 뜰에서 화장하라"
하고 "상례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라"고 유언하였으며 이곳이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에 이웃한 자리인 것으로 보아 문무대왕의 화장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당초에는 사방에
소조대불을 모시고 감실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으나, 기단 사방에 12지신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 올린 오층 석탑으로 추정된다.
언덕모양으로 남아있던 것을 1969년부터 4차례에 걸쳐 발굴하고 1979년 11월 29일 현재의
모습으로 준공하였다. 발굴 과정에서, 기단 네 면 중앙에서 소조불상 편들이 발견되었고
12지신상들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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